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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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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_책과나_동환.hwp

얼치기 마르크스주의자가 버리지 않은 책, 버릴 수 없었던 책

: 스즈끼 순류, 『선으로의 초대: Zen Mind, Beginner's Mind』

동환 | 회원
#0.
흔적 없이
"무엇을 할 때는 잘 타는 모닥불처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고
자신을 완전히 태워 버려야 합니다."

#1.
글을 쓰고 싶긴 했는데, 요즘 사춘기 소년과 유사한 고민으로 마음도 어지러운데, 차후에 성장의 기쁨을 느낄 일기장도 아닌, 후회한들 돌이켜 고칠 수도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다. 처음엔 그랬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전 글들을 대충 읽어보았다.
아무래도「책과 나」는 다른 글들보다 실존적인 내용으로 많이들 채워지고 있었다.「갈월동기행」과「서평」사이에 있는 것 같다. 이런 글이라면, 보여주고 싶지 않는 내밀 일기의 파편과 약간의 무게감이 절묘한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영 자신이 생기질 않았다. 결국 논리가 보이지 않는 잡상을 이곳에서 채우게 되어 미안하기만 하다. 어지럽다면 나의 지금의 삶에 원인이 있을 것이고,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싶은 나의 '결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나의 '선택'은 『사회운동』과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느낌을 유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나의 모습이거늘. 솔직하게 말하자. "禪은 나에게는 취미이고, 삶이라고." 그리고 혹시나 궁색한 변명 하나만 더 달자. "이 글을 쓰는 내게 마르크스주의는 알리바이가 아니라고."

#2.
내 사춘기의 시작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얼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매우 관념적인 내용이었지만, 그 책을 뒤덮고 있는 '삶의 고통'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헤르만 헤세같이 파릇한 고민으로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의지로 만들어진 세계의 고통을 불행하게도 먼저 맛보았던 것이다. 이후 니체를 읽고 불교와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다. 지금도 나에게 관념적인 성향이 있다면 불행했던 사춘기에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읽고,『독일 고전철학의 종말』,『공산주의자 선언』등을 읽으면서 미망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나는 꽤나 오랫동안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춘기의 특징은 '향아적(向我的)'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가 아닌,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를 향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대학을 처음 들어가던 그 시절도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가 가사에 철철 넘쳐나던 듀스와 서태지의 노래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모 대학의 대동제에서 대중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그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열사(烈士)들의 원혼마저도 랩퍼들의 노래가락으로 묻혀가는 그런 분위기였다.

#3.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철학학습을 할 때 읽는 책인 이진경 씨의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서문에서,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는 낡은 사상이다.' 라고 쓰고 있다(얼마 전 서점에서 재판을 얼핏 봤는데 이 구절은 사라져 있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윤소영 선생도 말했지만, 그 당시 한국사회에선 '부정'과 '침묵', '고백'이 주류를 이루었으니... 이런 물이 어느 정도 쓸려가고 나서야 현덕 형을 통해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인식하고 자기비판하며 쇄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 중에 태길 형도 있었다. 형들과 같이 학습하면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던 나의 오류를 극복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본뜻을 감지하게 되면서, 남들이 버린 책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에 지식의 학습으로만 생각했던 독서행위가 실천적 경험을 통해 삶의 구체적인 지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비단 나만의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학문이 아니다. 이는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지식인들에 대한 공포의 미학'이라고 태길 형이 일갈하듯, 어느 순간 '공포의 미학'은 나의 삶 자체가 되어버렸다.

#4.
결국 운동도 '관계맺음', 쉽게 말해 사람과 사람의 교통(交通)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맺음의 과정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애로운 관계를 특권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범했던 오류들을 광정하는 차원에서 필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애로운 관계맺음'은 역설적으로 '단절'을 낳기도 하는 것 같다. '조심스러움'은 있어도 '적극적인 개입'은 사라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우애로운 소통은 서로에 대한 여유에서부터 출발한다. 관계는 '나'의 소멸을 전제로 하며, 그런데 자신의 소멸과 타인에 대한 여유는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의 현존은 나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의 모습을 궁극적으로 바꾸어내기 위해서 '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사회적 존재, 우리가 현재를 지양하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로서의 소통을 위한 방편인 셈이다. 최소한 '나'에게서 증명된 이러한 깨달음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 禪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탁월한 명상서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줌과 아울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양하며 궁극적으로 나를 소멸시키는 운동인 것이다.

#5.
과거 나는 이러한 것을 헛소리로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을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도 이런 말을 함부로 못했다. 내가 억울하게 관념론자라고 치부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최소한 나 자신의 경험적 확증 때문인지 그들의 말은 무시할 정도로 확고해졌지만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 책을 소개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난 이 책을 유초하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생활 속에서 선생을 대하면서 나의 본모습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난 무척 괴로웠고, 다시금 사춘기로 접어들어 향아적 고민에 휩싸여 구원의 심정으로 이 책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중단했던 명상을 조금씩 실천해 갔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가 소멸하고 '관계'만 남게 되었다. 참으로 역설적인 '얻음'이었다.

#6.
스즈끼의 책은 지식이 아니다. 그냥 자신을 '그대로 비추게끔' 도와주는 책이다. 불교적 냄새가 나는 것은 무시해도 좋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니까. 최소한 이 책이 세속적 의미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덧붙인다. 장황하고 잡스런 서언(序言)은 그만두자.

#7.
자신을 보는 방법을 말함에 번잡스러움이 없다. 스즈끼는 매우 실제적이고 단순한 방법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바르게 앉아 좌선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스즈끼는 이 또한 절대화하지 않는다. 하등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덧붙여 나는 의심할 바 없이 비약하여 믿는다. 이것이 '보편적 인간'의 '자유로운 교통'의 지침이 될 수 있다고... 회원 분들에게『자본』만큼이나 두고두고 읽기를 감히 권한다. 우리에게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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