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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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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에 맞서 아프리카를 구하라!

양희진 | <다른과학>편집위원
생명공학의 시대, 이를 둘러싼 싸움

사람들은 벌써부터 21세기를 생명공학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생명공학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헛된 바램인가.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축적된 어떤 지혜로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1970-80년대에 개발되어 이제 불과 20-30년의 역사를 가졌을 뿐인 하나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언론과 과학자들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생명공학이 인류의 오랜 염원을 해결해줄 것인가에 관한 분명한 해답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제시된 바 없다. 오히려 생명공학은 제1세계와 제3세계간의 새로운 갈등요인으로 떠올랐을 뿐이다.
두 세계간의 생명공학을 둘러싼 첫단계 갈등은 유전자자원의 주권 문제였다. 즉, 석유나 금과 같은 지하자원에 대해 주권을 인정하듯 유전자자원에 대해서도 주권을 인정할 것인가 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1992년 리우환경회담에서 생물다양성협약이 채택됨으로써, 주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국제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셈이다. 제2단계는 생물특허의 인정문제를 둘러싼 싸움이다. 이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제1세계의 거대자본과 연구자들이 생물탐사를 통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유용한 유전자 자원의 대부분은 사실상 제3세계 민중의 전통적 농업 및 의료지식으로부터 직접적 힌트를 얻은 것이다.

따라서 지하자원을 캐내서 그 이익을 나눌 수 있으나 그 지하자원에 특허를 내어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게 터무니없는 말이듯, 제3세계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적 지식이 제1세계 다국적 기업과 연구자들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생물해적질(biopiracy)이라고 지칭하며) 반대한다. 우리는 이 싸움의 한가운데서 고전하고 있는 아프리카를 만나게 된다.


아프리카 - 풍부한 생물다양성

'동물의 세계'나 '동물의 왕국'과 같은 TV프로그램을 볼 땐 남미나 호주보다도 의례 아프리카이려니 하며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받쳐주기라도 하듯, 아프리카는 실제로 엄청난 유전자 자원의 보고이다. 세계 생물다양성의 ¼이 아프리카에 있는 것으로 평가될 정도다. 아프리카에서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보다 전체 경제와 서민 생계에서 생물자원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높다. 사하라사막 남부의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국내총생산(GDP)의 30-60%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노동인구의 6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적도 부분의 기니아와 마우리타니아 등에서는 60%에 이르는 외환을 산림자원 및 수중 생물자원으로부터 얻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그런 유전자자원 중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들이 많아 커피, 사탕수수, 기장, 야자 등을 비롯한 세계 농업 및 약초를 활용한 의약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아프리카 생물다양성의 파괴

그러나 아프리카의 생물다양성은 위협받고 있다. 생물다양성 파괴는 두 가지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하나는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지역에 댐이나 도로 건설, 어류 남획, 대규모 양식장 및 광산 개발 등 거대개발사업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대규모 상업적 농업, 임업, 축산업, 수산업 등에 의해 단일 종 재배나 사육이 강제되어 생물다양성이 대체되는 기술적·경제적 압력이다. 특히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후자의 문제이다.

인도의 생태주의자인 반다나 시바에 따르면, 생물다양성은 문화적 다양성이 융성한 환경 속에서만 보호된다.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민중들은 토착적 지식체계를 이용해서 생물다양성을 활용하고 재생산하는 탈중앙집권화된 경제와 생산체계를 건설해 왔다. 따라서 지금 제3세계의 생물자원은 아무런 인위적 노력 없이 어느 찰나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공동체와 자연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축적된 역사적 산물로 보아야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유용성이 밝혀진 생물자원에 있어서는 더더욱 지역토착민들이 쌓아온 전통적 지식을 무시할 수 없다.

사하라사막 남부 아프리카의 농부들 중 90% 이상은 지금까지 전통적 농사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다모작을 하며 시판되는 종자를 사서 쓰기보다는 다음해 농사를 위해, 자가채종하여 보관하고 화학비료나 농약의 사용은 적은 편이다. 따라서 새로운 품종은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수(십)년 동안 계속된 농사의 경험 속에서 농부 스스로 선택·육성한다. 이런 체계야말로 다양한 생물종이 생겨나고 보존될 수 있는 환경이다. 반면 이런 농업방식은 관련 다국적 기업에게는 반가운 일이 못 된다.

종자 및 농약 등 농업관련 시장을 넓히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전통적 농사기법은 소위 '현대화'되어야 한다. 제1세계의 농업자본은 아프리카 농업을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모든 아프리카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농업자본의 시장확장 정책의 하나는 아프리카 농업부문을 개편해서 자신들의 시장진출이 용이한 체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말라위의 국영종자회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말라위의 농업부분을 재편하려는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계획에는 말라위의 국립종자회사를 민영화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우간다, 세네갈과 다른 서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조정이 종자부문에서 이루어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역 종자회사인 센사코는 다른 다국적 종자기업과 경쟁하기 위한 명목으로 몬산토에게 대부분의 주식을 양도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다른 종자회사도 비슷한 처지이다. 올해 초 미국 국회에서 통과된 '무역개발법(Trade and Development) 2000'에 포함된 '아프리카성장기회법(African Growth and Opportunity Act; AGOA)'은 미국 기업에게 유리한 대아프리카 투자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아프리카 지역농업을 보호하는 "무역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다. 또한 "생명공학의 유익함에 대한 인식"을 증진시키고 사하라남부 아프리카에서 농작물 생명공학 연구개선을 위한 과학적 교환프로그램도 들어있다. 아프리카를 세계시장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서구자본의 노력은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축을, 세계무역기구(WTO)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 (TRIPs)의 생명특허제도가 형성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생명특허 반대 운동

제1세계 농업자본이 안정적인 시장을 확보하고 시장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적재산권을 바탕으로 독점력을 키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WTO와 TRIPs에는 애초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몇몇 선진국의 강력한 주장이 반영되었다. 이 협정은 회원국들이 지적재산권으로 보호해야 할 최소한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협정의 제27조에 따르면 각 국가는 동물을 특허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지만, 미생물 및 미생물을 이용하는 모든 기술에 대해서는 특허를 인정해야 하며, 식물신품종에 대해서는 특허 또는 이에 준하는 독자적인 체계 (sui generis system)로 보호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또한 유럽연합과 미국 등 선진국은 이 '독자적인 체계'를 농부의 자가채종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세계식물신품종보호협약(UPOV)체계로 일원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TRIPs 협정이 제정될 당시부터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에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조항은 처음부터 재검토 대상에 올라있었다.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인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등의 제3세계 국가들은 이 조항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각국이 미생물, 식물, 동물 및 이를 이용한 모든 기술에 대해 특허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국가들의 NGO들은 TRIPs 협정이 아예 철폐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지난해 11월말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제3차 각료회의 전후로 이런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아프리카단일기구(OAU)와 아프리카경제공동체(AEC), 아프리카특사그룹(African Group of Ambassadors)은 시애틀 각료회의 전에 △ 생명체 특허화 반대, △ TRIPs 협정의 특허대상에서 미생물 및 미생물학적 방법을 배제할 것, △ 식물신품종을 보호하기 위한 '독자적인 체계'에 대한 유연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농업공동체의 혁신 및 관행을 보호하는 '독자적인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 △ 생물다양성협약(CBD)과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국제협약과 TRIPs가 조화되어야 한다는 것, △ 세계보건기구가 필수의약품으로 나열한 의약품의 경우엔 특허권자의 배타적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는 점을 천명했다.

OAU는 '지역공동체, 농부, 육종자의 권리보호를 위한 아프리카 모델법령'을 개발해 왔다. 이 모델은 "생명지탱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물다양성을 보존 및 향상시키기 위해, 농업 유전자자원을 비롯한 생물자원과 지식 및 기술의 보존, 평가 및 지속가능한 사용을 보장하는 것"이 목표다. 이 법령은 지적재산권을 거부하며, 식물신품종에 대해 UPOV를 대체할 대안을 설명하고 있다.

OAU 활동의 성과를 평가하기는 너무 이른 감이 있으나 개도국의 경우 TRIPs 협정을 올해부터 이행해야 하는 처지여서, 어떤 식으로든 국내법을 TRIPs협정에 일치시켜야 하므로 OAU의 새로운 모델에 대한 반향은 정부들 사이에 크게 확산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짐바브웨, 케냐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UPOV 체계를 채택해 왔으나, 짐바브웨는 지금 OAU 법령을 면밀히 검토 중이며, 독자적인 법령을 준비 중이다. 잠비아는 폭넓은 의사수렴과정을 거쳐 식물육종자법을 현재 제정 중에 있다. 에티오피아와 남아공화국을 비롯한 많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전통적 지식과 농부의 권리보호를 보장하도록 행정지침이 운용되고 있다.


맺음말

우리가 아프리카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보다 더 못살고 굶주린 대륙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다. 아프리카 종자회사의 민영화 및 해외판매사례는 우리 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이것들이 세계은행과 IMF의 구조조정안이었다는 면에서 더욱더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폭력적인 세계화의 물결에 대응하는 자세는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일찌감치 개도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OECD에 가입했으며, TRIPs 협정이 체결되자 그에 따라 순순히 관계법령을 재정비했다.
아프리카와 우리와의 차이는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비롯되는 면이 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현실도 만만치 않다.
전세계 농업 및 제약시장은 이미 소수의 다국적 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아벤티스, 듀폰, 몬산토, 아스트라제네카, 노바티스 등 다섯손가락에 꼽히는 유전자 대기업이 310억달러 규모의 전세계 농약시장 가운데 거의 2/3를 차지하며, 300억달러 규모의 종자시장은 1/3을 잠식하고 있다. 유전자조작된 종자시장에 있어서는 사실상 거의 전부를 그들이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기업들은 3천억달러 규모의 제약산업계와 계속해서 합병해 나가고 있다. 지적재산권의 추이도 일치한다. 선진국은 전체 특허의 97%를 점유하고 있으며, 이 특허 대부분은 소수의 거대기업 손에 들어있다. 또한 선진국에 거주하는 이들이 개도국에서 허용된 특허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현실을 분석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은 '기술축적하고 지적재산권 확보해서 선진국 따라잡자'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정치적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의 주류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누구나 잘 살기 위한 유일한 선택'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식량주권'은 위협받고 우리 농민들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또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소멸되고, 어떤 계층이 일방적으로 소외되어 가는 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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