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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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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확산될 것이다: 울산과학대, 광주시청 비정규직 노동자 인터뷰

신진선 | 편집부장
작년 11월 말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비정규직법안은 과연 정부가 주장한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할 법안’이며 ‘비정규노동으로 인한 고용불안과 차별을 금지’할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경총은 7월 시행예정인 비정규직법의 허점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담은 책자를 공식 배포했다. 이런 정부의 너무나 ‘순진한’ 발상은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욱 고통 속으로 내몰고 있다. 벌써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계약해지나 초단기 재계약, 임금삭감 등 처우를 악화하는 재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작년 8월에 발표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과 맞물려 초․중․고등학교에서 이런 일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벌어지고 있다.
또 기존의 비정규직법안은 이미 노동탄압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얼마 전 용역도급 계약기간 만료를 빌미로 용역업체를 앞세워 노동자들을 해고한 울산과학대와 광주시청이 그 단적인 사례다. 울산과학대와 광주시청 청소용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모두 사실상 ‘해고’됐다. 원청(울산과학대, 광주시청)의 용역업체 변경과정에서 고용승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우빌딩, 경주 동국대, 원광대 병원, 도시철도, 대구지하철, 르네상스호텔, 전북도청, 롯데호텔 등 수많은 곳에서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7월 비정규직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더욱 불안정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노동조합을 통해 자존감을 되찾고 빼앗긴 자신의 권리를 기필코 되찾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극단적인 폭력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울산과학대, 광주시청 노동자들을 만나 이들의 삶과 노동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울산지역연대노조 울산과학대 지부 인터뷰>
비정규직 투쟁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더 당당하게 투쟁하겠다.

인터뷰: 정지현(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처장)
울산지역연대노조 울산과학대 지부 이순자 지부장, 오순남 조합원을 만났습니다.


정지현: 청소 일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요?

이순자 지부장(이하 이순자): 나는 2003년 9월 4일, 옆집 아저씨가 권유해서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야간으로 시작했다가 주간으로 넘어왔어요.

오순남 조합원(이하 오순남): 나는 처음 학교 지을 때부터 일했어요. 2000년 3월 14일부터. 그 전에 같은 용역업체를 통해 다른 데서 7년 정도 일을 했었어요.

정지현: 일하면서 힘든 점이 무엇인가요?

이순자: 말도 못하죠. 우리는 미화원으로 들어왔는데 청소 말고 다른 일도 많이 시켜요. 예를 들어 무거운 책걸상을 1층에서 6층까지 나르고, 산에서 아저씨들이 나무 가지치기 해놓은 거 우리가 정리해서 나르고…. 청소도 하고 잡부, 조경 같은 일도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요. 오죽하면 한 달에 60~70만원 받는 우리가, 우리 돈 내서 사다리차를 살까라는 생각도 했겠어요.

오순남: 다른 일을 다 끝내고 다시 정신없이 청소하고 있으면 관리자가 뒤따라와서 “이거해라.”, “여기는 왜 이렇게 더럽냐.” 참견을 해요. 이것도 정말 힘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사람취급 안하는 게 제일 힘들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으면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벌컥 열어요. 옷 갈아입는 중에 문을 열었으면서 “왜 그렇게 옷을 입고 있냐.”고 더 난리에요. 미안해하는 것도 없어요.

이순자: 우리가 학교에 그런 얘기를 하니까 학교에서는 그건 탈의실이 아니라 대기실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문을 마음대로 열어도 된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기가 찼어요. 우리는 휴게실이 없어서 거기서 밥도 해먹고 옷도 갈아입었는데, 결국 우리한테는 탈의실도 없었던 거죠.

정지현: 어떤 계기로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나요?

이순자: 작년 6월에 경비아저씨들이 먼저 노조에 가입하고 우리한테도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노조에 들면 학교에서 해고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가입을 안했어요. 그러다가 같은 용역업체에 있는 미화원 엄마가 한 명 있는데 이 엄마랑 우연히 만나 얘기하면서 생각을 바꿨어요. 그 엄마가 “언니 왜 노조를 안 하노. 노조를 해야 안 잘리지. 노조가 없으면 우리는 더 힘이 없다.”고 했어요. 가만해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맞았어요. 우리는 억울해도 하청이니까 말할 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탈의실에 와서 엄마들한테 같이 노조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10명이 모두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정지현: 노조 가입 후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이순자: 많이 달라졌습니다. 노조 하기 전에는 학교에서 함부로 대했는데, 이제는 선을 두고 자기네들이 조심합니다. 밥도 못 먹고 일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식당에서 외상으로 밥도 먹고 그럽니다.

오순남: 노조가 있으니 할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아요. 해고당해도 이렇게 투쟁하고 발버둥이라도 칠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이순자: 일도 힘들지만 관리자 비위를 맞추는 게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어요. 그런데 노조에 들고 나니 힘이 생겨서 비위를 안 맞춰도 되니까 편하죠. 출근을 하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정지현: 어떤 과정을 거쳐 해고됐나요?

이순자: 먼저 경비아저씨들을 쳤습니다. 경비아저씨들은 작년 업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계약해지 됐어요. 업체가 노조 가입자들을 재계약에서 일부러 뺀 거죠. 부산 지방노동위원회에서도 모두 복직시키라고 했는데 학교가 말을 안 들었어요. 결국 다 노조를 탈퇴하고 2명 남았습니다. 아직도 투쟁하고 있구요.
그 다음은 식당을 쳤어요.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노조에 가입했는데 학교에서는 학기 중인데도 식당 문을 닫았습니다. 직장폐쇄를 한 거죠.
그 다음은 우리 차례였습니다. 우리도 생각하고 있었죠. 1월 중순부터 소문이 돌았는데 결국 1월 21일에 해고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21일에 해고통보 받고 23일에 해고 됐죠.
그리고 26일부터 본격적으로 탈의실에서 점거농성을 벌였습니다. 점거농성 할 때 교직원들이 방해를 많이 했어요. 문도 다 떼고, 캐비넷도 다 빼내고, 하루에 두 세 번씩 내려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매일 매일 와서 실랑이를 하는 게 힘들었죠.
그러다가 3월 7일 일이 벌어 진거에요. 우리는 여기서 음식을 해먹는데 문을 떼버리니까 음식냄새가 올라갔어요. 그러니까 교직원들이 음식냄새 난다고 우리를 밖으로 쫓아 낸 거죠. 그래서 우리는 다시 여기에 천막을 쳤습니다.

정지현: 집에서 출퇴근하세요?

이순자: 처음에는 다 같이 잤고 며칠 뒤부터는 반씩 돌아가면서 자고 요즘에는 2~3명이 지킵니다. 여자들이니까 다 집에서 살림을 해야 됩니다.

정지현: 짧은 기간 동안 점거농성, 피켓시위, 알몸시위, 서명운동 등 많은 것을 했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이순자: 제일 힘들었던 건 알몸 투쟁을 했을 때죠. 맘고생도 심했고 여자로써 수치감도 들었습니다. 또 지금 연대해주고 있는 동지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껴요. 오십 평생 살면서 난 나만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여기 오는 동지들은 우리들 일을 다 자기 일처럼 생각해요. 천막에서 자는 게 춥고 힘든데도 이 사람들은 같이 합니다. 내 형제도 이렇게 못할 거에요. 그 전에는 돈만 있으면 행복인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내가 꼭 딴 나라에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밖의 세상은 메말랐는데 이 세상은 너무 인간미가 넘쳐요.
또 얼마 전에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영화를 보면서 기운을 많이 얻었습니다. ‘이게 내 혼자만의 수치가 아니었구나. 내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니 더 당당해져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더 열심히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순남: 그날 강제로 끌려나온 날이 가장 기억에 남죠. 그 사진만 봐도 눈물이 나요. 그 사진을 보면서 꼭 복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지현: 광주시청의 청소용역 노동자들도 비슷한 투쟁을 하고 있는데 한 말씀 해주세요.

이순자: 학교, 관공서에 있는 비정규직 문제가 제대로 해결돼야 본보기가 될 겁니다. 우리 열심히 투쟁해서 본보기가 됩시다. 그리고 투쟁 정리하고 만날 때 건강한 모습으로 만납시다.

<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시청지회 인터뷰>
내 발로 나올 때까지 다시 들어가서 일 할 겁니다.

인터뷰: 김희정(광주민중행동)
공공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시청지회 김경임 조합원을 만났습니다.


아침8시, 광주광역시청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스무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피켓을 들고, 유인물도 나눠주며 선전전을 하고 있다. 바람을 일으키며 휙휙 지나가는 차들 옆에서 간밤 꿈에 된장통 찾으러 시청사 안에 들어가 봤다는 바람을 담은 꿈 이야기도 한다.(현재 해고된 여성노동자들은 시청사 출입조차 못하고 있다.)

김경임 씨를 소개받은 건 한 시간 가량의 아침선전전을 끝내고 가져온 떡과 차 한 잔을 나누는 자리에서였다. ‘아, 이분!’ 퍼뜩 떠오르는 건 언젠가 함께했던 노동조합 야유회에서 노래에 춤에 참 신나게 그 자리를 즐기시던, 흥이 넘치던 분이었다는 기억이다. 그런 김경임 씨가 인터뷰 도중 지난 3월 7~8일 상황이 떠오르자마자 눈시울을 붉히시더니 바로 우신다. 감금에 폭력진압, 인권유린으로 얼룩진 그날의 공포가 스무날이 다되어가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다시 예전의 김경임 씨 모습을 되찾는 길은 쫓겨난 그 일자리로 돌아가는 그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희정: 광주시청에서 이번에 해고됐는데 언제부터 일하신건가요?

김경임: 광주시청이 이전해서 처음 입주할 때부터 청소를 했어요. 2004년 3월 9일부터. 일한지 3년 됐네요. 그 동안 용역업체가 5개로 나뉘어졌고 1년 마다 재계약을 했어요. 시청에서 공고한 거 보고 딸이 한번 해보라고 해서 곡성에서 광주까지 와서 접수했어요.

김희정: 그 전에 곡성에서는 뭐하셨나요?

김경임: 곡성에 있는 농공단지에서 농사도 짓고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청에서 일하게 된 3년 전부터 광주에 방 얻어서 혼자 살고 있어요.

김희정: 시청에서는 주로 무슨 일을 하셨나요?

김경임: 처음 입주 청소할 때는 말도 못하죠. 새로 지은 건물인데다가 청소가 전혀 안되어 있어서 5분, 10분도 못 앉아있고 밥도 아무데서나 닥치는 대로 먹으면서 아침 6시 30분부터 저녁 10시, 11시까지 일했어요. 여기저기 흩여져 있다가 모이라면 모이고, 다시 옮겨서 일하고. 3월부터 7월까지는 정신없이 일만 했어요. 옆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일했으니까요. 그런데 수당도 없이 기본급만 받고 일했어요. 그 때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김희정: 노조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또 노조를 결성하고 나서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김경임: 광주시청은 최소한 8시간만 일하게 해달라는 얘기도 듣지 않았어요. 그래서 2004년 7월에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설립신청을 하려고 하니까 이미 신청이 되어 있었어요. 소장이랑 중간 관리자가 이미 노조 설립신청을 해놨더라고요. 그래서 노조 승인 받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노조를 만들고 나서는 8시간 근무를 하게 됐고, 해야 할 일과 안 해도 되는 일이 구분되어서 일하는 것도 수월해 졌습니다. 예전에는 공무원들이 이거 해라하면 다 해야 하고 집에 가다가도 불려가 일해야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안 그래요. 또 그 전에는 일만 시키던 사람들이 인사도 해요. 노조하면서 시간도 많아지고 인간대접도 받게 된 거죠.

김희정: 힘든 투쟁을 하는 중에도 항상 즐겁고 단결된 모습을 보게 되는 데 투쟁을 시작하고 나서 하루가 어떻게 달라졌나요?

김경임: 예전에는 매일 4시, 5시에 일어나서 출근준비하고 가서 일하고 했는데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시청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시청 밖에서 출근투쟁을 해요. 매일 7시까지 나와서 시청 앞에서 선전전을 합니다. 시청 건너편에서 시청을 바라보면서 언제까지 투쟁하면 내가 저기 다시 들어가게 될 수 있을까 매일매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크게 힘든 것은 없어요. 지나가는 시민이 수고한다고 음료수도 사주고 떡도 사주고 그래요. 또 아침에 선전전을 할 때 차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차 창문을 열고 유인물을 달라고 해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힘이 나요. 또 조합원들끼리 서로 많이 의지해요. 처음 투쟁을 시작할 때 그 마음 그대로 입니다. 우리는 뭉쳐야 산다며 변함없이 서로 힘을 주고 있습니다.
3월 8일이 많이 힘들었죠. 그 때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3월 7일 해고되기 직전에 시장을 만나려고 시청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장을 만나고 가겠다고 생각했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결국 몇 조합원들이 밖으로 끌려 나가고 나는 옆에 세미나실로 몰려서 거기 갇혀 있었는데 그 때가 정말 무서웠어요. 갇혀있는데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문을 열려고 했습니다. 세미나실 쪽방에 숨어서 문고리를 잡고 버티는데 손에 쥐가 다 났어요. 밖에서 망치로 문고리를 막 두드리는데 그 소리랑 울림 때문에 온몸이 다 떨렸어요. 생각만 해도 악몽 같아요.

김희정: 그렇게 힘든 일을 겪고 지치기도 하고 다른 데서 일을 시작할 수도 있을 텐데요.

김경임: 그렇게 당한 게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들어 갈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일하면서 정도 들었고 또 우리발로 안 나왔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해요. 다시 들어가서 내 발로 나올 때 까지 일 할 겁니다.


김희정: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직복직투쟁에 승리할 때 까지 함께 열심히 투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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