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4.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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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③ 한국여성운동사] 성별화된 권리와 노동권의 결합을 위하여:반(反)성폭력 운동 평가

김정은 | 여성국장

이 글은 9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단일 이슈 및 쟁점이 된 반성폭력 운동을 여성단체의 법제정 중심의 활동과 '영페미니스트'로 불리는 대학 내 여성모임의 활동으로 구분해 살펴보고자 한다. 각 흐름들이 성폭력이라는 쟁점을 어떻게 여성운동의 과제로 설정했는지, 각 운동의 활동양식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여성단체와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이 지닌 한계와 오류는 무엇인지를 평가하고, 새로운 여성운동이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 수립해야 하는 여성운동의 과제가 무엇인지 논의하고자 한다. 그러나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잘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안 모색은 이 글의 평가의 관점이 아니다. 발생한 사건에 대한 처리로 한정되거나 폭력에 대한 방어라는 수세적 권리를 제기한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서자는 것이 이 글의 제안이기 때문이다.
강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을 접하면, 여성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권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권리 등의 측면에서 시민권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폭력은 여성이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다. 그러나 성폭력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의미를 담은 여성성에 대한 다양한 표상들, 성관계에서의 동의 여부에 관한 여성의 진술에 대한 철저한 무시, 여성의 역할을 출산, 양육 등 재생산 노동으로 한정하고 그 가치조차 부정하는 역사적 가족형태 등 여성의 육체적ㆍ정신적 고유성을 위협하는 제도, 관행, 실천을 포함한다. 따라서 성폭력은 여성의 배제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현실적ㆍ상징적 구조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정인경, 2003) 여성 억압을 지속하는 제도 및 관행, 실천을 포함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으로서 성폭력 개념을 확장한다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반대하는 운동은 사건 처리를 넘어 여성의 고유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여성해방운동으로 배치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부차화하고 여성 의제를 운동의 과제로 제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민중운동에 대한 비판은 이 글의 전제라는 점을 밝혀둔다. 변혁운동과 분리된 채 생물학적 여성 동일성에 기반한 반성폭력 운동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평가하고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여성운동의 과제를 모색하자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여성단체의 반성폭력 운동

1980년대 여성운동 진영은 '기층 여성 중심성'과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라는 규정을 수용하며 민족민주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을 규정하였다. 이 시기 국가기구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1984년 경희대 여학생 연행 중 성폭력 사건,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사건은 민주화 투쟁과 여성문제를 매개하는 유일한 사안이었다.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민족민주운동의 과제로서 이슈화되었고, 범여성운동계가 총동원되어 성폭력 사건 대책위를 구성하여 연대활동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응하면서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여성운동진영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이나 논의를 발전시키지 못한 상황이었다. 성폭력에 대한 관점은 계급의 관점(노동통제 수단으로서의 여성노동자 성폭력)이나 민족의 관점(공권력에 의한 성폭력, 일본군 '위안부' 문제, 기생관광 등)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여성단체는 여성운동의 독자적인 사안으로서 성폭력 문제를 의식적으로 이슈화하기 시작한다.

1) 여성운동의 독자적 사안으로서 '성폭력' 문제의 이슈화
‘민주화 투쟁에 복무하는 여성운동’이라는 지향을 갖고 활동하던 <여연>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중운동과 분리되면서 여성운동의 독자화, 대중화로 노선을 전환한다. <여연>은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여성의 동일성에 입각한 의제를 제기하는 속에서 모색한다. 성폭력은 '가장 설득력 있는 여성억압의 사례'로 여성 전반의 동일성을 구축하기 위한 이슈가 되었다.(민경자, 1999) 따라서 <여연>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건발생 지역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구성하였고, '가해자의 폭력이 분명하게 입증되는 사안'을 골라 사회 문제화하였다. 그리고 개별 사건에 대한 법정 대응을 진행하면서 성폭력 사건 전반을 처리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역량을 집중한다. 그러나 여성운동의 독자성이 단일 이슈로 특히 성폭력으로 드러나는가, 여성운동의 독자성이 여성 '동일성'을 전제한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등은 평가되어야할 지점이다. 여성운동의 독자성 구축과 대중화를 목적으로 성폭력이라는 단일쟁점이 여성운동에 이입되면서 여성 억압과 폭력을 발생하는 구조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가로막았으며, 변혁운동과 분리된 여성운동은 여성의 차이를 드러내는 계급 문제를 동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하는 결과를 낳았다.

2)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
여성단체의 반성폭력 운동은 법 제정 운동을 중심과제로 설정한다. <여성의 전화>가 성폭력 특별법을 제기하여1) 공청회(1991년)를 거쳐, <여연> 산하 성폭력특별법제정특별위원회(이하 성특위)(1992년)를 구성하면서 법 제정운동이 시작된다.
당시 형법에서 강간을 비롯한 성폭력은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되어 있었고 성폭력 성립 요건이 까다로웠다. 이러한 가부장적 개념을 여성의 관점에서 정의하고 이를 법에 반영하고자 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성폭력 개념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성의 전화>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혹은 gender violence)으로 성폭력을 주장했으나2) , <한국성폭력상담소>3) 와 <여연>을 비롯한 성특위는 ‘법 제정의 현실성’을 이유로 아내구타를 제외한 협의의 개념, 즉 성적인 폭력(sexual violence)을 성폭력의 개념으로 채택한다. 이에 성특위는 성폭력을 '성적 자기 결정침해의 죄'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 언동, 곧 강간 뿐 아니라 추행, 성희롱 등 모든 정신적ㆍ언어적ㆍ신체적 폭력’으로 정의하는 것에 합의한다. 성특위는 성폭력 범죄 유형을 세분화하고 성폭력 범죄 구성 요건을 넓혀 '성적 자기 결정 침해의 죄' 조항을 신설하고 고소기간 폐지, 친고죄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성폭력특별법’ 안을 제출하고(1992년),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다.(1993년) 그러나 법안에서 강간은 여전히 '정조에 관한 죄'(개정 운동을 통해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뀜(1995년))로 규정되었고, 친고죄 폐지 및 친고죄 고소 기간 연장, 성희롱 규제 신설 등의 여성단체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아 재개정 과제로 남게 되었다.
반성폭력 운동은 입법 운동을 시작한지 3년 만에 법 제정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다. 법 제정을 위한 법률안 작성, 법조인과의 공동작업 등의 법 제정운동의 과정은 여성이 아래로부터 주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책역량을 중심으로 한 여성주체들의 전문가주의를 강화하는 한계를 보였다.

3) 법안 보완 위주의 현재 활동
성특법이 제정된 후 여성단체의 활동은 법률 재ㆍ개정 작업, 성폭력 상담소 활동을 주축으로 이뤄지고 있다. 성특법이 제정되고 4차례에 걸친 성특법 개정과 10차례 정도 관련법과 소규모의 개정작업이 있어 왔는데, 여성단체는 개정 작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법을 보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성폭력과 관련 있는 성희롱 관련법, 청소년성보호법, 스토킹방지법 등의 제정과 개정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법률 제정운동의 후과로 상담소가 제도화되면서 여연 회원단체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설립된 성폭력상담소에서는 피해자 상담, 쉼터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성폭력 사건 해결의 가이드라인과 정보를 제공하며, 피해자에 대한 통합적 지원체계를 마련하면서 서비스기관화, 전문화의 특성을 강화하고 있다. 상담소는 '성폭력생존자 말하기대회', '반성폭력 페스티발' 등을 개최하면서 여전히 피해 당사자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반성폭력운동의 주체화를 확대하려 시도하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법 적용을 원하는 피해자가 오히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2차적인 피해를 당하고, 법으로 인해 성폭력 발생률이 줄어들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 개정이나 법 시행을 보완하는 감시나 모니터링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상담소 단체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수사나 재판과정에서의 피해 감시', '성폭력을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바꾸기 운동', '공소시효배제 및 연장을 위한 소송'등이 그것이다.(이미경, 2006) 이는 여성단체가 입법 운동의 한계, 피해자 정체성에 기반한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발본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인한다.

4) 입법 운동의 한계
성폭력특별법은 성폭력과 관련한 형법 체계를 현대화하고자 한 시도였으나, 기존의 형법상에 규정된 성범죄 행위들을 치환, 재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신상숙, 2001) 법률안에서 성폭력의 개념이나 정의는 누락되었고, 강간은 여전히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되었다. 여성단체들이 현실성의 이유로 성폭력에 관한 정의를 협소화 한 점, 성폭력 관련한 아내구타, 성폭력, 성희롱 등이 각각 다른 법체계의 적용을 받는 한국 입법 관행의 문제 등이 성특법 제정 운동의 한계로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성폭력특별법의 한계는 법률안 자체의 완결성이 부족하여 파생되는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법 자체의 한계에 대한 발본적인 평가 속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여연>은 87년 민주화 이후 '신속하고 유연한' 대응을 통해 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제도 개혁 차원의 법제화 운동을 중심적으로 벌여낸다.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도 이러한 제도화 투쟁의 일환으로 배치되었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성과는 여성운동이 남성 중심적인 국가 권력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민경자, 1999) 그러나 법은 여성의 권리와 성적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성특법에서 성폭력이 무엇을 침해하는 범죄이며 어떤 기준에서 판단되고 통제되어야 하는지를 여성의 고유한 권리에 기초하여 정의할 수 없었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권리로서 정의될 수 있는 성적자기결정권4) 은 여성의 고유한 권리가 아닌 '성행위 여부 및 그 상대방을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의 일환으로 법에서 해석되었다. 개인의 신체와 성적인 '사생활'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권리의 하나로서 성적자기결정권이 이해된 것이다. 이때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추구할 자유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충돌하거나 갈등할 때, 성적 자기결정권은 딜레마5) 에 부딪히게 된다. 법은 개인성 모델을 일반화하고 있기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과 그 침해는 가해자-피해자 개개인의 권리충돌의 문제로 왜소화될 뿐 여성의 고유한 권리는 제기되지 못했다.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를 국가의 제도적 폭력을 이용하여 처벌할 수는 있지만 법안이 성폭력의 발생을 감소시키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

1990년대 중후반 대학 사회에서는 학생운동 의제의 다원화, 성해방 이데올로기의 유입에 따른 '성' 담론의 확산, 여성활동가들의 결집을 계기로 반성폭력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운동지형의 변화는 대학 내에서 이른바 민중민주, 민족해방운동 외에 성, 생태, 문화 등 다양한 부문운동이 제기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구좌파의 계급 운동을 비판하면서 심리적ㆍ문화적 억압 기제 타파에 초점을 두는 미국의 신좌파 운동이 유입됨에 따라 이른바 개인적인 문제들이 운동의 의제로 포함되기 시작한다. 신좌파는 일상에 산재하는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며 위계적인 중앙집권적 의사결정 과정을 비판했고, 자기해방이 곧 사회변혁이라는 개인적 정치를 발전시켰다.(오현미, 2003) 이러한 신좌파의 정치개념은 대학 내 학생운동의 의제 설정과 운동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들어 서구의 성해방 이데올로기가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의 부흥을 필두로 성의 상품화와 함께 유입되면서 대학 내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이러한 성담론의 확산과 함께 1990년대 여성운동의 의제였던 성폭력 담론과 반성폭력 운동은 대학 내에서 활성화된다. 1995년 이후의 대학 내 여성모임은 대학 내 자치나 성정치와 관련한 문화주의적 실천, 성폭력 사건 대응 등의 활동을 한다.

1) 대학 내 여성모임의 구축
대학에서 활동하던 여성활동가들은 학생운동과 별개로 자치모임이나 여성위원회 등 독립적인 모임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런 여성모임의 독자 구축은 기존의 학생운동이 여성 의제를 부차화하는 상황, 남성 활동가에 의한 성폭력 등 운동사회의 가부장성에도 그 원인이 있다.
대학 내 여성운동 단위들은 급진주의 페미니즘6) 의 '성정치7)'라는 '이성애 관계 속의 권력과 지배' 개념을 받아들이고 성, 정체성, 문화 등의 새로운 의제를 제기하면서 문화주의적 실천을 기획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대중화시킨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은 개인적인 삶에 정치적인 차원이 존재한다는 이념을 보여주는데, 이는 개인과 정치의 통합을 주장한 신좌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껏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던 성폭력이 집단의 권력 관계가 반영되어 발생하는 정치적 문제로 재조명되었다. 1990년대 후반 대학 내 여성운동은 신좌파 운동,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유입에 따른 성정치화의 영향 하에서 성폭력에 대한 정의나 반성폭력 운동 양식을 급진화하고자 했다.

2) 성폭력 대응
1993년 발생한 서울대 신정휴 성희롱 사건은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가시화하여 대학가의 반성폭력 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된다. 1996년에 발생한 이화여대 대동제에서의 고려대 남학생들의 집단 성폭력 사건, 연세대 사태 이후 집단 성폭력과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여성활동가들의 공동 대응이 활성화된다. 이에 고대생 집단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각 대학의 여성활동가들 모임인 '들꽃 모임'이, 공권력에 의한 여학생 성폭력 사건 대책위(9개 학교 참가) 구성을 모태로 '학내 성폭력 근절과 여성권 확보를 위한 여성연대회의'(1997년)가 결성된다.
이렇게 모인 대학 내 여성활동가들에게 여성을 억압하는 권력은 개인의 삶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삶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성폭력은 찾아야 할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이른바 '영페미니스트8)'가 등장하면서, 이들은 주류화된 여성운동을 '올드페미니스트'로 규정하고 주류 여성운동이 조직의 거대화, 운영의 관료화되어 권력화 된 여성운동은 더 이상 진보 운동이 아니라고 비판했다.(강남식, 2004) 영페미니스트들은 지도부나 집행체계를 두지 않는 느슨한 네트워크 형성, 나이ㆍ학번에 관계없이 별칭 쓰기, 수다식 회의 등 '민주적인 운영방식'을 앞세우며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위계적인 구조나 권력 관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은 신좌파의 탈권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느슨한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기동력 있는 대응의 효율성에서 찾기도 했다. 반성폭력 운동은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응하기보다는 여성 억압의 '일상에 시비걸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큰 몸집과 '조직'은 부담스럽고 기동력 있고 기민한 개체가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개별적이고 비조직적으로 기습 시위 및 퍼포먼스(지하철 성추행 경고 퍼포먼스 등) 등을 벌이는 활동 양태를 구사하면서 이를 반성폭력 운동의 모델로 제시했다.
한편 대학 내 여성모임들은 학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면서 성폭력에 대한 정의, 해결 방식의 원칙 등을 마련해가기 시작한다. 성특법에서 성폭력을'성적인 폭력'으로 협소화 한 것을 비판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 성차별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그 개념을 확대하였다. 성폭력 행위를 폭력성의 경중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남성 폭력의 연속성과 구조적 측면을 강조하는 '연속선 개념'을 도입했다. 1990년대 초반 법제정 운동 과정에서 여성단체들이 한시적인 전략으로 채택했던 피해자 중심주의는 '철저하게 권력 관계에 기반한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는 원칙이자 방식으로' 전면화 된다.(달과 입술, 2000) 법에서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고안된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이 중심적인 원칙으로 채택되면서, 대학 내에서 성폭력 성립여부는 논쟁과제가 아닌 전제가 되었다.
대학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은 형법을 통해 처리되기보다는 사건 공개 및 가해자 실명 공개 사과문 작성, 가해자 재교육 등의 해결 방식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시도들은 당시의 문제의식이 성폭력 문제를 개개인의 사건이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사건 공개는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여 공동체의 자성과 논의를 촉발하고자한 전략이었으며, 공개 사과를 통해 성폭력 가해자는 성폭력 피해자 뿐 아니라 대학 구성원들 전체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재교육을 통해 가해자 개인의 변화를 시도했다.(박정미, 2002) 그러나 가해자 재교육은 해당 가해자의 재발방지를 위한 시도였을 뿐이며, 이러한 처리 방식에 따른 사건 해결은 가해자 개인의 의지와 태도에 따라 달랐으며, 이에 대한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3) 학칙 제정 운동
개별 성폭력 사건들에 대응해나갈 수록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수단이나 강제력이 없고, 교수의 권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 해결이 불투명하다는 이유 등에서 학칙 제정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학칙제정운동은 가장 현실적이며 대중적인 운동이라는 이유로 대학 내 여성운동의 과제로 자리 잡아 갔다.(달과 입술, 2000)
그동안 대학 사회 내에서 정착된 성폭력의 정의, 성폭력 사건 처리 및 해결 방식을 제도화하려는 노력은 학칙ㆍ자치규약 제정운동으로 수렴되었다. 물리적 성폭력 뿐 아니라 성차별적인 문화 자체(여성 비하적 표현이나 여성 배제적 공동체 놀이 문화 등)가 규약에서 성폭력으로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피해자-가해자 구도에 따른 사건 구성, 가해자 처벌 등의 제도화된 사건 처리 방식이 여성 억압적인 문화를 포괄하는 모든 성폭력에 일반적으로 적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여성 비하적 표현이 언어적 성폭력 '사건'으로 제기되어 가해자를 규약에 따라 처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규약은 공동체의 권위에 기반하여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또 다른 형법이 되었다.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처벌하는 규약에서 정의된 성폭력은 남성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위나 단어의 목록으로만 인식하게 하였다. 여성을 억압하는 폭력이 무엇이고 여성의 어떤 권리를 침해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봉쇄되었다. 반성폭력 규약이 완성됨과 동시에 성폭력에 대한 공동체적인 논의는 사라지고, 성폭력 사건 접수, 대책위 구성, 사건 공개, 가해자 실명 공개 사과, 가해자 처벌 및 재교육 등 성폭력 사건 처리의 매뉴얼만이 남게 되었다.
주류 여성운동의 반성폭력 운동이 법제정 운동으로 수렴되었듯이, 대학 내 여성모임의 반성폭력 운동 또한 학칙 제정 운동으로 수렴되었다. 성폭력 관련 법안이 성폭력을 감소시키지 못했듯이, 성폭력을 세분화, 확대하고 규약에 의해 처리하는 것이 성폭력 사건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는 없다. 이는 '영페미니스트'의 '올드페미니스트' 비판이 불충분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페미니스트는 주류 여성운동의 '권력화된 구조'만을 비판했을 뿐 반성폭력 운동의 실내용을 비판하지 못했다.'이미 발생한 사건'이 아닌 '일상에 산재한 여성억압'을 제기하려 했던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의 시도는 확대된 성폭력 개념을 규약안에 삽입하고, 발생한 사건을 처리하는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4) 반성폭력 운동의 현주소, 탈정치화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은 학칙 제정운동의 완성과 함께 대중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여전히 대학 내에서 성폭력이 발생하고 여성활동가들이 성폭력 처리에 나서고 있지만, 공개적인 논의를 포함한 활발한 대외 활동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은 대중운동으로서 주체화의 가능성이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에서 여성들은 스스로를 피해자 내지 잠재적 피해자로 규정하였다. 이는 여성의 보편적 권리에 입각하여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피해라는 경험에 입각한 것이며, 남성의 폭력성이나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규정을 근거로 작동되고 있다. 이러한 한계는 여성억압의 구조와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남성 일반의 권력' 혹은 '남성의 공격적인 성욕'에서 찾는다. 따라서 이성애적 관계는 정도의 차이일 뿐 그 자체로 성폭력에 노출될 위험을 파생시킬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 성폭력의 쟁점화는 이성애적 관계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이어져, 정치적 레즈비어니즘9) 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들은 결혼과 가족을 이성애를 강요하는 제도로만 인식했다. 이러한 이성애 제도 비판은 이성애 관계에서의 여성의 성적 권리(성욕에 대한 권리)나 남녀의 지배적인 성적 결합의 양태인 가족 형태에 대한 문제의식을 삭제한다. 또한 성적 결합을 넘어선 가족을 매개로 심화되는 여성의 경제적 종속, 노동권의 제약 등도 분석하지 못한다. 이성애 제도 비판의 경향은 여성들만의 공동체나 문화 건설을 진행했던 문화주의 페미니즘10) 과 닮아있다.
이렇게 여성 억압이나 폭력의 구조적인 원인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지 못한 반성폭력 운동은 무엇을 변혁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을 찾지 못했다. 개인의 해방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변화가 요구된다. 하지만 반성폭력운동의 과정 속에서 공동체의 변화를 위해 조직되어야 할 집단적인 주체화와 실천이 개인적인 저항과 의식화에 머물게 된다. 이들의 실천은 페미니스트로서의 '감수성' 획득에 그치고 있으며, 문화주의적이거나 개인적인 저항에 자족하고 있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접합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은 탈정치화의 알리바이가 되어준 셈이다. 운동의 활성화와 함께 유의미한 수단으로서 제기된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기획-출판사, 서점, 여성센터, 카페 등-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문화주의'적 경향을 낳았다. 더욱이 자본주의 소비 시장에서 페미니즘이 문화상품이나 라이프 스타일로서 상품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주의적 소비11) 가 가능한 것인지 의문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성폭력 운동이 증대시키는 (잠재적 가해자로서) 남성에 대한 적대감은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고,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기제가 되고 있으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에는 취약하다.

운동사회 내 성폭력 고발-100인 위원회

2000년<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100인위)>의 결성은 기존 운동조직의 구조와 내용, 실천 상의 성맹목과 여성 억압적 성격에 대한 비판과 관련이 있다.(정인경, 2003) 1990년대 후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성폭력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여성활동가들의 운동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확장되어온 반면, 이른바 '진보적인' 운동사회의 가부장성과 성차별적인 관행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혜숙과 조순경(1995년)이 지적했듯이 운동 조직 내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몰이해(여성운동을 분열을 조장하는 비도덕적이고 계급성이 철저하지 못한 행동, 여성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기주의로 이해하는 여성운동관)나 부차화로 인해 조직 내부의 성별분업구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운동문화의 남성중심성 등의 관행은 여성운동가를 배제해 왔으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형성을 가로막아왔다.
<100인위>는 대학가의 반성폭력 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운동사회의 성폭력 문제를 제기했다. <100인위>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장 억압적인 요소가 '성폭력' 문제라는 데 입장을 공감하며 가해자 실명공개를 비롯한 적극적인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17개의 성폭력 사건을 공개했다.(100인위 활동백서) 그러나 운동사회의 가부장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발생한 사건의 해결로서 '처벌'의 원칙을 가지고 접근한 결과 공개된 개별사건 각각이 성폭력이냐 아니냐를 논쟁거리로 남겼다. 이는 애초 <100인위>의 가해자 실명공개가 '피해자 정체성에 기반한 자기 방어적인 운동이자 잠재적 피해자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제기하고자 했던 의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100인위> 성원들이 모든 견해에서 통일되거나 동일한 입장을 채택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처리를 요구하는 것 외에 혁신되어야 할 사회운동의 지향이나 구조와 방식에 대한 논의나 문제제기가 이뤄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00인위>의 문제제기는 사회운동으로 하여금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사회운동 내 여성활동가들은 성폭력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여성활동가 모임이나 여성위원회 등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100인위>의 문제제기에 대한 운동사회의 혁신은 한계적이다. 반성폭력 규약의 존재나 규약에 의거한 성폭력 사건의 신속한 처리 여부가 운동사회의 진보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인식되는 상황이다. 물론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처리마저도 정파적 구도나 이해관계와 맞물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활동가들의 운동사회에 대한 비판은 폭력에 대한 방어나 처벌을 통한 여성활동가의 생존권적 요구를 넘어서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 억압적인 구조가 존재하는 한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활동가들이 운동을 현식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요구와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는 민중운동을 페미니즘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운동의 과제를 제출하는 것으로 여성주체들의 요구는 확대되어야 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족 제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강화하거나 여성의 의무를 강요하는 정부의 여성정책에 무비판적이고, 가족임금 이데올로기 등과 맞물려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으로 간주하며 여성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자본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해온 민중운동은 여성의 궐기와 요구를 운동의 과제로 입안하기 위한 자기혁신이 필요하다.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

앞서 반성폭력 운동의 흐름은 이른바 변혁운동과 여성운동이 분리되는 상황에서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성폭력 쟁점에서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여연이 민족민주운동과의 분리되면서 자유주의적 담론을 흡수하는 한편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성폭력 단일 이슈에서 찾으려 한 점이 그렇고, 1990년대 말 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변혁운동의 쇠퇴, 학생운동의 다원화 경향에 따라 독자적으로 결집한 여성모임들이 '성정치'를 전개한 맥락이 그렇다. 역사적으로 변혁운동과 페미니즘의 분리는 변혁운동이 점차 쇠퇴하는 동시에 자유주의적 개혁이 출현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가 페미니즘의 주류를 형성함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반성폭력 운동이 법 제정(성특법과 학칙 등의), 제도화로 수렴된 맥락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변혁운동12) 과 분리된 여성운동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노동권, 여성 고유의 권리로서 여성권의 결합을 사고하지 못한다. 현재의 여성단체나 영페미니스트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의 불안정화,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여성노동자 투쟁을 적극적으로 운동과 결합시켜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이를 반영한다.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부과된 역할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이 필수적이며, 이는 노동권의 획득을 통해 실현 가능하다. 또한 여성이 노동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종속을 재생산하는 가족제도 및 가족 이데올로기가 변화되어야 한다. 노동권과 여성권은 각기 구별되는 독자적인 권리지만 서로 결합되지 않으면 어느 것도 실현될 수 없는 권리이기 때문이다.(김숙경, 2003) 그러나 변혁운동과 분리된 여성운동은 여성해방을 위한 노동권 쟁취는 부차화 한 채, 계급 등의 내부적 차이를 제거한 여성 동일성에 기반한 이슈를 제기하거나 여성 일반의'이해'를 위한다는 대의 하에 일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지위향상이나 권리 증진의 활동을 진행해왔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반성폭력 운동이 지금껏 여성운동이 의제로 삼지 못했던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의 성욕에 대한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권리로서 성적자기결정권 담론은 폭력에 대한 방어 주장, 대항폭력의 담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모든 여성을 모든 남성의 권력과 폭력의 희생자로 동일화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기반한 반성폭력 운동은 남성의 폭력성을 강조하며 여성의 성욕에 대한 침묵을 낳았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한 방어의 강조만으로는 남녀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변화를 모색할 수 없다. 결국 반성폭력 운동은 여성의 독자적인 권리가 무엇인지, 여성억압을 구성하는 구조를 변화하기 위해 무엇을 변혁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채, 점점 세분화된 성폭력을 구성해 가는 데 그쳤다. 아내구타, 강간 등 남성이 휘두르는 폭력도 여성의 노동을 부차화하고 여성을 경제적, 심리적, 성적으로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가족형태 및 이를 통해 재생산되는 성별 이데올로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극단적 형태의 폭력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폭력은 해부학이나 심리학에서 그 원인이 규명될 수 없으며, 오히려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정인경, 2003) 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여성의 독자적인 권리를 정의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가족의 변혁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사고해야만 한다.
성폭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은 공동체 내에서 배제된 존재라는 것이다. 근대의 공동체는 환원할 수 없는 성적 차이를 한 성으로 환원한 남성들만의 특수주의에 기초한 공동체였다. 그러나 여성의 시민권은 단지 배제의 종식을 통해 획득될 수 없으며 여성의 권리에 근거한 보편적 권리의 재구축이 필요하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 여성에 대한 현실적, 상징적 폭력에 대한 반대는 성적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성별화 된 시민권의 요구 없이 달성될 수 없다. 여성이 공동체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양성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유대를 위한 토대로서 새로운 성적 윤리의 구축이 필요하다. 이리가레는 여성이 존중받을 권리로서 여성의 육체와 이미지가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을 권리,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이 착취되지 않을 권리를 제기하며, 성적 차이에 입각한 여성의 고유한 권리로서 재생산에 대한 권리, 성욕에 대한 권리를 제기한다. 이러한 권리들은 공동체의 성원인 시민에게 성별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 남녀 간의 환원할 수 없는 성적 차이에 기반한 성별화 된 권리를 변혁운동이 인식하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을 모색해가야 할 것이다.
성폭력 쟁점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영향 아래 대학 내 여성활동가들을 주축으로 여성운동의 중심적인 쟁점으로 제기되었으며 반성폭력 운동의 경향성이 재생산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성폭력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여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을 평가하는 작업이 시급히 요구된다. 그리고 이는 반성폭력 자장 안에 존재했던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여성활동가들의 자기반성을 포함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많은 논의와 모색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글은 완결된 평가가 아니라 열린 논의를 제안하는 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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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의 전화>가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한 계기는 다음과 같다. 가정폭력으로 피신해온 여성들을 쉼터에서 보호하는데 구타남편이 여성의 전화를 인신매매단으로 경찰에 신고하여 상담원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을 통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여성폭력추방을 하고 있는 여성단체가 국가로부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울분을 느껴 여성운동가들이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 필요성 공감했다는 것이다(민경자, 1999). 본문으로
2) 1983 설립된 <여성의 전화>는 한국에서 최초로 아내구타 등의 여성 폭력 문제를 상담한 여성 상담 기관이다. <여성의 전화>는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차별이 폭력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정의했다. 협의의 성폭력뿐만 아니라, 여성을 경시하는 말, 여성에 대한 희롱, 결혼 퇴직 강요, 생존권 탄압 수단으로서의 성폭력, 직장 내 성차별 사례, 아내구타, 낙태 등을 포함한 광의의 개념을 포함하여 성폭력의 개념을 확대했다.(민경자, 1999)본문으로
3) 1991년에 설립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대 여성학과 졸업생과 교수들이 '강간위기센터(가칭)'를 설립한 것을 계기로 개소되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여성학(1983년 이화여대 여성학 석사과정 개설, 이를 중심으로 성 연구 활성화, 1980년대 말부터 섹슈얼리티 관련 논문 등장했고, 1989년에 강간에 관련한 석사논문 3편이 발표됨) 이론의 실천적 장으로 시작되었고 여성 전체의 문제로서 성폭력에 접근했다(민경자, 1999). 이들은 성폭력을 '성적인 폭력'이라는 좁은 의미로 채택했다. 성폭력에는 강간뿐 아니라 추행, 성적 희롱, 성기노출, 어린이 성추행, 윤간, 아내강간, 강도강간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여성주의 상담'을 진행했는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전제 하에 개인적인 문제로 보이는 여성폭력의 뿌리가 사회구조에 있으며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현재의 사회가 성별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변혜정, 2005)본문으로
4) 김철수 헌법학 개론에 따르면 자기결정권은 자기의 사적인 사항, ①결혼, 이혼, 출산, 피임, 낙태와 같이 자신의 인생 전반의 설계에 관한 사항 ②생명연장치료의 거부, 존엄사와 자살, 장기이식 등 삶과 죽음에 관한 사항 ③개인의 생활양식이나 취미에 관한 사항 ④혼전성교, 혼외성교, 동성애 등 성인간의 합의로 이뤄지는 성적 행동에 관한 사항 등을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이를 '자기결정권'의 개념으로 파악하지만, 미국에서는 '프라이버시권' 개념으로 파악한다(신상숙, 2001).본문으로
5)'성특법은 국가가 개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간섭하는 전근대적인 파시스트법이다.'([성명] 성매매 특별법 1년을 평가한다. 여성단체는 집으로 돌아가라! <민주성노동자연대(이하 민성노련)>에서 발췌.) 성노동자들이 말하는 성적 자기결정권 역시 자유주의적 사생활 침해에 대한 반대의 맥락에서 인용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은 지난 6월 29일 <민성노련> 1주년 행사에 참가한 양성평등연대 참가자가 동성애자의 권리를 국가가 억압하지 말아야 함을 비유로 주장하며, 성노동자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주장한 것과 맥락을 함께 한다.본문으로
6)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미국에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조류로서 아메리카 핵가족의 위기에서 파생된 여성의 성적 수동성과 대상화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금껏 논의되지 않았던 성적 감정, 욕망, 실천 등을 여성운동의 의제로 삼았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원인을 남성 성욕으로 규정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와 폭력을 강조하는 한편, 여성의 성적 권리(성욕에 대한 권리)의 실현을 통한 자기 권력화(empowerment)라는 문제의식도 제기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 이론에서 남녀 간의 모든 관계는 '남성이 여성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 유지하려는 집단적 노력'에 의해 결정되었고, 이것이 가부장제라고 명명되었다. 이들은 특히 강간과 폭력이 남성지배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정인경, 2003)본문으로
7)대학 내에서 '성정치'가 확산된 계기로 1995년에 개최된 연세대 성정치 문화제가 언급된다. 1995년, 10월 11일부터 사흘 동안 '나를 강간하라(Rape me)'는 표어 아래 여성 상품화와 남녀 성차별을 고발하는 '성정치 문화제'는 당시 언론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성을 주제로 한 진보적인 영화 상영,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라는 주제로 성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보디 페인팅, 성의 상품화와 여성의 도구화를 극복하기 위한 강연회 등이 열렸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성정치국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성범죄를 비롯한 여러 유형의 남성 폭력을 공적인 이슈로 제기했고, 동성애 문제도 다뤘다. 이를 계기로 학내에서 중심 운동의 부문 운동으로 존재하던 대학 여성 운동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두입술 창간호「테마1-자치/미완의 작업-자치질서 만들기」, 1998, 연세대)고 평가된다. 이후 반성폭력, 성정치, 자치 등을 주제로 하는 문화제(96년 연세대 문화제 ‘일상/저항/자치 문화제-너의 일상에 침을 뱉어라’, 1997 서울대학교, 한양대 주최 ‘한총련 집단 성폭력 반대 문화제-너희가 X를 믿느냐’, 1999년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 1999년 ‘월경 페스티발’ 등)가 서울지역 중심으로 대학가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른바 여성주의적 실천으로 여겨지던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1997년), 여성주의 영화 상영 및 감상이라는 활동방식도 (1998년 1회 여성영화제 개최) 이즈음부터 시작된다. 또 다양한 여성주의 언론(페미니스트 저널 , 페미니스트 웹진 <달나라 딸세포>, 연세대 여성 자치 언론 <두입술> 등)이 98년도에 우후죽순처럼 창간되었고, 문화기획집단(여성문화예술기획 <마녀>(1997년), 페미니스트 카페 <고마> 개점(1997년), 경제적 자립을 위한 여성경제네트워크 <프리-워(FReE-war)> 등도 생겨났다.(달과 입술, 2000) 본문으로
8) <언니네> 편집팀 땐은, 언니네 특집 55호, 「영페미니스트를 둘러싼 그 논쟁의 지형도를 돌아보며」(2004.11)에서 96년 5월 고대생들의 이대난동사건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각 대학 여성주의자들이 모인 '들꽃모임'을 지칭하는데 영페미니스트라는 명명이 시작되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본문으로
9) 성적 선호에 의해 차별받는 것에 반대하는 것과 운동의 일환으로서 레즈비어니즘이 제기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통해 이성애적 관계를 개인적으로 지양하거나 피할 수는 있어도, 남녀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운동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본문으로
10) 문화주의적 페미니즘은 미국에서는 1973 이후 등장했다. 문화주의 페미니즘은 (남성 일반과의) 분리주의와 여성문화, 여성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특성을 가진다. 문화주의 페미니즘은 본질주의, 반좌파주의, 관념적인 사회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이들의 운동은 오히려 가부장제로부터의 피신처를 제공한다. 페미니스트 서점, 출판사, 강간방지센터, 여성건강센터, 여성신용협동조합 등이 전국적으로 형성된다. 이들은 여성해방을 공동의 투쟁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 결심의 문제로 간주한다. 여성들만의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모임으로 변모되어간다.(조은 외, 2002)본문으로
11)'여성주의로 숨쉬는 마을'을 내건 '언니네' 커뮤니티의 특집 기획을 보면, 만화, 연애, 패션, 건강, 여행 등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주로 해당 상품의 여성주의적 특성을 소개하는 식인데, 여성주의적 특성도 모호할뿐더러 소비 행위를 의식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본문으로
12)이때 변혁운동은 현존하는 노동자운동이나 사회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구조적 위기의 지연책으로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폭력과 빈곤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이념과 주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혁운동에 페미니즘이 결합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운동과 여성운동 양자가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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