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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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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파병에 반대한다

: 한국군 파병의 현황과 문제

김영식 | 반전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사망

지난 2월 28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북부에 위치한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사건으로 한국군 윤장호 병장1)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사회 전반에 걸쳐 미국 주도의 침략전쟁에 동참하는 한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지속적으로 이슈화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사고 이후 정부가 3월 5일까지 전사자 운구와 장례식을 완료함으로써 신속하게 대처했다는 점, 그리고 국내외의 반전운동의 초점이 이라크로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예상 밖으로 사건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외곽에서 발생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할 것이다.2)
역으로 생각하자면 이는 지금껏 이라크로 모아졌던 미국의 일방적 군사패권주의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넓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이야말로 9·11 이후 벌어졌던 미국의 무도한 침략행위의 첫 희생양이 아니었던가. 이라크 파병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파병 역시 본질적으로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에 동참하는 것이며, 故 윤장호 병장 역시 수없이 목숨을 잃은 민중들과 같은 안타까운 전쟁의 희생자임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군 파병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 전 세계에 파병되어 있는 한국군의 현황을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한국군의 파병은 지배계급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궁극적으로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조응함으로써 분쟁을 확산시키고 전쟁범죄의 공범자가 될 뿐임을 명확히 밝힐 것이다.

베트남 파병과 그 결과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군이 창설된 이후 최초의 해외 파병은 베트남 전쟁 때였다. 베트남 파병의 과정을 보면 2003년의 이라크 파병과 유사한 부분을 찾을 수 있는데, 미국의 요구에 의한 파병이었다는 점3), 그리고 후방지원을 맡는 의료부대와 군사지원단과 같은 비전투부대의 파병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 본격적인 전투부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요한 점은, 어떠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이건 간에 군대가 본질적으로 무장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특히 전·후방의 구분이 어려운 전장에서는 비전투부대 역시 자위용의 무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불가피하다. 따라서 비전투부대와 전투부대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보아야 하며, 병과 체계에 의한 임의적 구분일 뿐이다.

베트남전 파병일지

베트남전 파병일지

'64. 9 비둘기부대(외과병원, 태권도교관단 파병)
'65. 2 군사원조단 파병
'65. 8 전투병 파병 국회 의결
'65. 10 맹호(수도사단), 청룡부대(해병2여단)파병
'66. 8 백마(9보병사단)부대 파병
'71. 12 청룡부대 철수
'73. 3 한국군 잔류부대 철수


출처: 공군 홈페이지

단적인 예로, 베트남에 2차로 파병된 비둘기부대의 경우 부대성격은 대민지원을 목적으로 한 건설지원단이었지만 자체적으로 경계 및 수색활동을 전개하였고 전쟁 후반기에는 매복 작전을 비롯하여 NLF병력4)과의 직접적인 교전에까지 투입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보병사단이 증파되어 최종적으로는 1개 군단 규모에 해당하는 4만여 명의 병력이 참전하게 되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여기서 부연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되, 파병 한국군에 국한하자면 최종적으로 한국군은 철수까지 연인원 32만여 명이 참전했으며 그 중 전사자 4천 6백여 명, 전상자 1만 7천여 명이 발생했다. 이 중 7만 명이 넘는 참전자들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현재까지 고통 받고 있다.5)
2000년에 이르러 파병 한국군이 저질렀던 민간인 학살사건이 새롭게 재조명되면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 6월 부로 미 국립문서기록 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문건을 『한겨레21』에서 입수하여 보도함으로써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졌는데, 당시 사건들에 대한 미군 지휘부와 한국군 당국 간의 긴밀한 협의가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공개된 공식문서에는 한국군 해병 2여단 소속 부대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잔혹행위가 현장증거사진과 함께 상세히 보고되어 있다. 특히 80명에 가까운 양민들이 잔혹하게 학살되었던 1968년 2월의 '퐁니-퐁넛 마을 사건'의 경우는 한국군 장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졌지만, 상부의 입막음으로 인해 베일에 가려져야만 했다. 이외에도 한국군 주둔지역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불법적인 약탈행위와 암시장 운영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미군 측 기록에 나온다. 한국 정부는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양민학살에 대한 인정과 사과는 커녕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어떠한 입장조차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걸프전쟁과 두 번째 파병


1973년의 베트남 철군 이후 한국군의 해외파병은 한동안 없었는데, 베트남전 패배의 영향으로 이후의 국지적 분쟁에서 미국이 전면전을 펼치지 못했다는 것이 한 이유일 것이다. 1990년 8월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점령으로 페르시아만 전쟁(이하 걸프전쟁으로 칭함)이 발발하자, 당시 36개국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한국군이 참전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이후 두 번째 본격적인 해외 파병이었다. 당시 파병된 한국군은 100여 명 규모의 의료지원단, 그리고 공군수송단으로써 후방지원임무를 담당했다. 때문에 전체적인 전쟁 수행과정에서 한국군이 맡았던 역할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고 보아도 좋다. 하지만 걸프전쟁 파병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다고 할 수가 없는데, 의료지원단 파견으로 인해 이후 UN 평화유지군(PKO) 활동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걸프전쟁에 참여한 다국적군은 이라크의 기습침공을 규탄하기 위한 UN안전보장이사회의 무력사용 결의에 의하여 결성된 형식을 취하고 있었고, 이에 동참하는 것은 한국이 국제사회의 평화유지활동에 동참한다는 명분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걸프전쟁은 본질적으로는 석유자원에 대한 쟁탈전이었으며, 이후 이라크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재편의 서막이었다. 즉, 한국군의 해외파병은 표면적으로는 UN 평화유지군 활동의 명목으로써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탈냉전 시대 미국의 새로운 군사세계화 전략에 조응하는 것이다.
걸프전쟁 이후 미국은 적극적 개입전략, 즉 윈-윈(Win-Win)6)으로 대표되는 군사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이라크전 파병일지

'03. 3 이라크전 발발
'03. 4 서희 · 제마부대 1진 파병
'03. 5 부시, 종전선언
'03. 9 미국, 한국군 추가파병 요청
'03. 10 정부 추가 파병 결정
'04. 2 국회 파병동의안 통과
'04. 8 자이툰부대 파병



출처: 공군 홈페이지
이는 클린턴 이후의 부시행정부에서 '선제공격독트린'과 신속기동군에 의한 '전략적 유연성' 확보로 더욱 강화되는데, 이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을 비롯한 냉전기 미국의 동맹국들이 더 많은 세계 각지의 국지전에 참여를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즉, 미국의 세계관리에 필요한 전력을 보충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재배치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그리고 일본 자위대의 MD참여와 해외파견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걸프전쟁 이후 한국군은 UN 평화유지군 활동의 일환으로 해외파병을 본격화하게 되는데, 현실적으로 UN이 초월적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미국의 세계정책의 승인기관으로 전락해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의 UN 평화유지군 활동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UN 평화유지군의 활동이 분쟁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 파병의 근거는 더욱 희박해진다. 민족, 종교, 역사 등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한 지역내전의 경우 외부의 개입은 분쟁의 실질적인 해결은커녕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소말리아 내전이다.7)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는 한 갈등을 중재를 통해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UN 평화유지군의 개입은 순수한 분쟁해결의 의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관련된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8) 동티모르 파병은 UN 평화유지군으로서 한국이 참가했던 대표적인 사례다.9)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신생국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쳐 정치·경제적 기반이 전무한 상태였다. 따라서 동티모르에 개입한 평화유지군 참가국들은 백지 상태인 동티모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계산을 나름대로 마친 상태였다. 이는 동티모르 평화유지군의 참가국들을 보면 여실히 증명되는데, UN 결의에 따라 INTERFET(INTERnational Force for East Timor)로 명명된 18개 다국적군의 지휘군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이었으며, 가장 많은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큰 규모의 파병국은 뉴질랜드였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군사적 지역동맹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호주의 가장 큰 적성국이 인도네시아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호주의 입장에서 동티모르 사태는 지역 내에서 인도네시아의 군사력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이며 동시에 재건을 지원한 파병국이란 명목으로 자국 내 자본들의 시장침투를 용이하게 하여 경제적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구스마오 정부가 들어서고 소요사태가 소강국면에 접어들자 동티모르로 국내 기업들의 투자가 줄을 이었다.10) 이쯤 되면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으로 표상되는 UN 평화유지군 활동이 얼마나 한계적이고 또한 기만적인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한국군 파병의 현재와 민중운동의 대응


전술하였듯이 9·11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은 탈냉전기의 새로운 국제질서 확립으로 이어졌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차례로 전화로 몰아넣으며 일방주의적 군사세계화를 이룩하였다. 한국군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차례로 병력을 파병하였고, 양 지역에 파병된 인원은 전체 파병 인원의 대부분임을 위 표에서 살펴볼 수 있다. 평화유지군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인원은 전체의 1%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군의 해외파병의 본질은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닌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의 동참일 뿐이다. 앞서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파병은 베트남과 한국 양국의 민중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만을 남겼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에 동참하여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파병은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사진출처:국방부)한국 정부는 93년 소말리아 공병부대를 시작으로 현재 이라크 2276명(2004), 아프가니스탄 208명(2002)등 세계 13개 지역 총 2519명이 파병 중에 있다.

정부가 레바논에 또다시 파병을 하려고 하고 있다. 한국군이 현지에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되어 간다고 현지의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한 세기를 갈등과 전쟁으로 보내고 있는 중동지역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한국군의 레바논 파병은 미국의 중동관리 전략에 의한 미봉책 역할만을 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침략 책동을 거두어들이지 않는 한 레바논 사태는 계속해서 악화될 것이며, UN군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민중운동의 과제는 정권이 말하는 파병의 정당성이 얼마나 허울 좋은 것인가를 폭로하고 적극적인 반대의 움직임을 조직해 나가는 것이다. 아울러 현재 파병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현황을 널리 알려 파병군의 유명무실함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 더 이상 억울한 희생자가 없도록, 전쟁의 참화로 고통 받는 민중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미국의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에 맞서 세계의 반전평화운동과 함께 연대의 움직임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1) 故 윤장호 병장은 전사자로 처리되어 3월 1일부로 하사로 1계급 진급이 추서되었다. 이 글에서는 고인에 대한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그리고 고인을 영웅화함으로써 파병문제의 본질이 침략전쟁에의 동참에 있음을 외면하고 은폐하려 하는 정부의 의도를 비판하려는 목적에서, 고인을 지칭함에 있어 원계급인 병장으로 표기하고자 한다.본문으로

2) 바그람 공군기지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동맹군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동의·다산부대 역시 기지 내부에 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의 안전도에 대한 정부의 예상은 100%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반적인 인식 또한 주둔 병력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위험의 강도가 이라크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다.본문으로

3)정확히는 1964년 7월 베트남 정부의 파병 요청에 응한 형식을 취한 것이었으나, 사실상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 정부의 강력한 개입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본문으로

4)베트남민족해방전선(Vietnamese National Liberation Front: NLF). 본문으로

5) 2006년 1월 26일 베트남전 참전 군인과 유족 2만 6백여 명이 고엽제 제조 회사인 미국의 다우 케미컬과 몬산토를 상대로 5조원의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이 중 6795명에 대해 상이 등급에 따라 600만~4600만원씩 총 630억 7600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는 법원이 정부가 인정한 고엽제 후유증 13개 병 중 말초신경병과 버거병 환자 4880여 명, 그리고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6만 8000여 명에 대해서는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배상 대상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본문으로

6)윈-윈 전략은 2개의 적성국과의 전쟁 수행을 승리할 수 있도록 그에 상당하는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탈냉전 이후 안보환경 변화에 따른 미국의 국방전략으로 조지 부시 행정부 때인 1991년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과 콜린 파월 합참의장이 주도한 군사 보고서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즉 소련과의 전면적 핵전쟁 상황을 주로 염두에 뒀던 기존전략에서 탈피해 탈냉전에 따른 지역분쟁에 대비한다는 취지 아래 마련된 군사전략이다. 그 내용은 세계의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한 경우 두 지역 모두에서 동시에 승리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 지역 모두를 제압할 수 있는 규모의 전력을 항구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을 기조로 하고 있다.본문으로

7)소말리아는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1969년 군 장성 바레(Mohamed Siad Barre)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후 바레는 22년간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일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1991년 1월 무장 군벌인 아이디드(Mohamed Farrah Idid)가 반군단체인 통일소말리아회의(USC)를 이끌고 바레를 축출하였다. 이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모하메드(Ali Madi Mohamed)를 임시정부 수반으로 내세웠으나, 둘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면서 소말리아는 무정부 상태로 돌입하였다. 이 때부터 소말리아는 크게 아이디드파(派), 마디 모하메드파, 아토(Osman Ato)파 등으로 삼분되어 내전에 들어갔다. 같은 해 가뭄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수십만 명이 굶어 죽자, 1992년 4월 국제연합은 소말리아활동(UNOSMO)을 결의하고 1993년까지 2차에 걸쳐 3만 5300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군벌 사이의 무력투쟁이 격화되면서 평화유지군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자, 미국을 중심으로 편성된 다국적군도 군사작전에 들어갔다. 1994년 3월 분쟁 당사자 간에 정전 및 새 대통령 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평화합의가 성립된 뒤, 국제연합은 소말리아활동을 실패로 규정하고, 1995년 3월 완전 철수하였다.
2006년 미국은 또다시 소말리아 지역에 UN을 앞세워 테러지원국 의혹을 제기하고 군사적 개입을 계획하고 있다.본문으로

8)1994년의 콩고 내전의 경우 다이아몬드와 코발트 광산, 유전 등의 자원을 둘러싸고 주변국들의 개입이 격화되었다. 집권 카빌라 정권이 반군을 견제하기 위해 주변국의 군사력을 개입시키면서 이권을 넘겼던 것이다. 반군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으로 전비를 충당함에 따라 분쟁은 주변 르완다와 우간다가 반군을 지원하고, 앙골라 짐바브웨 나미비아가 정부군을 각각 지원하면서 국제전 양상으로 발전했다. 지난 4년간 이 과정에서 인종간의 갈등으로 내전 중이던 르완다의 난민들까지 휩쓸려 무려 250만 명이 목숨을 잃는 이른바 '아프리카판 킬링필드' 참상이 빚어졌다. UN의 개입으로 인해 평화협정이 맺어졌지만 그 합의 대가로 콩고정부는 석유자원 확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미국과 세계은행으로부터 상당한 재정지원을 받았다.본문으로

9)한국군은 동티모르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는데, 이는 베트남 이후 두 번째의 전투병 해외파병이었다. 상록수부대로 명명된 동티모르 파병부대는 특전사 요원들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동티모르를 점령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정규군과 민병대들과의 교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평화유지군 병력과의 마찰을 회피함에 따라 위험성이 대폭 줄어들었고 파병군은 현지의 치안유지활동과 민사작전에 투입되었다.본문으로

10)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가 2004년 1월에 즈음하여 국내 신문들에 보도되었는데, 당시 방한 중이던 구스마오 대통령 부부가 경북대를 방문하자 경북대 측에서 '떼뚬-훈민정음 연결 프로젝트'를 제안했다는 내용이었다. 동티모르에는 떼뚬이라는 고유어가 사용되는데 고유의 문자 표기수단이 없어, 이를 한글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국내 언론들은 '한글 수출 추진' 등의 기사를 내보내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고 검토 단계에서 폐기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이러한 제안이 실제로 실현되었을 경우 어떠한 문화적 충돌이나 갈등을 가져왔을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또한 이 해프닝은 한국의 지배계급들이 갖고 있는 언어적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파병을 통해 얻은 우월적 지위를 문화적 종속으로 연결시켜 시장의 확대를 노리는 자본의 논리를 적나라하게 밝힌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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