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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8-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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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교차승인 10년, 미완의 논쟁 10년

임필수 | 정책기획부장
미완의 교차승인 10년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과 교차승인 문제의 급부상
때는 1990년, 한반도에는 이른바 '교차승인'이라는 문제가 급격하게 부상하게 된다. 교차승인이란 말 그대로 한반도에 두 개의 정치적 실체, 즉 두 개의 국가가 있다는 것을 '주변4강'이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4대국에 따라 대한민국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어느 한쪽만을 '정통성'을 보유한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인정하던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 서로 다른 진영의 국가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교차승인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와 경제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대외전략에 중대한 수정을 가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한 측면으로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데땅트'를 추진하게 되었고, 이 때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나온 구상이 바로 교차승인이었다. 1970년 박정희정권이 8·15선언에서 발표한 '평화공존'의 개념, 1973년 6·23선언에서 발표한 '남북한 UN동시가입', '비적성 공산국과의 호혜평등에 입각한 문화개방', 1975년 30회 UN총회에서 키신저 미국무장관의 한반도에서의 '교차승인' 등은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서 천명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구상은 남한을 하나의 국가로서 실체화하고 기존의 한미간 조약 및 협정을 유지함으로써, 기존의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안정화하려는 전략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현실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던 교차승인 문제가 급부상하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세계정세의 변화에 기인하였다.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이래, '정경분리'라는 이름으로 한소 및 한중 경제관계가 점차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더니,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공식적인 외교관계의 수립이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1990년 6월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또는 노-고르비 회동)에 이어, 같은 해 9월 한·소간 대사급 외교관계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또한 1990년 당시 중국은 ― 북한의 입장을 고려하여 ― 즉각적인 한·중간 외교관계 수립은 없을 것이지만, 한소-북일-북미 수교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게 된다.(하지만 중국은 북미-북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1992년 8월의 시점에서 한국과 공식수교를 맺는다)


교차승인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북한

이러한 흐름에 대해, 북한은 애초에는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0년 6월 한소정상회담이 있은 직후, 북한은 이를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항의의 뜻으로 남측과의 대화 중단을 통지한다.(6월 13일 전화통지문: "우리 내부문제를 밖으로 들고 다니며 그 누구를 개혁과 개방으로 유도해 달라느니 남북정상회담과 UN단독가입을 성사시켜달라느니 하고 청탁구걸하는 식으로 분별없이 처신하는 것은 명백히 우리들의 주체적인 통일노력과 배치되는 것.")


교차승인의 실종과 대북 압박정책의 고도화

하지만, 상황은 북한이 남한(및 소련, 미국)을 비난하는 것만으로 전혀 해결될 수 없다는 게 점차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교차승인의 다른 반쪽을 차지하는 북미관계 문제와 관련된 미국의 태도가 심각한 문제였다. 예컨대 1990년 6월 9일 미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 솔로몬은 "현 시점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의 관계개선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검사 규정에 조인하는 것"이라면서 북한 핵문제의 선차적 해결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1990년 6월 27일 그레그 대사 역시 "한국은 중소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지만 북한은 어떤 진지한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과의 관계개선 용의는 없다", "한소수교의 시기와 미북수교는 관계가 없다"고 밝힌다.

또한, 노태우 정부 역시 UN 단독가입 의사를 거듭 천명하면서 북한에 대한 압박정책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1990년 7월 당시 최호중 한국 외무장관은 "유엔가입에 관한 우리의 기본 입장은 남북한이 통일될 때까지 UN에 동시 가입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면서도, "북한이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계속 거절한다면 유엔 단독가입을 추진하겠다", "독립국가로서 우리가 북한의 입장에 관계없이 UN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애초의 '교차승인' 구상의 변질로 볼 수 있을까? 회고해 보건데, 당시 미국과 한국이 추진하던 '교차승인'이란 언제라도 대북 압박정책으로 전환될 수 있는 친화성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노태우 정부와 미국은 교차승인을 말하면서도, 실질적인 현상변화가 없는 교차승인을 추진하였고, 1980년대 후반 이래로 북한이 한반도 문제의 진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강조한 핵심적 주장들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988년 11월의 북한의 '포괄적 평화안'이나 1990년 5월의 '5·31 군축안' 등에서 제시하고 있는 미군무력(특히 핵무기)의 철수, 주한미군 철수, 남북무력 감축, 한반도 평화보장체제의 구축(북미남간 3자회담 → 남북 불가침선언 및 북미평화협정 체결) 등에 대해 남한과 미국은 이를 검토하려는 태도를 전혀 보인 바 없다.


북한, 교차승인의 실현으로 목표를 재조정

따라서 현실의 흐름은 교차승인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교차승인을 명분으로 하는 대북 압박전술이 점차 고도화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특히 미국이 진정으로 교차승인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는 징후가 계속적으로 드러나게 되자, 오히려 북한이 현실적으로 교차승인을 실현하는 틀 내에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그 중요한 사례는 북한이 전격적으로 북일 수교를 제의한 것이었다. 즉 1990년 9월 28일 북한 노동당과 일본 자민당·사회당 3당간에 채택한 <공동선언>은 '조-일 두나라 사이의 국교수립의 실현을 강력히 권고한다'는 조항이 포함됨으로써. 북일수교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현실적인 감각에서 보자면, 북일수교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곧 중국에게 한중수교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온전한 의미에서의 교차승인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대목은, 북한이 한소 정상회담에 따른 남측과의 대화중단 방침을 철회하는 한편, 남북 고위급회담을 수용하여 1991년 말에 이르러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게 된 것이었다. 즉 북한은 남북대화 철회 방침을 밝힌 뒤 그 1주일 후인 6월 20일 다시 고위급회담을 제의하였고, 9월 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이루어진다.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남북 고위급회담은 그 시작부터 남북간의 현격한 시각 차이 때문에 난항을 거듭하였다. 노태우 정부는 기존의 접근방식 즉 '남북대화의 진전을 위해서는 기존 체제의 상호인정이 선행되어야하고 이를 위해 먼저 非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의 교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이에 반해 북한은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문제를 기본으로 토의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렇지만 더욱 문제가 된 것은 남북 고위급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이를 둘러싼 주변상황은 북한에게 있어서 더욱 나쁜 쪽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협상 과정에서 남한의 강성기조는 점차 강화되었고("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남북대화의 목표는 북한의 변화, 개방·개혁을 유도하는 데 있다", 임동원 남측대변인, 1990.12.14)

그리하여 1991년 말에 이르러서는 북한의 핵사찰 수용이 남북 합의서 채택의 전제조건이 될 가능성마저도 매우 높아 보였다.


북한의 정책변화에 따른 남북관계의 변화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1991년 12월 10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여기에는 북한의 적극적인 의지가 강하게 작용된 바, 북한으로서는 핵사찰 문제와 연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합의서가 채택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성과였다. 하지만, 기본합의서가 채택될 수 있었던 기저에는, 남과 북 각각의 요구가 절충되면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성격이 잠재되어 있는데 따른 것이었다.

첫째, 기본합의서는 남과 북이 서로의 국가 존재를 사실상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남한측의 집요한 요구 사항). 이와 관련하여서는, 특히 남북기본합의서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과의 유사점들이 지적되었다. 즉 기본합의서는 남과 북의 관계가 '나라 대 나라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고 규정하면서도, 서로의 체제를 인정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동서독 기본조약에서 동서독의 관계를 대외적으로는 각자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2개의 주권국가임을 인정하면서도 민족 내부적으로는 특수한 관계임을 규정한 것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또한 북한 김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의사 표시는 명분상으로도 남한 국가의 실체를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둘째, 남북관계의 급진전에 따라, 북한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바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단, 평화협정 체결, 군축의 진전 등과 같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전망이 더 밝아진 것이다. 즉 북한으로서는 합의서 이후, 기존의 핵사찰 압력을 막아내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미국과의 직접 협상통로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를 얻어낸 것이다.(물론, 이에 비례하여 북한은 합의서 채택과정에서 기존의 주장으로부터 몇가지 눈에 띌만한 양보를 하게된다. 먼저 매번 고위급회담 때마다 강력하게 요구하던 방북인사의 석방 및 국가보안법 철폐를 거론하지 않은 점, 평화협정 체결의 주체의 하나로서 남한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징후를 보인 점 등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잠시 상황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한반도 핵문제와 관련하여서는 1991년 12월 18일 노태우대통령은 이른바 '핵부재선언'을 발표하였고, 12월 31일 남북은 '한반도비핵화에 관한 공동성명'을 합의하였다.(북한은 핵사찰 문제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듯, 1992년 1월 30일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협정에 서명한다) 또한 1992년 1월 7일 '92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발표가 이루어지고, 1월 16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방북이 이루어져 남포에 9개의 합작공장을 세우기로 북한과 합의했다고 발표한다.

그리하여 1992년 4월 12일 북한 김일성주석은 <워싱턴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북미 외교관계 수립에 대해 적극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그는 "냉전이 끝난 지금 두나라 관계 정상화는 당연한 추세"라면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평양에 미국 대사관이 들어오기를 기대한다"고 밝힌다.(어느 관측가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지도부는 핵개발과 관련된 장기간의 논쟁 끝에 핵개발 노력을 중단하기로 1991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결론을 보았다.")


미완의 교차승인 10년

하지만 이러한 북한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현실이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시점까지 온전한 의미에서의 교차승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미관계는 양국간의 중요한 몇몇 합의들, 즉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문, 1999년 북한 금창리 지하시설 방문이나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조치와 관련된 합의들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크게 나아졌다고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북일수교 협상 역시 1990년대 초반 급진전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 같더니, 1991년 5월 일본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회담을 중지시킨다. 이처럼 기본합의서가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고 교차승인이 중단되게 된 사태의 도화선은 1992년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는 그 이후 1990년대 남북관계 및 한반도의 정세를 규정하게 된다.

먼저, 앞의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천명된 북미수교에 대한 북측의 기대에 대해, 1992년 4월 15일 미 국무부는 사실상 이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즉 '북한과 미국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핵문제 해결, 남북한 관계개선, 미군 유해 송환, 테러 포기 등 지금까지 요구해온 조건 (이른바 솔로몬의 5개항)과 함께, 탄도미사일과 미사일 수출 중지, 인권상황 개선이라는 두가지 조건을 북한쪽에 추가로 제시한 것이다.
또한 이에 앞서 4월 9일 한국 법무부는 ―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투쟁본부'가 3월 11일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보낸 남북합의서의 법적 효력을 묻는 공개질의서에 대한 회신서에서 ― 기본합의서 채택까지에 이른 대북정책의 기본 취지를 스스로 부인하는 내용을 밝힌다;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합의서를 조약으로 볼 수 없으며, 조약이 아닌 한, 우리 헌법체계상 법적 효력을 부여할 근거가 없다", "따라서 남북합의서는 남북 사이에 성의있는 이행을 약속하는 공동성명 또는 신사협정의 성격"이다. 또한 "남북 UN 동시가입이 이뤄졌다고 해서 북한에 대한 국가승인의 효력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라며,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규정은 남북합의서의 효력과는 관련이 없다."

이러한 조짐으로부터 출발하여, 1992년 6월 남북 핵사찰규정 합의 무산, 10월에 들어 안기부의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 발표, 민간경제인 방북 및 대북협력사업자 지정 전면 동결, 팀스피리트훈련 재개 발표, 특히 북한 핵사찰과 관련하여, 군사시설을 포함하는 특별사찰 실시 주장 등 일련의 사태들이 1992년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터져나온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는 오랜기간 동안 침잠을 거듭하게 된다. 미국은 북한의 요구에 응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강경한 행동방침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북한은 여기에 강력하게 맞대응하는 전략을 택했다(1993년 북한의 NPT탈퇴). 특히 북한이 실제 물러서더라도, 이는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를 더욱 강화할 뿐, 미국으로부터 어떤 반대급부를 얻어낼 수 있다는 보장은 희박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북한은 단기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얻어낼 수 없다는 점을 체감하면서, 더 장기적인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미완의 논쟁 10년

남북기본합의서 vs 남북정상회담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시점과 기본합의서가 발표되었던 시점을 현재 남북정상회담을 비교해 보는 것은, 그 유사한 측면들로 인해 여러모로 흥미롭다.
첫째, 1990년 당시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은 UN 동시가입을 실현시키고 원칙적인 수준에서 교차승인을 인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였다. 또한 현재 김대중정부는 이전 김영삼 정부과는 태도를 바꿔, 이러한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여 북미-북일수교를 지지하는 입장을 세우고 있다. 게다가 노태우정부의 대북정책이 그 기반의 취약성과 여러 가지 조건의 결여로 인해 결국 대북압박정책으로 전화되었지만, 현재 김대중 정부는 전략적 일관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이 핵-미사일 포기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북미-북일수교를 지지할 의사가 분명하다는 점을 전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1991년 당시 기본합의서가 채택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데에는, 미국이 북한의 핵사찰 수용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원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북미 외교관계 수립이 갈림길에 들어섰다는 조건이 크게 작용하였다. 한편 최근에는 1999년 미국이 페리보고서를 발표하고 대북정책의 재수립을 선언했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포기 조건에 따르는 미국측의 반대급부(즉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외교관계 수립)를 분명하게는 제시하지 않음으로 인해 북미관계가 어느 방향으로 가닥이 잡힐지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셋째, 1990∼91년 몇차례에 걸친 고위급회담은 양측의 심각한 입장 차이로 인해 난항을 거듭하던 와중이었고, 따라서 그처럼 전격적으로 북한의 태도 변화와 함께 기본합의서가 채택될 것이라고는 대부분의 관측가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 정상회담 합의 발표 이전에도 대부분의 관측가들은 정상회담은 물론이거니와 고위급회담이 단시간 내에 성사될 수 있을 것이리라 기대하지 않았다.(따라서 이점은 유사한 상황에 대한 북한의 유사한 대응방식을 시사한다)


교차승인과 한반도통일

따라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한 현재의 한반도 정세는 1991∼92년 정세의 또다른 '변주곡'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남북기본합의서 이후 예상되던 정세의 전개방향이 1992년 하반기 북한과 한국-미국의 관계가 급냉각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동면상태에 빠져있다가, 최근들어 몇몇 조건들의 변화에 따라 조심스럽게 재개될 조짐을 보이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 언론의 각광을 받은 것은 남과 북의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다는 대목, 그리고 대규모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협력사업의 가시화 문제 등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필자는 이번 정상회담이 합의되고 남북간의 무언가 대화가 지속될 수 있는 동인(動因)에는 1990년대 초반 제기되었으나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교차승인 문제가 중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이래 한반도의 정세를 규정하고 있는 '비대칭성'을 해소하고자 하는 북한의 의도가 결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우리가 왜 만났는가에 대한 세계의 질문에 답을 줘야 한다")

그렇다면, 이는 또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게 된다. 즉 이번 정상회담의 잠재된 핵심쟁점이 미완의 교차승인 구도의 완수라고 한다면 한반도 통일문제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필자는 이 점에 대해 그 자체로서는 통일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즉 <남북공동선언> 2항의 통일방안 합의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번 정상회담이 '통일회담'은 결코 아니라는 점) 다만 그 진행 과정과 결과과 한반도 통일문제에 어떤 효과를 끼칠 것인가, 달리 말해 유리한 또는 불리한 조건을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완의 논쟁 10년

그렇다면, 여기에서 과거 1990년대 초반 교차승인 문제를 놓고 민중운동 진영에서 불러졌던 논쟁들을 회고해 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특히 현재의 남북관계의 국면을 1990년대 초반 국면의 '재개'라고 본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먼저, 당시 교차승인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며 무조건 반대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살펴보면, 그 논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교차승인이란 한국전쟁 이후 40년간 실존해왔던 한반도에서의 2개의 국가를 실체화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교차승인 이루어져 민족통일의 문제가 국가간 통합의 문제로 전환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통일의 형태가 바뀔 뿐, 이것이 반드시 분단의 영구적 고착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북이 상호를 국가라는 실체로서 인정함에 따라 대화를 통한 통일의 접근이 더욱 용이해 질 수 있다.
북한을 반국가단체가 아닌 동등한 국가로 인정한다는 점은 기존의 국가보안법과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남한의 민중운동에게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민중운동 내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입장은 교차승인을 분단의 '고착화'(영구화)로 해석하고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비판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교차승인이 현실화되면 한반도에서 2개의 국가가 합법화됨으로써 통일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발휘된다. 특히 '민족통일'의 문제를 '국가간 통합'의 문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한반도 문제의 국제화)
게다가 현실적으로 추진되는 교차승인 전략은 역사적인 국가간 힘관계의 변화를 반영한다. 1970년대 이래로 미국과 남한 당국자는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2개의 한국'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렇지만 북한(및 소련, 중국)의 반대하에서는 실제로 관철될 수 없었던 바, 1980년대 하반기 기존 사회주의권의 변화의 바람에 힘입어 교차승인 구도가 현실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결국 교차승인 구도의 관철 과정은 북한에 대한 일종의 압박 조처와 동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북한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유도)

따라서 당연하게도 당시 진행되는 교차승인 전략에는 한반도에서 긴장완화 또는 미국의 영향력 감소와 연관된 어떠한 실질적인 조치들도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았다.(예컨대 '외국군 철수', '핵무기 철거', 군사훈련 중단' 등을 전혀 수반하는 구상이 아니라는 점)
한소수교 (및 한중수교) 등이 실현되는 과정은 민중운동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 있는 노태우 군사파쇼정권에게 국제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해주며, 국내적으로도 민중운동의 반정권투쟁을 은폐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논쟁은 계속된다

필자가 보기에, 현재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는 남북관계의 변화 전망을 놓고 그것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면, 그 논점들은 이러한 과거의 논쟁의 사정권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한국 및 미국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대북정책의 기본적인 전략적 기조와 구제적인 방식이 1990년대 초반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통한 공고화, 북한의 개혁·개방의 유도와 경제통합, 따라서 '2국가 1체제'로의 '사실상의 통일'?), 교차승인을 거부하던 기본정신에 부합하여 현재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의 제반의 문제점들을 폭로하고 투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이는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 혹은 이를 이어받는 자유주의/보수주의 정권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점으로 연결될 것이다)

또한, 지난 10년간의 한반도에서의 힘관계의 비대칭성과 고정화된 현상의 유지(즉 북한의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교차승인의 봉쇄)가 장기화되는 것 역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 측면에서 볼 때, 교차승인을 지지하고("북미관계 개선 저지는 반민족적 노선이다"?) 이를 통해서 동서독과 같은 방식의 점진적인 방식으로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추진한다면, 장기적인 과제로서의 통일을 도모하는 것도 비로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입장도 제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와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현실주의'적인 접근에는 고유한 난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한반도에서의 통일의 '지연'시킨다는 논리는 남한에서의 변혁의 '지연'시킨다는 논리와 친화성을 갖는다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그러한 방식은 북한이 교차승인을 수용하는 틀 내에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지 않으면 곤란하도록 강제하는 한반도에서의 기존의 구조적인 관계들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애초의 교차승인 구상의 성격 자체가 대북 압박정책과 가역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미국 및 한국 정부의 헤게모니 하에서 추진되는 대북정책이란 그 구조적 권력을 강화하는 형태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한 사실의 뒷면으로서) 현존하는 지배전략을 수용하는 방식으로는 그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 투쟁의 대중적 주체를 형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교차승인이 실제화된다고 했을 때,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일부 효과들(예컨대 국가보안법이나 헌법의 영토조항의 개정, 초보적인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등)은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을 담보할 수 있는 대중적 정치역량이 부재하다면 기실 잠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현재 김대중정부의 집권 하반기 구상에서 남북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2000년 새롭게 등장할 미국 행정부는 집권 말기의 클린턴 행정부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대북정책을 구사할 가능성도 높다. 따라서 만약, 앞으로의 한반도 정세가 1990∼92년의 상황이 재개되는 형태로 전개된다면 ― 물론 이도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 이에 조응하여 당시의 논점들 역시 재연될 가능성도 커지게 될 것이다.(물론 이는 각각의 주체들이 논쟁에서 맡았던 역할들이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에 따라 김대중 정부가 경제협력이나 사회문화교류 등의 영역에서 몇몇 가시적인 성과들을 거두어낸다면, 이러한 논쟁축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국면은 앞으로 본격적인 토론을 예고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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