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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8-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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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폐업 사태와 공공의료의 필요성

최용준 | 편집위원, 민중의료연합 편집실장
문제도, 문제도 이렇게 곪아터진 것이 있을까

약사법 개정 문제를 놓고 여전히 의사와 약사, 정부의 공방은 치열하다. 의사들은 약사법 개정을 놓고 또다시 대규모 집단행동을 할 기세다. 의약분업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하였지만, 약사들로서도 돌아가는 형국이 영 찜찜하다. 언론들은 언론대로 파행의 책임을 정부에, 의사에 돌리느라 여념이 없다. 의약분업 이대로 꼭 해야 하나라는 얘기마저 흘러나오는 판국이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의 의료제도가 '개판 5분전'이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셈이다.

그렇더라도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태를 힘 닿는대로 객관화시켜 볼상치면 그저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고 메스꺼울'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의료제도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이것이 개선되거나 해결되는 쪽으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일로에 있음은, 적어도 알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다. 다만 지금까지 '소수 좌경분자들'만이 문제가 심각하고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고 그 난리들을 쳤던 것이고, 정부든 언론이든 문제를 까뒤집어 내놓을까봐 걱정이었지 별 무관심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 민중이야 크게 아플 때마다 병원에 가 뒤집어 쓰는 바가지 요금에 신물이 났겠지만, 그저 순간적 체념일 뿐 그 놈이 정말 심각한 골치덩어리임을 이내 깨닫지 못했던 것도 분명하다. 그러던 것이 주말마다 장외집회며, 의사 98%가 찬성하는 일주일간의 폐업 투쟁이며,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중앙일간지 1·2면마다 처바르는 통광고하며, 그야말로 일치단결된 의사들의 집단폐업과 병원이탈을 계기로, 문제도 문제도 이렇게 곪아터진 것이 있을까 싶게 단숨에 주목을 받은 셈이다.

의료보험도 문제고, 의료전달 체계도 문제고, 의사수도 너무 많고, 적정수가도 보장이 안되어 있고, 의약품 비리는 왜 그렇게 또 많은지…. 민중들이 아플 때 이 나라의 의료 제도에 몸을 맡겨서 치료되고 회복된 것이 오히려 신통할 정도다.


민중은 치료받고 건강할 권리가 있다구!

그 많은 문제 중에 공공의료 문제가 첫번째 의사폐업이 있고 난 후 새삼스레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공공의료 문제를 먼저 꺼내들었던 것이 다름 아닌 '정부'의 일각이라는 점이다. 이 정부가 어떤 정부인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다른 분야들은 차치하고 의료 분야만이라도 볼라치면, 이 정부는 이미 출범 전부터 공공의료기관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계획하였던 정부다.
1998년 2월 신정부의 정부조직 개편안에서 국립목포결핵병원 민간위탁 방침을 발표했다―이는 물론 결핵병원 환자들과 사회단체의 노력으로 저지되었다. '지방조직개편 추진지침'을 발표하여 지방공사의료원에 대해서는 20% 예산 감축, 수익성 평가에 따른 폐쇄 및 민간위탁 방침 결정 등을 단행하겠다고 한 정부다. 보훈병원, 원자력병원 등 특수병원에 대해서도 예산을 15~20% 감축하고 경영수지가 나쁘면 민간위탁하겠다고 한 정권이다. '국립대 병원경영 혁신안'도 초록동색이어서 의료수익 대비 인건비 상한제를 도입하여 인건비를 줄이고 총정원제를 시행하여 인력감축 정책을 추진하던 정권이다. 이 정부 들어선 후 공공의료기관인 보건소와 보건지소도 각각 1.2%, 3.8%씩 줄었다.
더 이상의 사례가 필요할까?

그러던 정부다. 그 정부의 일각에서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꼈다는 발언이 흘러나온다. 왜? 의사의 98%가 병의원 문을 닫고 병원에서 뛰쳐나오고 급기야는 교수들마저 '응급실을 떠난다'는데, 정부가 했던 것이라고는 1139 응급의료정보센터에 사람을 더 들이고 군의관 수십 명을 국립의료원에 배치하고 군 병원을 열어 군의관의 손을 바쁘게 한 것밖에 없었으니까. '국립대학교' 병원이라고? 전공의들은 물론 교수들마저 의료현장을 떠난다는데 사태가 장기화되면 정부로서도 부담이 커지는 법이다. 그 동안 세금 거둬 뭐했냐고 어느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느냐고. 한 마디로 사태에 대처할 수단과 방법이 없었다는 거다.

그래서 청와대 '삶의 질 향상 기획단'의 일각에서는 이런 얘기도 나왔다. 공공 클리닉을 3,000~4,000개 만들자. 국립대 병원, 이거 정말 '국립' 맞는거냐. 아무튼 공공의료기관을 대폭 확충해야 하는 것 아니냐. 눈물나게 반가운 일이다. 십수 년 동안 뜻있는 몇몇 학자와 사회운동 쪽에서 누차 반복하였던 그 얘기가 마침내 정부 당국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다니! '폐업 대비용'이라는 그 얄팍하기 이를 데 없는 동기가 밉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그 어떤 상황에서건 아픈 사람 치료 받고 낫는 환자 재활하고 아이들 예방 접종해야 하는 것은 의사들이 폐업하든 말든 병원이 문을 닫든 말든 이루어져야 하기에 그나마 허언(虛言)으로 그치지만 않는다면 그저 반갑기만 할 거다.

의사들에게 폐업과 집단행동의 권리가 있다면, 민중에게는 그보다 더 중한 권리가 있는 법이다. 치료 받고 건강할 권리가 있는 법이다.


장기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은 커져야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의사들의 첫번째 난리 뒤에 무성하던 정부 일각의 논의들은 빛 아래 한번 놓여지지 않고서 금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더라도 정부의 아이러니 덕분에 공공의료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강화의 계획을 현실화시킬 만한 여건은 그 전보다 나아진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장기적으로는? 현실적으로는?
사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단지 10~15%에 불과하다. 게다가 십년 전에 비해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그나마 공공의료기관은 보건소와 보건지소 등을 합친 숫자다. 이들 기관에는 병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문제다.

단기적으로는 작년에 제정된 공공의료에 관한 법률이 제대로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정부가 법대로 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권력의 속성이 아닌가. 그나마 공공의료 문제에 관한 유일한 법적 장치로서 마련된 만큼 법률의 활용 폭을 넓히고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필요할 거다. 더 나아가 의사폐업을 계기로 정부 일각에서 주워 섬겼던 공공의료에 관한 논의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낳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경영성과 어쩌고 하면서 최근 경영실적을 발표했던 지방공사의료원의 중요성부터 강조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폐업사태의 와중에서 그나마 구석구석에서 진료를 감당했던 공공의료기관 아닌가.

장기적으로는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이 훨씬 커져야 한다. 공공클리닉이나 보건소 분소 따위를 많이 지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저 동네의원 진료실에 웅크려 오는 환자 진료하고 가는 환자 붙드는 것보다는 보건소나 공공클리닉에서 활기차게 보건사업도 하고 진료도 하고 교육도 하면서 의사 노릇을 하는 것도 의료인 쪽에서도 훨씬 나을 것 같다. 새로 짓는 것이 어렵다면, 쓰러져 가는 동네의원을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인수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경영 위기에 놓였다는 중소병원에 대한 대책으로도 지방자치단체나 정부 차원의 병원 인수는 고려해봄직하다. 이번 폐업 사태에서 드러나듯 의료기관의 공공 소유 자체로 의료기관 운영의 공공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적 조건의 확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공공의료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은 의료기관의 소유 여부와는 무관하게 의료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문제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의료이용 재원의 공적 조달을 통해 의료이용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그게 바로 의료보장 제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의료보호, 의료보험 제도가 된다. 즉 앞에서 큰 골치덩어리 중 하나인 의료보장 제도를 제대로 개편하는 것이다. 본인 부담이 과중한 보험체계를 바꾸고 급여 대상에서 제외된 의료서비스를 의료보장 제도 안으로 흡수할 필요가 있다.


그 좋은 구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장기적인 방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민중의 통제와 결정권,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재원의 재분배 문제다. 이러 저러한 정책 방안은 많이 있겠다. 하얀 백지에 설계도면을 그리듯 다른 요소들을 죄다 무시하고 보건의료 시설, 보건의료 인력, 보건의료 재원, 이렇게 하나씩 그려가면서 좋은 의료체계를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것은 그 좋은 구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게다가 좋은 구상도 현실의 진행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물적 조건의 발전이 없는데 어찌 그저 상상 속에서 구상만 하란 말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더 나은 의료제도들, 그보다 못한 의료제도들, 그 모두가 실현의 동력이 따로 있었다. 영국의 NHS의 토양을 일구기 위해서 노동당과 그 내각의 보건성장관 베번(Bevan), SMA(Socialist Medical Association)과 영국 노동운동의 투쟁이 있었다. 미국의 유일한 공적의료보험 제도인 메디케어(Medicare), 메디케이드(Medicaid)의 탄생 뒤에도 1960년대 미국 노동자 민중들의 지난한 요구 투쟁이 있었다. 사회 전반의 변혁을 위한 투쟁 속에서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의료체계를 동시에 건설했던 칠레와 쿠바의 예를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다. 가까이는 우리로서도 의료보험 투쟁의 경험이 있지 않았나.

자본주의의 족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초기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건강에 대한 투자가 매우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였다는 점도, 건강과 복지가 인간 해방의 필요조건임을 시사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어떤 정책 방안에 앞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이 모든 문제를 싸안고 나갈 수 있는 노동자 민중과 그 운동의 정치적 역량과 인식의 문제다. 노동자 민중의 의료체계, 그 이론적 탐구와 실천도 물론 시급한 일이겠으나 노동자 민중과 그 운동의 인식의 심화, 그것이 없이는 그저 도루묵일 뿐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라면 그것이 제 1순위 아닐까. 의사폐업의 와중에서 의료의 사회화를 생각하더라도,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인식의 사회화라는 생각 뿐이다.

또 다시 집단행동에 나서고 있는 의사들을 보면서 노동자 민중과 사회운동가가 그저 분통만 터뜨리고 손가락만 빨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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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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