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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8-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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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종의 역사를 물려줄 수 없습니다"

최이숙 | 편집부장
-주봉희 방송사 비정규직 노조위원장님을 만나고-


방송사 그 화려한 이면

방송사를 생각하라고 한다면 흔히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팬들의 아우성을 받는 스타를 생각한다. 방송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한다면 새로이 뜨는(?) 직업인 기자나 PD가 떠오른다. 이렇듯 화려하고 안정되고 돈 많이 버는 곳으로 여겨지는 방송사 역시 비정규직이 50%를 넘는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 더군다나 파견법이 시행된지 2년을 맞이하여 발생하는 대량해고 사태의 중심에 화려한 방송사가 놓여있다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화려한 방송사의 이면에 숨겨진 굴종의 현실에 저항하며 정당한 노동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주봉희 방송사 비정규직 노조 위원장을 만나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던 대량해고

이야기는 현재의 투쟁이 시작되게 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1998년 정리해고, 명예퇴직 이후 파견근로자가 되었을 때, 우리 쪽에서 KBS가 파견법에 적용되는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KBS 쪽에선 '파견법은 우리랑 상관 없고 당신들은 파견이 아니라 도급이다'라고 이야기했지요. 이전에 근무하던 곳에서 용역회사 소속이긴 하지만 똑같은 곳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용역회사가 몇 번 바뀌기는 하였지만 고용승계는 계속 이루어졌어요. 그러다가 KBS쪽에서 지난 5월 19일 자신들도 파견법에 적용된다고 이야기하면서 고용승계가 100% 이루어지기는 힘들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계약이 만료되는 27명에 대해서 SBS, MBC, EBS 등에서의 교체근무를 제안하였고, 6월까지 KBS 소속으로 일을 하다가 다른 방송사로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방송사 쪽에서 이 약속을 어기고 5월 20일자로 7명, 5월 31일자로 20명을 해고한 겁니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파견법이 노조결성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였다. '2년이 이상 그 직장에서 파견노동자로 일한 노동자의 경우, 2년이 지난 이후 회사의 직원으로 채용할 수 있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 회사들이 파견노동자에 대한 해고를 감행한 것이 이쪽에서도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방송사 비정규직 노조의 경우 발생한 KBS 내에서 운전직에 종사하시던 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를 방문한 지난 5월 26일 노조 설립이 허가되었고, 같이 해고당하셨던 27명이 처음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색한 손짓, 처음 불러보는 노래

"5월 26일 노조 설립인가가 나고 여의도에 있는 KBS, SBS, MBC를 쭉 돌면서 노조설립 사실을 알렸어요. 이날 하루만 노조 가입자가 1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호응이 좋았어요. YTN같은 경우는 태평로에 있어서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노조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그날부로 비정규직 노동자 31명이 가입했지요."

5월 말부터 시작되었지만, 현재 조합원이 400여명에 이른다. 그 직종도 처음 중심이 되었던 운전직 뿐만 아니라, 방송사내의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촬영보조, 영상기술등의 사람들이 속속 결합하고 있는 상황이다.

방송사 비정규직 노종조합 조합원으로 참여하신 분들 중 대부분은 운동의 경험이 거의 없으셨던 분들이라고 한다.

"처음하는 사람들이니 모든 것이 다 새롭지요. 투쟁가를 몰라서 집회를 하면 두사람이 앞에 나와서 노래가사를 들고 그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사 적힌 종이를 주면, 이 노래를 불러야하는 데 저 노래를 부르고, 또 구호를 외칠 때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구호를 외치고, 머리띠도 어떻게 매는지 몰라서 제마다 다 각각이고…
그 사연을 말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러던 사람들이 집회나가서 맞아보기도 하고, 15분 동안 만들었던 천막이 10초만에 갈갈이 찢기는 일도 당해보면서, 서서히 눈을 뜨게 되고. 이제까지 남의 일이라고 느껴졌던 노동운동이 자신의 일로 다가왔지요."

예전에는 운동에는 전혀 관심 없어 하던 이들을 움직이게 한 동인은 과연 무엇일까?

"파견법의 문제점에 대해 자신들이 느끼고 인식하게 된 것이 가장 클 거에요. 실제 처음 노조를 만드는 데 가장 중심이 되었던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했던 것도 우리가 이제 싸움을 하고 방송사 내에서 노조를 만들면 하나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었죠."


180。로 변한 회사 생활, 불안해진 직장생활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현재 방송사 비정규직 비율은 무척이나 높다. 서울방송 등 신생방송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비정규직 노동자가 700-800여명에 이르고 있다. 기존 매체라고 할 수 있는 KBS의 경우 540여명, MBC의 경우는 300여명에 이른다. 물론 이들은 이전에는 모두 방송사의 기능직 및 일반직에 종사하던 정직원들이었다. 1997-98년 경제위기 동안에 기능직을 중심으로 명예퇴직 및 정리해고를 거치면서, 1998년 6월 30일 정규직에서 정리해고된 사람들이 7월 1일부로 파견직 근로자가 되어 출근을 하게 되면서 이전에도 근무하였던 직장내에서의 생활은 180。 바뀌었다.

"원래 KBS에 입사를 하게될 때는 크게 기능직과 일반직으로 나뉘게 됩니다. 기능직의 경우는 이제 운전직, 촬영보조등이 있으며 일반직의 경우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기자, PD 등이지요. 이전에는 직종별로 차이가 없었어요. 똑같은 KBS직원으로 연수도 같이 받았지요. 선후배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의 차이는 직급으로 구분됩니다.

중요한 것은 직종이 아니라, 작업장 내에서의 경력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나는 파견직이고 그 사람은 정규직이니까요. 일례로 예전에는 PD라고 할지라도 같이 고생하는 입사 동기/선후배이기 때문에 운전직에 있는 노동자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는 이로 서로간의 예의를 지켰지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촬영보조비로 같이 식사도 하고, 멀리 촬영갈 경우 같이 밤을 지새고, 함께 숙박했거든요.

운전직 노동자가 선배일 경우에는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PD에게 하듯이 깍듯했어요. 하지만 파견직으로 되면서 완전히 달라졌죠. 식사는 커녕 잠을 자는 것도 혼자 지내야 했고, 여관비조차 파견노동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요. 같이 촬영을 나갈 때에도 '이번에는 어디어디입니다. 우리 고생 좀 하겠네요'라는 말들이 '어디어디 갑시다'가 된 거에요."

예전에 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작업장에서의 노동통제도 더욱 심해졌다. 운전자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화장실을 가는 것까지 배차를 담당하는 데스크에게 보고해야 한다. 배차시간을 정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일방적으로 변하였다.

"데스크에게 잘못 찍히면 운행일정은 갑자기 빡빡해지죠. 오늘은 충남 전지역, 내일은 부산, 다음날은 완도.. 이렇게 일주일 내내 한시간도 쉼없이 운전해야만 합니다. 예전 같으면 '네가 한 번 해봐'라는 식으로 무리한 배차시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와 같이 이야기했을 경우 파견직이기 때문에 '그래, 싫으면 너 나가'라는 반응만이 올 뿐입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자를 수 있으니 얼마나 편안하겠어요."


줄어드는 임금

가장 많은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 건 역시 임금이다. 정직원이었을 때 KBS에서 받아왔던 학자금 지원, 휴가비등은 사라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혜택이 사라진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전에는 분단위로 정확하게 받던 수당까지도 지급되지 않기 일쑤이다. 뿐만 아니라 용역업체가 바뀌게 될 때마다 월급은 계속 깎여나간다.

"KBS쪽에서 업체를 선정할 때 입찰을 붙이게 되고 저비용 업체가 선정되지요. 선정된 업체도 이익을 남겨야 하니까 수당은 계속 깎이게 됩니다. KBS에서 시간외 수당을 포함하여 97만원 정도를 용역회사에 지급하지만, 실제 노동자들이 97만원 다 받는 게 아니에요. 용역회사 쪽에서 수당의 일부를 챙겨가죠. 그 변명도 궁색해요. '차가 1시간 더 굴러가면 타이어도 닳고, 차도 닳는다'구요. 차관리는 분명히 용역회사에서 담당해야 할 부분인데도 말이죠."

월급에 대해서는 옆에 계시던 총무부장님이 한말씀 더 거드신다.

"더욱 낮은 가격을 입찰하는 용역회사로 바뀌지나 않으면 다행이에요".

실제 처음 3만 5천원 하던 일요수당의 경우 2만 7천원으로 20%이상 삭감되었다.

"여기서 기가 찬 것은 용역회사의 월급내역서에요. KBS에서 받은 총액에서 떼인 돈을 제외한 74만원인데, 월급 내역서를 보면 기본급 이외에 지급하지 않은 시간외 수당 얼마, 연월차 수당 얼마식으로 수당이 다 지급된 것으로 되어 있어요. 심지어는 연월차 수당이 2번 적히기도 하죠.

심지어는 특별 휴일수당도 있어요. 특별 휴일 수당이 과연 뭐냐고 물어보았더니, 7월 17일 제헌절이나 8월 15일 광복절같은 기념일은 특별한 휴일이니까 지급하는 수당이라고 하데요. 자신들은 돈을 챙겨가지만, 내역서는 그렇지 않으니 뭐 법적으로는 별 문제가 안되죠."


가장 많은 이득자인 실제 사용자는 KBS

현재 이들 방송사 비정규직 노조 소속 직원들은 방송사 소속이 아니라, 용역회사 소속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위원장님은 실사용자는 분명히 방송사라고 또렷이 말씀하신다.

"사용자는 분명히 방송사예요. 정리해고 당하고, 용역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죠. KBS 쪽에서 너는 휴먼링크로 가라, 너는 대한통운으로 가라라는 식으로 임의적으로 배정을 해주었죠. 용역업체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었어요. 우리는 탁구공처럼 KBS 지시에 따라서 이 용역업체, 저 용역업체 소속 직원이 되고 배차 시간도 KBS에서 용역업체와의 협의없이 임의적으로 배정하였죠. 그들 주장대로 용역업체 소속의 비정규직 노동자 또는 파견근로자임에도 불구하고, 인사기록카드에 번호가 매겨져서 KBS가 인사관리를 하고 있어요.

또 파견 용역근로자를 관리하는 것도 KBS의 경우는 총무부였다는 사실 역시, 실사용자는 용역업체가 아니라 방송사란 사실을 보여주는 거 아니겠어요? 용역업체는 그냥 월급주고 수당주는 일만 하는 거에요. 심지어 7월 지방노동위원회조차도 사용자가 방송사라고 이야기했어요."

7월 초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방송사와 용역업체 모두에 노조와의 성실한 교섭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는 여전히 '자신들은 교섭대상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교섭에 나오지 않고 있다.

어디 투쟁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이, 교섭에 응하지 않는 데에만 있겠는가?
방송사 쪽에서의 탄압도 만만치 않다. 위원장님의 방송사 출입을 금지시키는가 하면, 심지어는 위원장님에 관한 유언비어마저 퍼뜨리고 있다. '해고된 위원장님이 위원장으로서의 효력을 상실하였다'거나 휴대폰이 하루동안 안터진 날은 '저사람 책임도 못지면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각 방송사별로 진행되는 탄압 역시 만만치 않다.

SBS의 경우는 방해 공작이 특히 심하다. 비정규직을 관리하는 부서가 총무부만 있는 다른 방송사와는 달리, 총무부와 인사부로 나뉘어져 있어서 다른 곳에서 관리하는 쪽끼리의 교류와 방문도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사측에서는 가입하는 순간 해고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협박하고 있다.

현대 사회 최대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인 방송사를 상대로 하는 싸움인만큼, 방송사를 상대로 하여 싸우다보니 투쟁을 사회적으로 부각되는 것도 더욱 어렵다. 실제로 방송사 비정규직 노조문제에 대해서 중앙일간지에 실린 경우는, 겨우 한겨레신문에 실린 조그마한 기사 정도가 전부이다. 언론사들끼리 단단하게 연결된 망은 언젠가 이러한 사안이 자신들의 회사가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방송사 노조의 투쟁에 대한 보도는 유난히도 인색하기만 하다.


굴종의 역사를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방송사쪽의 탄압 이외에도 초기에는 어려운 점이 정말 많았습니다. 사무실도 없어서 여의도 공원에서 한강 둔치에서 둘러앉아 회의를 하곤 하였지요. 전화도 없어서 20여만원 정도 나오던 핸드폰비도 모두 개인들이 부담했고요. 처음 하던 사람들이 집회 잡고, 이것저것 배우려고 하루 3개 4개씩 집회를 나가고....
저와 함께 KBS에서 해고되어 이 노조를 만들고자 한달동안 굳건하게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덕입니다. 물론 생활상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한달이 지난 뒤에는 헤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로 부둥켜 안으면서 '형, 꼭 승리해야 해요'라고 울었습니다. 굴종의 역사를 더 이상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정된 직장, 평생직장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느냐는 바로 우리들의 싸움에 달려있으니까요."

잠시 떨어진 동지들을 생각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안정된 직장,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망. 이는 바로 주봉희 위원장님과 같이 투쟁하고 있는 이들의 어깨 그리고 같이 하고자 하는 이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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