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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10.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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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대중운동의 분화, 그리고 전선재편

박준도 | 편집실장
대중·대중운동의 분화, 그리고 전선재편

박 준 도 | 편집실장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민중운동의 내적 변화는 필연적이다. 대선 투쟁 본부 제안{{) 사회진보연대 대선기획팀, '2002년 하반기 투쟁의 과제와 대선의 의미', [사회진보연대 2002.9]
}}에서도 밝혔듯이, 대통령선거는 지난 5년 동안 자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에 대해 민중운동이 비판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못하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이 지금 대선에서 어떤 구도아래 새롭게 자신의 권력을 재편할 것인지, 어떻게 대중을 또다시 장악하려 하고, 오늘날 대중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래서 마침내 어떻게 구조조정을 하려는지 세세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를 비판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에 앞서 우리의 과제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계급투쟁의 양상과 대중운동의 현실이 어떤지, 왜 전선 재구축이 최우선 과제인지를 따져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대중운동의 현실은 지배계급의 집요한 반격과 이에 따른 대중의 분열에 바탕하고 있다. 대중운동의 분화는 그에 따른 것이다. 1991년 계급투쟁의 패배 이후, 적과 우리를 가르는 전선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수많은 정치세력은 혁명과 개량을 가르는 수사로 이를 대체해 왔다. 그리고, 그에 따라 혁명적 정치조직·지도부와 개량적 정치조직·지도부를 구별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후자를 비난할 뿐이다. 대중의 실리적 경향과 대중운동의 우경화라는 경향을 혁명적 지도부·혁명적 정치조직으로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소아병적인 자세다. 그것은 대중들 스스로 과학적인 사고로 자신의 존재 조건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문제를 보편적인 쟁점으로 제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것이 능동적 대중 주체 형성이고, 대중운동의 혁신이다.
}} 전선의 부재는 무엇보다도 봉기적인(!) 대중 주체의 부재를 가리킨다. 1997년 IMF 경제위기는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드러냈지만 그에 걸 맞는 전선과 주체가 우리에겐 없다. 오늘 우리의 투쟁이 계속 분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전선의 부재는 대중운동의 분화-부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대중운동의 분화-부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다.

1987년 이후 계급투쟁의 전개양상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배계급의 반격은 집요했다. '3저 호황'이라는 예외적인 호조건이 사라지면서, 경제위기를 눈앞에 두자 지배계급은 3당 합당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정치적 힘을 채비하였다. 이들은 무노동 무임금을 앞세워 노동조합의 전투성(파업투쟁)과 1987년 이후 임금상승을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지속되는 경기침체 속에서 대다수 중소기업은 파산하거나, 과거에도 그랬듯 대기업에 하청 계열화된다. 그리고, 일부 설비부문(특히 섬유산업)은 해외로 옮겨지는 등 산업전반이 재편된다. 감원과 해고, 사용자의 정규 고용직 회피로 용역직과 임시직이 늘어나고, 노동자 파견,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용도 대폭 증가한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공안정국'을 앞세우며 강경하면서 선별적인 노동탄압으로 노동운동의 분열을 조장한다.{{) 전노협은 결성 전부터 주요탄압대상이었으며, 대기업연대회의는 사안에 따른 선별적인 탄압을 받았고, 업종회의는 탄압대상에서 상당히 밖에 있었다(몇몇 방송·언론·출판사 제외).
}} 회사의 파산과 자본투자의 해외 이주로 상당수 노동조합이 자연 소멸하게 되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고용불안과 선별적인 공안탄압에 따라 조합원 상당수가 이탈하게 된다.{{) 이를 가장 격렬하게 경험한 곳이 여성노조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노조의 대다수는 제조업 기반이었다. 하지만, 제조업의 절대 수가 줄어든 데다, 여성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는 전기·전자 산업과 섬유산업이 재편되면서 여성노조의 설자리가 급격하게 변하게 된 것이다. 다른 사업장보다 여성노조에서 먼저 '고용안정'을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
한편, 대기업은 하청계열화로 구조조정의 위기를 지연시키면서, 기업문화 개선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가며 노동자들을 사내질서로 흡수하고, 팀 체계를 앞세워 개별노동자들을 새로운 노동과정으로 재조직한다. 이때 대기업 노동조합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기업 노동자들 대다수를 조합원으로 확보한데다 중소업체 노동조합에 비하면 상대적인 안정성도 누린 편이므로 조직력이 크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이 같은 현상은 금융과 언론으로 대변되는 사무직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들 사이에 고용, 노동조건의 차이가 생기고, 나아가 노동조합 조직력에서도 차이가 벌어진다.

경기침체는 멈추지 않았고, 산업 재편은 계속되었다. 경력을 가진 사람도, 사무직 노동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될 비정규직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력직과 사무직에서 명퇴, 조퇴도 확산되었다. 끝내 남한 발전주의가 안겨준 유일한 혜택-종신고용 전통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는 이런 민중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이었지만 조직된 규모에 비해 결과는 너무도 초라했다. 정리해고 법제화는 2년 유예되었을 뿐이었고, 겨우 민주노총 합법화와 복수노조 인정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뿐이었다. 늘어나는 기업파산 앞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장이 설득력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로 비쳤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급격한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만들었다. 더구나 같은 해 이뤄진 정권교체는 구조조정에 민주화와 개혁이라는 모양새까지 추가하였다.{{) DJ 행정부는 당선되자마자 자금지원을 앞당기기 위해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더 잘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추가조건을 제시한다. IMF 플러스. 여기에는 정리해고제 수용, 집단 소송제 도입,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M&A) 허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이를 틈타 지배계급은 구조조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고통분담, 재벌개혁과 함께 다가온 구조조정은 전율적이었다. 결국 1998년, 총파업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노사정위원회에서 양 노총 지도자들은 정리해고 법제화에 합의하고 만다. 2001년에는 복수노조인정마저 한국노총의 노사정 합의로 5년 동안 유예된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노동조합(대중운동)이 당연히 자신의 권익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노동자, 농민, 여성: 멈추지 않는 분열과 자기파괴

혜택을 앞세운 구조조정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려 들었다. IMF 외환위기와 정권교체라는 정치 조건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기업구조조정은 사회의 공적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구조조정에 앞서 그들은 노동자는 물론 심지어 기업주까지 한몫으로 싸잡아 사회의 공적으로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구조조정에 맞선 개별기업 노동자들의 저항은 상당부분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기업과 해당사업장을 넘는 연대투쟁은 점점 더 곤란해졌다. 모든 투쟁은 IMF 이후 더욱 고립되었고, 노동자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계급으로 단결하는 노동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해고와 임시채용의 격렬한 반복은 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마저 위협했다. 이젠 누구도 평생직장을 믿지 않는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자신을 보호할 법적인 장치는 물론이거니와 조직적인 힘도 없다고 믿고 있다. 유효한 방어수단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 개개인은 기회가 있을 때 한 몫 잡아두어야 했고, 고용만 보장되면 노동조건의 후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후퇴하는 단체협약에 개별 노조는 서명하였고, 허구적인 것을 알고도 고용보장에 만족할 도리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노동조합 결성조차 어려웠고, 설사 결성했다 치더라도 사업장내로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도 별다른 성과 없이 흩어져야 했다. 심지어 정규직과 임시직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투쟁이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노동자들은 개별화되었다.

저임금 저곡가 정책에 따라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수입하고, 농가소득보존이 곤란해지고, 그리하여 농촌의 노동력이 도시로 유입되고, 이들의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시 저곡가 정책을 고수하고, 이런 식으로 농촌사회는 이미 해체될 대로 해체되고 난 뒤였다. UR 협상에서 격렬한 농민들의 저항으로 쌀만큼은 10년 동안 관세화를 유예한다는 협정을 맺긴 했지만, 농산물 완전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다.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작물이 개방된 데다가, 그나마 국제경쟁력을 갖춘답시고 진행한 정부의 농업구조조정은 농산물 가격 폭락을 거들기만 했다. 경쟁력이 있다고 소문난 몇 가지 농산물 제작에 농민들은 몰렸고, 저리의 농가보조금 대부분이 여기에 집중되었다. 이 바람에 농가의 생계구조는 개선되기는커녕 농가부채만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계속되는 농정 실패로 국민 모두가 농업문제에 대해 회의하였다. 농민을 달랜다며 쥐어진 농지규제 완화는 농민들의 농업 포기를 부채질 할 뿐이었다. 농민들이 농지 규제 완화를 계기로 수익이 좀더 좋은 생업에 나서기 때문이다. 언론조차 외면하는 농촌문제는 이제 농촌만의 문제였고, 농촌에는 휑하니 농가소득보존의 논리만 남아 농촌 사회를 둘러쌌다.

불안정한 삶으로 일상적인 생활조차 곤란해지면서 이전과 같은 방식의 가족생계는 누구에게나 불가능했다. 경제위기에 따른 정부재정위기와 교육과정의 변화(노동력 재생산 방식의 변화)로 가계 유지비는 급증했다. 아내-여성을 시작으로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생계유지 혹은 늘어난 가계유지비를 감당하기 위해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들 모두 노동시장의 성별·연령별 구조적 불평등에 따른 극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제각기 흩어진 일터, 개인과 가족의 거리는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해체했고, 급기야 구성원 모두에게 개별적 생존을 강요한다. 이제 남한사회의 근대적 가족은 역사적 사명을 다한 듯 했다. 하지만 인간·가족·사회의 재생산은 개별적으로는 불가능한데다, 이를 대신할 가족 모델이 출현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이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성은 가정 유지의 책임을 다시 짊어져야 했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열악한 노동조건에 밀려있는 가사노동·보살핌노동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성차별에 고용불안까지 겹쳐 노동조건 개선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고달픈 노동으로 가사노동·보살핌 노동은 하루하루 밀리기만 했다. 각종 가전제품과 사설 보육 서비스, 금융상품만이 대안인양 기다리고 있어 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가계 유지비는 점점 더 높아질 뿐이었고,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은 여성을 더더욱 극악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족의 생존과 개인의 생존 사이의 대립을 겪으면서, 상황을 회피하거나, 짓눌린 채 체념하고 마는 양극단의 방식을 택하게 된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여성 신체, 특정한 신체가 여성의 인격을 대신하면서,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직·간접적인 폭력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보증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적인 차원으로 제한되고, 국가권력과 남성이 저지르는 성적 비하는 개별적인 사안과 피해자의 문제로만 남았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제한된 것이고, 제한된 만큼 모든 책임이 여성 개인에게 되돌려질 뿐이었다.


대중운동의 분열, 운동노선의 분화

1987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위로부터 해체되면서, 대중운동은 1991년 5월 강경대 열사 투쟁을 끝으로 급격한 우경화(탈정치)를 겪는다. 이후, 학생대중을 위시해서 대중운동의 다수를 차지하던 노동자대중은 예외적인 몇 번을 제외하고 내내 밀리기만 했다. 노동자, 농민, 여성은 너무도 오랜 기간 분열과 자기파괴를 겪었다. 오늘날 대중 운동의 분열과 고착화는 이를 반영한다.
앞서 본 것처럼 1990년 정권의 극심한 탄압과 산업재편으로 상당수의 노동조합이 몰락하고, 노동자들이 조합을 이탈(전노협은 절반 가까이)하였다. 법·제도적 한계로 노동조합의 조직 자체가 곤란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어서 노동법 개정이 노동운동의 주 관심사가 되었을 때다. 여론은 노동운동의 격렬한 파업에 등을 돌렸고, 많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중간층의 이탈과 법·제도적 한계로 인한 노동조합 투쟁의 곤란함을 호소하던 때였다. 노동조합운동은 조합원 감소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국민의 여론을 등질지도 모르는 과격한 투쟁은 제한하려 들었고, 법·제도 개선, 대 국민 여론 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배계급의 반격과 구조조정을 정확히 살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법·제도 개선과 대 국민 여론 전의 필요에 따라 노동현장의 문제와 각종 사안에 대한 '정책대안능력'이 중요하게 대두되고, 사회 개혁 투쟁이 중요해지면서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이것이 점점 집단적으로 확산되면서,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이념(자유주의·실리주의)이 노동운동 내부로 더욱 확산된다.
과거 개발독재시기 저임금이나마 완전고용이 보장된 탓에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기업내부로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나 실업자 문제가 노동자들의 주요관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차원에서 불거진 쟁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로 인해 빈민 운동을 위시해서 지역운동과 벌이는 연계는 상층연대로만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노동운동이 지역별 영역별 연대투쟁에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노동대중의 연대의 경험은 부족하거나 일방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기대어 노동운동은 지역별 노조보다 산별노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은 노동조합을 아우르는 전체 대중운동의 지도그룹을 형성하는데 끝내 실패하고 만다. 이를 기점으로 선거투쟁이란 합법적 정치영역의 진출을 위한 투쟁으로 기억된다. 1993년 기업별 노조의 공통과제인 노동법개정을 위해 국제적 압력을 가하려 했던 ILO 공대위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사무직과 대기업 노동조합을 대표하던 업종회의와 연대회의가 전체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하던 때였다. 이렇게 결성된 전노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1기 지도부 결성의 토양이 되었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중간층에 대한 노동자의 헤게모니, 사회개혁(법-제도개선) 투쟁, 민주노총과 양립하는 진보정당 건설들을 전면에 내건다.{{) 이렇게 보면, 1기 지도부가 1996년 총파업 패배를 정당·정치세력의 부재(국회의원의 부재)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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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경제위기가 벌어지자마자 노동운동은 공세적인 방어(고용안정)를 위해 노사정의 직접 협상을 제안한다. DJ 행정부는 이를 계기로 노사정위원회를 제안하고 1998년 민주노총까지 참여한 가운데 노사정위원회가 진행된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진보정당 정치방침을 확정하고, 민주노동당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90년을 전후해서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있던 제조업 사업장이 역시 경기후퇴로 아예 문을 닫게 되어, 상당한 여성 노동력이 노동시장으로 흘러나오지만, 노동의 불안정화로 남성 노동조건의 동반 하락하게 되는 바람에 제조업에서 여성이 재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중간관리 층에 대한 수요가 확장되고 이에 따라 사무·서비스업종에 대한 일자리가 늘어난다. 이때 여성노동력에 대한 요청이 과잉되면서 여성노동력 상당수가 서비스업종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1987년 노동자 대 투쟁 당시 대기업 노동조합의 역할이 과대 평가되면서,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주변에 머물게 된다.
가족내의 생계부담의 증가에 따라 주부노동력이 급증하고, 제조업 여성노동자들의 급감과 함께 사무·서비스직 여성노동자들이 급증하면서 여성노동운동은 관심을 다변화하였다. 이때부터 사무직·서비스업의 여성노동자들의 이해가 여성노동운동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주부노동자의 사회적 진출을 보장하기 위한 모성보호와 양육서비스의 확보가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비정규직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과 이들에 대한 차별철폐를 내걸었으며, 한편에서는 주부노동력의 급증에 발맞추어 여성노동력의 활용과 그에 따른 산업조직개편의 긍정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99년 독자적인 노동조합노선을 걷게 된다.
한편, 가족에 대한 국가의 지원 없이, 모든 것이 가족 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겨진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가족법내 성불평등조항을 주된 쟁점으로 자신을 조직, 이는 거의 대부분 미국식 핵가족 모델에 조응하지 못하는 낙후된 법률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급격한 민주화바람과 함께 부분적으로나마 제도개선이 달성되면서 가족법 개정 투쟁은 일단락 된다. 하지만, 이처럼 몇 가지 성불평등 조항을 중심으로 법-제도개선 투쟁을 벌이던 여성운동의 전통은 성폭력, 성 매매 등 기존 여성운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대된다. 여성이슈와 단일 사안의 해결에만 집중하면서 더더욱 법-제도 개선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성운동은 '여성주류화정책'에 더더욱 힘을 싣게 된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벌이는 농민들의 투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농업의 다원성과 그에 따른 식량주권을 전면에 내걸고는 있지만, 내·외곽에서 몰아 치는 농가 소득보존 논리 앞에서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운동의 암중모색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처럼 대중운동 모두가 겪고 있는 노선분화와 미래의 불투명함은 곧, 대중 투쟁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어떤 정치세력도 이념과 미래를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내재된 고유한 한계로 인해 긍정적인 방식보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구조조정은 대상(특히 노동자, 농민, 여성)을 고립시켜 적의에 바탕을 둔 사회적 공론을 등에 업고 강제로 구조조정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이로 인해 저항 주체는 연대의 기회마저 빼앗기고,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대책위가 난립하는 것은 사실 이의 반영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은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 정책, 나아가 자본주의의 위기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지 못하고 되려, 국제 신용평가기관에 의해 상대적으로 노사가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비극이 재현되고 만다.


지배 정치의 위기와 2002년 대통령 선거: 연대투쟁의 확장과 전국적 투쟁거점

우리는 지난 몇년동안 수 차례에 걸쳐 지배계급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제휴세력으로서 386세대와 시민운동으로 불리는 자유주의자들을 파트너로 삼아왔음을 지적해 왔다.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정치개혁이 온갖 금융비리로 주요한 의제에 상정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햇볕정책마저 미국 정치지형의 불안정성으로 좌초하게 되자 오히려 (완전고용을 보장했던) 군부독재시절을 전후한 퇴행적인 쟁점이 대중을 선도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이들은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음을 지적해 왔다.{{) 사회진보연대 정책국, '개혁세력붕괴 이후의 한국사회', [사회진보연대 2002.7·8]
}} 사실, 이후 정국은 어떤 정치변수(비리폭로)가 집권의 향배를 결정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안개정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치집단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온갖 잡다한 정치 세력의 합종연횡과 해산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대중에 대해 완전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중에 대한 지루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히 지배계급의 위기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위기를 자초한 이유가 무엇인지(바로, DJ 정권이 정권교체를 빙자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을 배신하고 대중의 삶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저들에게 예속된 삶을 선택하도록 몰아 붙이다가 여의치 못하여 궁지에 빠져버린 것), 이들이 위기에 맞서 무엇을 조직하려는지(바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할 것 없이 민중의 피와 땀을 가로채고, 기생적인 금융생활자의 영광으로 위기를 지연시켜서 자신들만의 영속적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세력들의 한판 굿을 벌리려는 것)을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정치적 위기가 곧바로 인민대중의 정치적 기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 농민, 여성 모두 개별화된 채 존재하고 있다. 대중조직의 정치노선은 분화되고 있으며, 나아가 포괄 대중에 대한 대중조직의 정치적 헤게모니조차 상실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대중운동을 혁신하려는 기운이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과도 마주하고 있다. 공동 투쟁을 통해 대중들이 직접 연대를 실현하려는 노력에서 상설적인 공동 투쟁체를 건설하려는 노력까지, 당-노조 차원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직장과 가족을 넘어 지역과 부문을 아우르려는 노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대중운동의 한 자락을 이루고 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중의 공동 투쟁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이고, 더군다나 2002년 대통령 선거 이후 새로운 지배권력이 들어섰을 때 전체 민중운동 진영이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연합적인 질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노동자, 농민, 여성이 바로 이런 연합적인 질서를 만드는데 있어 자신에게 주어진 정치적 조건을 바꾸고, 자신의 문제를 보편적인 쟁점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공동투쟁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부도덕한 정권을 대신하여 들어설 반동적 정권에 맞설 수 있는 전국적 투쟁 거점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이 속에서 대중운동 혁신의 거점을 확보하고, 대중운동 혁신의 흐름이 서로 실천적으로 연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곧,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의 과제는 전선의 복구와 투쟁-저항주체의 형성과 이들의 연대를 통한 대중 투쟁체 건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선 시기를 관통하는 공동의 투쟁대오를 강조하며, (진보정당으로) 제한되지 않는 대중의 정치적 투쟁체, 대중의 선거 투쟁체 건설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추를 넘어 내년도 공동투쟁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고자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 경선과 민중운동진영의 공동투쟁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중운동 지도부 교체가 대중운동의 혁신을 대신할 노릇이 못되듯, 민중운동 좌파진영의 우선 결집 혹은 입지변화가 민중운동의 혁신과 질서재편을 대신할 노릇이 못된다. 민중운동의 혁신은 노동자, 농민, 여성 대중투쟁주체의 형성을 뜻하는 것이며, 실천적인 연대를 꾀하면서 대중운동의 혁신을 주도하는 것이다. 대중운동을 좌익적으로 강화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결집은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될 뿐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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