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11.30호
첨부파일
0211시선-김원정.hwp

여성인권에 대한 전면적인 방어가 필요하다. - '성폭력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를 다녀와서

김원정 | 기자, 민주노총 서울본부
들어가며

지난 10월 22일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성폭력가해자 역고소 대책회의, 성폭력 추방운동에 대한 명예훼손 역고소 공동대책위원회 3단체가 공동 주최한 [성폭력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가 열렸다.
필자는 얼마 전 이러한 주제의 토론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일정을 제치고서라도 꼭 참석하겠노라 다짐했었다. 노동조합 여성간부의 위치에서 단위사업장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라는 도발행위에 분노를 금치 못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KBS노조 전 부위원장 사건과 롯데호텔 성희롱 사건이 그러하였고, 얼마 전 죽암휴게소 50대 아주머니 피해자가 명예훼손으로 구속된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늘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 한탄하지만 여성, 특히 성폭력 피해자에겐 법이 또다른 가해의 무기가 되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했었다.
이날 토론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분위기도 비슷하였다. 2차 3차 가해를 당하는 성폭력 피해자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피의자'가 되어야 했던 여성활동가들의 뼈저린 아픔이 이날 토론회장을 가득 메우는 듯 했다.


토론회가 준비된 배경

토론회의 취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첫 순서였던 성차별판결모니터링모임 회원 장임다혜의 사례발표만 보아도 2001년 한해 15건의 성폭력 가해자 역고소 사건이 있었고 가해자의 대응이 뚜렷한 경향성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여성운동 단위는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서서 명예훼손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 외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런 것이 몇가지로 유형화된 사례만 보더라도 가해자의 역고소는 피해자의 법적 대응에 맞서 가해혐의를 부인해보려는 소극적인 수준을 넘어 피해자와 단체 활동가들을 협박하고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되어 있었다.
특히 장임다혜가 검토한 15개 사례 중 제주도 우지사 사건, KBS노조 전부위원장 사건을 포함한 13개 사건이 여성단체를 대상으로 한 고소와 병행되었다는 점은 가해자들의 역고소가 그동안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고 전사회적 해결을 촉구했던 여성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의 성격이 짙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현재까지 그러한 가해자의 역고소를 제어할 법·제도적 장치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며, 이는 성폭력 범죄 해결의 형사절차상 피해자(주로 여성)가 2차 피해자화 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토론회에서는 각각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다소 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성폭력 범죄의 형사절차로부터 어떻게 피해자를 보호할 것인가?

먼저 [형사절차 속에서 불신되는 성폭력범죄 피해 고소 여성 - 그 현실과 입법론적 대책]을 발제한 서울대 법과대학 조국 교수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편견이 만연한 사회에서 일반적인 형사절차가 성폭력범죄 피해자를 제2차 피해자화 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법적 대안으로 성폭력특별법 중 피해자 관련 조항의 실효성을 강화하고 보완하는 것,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강간방지법'과 같이 피해자가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제안하였다.
[명예훼손 사건에서 성폭력 사실의 판단기준]이란 주제로 발제한 이정희 변호사는 명예훼손 사건에서 오히려 피의자가 되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입증책임,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일반적인 형사절차에 근거하면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였다. 성폭력 피해자는 통상의 범죄피해자와 달리 범죄 발생시 극렬히 저항한다던가 즉시 신고한다던가 또는 구체적이고 정확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던가 하는 경험칙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받기 어렵고 결국 피해자의 '증거부족', '진술의 일관성 없음'을 이유로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피해 이후 반응과 정신상태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피해자들의 유형을 정립하고, 또한 일반범죄와 달리 소위 바람직한 유형의 남성이라도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음을 수사·사법기관이 염두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법과대학 박선영 교수는 [법여성학적 관점에서 본 명예훼손]이라는 긴 논문을 발제하였다. 형법 310조 명예훼손의 위법성 조각사유{{) 일정한 사유가 있으면 위법하지 않게 되고, 그것이 없으면 위법한 것이 되는 사유이다. 위법성 조각사유로서 형법은 ①정당행위 ②정당방위 ③긴급피난 ④자구행위 ⑤피해자의 승낙 ⑥진실을 발표할 권리 등을 규정하였다. (형법 20~24, 301조)
}}인 진실성, 공익성, 상당성이 법여성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발제하며 그동안 문제되었던 가해자 명예훼손 사건의 위법성 조각사유를 논증하였다. 특히 '공익성'에 대해 법원이 국가, 사회전체의 이익뿐 아니라 소공동체나 특정사회집단 구성원의 관심과 이익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판결을 내린 바(2002. 1) 도지사, 노조간부 등 특정집단 구성원의 성폭력 사건을 폭로한 것도 위법성 조각사유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성폭력 가해자 서울대생의 제명처분무효확인소송에 대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처럼 가해자(특히 공인)의 명예훼손을 부당제소로 규정하는 법원의 적극적인 판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 발제를 한 이화여대 여성학과 조순경 교수는 제목인 '성폭력 피해사실 공개의 공익적 의미'보다 성폭력 관련 법 체계와 법 집행에서의 적극적 조치를 제안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조순경 교수는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 가해자 문귀동의 명예훼손 역고소 이후 지금까지 성폭력 피해자들과 그들의 지원자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성폭력 피해사실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가해자들의 반격은 역고소 바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흐름은 우리 법체계·집행과정의 남성중심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말로 글을 열였다. 또한 남성중심·가해자중심의 법체계·집행을 수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 (1)성폭력 가해자, 피의자의 명예훼손 소송 금지 (2)합리적 피해자, 여성의 기준 적용 (3)명예훼손 사건의 피의자인 성폭력 피해자가 증거로 피해사실을 입증하고, 진실성과 공익성을 피력해야 하는 상황을 뒤바꾸기 위해 입증책임 당사자를 바꾸는 것 (4)고용주나 기관, 조직의 장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를 통해 더 이상 피해자가 스스로 2, 3차 피해를 감수하면서 사건을 해결해야할 위치에 서지 않도록 근본적인 예방 및 근절 대책을 마련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명예훼손 사건의 입증책임을 바꿔야 한다'는 조순경 교수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앞서 제기된 우리나라 법 체계·집행상 성폭력 피해자에게 불이익한 부분을 어떻게 수정, 보완할 것인가에 토론이 집중되었다. 성폭력 특별법 개정과 실효성 제고, 英美 강간방지법의 주요내용 도입, 합리적 여성(피해자)의 경험칙{{) 원어는 경험법칙. 일반인의 경험과 교양에 속하는 것도 있으나 특별한 학술·기술·직업을 가진 전문인의 경험과 교양에 속하는 것도 있다. 경험법칙은 당사자의 주장을 이해하거나 증거로부터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필요하다. 법관(法官)은 일상적 경험법칙에 관하여는 자신의 지식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으나, 특별한 경험법칙에 대하여는 감정(鑑定)을 통한 증명이 필요하다. 경험법칙의 존재는 법관의 직권조사 사항이지만 그것이 고려되지 않을 때에는 그로 인하여 이익을 받을 당사자가 그 존재를 주장·증명할 필요가 있다. 재판(裁判)에서 경험법칙의 적용을 그르친 경우에 상고사유(上告事由)가 되는지에 대하여는 견해의 대립이 있다.
}} 일반화 등 몇가지 유의미한 법제도적 대안이 제안되고 그 실효성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피해자들과 그 지원자들이 그동안 느껴온 '답답함'을 해소하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참석한 법률전문가들의 몇가지 수정보완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성폭력 범죄의 심각성과 불평등한 성문화를 현실로 전제하고 여성-피해자의 입장에서 법에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이상 개선의 폭은 협소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역고소 바람은 남성중심적이며 가해자에게 온정적인 우리나라 법체계와 집행의 심각한 문제점, 소위 '법 앞에 불평등한 여성의 현실'을 너무나 가혹하게 보여주었지만, '현행 법률을 수정하는 것'과 '적극적 조치를 도입하는 것'이 마치 '현실'과 '이상'의 문제로 치환되었던 토론회의 분위기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토론회만의 문제이겠는가?

불과 몇몇의 사례로 대변될지언정 가부장적 법체계의 울타리 안에서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가 특정한 사회적 현상으로 굳어져 가는 상황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답답한 현실이다. 때문에 우리가 당장에라도 해답을 내놓아야 하는 부분은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 '이후'의 대응문제 뿐 아니라 피해자가 단 한사람이라도 더 이상 '피의자'가 되는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지금, 이와 같은 일련의 '바람'이 형성되고 있는가를 진단하고, 수십년간 여성들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이루어놓은 성과를 부정하려는 가부장적 권력의 발호를 제어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일테다.


여성인권에 대한 전면적인 방어가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앞서,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여성인권의 현실을 생각해보자.
김대중 정권은 지난 민주화 운동의 적자를 자임하며 수권에 성공하였고, 여성문제에 대해 역대 어느 정권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여성부를 신설하고 헌정사상 첫 여성총리 임명했을 뿐 아니라 성차별과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주도적으로 형성하는데도 일정하게 기여했다. 그러한 조치들은 일반 국민들이 상상하기 어려웠던 획기적 변화임에 분명하며, 또한 우리나라 여성운동이 지난 수십년간 꾸준히 일구어놓은 성과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여성들의 인권은 신장되고 또한 사회적 분위기가 쇄신되었을까?
여기서 굳이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여성노동의 주변화와 빈곤의 여성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그만큼 여성이 폭력과 성적 착취(성매매, 성폭력)에 노출될 위험도 높아져 왔다.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이며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수 있을지언정 쉽게 중단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위계층으로 갈수록 여성노동자·대중의 인권은 무시당하고 있으며, 이런 현실이라면 여성문제에 대한 정책, 제도의 개선과 홍보, 여론 형성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 전국민적 각성과 합의를 이끌어내기엔 역부족인 것이다.

이러한 '정책'과 '현실'의 괴리가 소위 가해자 역고소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가해자들의 대응은 그가 지식인이건 그렇지 않건, 사회적 지위가 높건 낮건, 공직자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피해자뿐 아니라 그녀를 지원하는 여성단체에 대한 공격의 양상을 띄고 있다. 최근의 경향이 지난 여성운동의 성과가 여성노동자·대중의 생활에서부터 하나하나 무너져 나가는 현실을 틈타 여성운동 세력을 고립시키는 가부장적 지배세력의 전략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반동적인 흐름에 대한 전면적인 방어가 필요하다. 아니, 방어수준에 그치지 않는 역전의 시도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아래로부터 반여성적인 공세에 대한 광범위한 전선을 그어 성폭력 가해자와 잠재적 가해자 집단이 감히 그런 도발을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사회적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한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의 여성주의적 관점을 기대하는 것도 그러한 싸움의 과정이 없다면 말 그대로 '기대'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마치며

여기까지 필자의 생각이 미치다보니 내가 몸담고 있는 노동조합은 왜 성폭력 가해자 역고소 대책회의 활동을 하고 있지 않으며, 왜 더 많은 소위 진보적 조직들이 이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나라 성폭력 범죄의 현실에서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는 여성인권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이며 또한 여성운동의 역사를 뒤엎는 것임을 정확히 인식한다면 이 문제에 대하여 여성운동·성폭력 근절운동 단위로 한정되지 않는 광범위한 연대 전선을 구성할 필요성이 절박하다.
마지막으로 성폭력가해자 역고소 대책회의, 성폭력 추방운동에 대한 명예훼손 역고소 공동대책위원회의 활동이 보다 강화될 수 있도록 많은 진보적인 사회단체의 참여를 호소하며 이 글을 마친다. PSSP
주제어
여성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