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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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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 위기 격화 시대에 있어서 일본의 대동아시아 군사 전개와 조일평화선언

야마우치 게이따 | 동경대학 대학원 석사
(*편집자 주; 아래에서 조선은 북한을 말합니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교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고문은 한글로 보내주셨습니다. 다소 어색한 표현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작년 7월 G8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세계 동시불황 저지'였다. 물론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었으며 항의행동을 하던 한 이탈리아 청년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두 달 후 9.11이 일어났고 그것을 빌미로 이 세계는 새로운 침략전쟁 시대에 돌입했다. 미,일에서 주가가 폭락하고 있음에도 왠지 '경제위기'는 조심스럽게 이야기가 될 뿐이다. 올해 G8 정상회담에서 '세계 동시불황 저지'는 의제도 되지 않았다. 왜? 세계 동시공황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정형화된 침략전쟁의 세계 전개라는 대책을 벌써 발동했다. 정상회담에 모인 제국주의 대표자들은 이제 '저지' 논의는 필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제국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격화되고 전체적 군사화가 급 전개되어 가는 세계에 살아 있다.
이러한 시대에 고이즈미가 방조(訪朝)하고 국교 정상화 협상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의 동아시아 전략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조일 수뇌회담을 중심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의 관련 속에서 생각하고자 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전략 기본 축은 미일안보조약이다. 그리고 미일, 한미 각각의 동맹을 매개한 한, 미, 일 군사동맹화가 추진 되고 있다. 그 진전 방향은 신(新)가이드라인에 따른 일본 자위대의 해외파병 추진과 한일 사이의 군사적인 접근으로 일관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을 위해 오키나와와 한국의 미군기지 재편 강화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
흔히 부시 정권 등장으로 미국 군사전략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2000년 7월 세계화와 IT를 의제로 삼은 G8 정상회담 개최국은 일본이었는데 일부러 미군기지들이 집중하는 오키나와에서 개최되었다. 2만2천여 경찰관들을 동원하고 자위대에게 사상 처음으로 경계활동이 명령되었다. 세계화의 군사화가 미일안보의 요충지에서 선언된 것이다.
2000년 10월에는 미 국가전략연구소가 "미국과 일본 - 성숙한 파트너 쉽으로의 전진"이라는 특별보고(소위 "아미테지 리포트")를 발표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에서 전문가들을 모은 '초당파' 그룹의 대일 전략연구이다. 이 그룹 중심 인물은 현재 미국무부장관인 아미테지이다. 여기서는 신 가이드라인은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에 불과하다며 미-영 동맹과 같은 강고한 군사동맹으로 미일관계를 강화시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 가이드라인이 아직 완성되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단계가 미국에서부터 명시적으로 요구되었다. 또 "오래 존재하는 잠재적 위협과 아울러서 국제적 테러리즘과 국경을 넘는 범죄활동과 같은 생겨나 가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군사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선거에 부시가 당선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전략이 '초당파'적으로 제출되었다. 미국 지배층은 양 대통령 후보에게 이러한 임무를 주고 그것을 수행하기에 보다 알맞은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혔음에 불과하다.
미국의 세력권인 중남미에서는 '마약 박멸'을 구실로 삼은 반(半)전쟁상태가 계속되어 왔다. 이미 2000년 이후 '플랜 콜롬비아'라는 대(對)게릴라 전쟁이 미, 일, 유럽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기본 방향 속에서 2001년에 들어와서 부시는 잇달아 군사전략 '재검토'와 그 공식화를 실행했다. 미사일 방위 추진, 대(對)조선 정책 수정, 양정면(兩正面)전략 수정, '사용가능한 핵무기'정책으로 전환 등이다. 조선정책은 미국이 94년 제네바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상병력 삭감 등 새로운 무리한 난제를 들이대었다. 양정면전략 수정에서는 테러와 같은 '새로운 위협'이나 '기습공격'에 군사 대응한다 하면서 아시아지역 중시와 해, 공군 강화를 내걸었다. 같은 시기 일본의 헌법 개악마저 언급한 랜드연구소 '제언'("미국과 아시아 - 새로운 미전략과 군사태세를 향하여")은 공군의 위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문가인 가릴자드(국가안전보장회의 상급부장)가 꾸몄다. 그것은 주로 대(對)중국전략을 다르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 있다. "지역 패권국의 대두를 저지한다. 아시아의 어떤 잠재적 패권국도 아시아에 있어 미국의 역할을 무너뜨리려고 하며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또 미국은 미국과 동맹국만이 아니라 이 지역의 많은 나라들에 대한 도전에 대처할 일시적 연합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나라들과 유연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이미 각본은 완성되었다. 남은 것은 9.11을 기다릴 뿐이었다.
9.11 이후 미국은 '반테러'를 구실로 삼아 새로운 군사전략을 세계규모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부시가 '십자군'을 상기시켰듯이 그 본질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회복운동에 다름 아니다. 국가주권을 완전히 부정하고 군사력으로 괴뢰정권을 세운다. 전반적 위기 속에서 세계화의 광폭화가 임계에 이르러 폭발한 것이다. 그 이전과의 차이란 보다 공공연하고 노골적으로 진행된다는 것밖에는 없다.
그 후 전개는 알다시피 필리핀에 미군 참전, 대량파괴무기 보유 국가 타도, '악의 축' 타도, 핵 선제공격의 공식전략화, 그리고 UN 사찰조차 방해하면서 이라크 침략전쟁까지 이르고 있다. 게다가 예멘 유조선 폭발(*편집자주; 예멘해역에서 발생한 프랑스 유조선 폭발사건)이나 발리 섬 폭탄 테러 등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반테러'전선 결속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로써 ASEAN은 '반테러'전선에 뭉치게 되며 미군이 접근하기가 편리해졌다. 전쟁을 위해서면 같은 백인이라도 미군은 호주인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과연 심상찮다. 그러나 제멋대로의 제국주의이면 별로 신기하지 않다. 이상한 것은 제국주의 그 자체인 것이다.

미일관계의 위상 변화

아미테지 리포트가 요구하는 대로 미일관계를 미-영 군사동맹과 같은 수준으로 올린다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해야만 한다. 종래 일본 정부는 "국제법 상 집단적 자위권은 보유하되 일본 헌법에 따라 행사할 수는 없다" 하는 입장이다. 원래 기만적인 입장이지만 2001년에는 미사일 방위 등을 둘러싸고 "헌법의 틀 안에서" 집단적 자위권 논의가 국회에서 진행되었다. 헌법은 개별적이든 집단적이든 간에 자위권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헌법을 개악하고 미일관계를 미-영 수준의 군사동맹으로 격상시키고 싶은 미일 지배층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
다른 한편 아미테지 리포트는 미국이 제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일정 정도 일본 정부의 외교적 독자성을 용인하고 있다. 물론 리포트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동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로써 일본 정부가 미국과의 협조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일정한 독자성을 발휘하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해졌다. 원래 일본 정부로서는 크게는 미군 협력을 통해서 해외 파병을 기성사실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자성을 추구하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일본 정부가 환영하는 바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신 가이드라인 체제 완성에서부터 집단적 자위권 행사, 헌법 개악으로 가는 길로 바로 자주적으로 매진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의 제2단계, 즉 이권 쟁탈전의 외교 전장인 아프간 부흥지원회의에서 일본 정부는 미국과 함께 공동 의장국이 되었다. NY에 이어 동경에서 공황으로 썩은 엔을 내세우고 제국주의 외교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전후 처음의 자위대 해외 전시(戰時) 파병도 중대하지만 그것이 일정한 정치대국화와 동시에 추진되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동아시아에서 정치 군사적 전개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미국의 전략 협조를 통해서만 정치 군사적 전개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그것은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을 사죄 배상하지 않고 미일안보 틀 안에서 경제 발전해 온 일본의 특수성에 기인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 분야에서 독자성을 발휘해 왔을 뿐이었다. 그것도 NAFTA와 같은 지역간 협정이 아니라 MAI와 같은 다자간 협정을 가능한 한 추구하는 것이었다. 98년 12월 일본 통상산업성이 양자간 다자간 병행 전략을 내건 후에야 한일투자협정 협상이 시작되었다. 또 올해 10월에 들어와서야 외무성이 동아시아를 우선하는 FTA 중시 전략을 발표했다.
99년 3월 '불심선(不審船)'에 대한 자위대 추격은 전후 처음의 '전투'였다. 이것은 신 가이드라인에 관련하는 주변사태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조작 사건이었다. 법안 반대를 위해 동경에 5만명 집회가 열렸지만 사건 충격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래도 이 때까지는 그 노리는 바는 어디까지나 신 가이드라인 실현을 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미테지 리포트가 나온 후 일본의 정치 군사적 전개는 보다 적극적이고 독자적으로 변화해 간다.
2001년 4월 수상이 된 고이즈미는 수상 소신(所信) 표명으로는 47년 만에 개헌 추진을 밝히고 국회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논의했다. 미국이 아프간 침략전쟁에 돌입하자 곧바로 테러특별법을 제정하여 자위대를 인도양으로 파병했다. 일본이 공격당하지 않았음에도 해외 파병을 한 것이다. 이야말로 집단적 자위권 행사 그 자체이다. 현재 자위대가 수행하는 보급이나 정보 제공은 국제적으로는 모두 군사 작전이며 헌법 위반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집단적 자위권 문제는 침략전쟁 참전이라는 형태로 순식간에 실질적인 끝장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독자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일본 정부는 작년 12월 '불심선' 사건을 최대한 이용했다. 전후 처음으로 일본 관헌이 전투에서 외국인을 죽이고 배를 격침했다. 그 현장은 아마미 제도에서 390km나 떨어진 공해이며 중국 측의 배타적 경제수역이었다. 일본은 명실상부한 살인국가가 되어 버렸다! 이 사건은 9월에 배가 회수될 때까지 일본 인민의 '국방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단속적으로 이용당해 왔다. 그 동시에 연안 경비군이 된 해상보안청의 행동 범위를 넓히고 장비를 강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또 이 사건을 이용해 일본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중국 정부는 감시선을 보내고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올해 5월 국제반공NGO가 조직한 탈북자들의 일본 총영사관 돌입 사건 때도 일본 언론은 국가주권 침해라든가 해서 반 중국 캠페인을 벌이려고 했지만 중국의 강한 자세 앞에 좌절해서 파쇼적으로 정치 불신을 부채질하기 위한 외무성 비난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중일 양 정부는 망명자 취급에 대해서는 엄중 경비로 응하기로 이전부터 합의하고 있었으며 과도한 중국 비판은 일본 정부에게도 위험했다. 일본 정부는 대(對)중국 ODA(*편집자주; Official Development Aid; 정부 개발 원조)를 삭감할 정도이며 정치적으로는 공세적이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 중국과 ASEAN의 FTA 합의에 초조해하며 한일 제휴에 기반하면서 동남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올해 3월 일본 정부는 동티모르에 PKO 부대를 파견했다. 그 인원은 690명. 이 대파견으로써 일본의 PKO 파견 인원은 미, 영을 앞지르고 세계 51번째에서 한숨에 16번째로 부상했다. 이것은 27번째인 한국보다 많다. 이번 동티모르 파병은 무기 사용 요건이 대폭 완화되는 속에서 감행되었다. 여기서 자위대는 새로운 침략전쟁 시대에 있어서 군정 모델을 연습하고 있다. 사령부에도 10명 파견하고 있다. 그리고 사상 처음으로 한국군 부대와 공동 연습을 했다. 그것은 시설 작업을 하는 자위대를 한국군 보병 부대가 방어하는 것이었지만 한일에서 멀리 떨어진 남반구에서 민족적 반발에 거리낌 없이 '한일 자본가들의 용병'들은 '공동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파병이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 침략에 대한 동티모르 주민들의 분노를 전혀 무시한 채 수행되고 있다. 현지에서는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자위대와 경제 지원을 앞세우고 국교를 수립했다. 고이즈미는 자위대를 열병했다. 군대와 돈으로 인구가 불과 70만여 독립국의 사죄 요구를 압살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일본이라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재침략은 이제껏 해 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은 기성사실화를 바탕으로 나카타니 방위청 장관(당시)은 올해 8월 동티모르를 방문했을 때 자위대 PKO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중시 방침을 표명하며 무기 사용 요건 철폐, PKF 참여를 요구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사령부 요원 등 보다 높은 지위를 UN에게 요구할 것을 밝혔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UN 틀을 이용하면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자위대를 파병한다. 10년 전에 PKO협력법이 통과되었을 때 일본 정부가 꾀한 과제가 현실화되고 있다. 군사적 전개의 독자성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신생 동티모르의 독립 정신이 이중삼중으로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자성 발휘는 아미테지 리포트가 튼 정치적 계기가 되면서도 그 잠재적 충동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일본 자본주의에 내재하고 있다. 제국주의들 사이의 협조란 어떤 조건 하에서는 한정적으로 가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불균등발전의 모순들이 전반적 위기 격화 속에서 급격히 조성되고 있으며 걸음 흐트러짐이 여러 장면에서 분출해 가고 있다. 조일 수뇌회담을 둘러싼 움직임에도 한, 미, 일의 협조와 모순들이 드러났다.

조일평양선언 - 일본 정부의 노림

이번 수뇌회담이 처음에 조선 측에서 제기된 것은 작년 1월이며 약 1년 전부터 수면 하 접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에게 한, 미, 일 중에서 가장 우선 순위가 낮고 게다가 역사적인 조선 적시가 뿌리깊은 일본과의 수뇌회담을 조선 측이 제기한 것은 분명히 국제정세 속에서 강제 당한 선택이었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미국에서 새 정권이 발족하면 강압적 정책이 시동할 것은 뻔했다. 올해 말 한국 대선 결과에 의하면 김대중 정권과의 사이에서 추진해 온 남북교류 전략이 좌절할 가능성이 있으며 2003년에는 KEDO 기한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한 정세에서 6.15 남북공동선언의 방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미 대화는 쉽지 않기 때문에 먼저 조일 대화를 택했던 것이다. 그밖에 57년 동안이나 식민지 문제를 사죄하지 않는 적대적인 일본과 대화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9.11 이후 세계정세를 보면 감히 대화 재개를 선택한 정치적 판단이 전적으로 옳았음은 분명하다. 한반도 6500만 인민을 전쟁위기에서 살려내기 위해 공동선언을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국주의 포위망으로 인해 강제당한 것이 조일회담이었다.
따라서 조일회담은 철저한 몽둥이 외교로서 추진되었다. 회담에서는 식민지 문제와 '납치' 사건이 정치적 교환물로 이용되었다. 평양선언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배상이 아니라 경제협력 방식을 명기했다. 게다가 미일 협조로 핵 미사일 문제까지 다루었다. 한, 미, 일이 공동으로 몽둥이 외교를 추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일본에서의 조일연대 운동은 진지한 대화를 일본 정부에게 강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수뇌회담이 열리는 배경 분석이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걸음의 흐트러짐도 드러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납치' 문제로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으며 중, 러를 포함한 6자 회담을 기도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파쇼적 분위기를 조성하기를 노리고 있다. 미국은 6자 회담을 반대하고 핵 미사일 문제로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 새로운 '핵 의혹' 역시 미국이 주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왜곡해서 꺼낸 것이고 제네바 합의 백지화를 계속 획책해 온 미국이면 당연한 전술이다. 한국 정부는 대화 노선 그 자체는 환영하고 있지만 그것은 남북 경제교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자본의 동포 침략을 가속시키기 위해서이다. 그 때문에 특구(特區) 구상에는 관심이 높지만 미일이 꺼내는 여러 가지 '전제 조건'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조선은 사회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경주했다. 평양선언은 경제 재건을 위한 원조자금을 획득하기 위해 마지못해 경제협력 방식을 인정했지만 식민지 지배의 사죄도 인정시켰다. 이것은 65년 한일기본조약에는 없는 내용이다. 또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납치'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불정상(不正常)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납치' 사건을 역사적 맥락에서 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36년이나 이른 가장 중대한 '불정상적인 관계'인 식민지지배 때문에 얼마나 비참한 과거가 있었는지 정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가 아니라도 같은 '불정상적인 관계' 시절에 납치당한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심정일까?
일본 정부의 노림은 이 사건 충격을 이용해서 파병 국가에 필수적인 유사법제(有事法制)를 제정하고 헌법 개악까지 내달리기다. 벌써 정부는 "국교 정상화와 정상화 협상은 다르다"고 밝혔다. 즉 협상을 공식적인 압력 경로로 확보하면서 국교 정상화라는 결과를 당면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과 같은 경제침략은 선행시키고 '납치' 사건을 이용한 제국주의적 국내재편을 강행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로 "북조선을 바꾸기"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 언론에서는 "이번 협상은 그리 쉽게 좌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으며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협상'이란 모순들이 착종하면서도 협조하는 한, 미, 일 제국주의에 의한 몽둥이 외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 인민으로서 선린우호가 아니라 몽둥이 외교로서 조일회담을 강제해 버린 대가는 또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을 자각해야 한다. 정부는 '납치' 불심선 문제를 앞세우고 유사법제를 강행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인권을 제한하며 드디어 헌법 개악이 구체적인 일정에 올라올 것이다. "타 국민을 억압하는 국민은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 정부에 대해서 성실한 조일 협상을 요구하는 것과 유사법제를 반대하고 자신들의 평화와 인권을 지키는 것은 이제 일본 인민에게 더욱 표리일체의 과제가 되고 있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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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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