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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2.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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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나]귀환의 방식

강영규 | 회원

연말 언제쯤인가 한번 큰 눈이 내렸다. 마침 주말이라 아침나절 근처 야트막한 산에 올랐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들이 산길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서넛이 동행했는지 우왕좌왕하는 것과 홀로 오롯이 남은 것, 산 중턱에서 끊긴 것과 멀리까지 이어지는 것, 깊이 꾹 밟아 다져 놓은 것과 사뿐사뿐 눈 위를 스쳐간 것까지 같은 사람이 없듯 발자국도 저마다 천차만별이었다.
문득 길을 걷는 것이 결국 누군가의 흔적을 좇아가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 또한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같은 길을 가고 있지만 먼저 거쳐간 자의 그 때와 내 두 다리가 움직이는 지금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시간의 간극을 두고 떨어져 있다. 난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이곳을 지나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보면 나의 현재는 그가 남긴 과거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의 발자국을 되짚어 가거나 또는 피해 가거나 나는 그의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그의 발자국을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내 뒤에 올 또 다른 누군가는 선행자의 어떤 범주에 나를 집어넣을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 김영현의 새 소설『폭설』을 꺼내 읽었다. 우리는 그를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실천문학사, 1989) 의 작가로 기억한다. 그가 보여줬던 치열한 사회의식과 동시대인을 향한 애정, 역사에 대한 낙관과 신념의 옹호는 많은 이들에게 어려운 시대를 넘어가는 동반자가 되었으리라. 뒤늦게 그의 작품을 접했던 나는 그의 소설에서 내 선배들의 얼굴을 읽었고, 그 전 세대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배를 깔고 누워 읽다가도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었던 그 때의 기억은 조금 열적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것 또한 되돌릴 수 없는 하나의 풍경이다.
『폭설』은 70년대 말 대학에서 공장으로, 감옥으로, 군대로 떠났던 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박형섭이 병역을 마치고 귀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그가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사회 현실과 자신의 궤적을 반추하는 독백이다.
이 정도 소개로는 90년대 초반에 쏟아져 나온 이른바 '후일담'류의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아니, 솔직히 이 작품 끝까지 읽으면서도 이러한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1990년대가 회고하는 1980년대 후일담 문학에 대한 비판은, 내 생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현실은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았지만 주체는 그 변화를 과잉 의식하고 나아가 이념과 현실의 '합치할 수 없는' 간극이라는 고전적인 명제를 반복하면서 역사와 현실 양자를 관념화시킨다. 『폭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역사는, 그리고 개인의 과거사는 결코 화석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현실, 그리고 주체 자신만큼 그가 기억하는 과거 또한 그 의미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과거와의 대화!) 필요한 것은 과거 속에 갇혀 있는 나와 변화된 현실의 차이를 과잉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갇혀 있는 과거를 상대화하고 객관화하면서, 내 안에서 과거와 현실이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영현의 『폭설』은 이런 점에서 다른 하나의 방식, 귀환하는 자의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운동의 중심에서 격렬한 고민과 실천을 펴는 활동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공간을 빼앗기고 현실로 복귀할 때까지 유예의 시간을 방황하는 한 복학생의 내면을 조명하는 것이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198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이 언급되지만 가장자리로 내몰린 형섭에게 그것은 먼 소식, 침울한 풍경으로서 다가올 뿐이다. 김영현은 사건에 대한 설명이나 의미 부여를 생략하고 형섭의 독백과 내면 변화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의 눈은 한 여자, 한때 동지이자 애인이었던 연희를 향해 있다. 과거의 연인에 대한 기억, 이루어질 수 없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 그것을 여전히 방해하는 시대적 상황은 형섭으로 하여금 현실에서 연희를 다시 찾으러 헤매게 한다. 그러던 중 형섭은 연희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녀는 형섭과 헤어진 뒤 집을 나가 열심당(헤롯 대왕 당시에 출현하여 로마 제국에 저항하고 구원의 도래를 예언했던 유대 민족해방운동 결사체)이라는 과격 종교 단체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 교주인 성유다의 연인이 되어 경찰에 쫓기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형섭은 변혁 운동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그의 애인은 (이념과 방식은 다르지만) 주변에서 중심으로 들어선 역전된 상황(그러나 여전히 두 사람을 갈라놓는)을 맞게 된다.
형섭은 종교 운동의 환상성, 맹목성, 폐쇄성을 지적하며 연희가 그곳에서 나오기를 바라지만 어떠한 종류의 사회적 실천이든 철저하게 탄압 받는 현실을 역류하려는 연희의 모습에서 두 겹의 괴로움을 느낀다. 결국 형섭은 자신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좀 더 많은 자유와 평등, 인류의 진정한 해방과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문제 그 자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과학, 이념, 실천, 생활, 사랑이 결국 한 덩어리의 문제임을 알게 된 그는 연예라는 지극히 사적인 문제 또한 시대적 모순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전 애인이었던 연희가 가담한 종교 운동과 함께 형섭에게 또 다른 충격인 것은 옛 스승이 산골 오지에 칩거하여 생태 공동체를 만들어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다. 작가는 공동체와 생태주의에 대해서는 그리 길게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형섭에게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또 다른 성격의 생활과 실천이 있다는 것, 그들 나름대로의 고민과 극복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되는 계기이다. 물론 농촌 공동체에 대한 복고주의적, 환원주의적 한계에 대해 거리를 둔다 해도 연희가 종교로 귀환한 것과 옛 스승이 생태주의 운동으로 뛰어든 것은 모두 형섭에게 변혁의 근본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되씹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과거와 현실, 변화한 조건과 입장을 오가면서 형섭은 다양한 인물 군상과 만나게 된다. 자신의 옛 스승, 그의 딸이자 첫사랑이 될뻔한 여인, 자취 동거인들, 군대 친구와 공사장 동료들, 열심당의 활동가들, 열심당과 형섭을 연결하는 연희의 친구들, 열심당을 뒤쫓는 정보과 형사 등은 형섭의 의식 속에서 복잡하게 얽히면서 형섭의 판단 이전에 현실을 규정하고 그의 선택을 강요하는 요소들로 기능한다.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미로와 같은 길을 헤쳐나가는 것이 현실의 삶이다. 자신의 지향이 아무리 확실하다 하더라도 현실이라는 지평 위에서는 다른 것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방향이 굴절된다.
형섭과 연희는 친구의 도움으로 열심당의 피신처에서 짧은 만남을 가지지만 이미 연희는 성유다의 아이의 임신한 상태였고 자신을 잊어 달라고 한다. 그 후 열심당은 프락치 치사 사건으로 몰려 일제히 검거되고 그 와중에 연희는 중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나 결국 죽게 된다. 형섭은 연희의 죽음 이후 열린 열심당 공판에서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펴며 변호를 거부하는 성유다의 모습을 방청한다. 한갓 몽상가의 궤변일 수도 있는 성유다의 최후 진술은 자신의 꿈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현실에 맞선 자의 마지막 유언 혹은 남은 자들을 향한 전언(傳言)으로 들린다.
현실은 거대한 모순과 그것에 대항하는 반모순의 앙상한 대립으로 이루어진 체계가 아니다. 모순은 끊임없이 자기증식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 역시 자기모순을 키워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거대 모순을 꺾어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모순의 생성 구조, 모순과 대항 모순이 생겨나는 구도 자체를 무화시키는 근본적인 꿈꾸기와 실천이 아닐까. 한 배회자의 행보와 내면에 시선을 두고, 그의 개인적인 문제 속에서 시대적 고민을 다루려는 시도는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모순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김영현의 지속적인 주제 의식의 소산이다. 이러한 문학적 전략은 당대의 실천이 가져야할 과학성과 정치적 민감성을 둔화하는 위험을 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꿈의 영역이 허물어진다면, 몇몇 실리적 계산과 근시안으로 인해 간과된다면, 그 다음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역사의 잉여뿐이다. 길이 끊겨 헤맬 때, 땅은 순순히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앞서간 자의 흔적을 찾거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그것에 비추어 자신의 앞길을 예견할 수밖에 없다. 형섭은 그렇게 자신의 짧은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하지만 그 길은 과거의 길이 이미 아니다. 자신의 삶과, 수많은 동반자들과, 그들과 나눠 가진 시간들로 변화한 길이다. 과거는 삭제할 수 없고 현실에 눈감을 수도 없다. 이제 다시 묵묵히 올라가는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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