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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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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와 그 이후

박준형 | 기자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을 추모하고 살인미군의 무죄평결에 항의하는 대중적인 촛불시위가 지난해 연말부터 계속되었다. 이 시위를 통해 우리는 90년대 초반 이래 오랫동안 사라진 듯 했던 하나의 투쟁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이례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이 시위현장에 동참했다는 점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작년 6월 13일 사건 당시에는 월드컵에 묻혀 있던 이 사건은 살인미군의 무죄평결을 기점으로 해서 대중적인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12월31일의 투쟁을 기점으로 하나의 정점을 지난 이 투쟁은, 대중적인 참여의 흐름이 약해지고는 있지만 아직 끝나진 않았다. 그러나 투쟁과정의 모든 국면에서 그렇듯이 그것을 평가하고 그 의미를 사고하는 일은 계속 필요할 것이다. 이 투쟁을 통해서 대중들은 민중운동진영의 '운동주체'들에게 대중운동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진전시킬 수 있게 하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반폭력

이 투쟁은 살인미군의 처벌, 소파개정에서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한 항의,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대한 반대까지 그 문제의식을 확장하면서 진행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 투쟁의 요구가 폭력에 대한 철저한 반대였을 뿐만 아니라, 투쟁의 방법에 있어서도 비폭력을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주한미군의 주둔 자체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폭력에 의한(혹은 폭력 없이는 불가능한) 지배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스스로를 '평화보장-안보'의 이름으로 은폐하는 제국주의의 폭력이 자신을 드러내는 '진실의 순간'이었던 셈이다. 대중적인 항의의 촉발은, 이같은 미군의 본질로 인식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전 위협과 같은 계기들은 '평화보장'의 이미지를 미군에게서 벗겨냈다. 그 결과 북한 미사일선박나포와 같은 사건을 거치면서도 반미분위기가 잦아들지 않았는데, 이는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임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은 폭력에 반대하는 투쟁으로서 자신들의 행동을 그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시위에서 '비폭력'으로 드러났는데, '비폭력'이란 단지 하나의 투쟁 방식인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폭력으로서 주한미군과 진압경찰에 반대한다는 정치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투쟁은 일종의 '반폭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지배자들이 강요하는 폭력이 그 모호성을 더해가면서 그것을 집단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정치'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으로 보이는 지금, 대중들은 그것에 반대하는 투쟁을 단번에 정치의 중심에 올렸다. 90년대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대규모의 대중투쟁으로서 91년 투쟁이, 통제불가능한 (지배자들과, 또한 스스로의) 폭력에 대한 대중의 공포와 함께 막을 내린 이후, 이러한 투쟁에 대중이 결집한 것은 우리 대중운동에 하나의 축복이다.

대중의 자기 조직화

앞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 투쟁에는 기존의 대중조직에 포괄되지 않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이를 두고 미디어들은 "네티즌의 결집"이라는 식으로 명명했다. 확실히 인터넷을 통한 대중들 사이의 교통이 투쟁을 빠른 속도로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미 인터넷이 이미 대중화된 사회에서 모든 시민이 어느 정도는 '네티즌'인 바에야, 이런 진단은 피상적이다. 초점은 대중들이 스스로 교통하고 논쟁하는 가운데 자기-조직하기 시작했다는 데 맞춰져야 한다. 스스로 교통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은 이 투쟁이 단지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은) "불평등한 한미관계"라고 불리는 제국주의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임을 인식해 갔다. 또한 이후 미디어의 여론조작에 의해서 부당한 대립이 형성되기는 하지만 이 투쟁을 미국의 폭력적인 세계지배와 침략행위들을 반대하는 "반전평화" 투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흐름도 일었다. 초기의 국수주의적인 흐름이 오히려 축소되는(이 때문에 사후적으로 민족주의적 감성에 기반한 '범대위'와의 모순은 복합적인 양상을 띠었다) 경향도 나타났다.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대중투쟁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 즉 대중조직을 통해서 조직된 대중을 동원하는 형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결집하는 시민을 통해서 투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중들이 결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잠정적으로는 그것이 대중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며, '조직'을 초과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할 수 있다.

자명한 것들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을 때

이 투쟁은 미디어와 신자유주의자 지식인들에 의해서 6월의 "붉은악마" 월드컵 응원에 비유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촛불시위는 젊은 '인터넷 세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노무현의 당선과 함께 2002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들은 상이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사건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것이라는 점에서(그리고 재단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대중투쟁을 자신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조작한다는 점에서) 부당한 것이다. 하지만, "붉은악마"와 "촛불시위"가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대중들은 "붉은악마"를 통해서 활성화한 민족주의적 감성을 미선이 효순이의 살해와 살인미군 무죄평결 사건에 곧이곧대로 적용했을 뿐 아니라, "붉은악마"의 거리응원을 이 항의에 적용하고자 했다. 대중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호혜평등"한 것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민족주의적 요구의 정당성을 주한미군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지는 복잡한 정치적 위상과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관철하고자 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대단히 모순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반미 對 반전평화"와 같은 허구적 논쟁 발생의 예처럼,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이 투쟁에 나서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동학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대되는 대항 이데올로기"의 형성이라기보다는 지배이데올로기(따라서 대중의 이데올로기인 것)의 주어진 자명성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작동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을 주목하자. 그것은 (주어진 것이지만) "보편성"을 관철하기 위한 것으로, 그것이 확보한 "보편성"은 대중적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투쟁에서는 대중의 어떤 보편적 요구를 운동진영이 명확한 언어로 제기하고 그것을 현실에 대한 급진적 비판(거리두기)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촛불시위에서 그것은 절반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남은 문제들

1월말 현재, 1월 25일 대회("2003년 자주평화 실현 범국민 촛불 한마당")를 잘 치루어 내기는 했지만 이 투쟁은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이다. 무엇보다 "반미 對 반전평화"라는 허구적 쟁점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내용으로 여론조작을 했던 미디어들에 대한 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운동진영의 대응도 그리 세련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한다.

촛불시위는 대중들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공동의 구호를 외치면서 집단적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스스로 교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적절히 구성되었어야 했다. 이 점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초반의 '깃발논쟁'(민중운동 진영의 각 조직들이 집회에서 깃발을 드는 것에 대한 논쟁 ― 비록 '반운동권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왜곡된 방식으로 제기되기는 했지만)을 통해서 대중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우선 90년대 이후 대형 깃발을 중심으로 조직의 권위를 세우고 대중을 그 '아래'로 동원하려고 했던 운동방식에 대한 대중의 거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깃발 아래 조직된 대오'와 그 '쪽수'에 대한 운동진영의 집착에 대한 거부. 대중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더 자유롭게 발언될 수 있기를 원했는데, 그것을 보장하는 방식의 집회가 필요했을 것이다. 단지 단상에서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피켓이든 유인물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주장을 교통하고 ― 따라서 공통의 통념을 민주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방식 말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 이후에 우리가 '대중운동'을 통해서 만나고자 하는 대중들을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던져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투쟁과 관련해서 남아있는 문제 중 하나를 언급하자.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이 유례없이 대중을 동원할 수 있게 한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이다. 여성-피해자의 구도가 여기서 작동했다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미선이와 효순이는 "순결한 민족의 딸"로 상징되었고, 그 죽음은 "딸"을 지켜내지 못한 가부장적 민족의 자존심에 대한 문제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미선이 효순이 이전에도 미군범죄로 인한 많은 살인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들이 남성이었거나 윤락여성("딸" 혹은 "어머니"가 아닌 여성으로서)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도한가? 자신의 친구-자매-형제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거리에 나선 중고생들이 단지 여기서 예외일 것이다.

아직은 나로서는 이 투쟁이 가부장적 민족-희생자 여성의 관념을 강화하는 방향이 아닌 것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정도를 말할 수 있을 뿐인 것 같다. 그러나 이 투쟁이 제기하는 다른 쟁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충분히 사고되고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제어
평화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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