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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6.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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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주의 비판의 방식

최원 | 회원, 미국 뉴스쿨 대학 철학박사과정
나는 지성의 회의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가 인용한 소렐의 말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에서 의지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또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믿는다.
― 루이 알튀세르 (1985)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의 제5장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의 도입부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휴머니즘적, 역사주의적 해석의 발생 원인을 '제2인터내셔널의 기계론과 경제주의'에 반대해 일어났던 '좌익적' 저항 안에서 찾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혁명적 휴머니즘과 역사주의의 테마는 독일좌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메링으로부터, 1917년 혁명 이후에는, … 루카치, 또는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그람시 등과 같은 일련의 이론가들로부터 유래한다. 우리는 제2인터내셔널의 기계론적 속류화에 반대했던 이러한 '좌익주의' 저항운동을 레닌이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고 있다. 그는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나 그람시의 경우 그것이 진정 혁명적 요소들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론적 우화와 정치 전술을 비난했다. (LC 152)

여기에 언급되는 레닌의 저작은 물론 『좌익소아병』이다. 알튀세르는 이 저작의 의미(특히 레닌이 행한 '당-원칙Party-principle'의 옹호)를 그람시를 비롯한 몇몇 다른 이론가들에 대한 비판을 경유하여 제5장 전체에 걸쳐 가공해 낸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람시는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기계론과 숙명론)에 반대하기 위해 인간의 의식과 의지에 호소한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볼세비키와 대중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 마르크스의 『자본』에 '반대'하여 수행한 혁명이라 규정했던 것이다(즉 『자본』은 궁극적으로 그에게 하나의 경제주의를 표현한다). 알튀세르는 우선 이러한 그람시의 입장 속에서 (정치적·논쟁적 필요에 따르는) 실천적 부분과 이론적 부분을 섬세하게 구분한 뒤, 오직 후자의 것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비판의 요지는 그람시가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 역사주의' 및 '절대적 휴머니즘'으로 선언하고 그것을 현실역사에서 실천적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환원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이 갖는 이데올로기로부터의 '단절' 효과를 철저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즉 그람시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에 대한 일반적 견해와 실천적 행동규범을 사람들에게 직접 제공함으로써 역사적인 시기를 고무하고 약동시킬 수 있는 이론적 정식들로서의 세계관으로 이해되며, 이를 위해 현실역사는 이론 그 자체 내로 역류함으로써 그 속에 자신을 반영시켜야 한다. 이론적 대상은 이를테면 '사유 내 역사'가 아니라 '현실역사' 그 자체다(경험주의).
이러한 견해의 배후에는 주지하다시피 헤겔이 있다. 즉 그람시는 '이론의 토픽 내로의 이중적 기입'이 아닌 '단순 기입'을 통해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의 장소를 빼앗고, 더 나아가서 토픽 내의 이질적인 심급들을 하나의 '본질적 단면' 속에 동시대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헤겔주의의 변종으로 만든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동시대성의 범주로 환원된 역사개념은 과학, 철학, 이데올로기를 생산력과 생산관계들의 일원론적 통일로 평준화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실천적 차원이 아닌 이론적 차원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적, 기계적 해석의 기본적인 이론적 원칙을 거꾸로 전도시켜 재생산하게 된다(LC 176). 이 때문에 그람시의 경제주의 비판은 정치주의적 좌편향으로 드러나며, 자생성주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 의지주의를 그 내부에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LC 177).
알튀세르는 이러한 그람시에 대한 비판을 레닌적 '당-원칙' 옹호에 연결시킨다.

[의지에 이론을 요구하는 역사주의적 휴머니즘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인간적 본질이 발로하는 장소, 인간적 본질의 전도자라 불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행동하는 철학이 되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외부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이론적 실천에 의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생산한다거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수입'해야 한다는 카우츠키적, 레닌적 테제는 절대적으로 거부되었다 … 이론적으로 이 혁명적 '휴머니즘'과 '역사주의'가 결과한 것은, 제국주의에 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몇 가지 테제, 사회주의 체제에서 '정치경제학' 법칙의 소멸, 프롤레타리아 문화부, '노동자 반대파'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또한 일반적으로는 스탈린적 독단론의 역설적인 형태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를 특징지운 '의지주의'라는 것들이다 … 레닌이 경탄할만하게 간파한 것처럼, 경제적·정치적 발상과 실천 속에서 관념론적이고 경험론적인 유혹을 궁극적으로 또한 필연적으로 생산하게 되는, 그들이 설정한 논리의 어떤 효과들에 의해 [그들의 혁명성은] 상쇄된다. (LC 179-80)

그러나 여기서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당'의 옹호 혹은 '당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우위'의 옹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초점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하나의 혁명적 의지를 갖는 '역사의 주체'로 만들면서, '자본의 추상성'에 대립하는 '노동의 구체성'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문제를 '정치적 결단'(이를 촉구하기 위해 이론은 실용주의적으로 언제든 수정·활용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의 문제로 치환하는 좌익적 의지주의 비판인 것이다.
사실 이는 바로 레닌 자신이 『좌익소아병』에서 가하고 있는 독일공산주의자 좌파('원칙적 반대파'를 자처하는)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표현한다. 독일의 독립 사회-민주주의당을 공격하는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지도자 대(對) 대중'이라는 문제틀에 입각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말하는가, 아니면 당독재를 말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같은 입장은 대중의 통일성과 혁명성을 부당 전제하는 관념론일 뿐이다. 이들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던 레닌은 단순히 '지도자'의 우위를 주장하지도 않고 '당독재'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문제틀 자체를 최대한 전위(!)시킨다. 그는 그들이 말하는 대중 자체가 다수의 계급들, 분파들로 갈라져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당은 그 속에서 가장 혁명적인 계급의 편에 서서 기나긴 이행으로서의 '계급투쟁'을 수행한다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레닌 자신의 말을 읽어보자.

당독재인가 계급독재인가, 지도자 독재인가 대중독재인가라는 단순한 문제제기는 가장 믿을 수 없고 절망적으로 뒤범벅된 사고임이 증명된다 … 러시아에서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첫 걸음을 내딛고 있다. 계급들은 여전히 잔존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쟁취 이후 수년 동안 모든 곳에 잔존해 있을 것이다 … 계급의 폐지는 단지 지주와 자본가들을 내쫓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소상품생산자들의 폐지를 의미하고 소상품생산자들은 내쫓거나 짓눌러버릴 수 없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들은 오직 매우 길고 느리고 조심스러운 조직화의 작업을 수단으로 해서만 변화되거나 재교육될 수 있으며 있어야만 한다. 그들은 모든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쁘띠부르주아적 기운으로 에워싼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구(舊)사회 전통의 힘들에 대항한 유혈 및 무혈의, 폭력적 및 평화적인, 군사적 및 경제적-교육적-행정적인 장구한 투쟁을 의미한다. 수백, 수천만 속에 있는 습관의 힘은 가장 무시무시한 힘이다 … 당 없이 이러한 투쟁은 성공적으로 행해질 수 없다.

이 짧은 구절 속에서 레닌은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대중의 독재도 당독재도 아니며 오직 기나긴 이행으로서의 '계급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레닌의 생각은 마오의 문화대혁명의 사상을 어느 정도 선취하는 것이다. 레닌은 여기서 구사회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습관의 힘들과의 투쟁을 계급투쟁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흔히 오해되는 것과 달리 마오의 문화 대혁명이 대중에 의한 국가의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대중 그 자체를 관통하는 '계급투쟁의 영속화'(발리바르)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이는 레닌의 문제의식의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핵심적으로 계승·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통치당'으로서의 공산당에 대항해서 대중의 편에 서는 것을 (현실적인 어려움 등의 이유로) 끝까지 비타협적인 자세로 견지할 수 없었다는 데에서 레닌과 마오의 오류를 찾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의지주의적인 평가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억압일 뿐이다. 그것은 심지어 그들의 문제설정을 왜곡함으로써 스스로 독일공산주의자의 '좌익소아병'에 전염되는 것이기까지 하다.
오히려 우리는 나중에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대중들 속에서 전개되는 계급투쟁의 한복판에 당을 내재적인 방식으로 위치시켜야 함("자신이 삽입되어 있는 사회운동의 실험자 및 집단적 분석자"로서의 당)에도 불구하고 당을 최종적인 계급투쟁의 해결장소라고 사고했던 점에서 그들의 오류를 찾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당 또한 끊임없이 변해 나가는 계급투쟁의 복잡하고 통제불가능한 정세 속에서 단지 불안정한 위치만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험적으로 가장 혁명적인 분파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 그들의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가 언젠가 의지(대중의!)에 대한 지성의 우위를 말하고,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말했다면, 그것은 지성에 대한 '대중'의 우위를 말한 것으로 착각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는 즉시 그람시적인 휴머니즘과 역사주의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알튀세르는 '대중'이 아닌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말했으며, 대중운동들의 우위란 바로 대중 그 자체를 관통하는 적대들을 둘러싼 투쟁의 우위를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투쟁에는 그것을 제어하여 목적지에 도착하게 만들 그 어떤 종국적인 주체도 있을 수 없다. '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중'조차 그것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틀 속에서 경제주의와의 투쟁은 어떻게 사고될 수 있는가? 발리바르는 『계급투쟁에서 계급 없는 투쟁으로?』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운동, 노동자조직, 노동자계급이라는] 이 세 항들 사이에는 계급투쟁의 실제의 사회적 및 정치적 역사를 산출하는 모순들을 발생시키는 간격이 항상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노동자조직들(특히 계급정당)은 결코 노동자운동의 총체성을 '대표'했던 것이 아니며 노동자운동과 주기적으로 모순에 처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노동자조직의 대표성이 산업혁명의 특정단계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한 '집합노동자'의 특정분파들을 이상화하는 것에 토대를 두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대표성이 국가와의 정치적 타협의 특정한 형태에 조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존 노동자조직의 실천들과 형태들에 반대하여 노동자운동이 재구성되어야 하는 순간이 항상 도래했다. 이 때문에 분열, 이데올로기적 갈등(개량주의 대 혁명적 단절), '자생성주의'와 '규율' 사이의 고전적인 그리고 항상 부활하는 딜레마는 우연이 아니라 이 관계의 본질 바로 그것을 표현한다.

발리바르는 여기서 노동자조직들(계급정당 뿐 아니라 대중조직들까지 포함하여)이 주기적인 모순에 처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주의'가 또한 '조합주의' 및 '개량주의'의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은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으로서의 경향의 조직화(역사적 착취양식의 조직화)에 대한 반경향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현재의 착취양식을 포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투쟁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경향의 조직화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 새로운 경향의 재조직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은 항상 다시 그러한 새로운 경향에 대한 반경향을 즉각적으로 조직할 수 없는 '무능력'의 상태를 통과해 가게 된다. 발리바르가 말하듯, 대표성을 갖고 있던 노동자 계급 내의 일분파가 개량화되어 노동계급의 대표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능력'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경제주의(조합주의, 개량주의)의 문제는 단순히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조직형식의 문제일 수 없게 된다. 관료제의 노동운동 내로의 침투나 조직들의 경직화 경향이라는 것은 모두 경험적인 진단이며 '결과'들의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원인'은 훨씬 뿌리가 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조직들은 개량화될 수 있다'라는 테제보다 훨씬 강한 테제를 채택할 필요성을 느낀다. 즉 '노동자조직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개량화를 필연적으로 경험하며 반드시 위기에 빠진다'라고 말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조직들이라면 얼마간 가질 수 있는 경직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따라서 대중의 자생적 활력으로 보충해야 할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경향과 반경향의 정세적 갈라짐 속에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무능력의 상태(스피노자라면 '슬픈 수동'이라고 불렀을 만한)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관점에 섰을 때에만이 해결책이 단순한 조직형식의 혁신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해결책은 새로운 계급투쟁 분파의 조직화, 새로운 주체들의 생산의 쪽에서 주어질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부르주아지가 조직해낸 새로운 경향에 대한 반경향의 조직화와 동일한 것이다. 물론 이를 수행함에 있어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을 결합시킴으로써 대중들의 투쟁을 고무하는 일은 당연히 사고해야할 일이지만, 이것이 급진적 분파의 형성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과제와 동떨어져서 조직형식주의적으로 사고될 때, 그것은 정치주의적 편향으로, 대중에 대한 물신숭배로 나타날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3년 우리는 실로 새로운 급진적 대중분파들의 진출을 목격하고 있다. 철도파업을 필두로 시작된 이들의 투쟁은 아산과 울산에서 조직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노조 및 비정규직 투쟁위원회의 건설, 그리고 화물연대 특수 고용직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파업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권과 자본은 이러한 새로운 급진적 분파들의 출현에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화물연대 파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본가들의 무능력(반경향에 대한 낡은 경향의 무능력!)을 보라.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마치 도깨비라도 본 듯 허둥대는 꼴이 아니었던가? 자영업자로 위장하여 화물운송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박탈하자, 이번에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아닌 '괴물'(이는 사이드라는 인터넷의 한 논자가 쓴 표현이다)이 되어 나타난 화물노동자들의 투쟁은 자본의 공권력을 소금기둥으로 만들어 버렸을 뿐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특수 고용직 노동자들(학습지 교사, 건설운송 노동자, 골프장 경기 보조원, 보험모집원 등)의 대투쟁을 예고했다. 이들은 또한 '노동자 자주관리'의 실천을 성사시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주체들로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새로운 '괴물'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모순을 표현하는 가장 능동적인 시민이며, 자신의 정치적 시민권(즉 하나의 제도나 지위로서가 아니라 집단적인 실천으로서의 시민권,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서의 시민권)을 주장함으로써 경제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자들이다. 경제주의 비판은 계급투쟁(및 또 다른 소수자 투쟁들)의 새로운 지형을 분석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주체들을 생산함으로써 전선을 혁신하려는 노력을 지시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들은 우리에게 온몸으로 보여주며 가르쳐주고 있는 중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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