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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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6.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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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6시선-박현.hwp

손을 내민 한사람만 있었어도 (송내역 추락참사 장영섭씨 미망인의 절규)

박현 | 장애인 이동권연대 사무국장
·1999년 6월 28일 오후 8시 30분 4호선 혜화역 이규식씨 리프트 추락(부상)
·1999년 10월 4일 오후 6시 5호선 천호역 이흥호씨 리프트 추락(부상)
·2001년 1월 22일 4호선 오이도역 장애인 수직형 리프트 추락 참사(1명 사망, 1명 중상)
·2001년 7월 18일 6시 25분 2호선 영등포구청역 이동석씨 리프트 추락(중상)
·2001년 9월 16일 오후 12시 45분 3호선, 7호선 고속버스스터미널역 환승통로 노판수씨 리프트 추락(중상)
·2002년 5월 19일 5호선 7시 30분 5호선 발산역 리프트 장애인 추락 참사(사망)
·2003년 4월 24일, 저녁 9시 20분 5호선, 4호선 동대문운동장역 시각장애인 부부 추락
(부인은 임신 8개월, 두 사람 골절 등 중상)
·2003년 5월 10일 6시 30분 동대문운동장역 5호선 이규식씨 추락(전치 3주 부상)
·2003년 5월 14일 5시 40분 1호선 송내역 시각장애인 선로추락 참사(사망)


위에 나열한 것은 TV에서나 언론에서 대서특필로 다룬 사건들이 아니다. 끔찍한 살인 사건도 아니고 특별히 무엇인가가 있는 사건들은 더더욱 아니다. 단순히 지하철을 이용하려다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어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일 뿐이다.
이 사건들은 단 하나만 제외하고는 아무런 보상과 책임 소제도 밝혀지지 않은 체 세간들 사이에 잊혀져간 아니 관심조차도 없었던 사건들이었다.
2001년 1월 22일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해 만들어진 수직형 리프트가 설치된 지 6개월만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명절을 맞아 아들네 집에 역귀향하던 노부부 중 한 명은 숨지고 한 명은 양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사건 발생 이틀 후 철도청과 오이도역 관계자는 유가족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어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으나 장애인 단체 및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겨우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를 사회 전면에 알려내는 성과는 올릴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되어지지 못한 채 사건은 뭍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1년 4개월여 후 5호선 발산역에서 고정형 리프트를 이용하던 중 리프트가 추락하여 1급 장애인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또다시 발생하였다. 발산역에 지하 2층에서 지상까지 양방향으로 총 4개의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는데, 사건 발생 당일 날 그 중 3개는 고장이 나 있어 지하 2층에서 지하 1층까지는 역무원으로 도움으로 들려 올라왔으나 그나마 고장이 나지 않는 1번 출구의 리프트를 이용하던 중 이러한 참변을 겪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명백한 사고를 두고서도 국가인권위원회와 경찰, 발산역 측은 갖은 합동 현장 조사를 벌였고 1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발산역 참사는 서울시와 도시철도 공사 측에 잘못이 있으므로 유가족들에게 배상하고 공개 사과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서울시와 도시철도공사는 사건발생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사과와 배상도 하지 않은 체 기만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다시 송내역에서 시각장애인 한 명이 선로에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매년 일어나는 지하철 관련 추락 사망사건들....
그러나 이건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하고 지하철을 이용해야만 하는 450만 모든 장애인의 현실인 것이다. 오이도역 참사 후에도 이동석씨 사고, 노판석씨 사고 등 작은 사고들을 통해 발산역의 참사는 예견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정형 리프트의 불안정성에 대해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장애인단체들이 문제 제기를 통해 발산역과 같은 사고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였지만, 서울시나 관계부처는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고 절박한 현실을 방관하였다. 결국 발산역 추락참사가 발생하였고 그것도 체 잊혀지지 않은 딱 1년 후 송내역에서 또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역시 이 사건이 있은 한달 여 동안 송내역 사고와 흡사한 동대문운동장역 시각장애인 부부 추락사고와 발산역 추락참사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규식씨 추락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오이도역 사고, 발산역 사고, 송내역 사고가 일어나기 전 이러한 일들을 예견하듯 사고들은 비일비재 일어났어도 이것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던 서울시와 철도청, 도시철도공사는 실상 살인극을 연출한 것에 다름 없으며 그것에 마땅히 공개사과를 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열한 살인자의 모습만 보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5월 19일 발산역 1주기를 맞이해 우리의 분노를 알리기 위해 서울시청 그것도 장애인 복지와 장애인의 인권을 생각한다는 장애인 복지과를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서울시청 안에 그래도 장애인의 문제를 고민한다는 그들에게 이러한 절박한 현실을 말하고자 하였을 뿐 큰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왜 안전하고 편리해야만 대중교통 지하철이 장애인에게는 정승길로 가는 완행열차인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이러한 살인극을 연출한 서울시청의 일개 꼭두각시 일뿐이었다. 발산역과 송내역에서 있었던 장애인의 죽음에 대해 목숨을 걸고 지하철을 이용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해 말하는 우리에게 직원들은 정말 장애인을 위해 일한다는 장애인 복지과라는 곳이 맞는지 의심되리만큼 다른 부서보다도 더욱 냉담했으며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우리에게 "우리를 왜 못 살게 구느냐?"라며 손가락질까지 해대었다. 장애인 직원들을 앞세워 우리의 투쟁을 탄압했던 기만한 장애인 복지과 직원들, 죽음에 대해 책임을 묻는 우리에게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않느냐?"식의 엉뚱한 소리만 해 대는 장애인복지과 과장과 복지여성국장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이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 있겠는가?' 라는 회의만 들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질의했던 여섯 가지에 대해 장애인 복지과 측이 24일(토)까지 여성국장 이름으로 답변하겠다는 것과 서울시 관계 실무자들이 장애인이동권연대, 시민단체들과 함께 하는 정책토론회를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으로 1박2일의 힘든 점거농성을 풀었다. 점거이후 이러한 두 협상결과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품기보단 더 이상 협상과 타협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우리 식대로 우리의 투쟁으로 대응해야겠다는 판단이 더욱 앞서게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24일에 온 알량한 답변서는 그들의 기만적인 모습만을 확인하게 했으며 우리는 우리에겐 남은 건 보다 강력한 투쟁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22일 송내역 위령제를 지내면서 오이도역, 발산역, 송내역의 억울한 죽음의 한을 풀어내며 언제 내가, 우리가, 이 땅의 450만 장애인들이 지하철역에서 비명 한마디 외치지 못한 체 싸늘히 식어 가게 될지 모르는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이를 사회에 고발해야하는 과제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장애인 복지과 점거농성을 통해 밝혀졌듯이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 생존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불사하듯 이 땅에 서울시에 모든 지하철을 세워 끊임없이 장애인을 차별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 사회를 멈춰 버리겠다.
서울시를 멈춰 버리겠다.
세 역의 죽음은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다. 세 역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실족으로 과실로 죽은 일들이 아니다.
故 장영섭씨 미망인의 절규처럼 이 사회가 사회 약자들에 대한 합리적인 배려만 있었더라도 그것에 대해 조그마한 관심이 있었더라도 이러한 사건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을 그 날까지 장애인이 정말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하면서 서울시의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당당히 살아나갈 그 날까지 우리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PSSP


"너무나도 안타까워요. 당황하셨지요. 어쩔줄 몰라 했을 당신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가슴 아파요.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닌가봐요. 당신의 옷 소매라도 잡아주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서있지 않겠지요"(송내역 추락참사 故 장영섭씨 미망인의 추모사 중)
주제어
빈민 민중생존권
태그
밀양 성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