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9.38호
첨부파일
0309과학과진실_김영식.hwp

기술; 우리에게 적인가 동지인가?

Martin Cook, Bill Hopwood | 번역-김영식(회원)
과학기술은 언젠가부터 전문가 엘리트 집단 혹은 자본가의 전유물이 되었고, 상층 과학기술 엘리트들은 이미 관료화되었다. 한국내 좌파들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문제에 대해 여전히 무관심하다. 어렵다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과학기술자들이 해결할 문제로 취급해 버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핵 폐기장, 전자주민카드, 노동 감시기술의 문제를 예를 들어 보자. 이 중 어떤 것도 과학기술자들만의 문제도 아니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다른 여러 과학기술 관련 문제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글에서는 일관되게 과학기술은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자본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연구실에서 생산되는 결과는 오히려 과학적이 아닐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기술을 노동자-민중의 ‘동지’로 위치 짓게 하기위해서는 “과학기술의 민주주의 !”, 혹은 “과학기술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통제!”를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와 관련해서 이 글의 마지막부분에 언급된 1975년의 영국의 루카스 항공 계획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 글은 [지구의 경고 Global Warning] (Militant Publications 1996) 책의 5장을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인터넷의 http://www.socialistalternative.org/ literature/globalwarning/ 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은 맑스주의 입장에서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중 번역한 5장은 과학기술에 대한 맑스주의 입장을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의 저자가 소속된 영국 사회당(구 전투적 노동자 Militant Labour)은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읽을꺼리 1]에서 ‘1차대전전부터 존재한 노동당 바깥의 사회주의 정당. 레닌주의를 거부하고 일종의 평의회 공산주의적 이념을 고수해왔다. 지금도 소정파로서 존재한다. 월간 Socialist Standard를 발간하고 있다.’라고 소개된 바 있다. -역자 주

*편집자주 : 본문에서 (#), 중괄호로 표기된 부분은 참고문헌이 있는 단락이며 참고문헌은 글 말미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지난 200년 동안 기술의 큰 발전은 인간이 이 행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주었다. 200년 전에는 런던에서 뉴캐슬(영국 잉글랜드 북동부의 항구 도시)까지 아무리 빨리 여행한다고 하더라도 이틀이 걸렸고 뉴욕까지는 2주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뉴캐슬까지는 기차로 3시간, 뉴욕까지는 비행기로 5시간 걸릴 뿐이다. 유럽의 소식은 일주일이 지나야 접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 전 지구의 소식을 단 몇 초안에 얻을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막대한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과거에는 많은 아이들이 성장하기도 전에 죽었지만 지금은 간단한 위생법과 의학의 발달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사망하고 있다. 유니세프(The United Nations’ Children’s Emergency Fund (UNICEF))는 해마다 신식민지 국가(neo-colonial world)에서 1천 2백만(하루에 3만 7천명)의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집계했다. 이들 대부분은 오래전에 값싼 치료법이 발견된 홍역, 설사, 말라리아, 급성폐렴 그리고 영양실조와 같은 질병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만약 이 아이들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같은 의료서비스를 받고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면, 이 수치는 35만명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들 아이들의 생명은 각각 매년 10달러만으로도 충분히 살릴 수 있다.

여전히 세계 여러 지역에서 물 부족과 오염된 물로 고통 받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40%이상이 긴 가뭄에 시달리고 있고, 일시적 물 부족과 오염된 식수를 공급받고 있다. 신식민지 국가에서 질병의 80%는 물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질병의 대부분은 쉽게 치료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설사병 하나만으로도 거의 일년에 5백만의 아이들이 죽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단 300만 달러의 비용으로 전 세계에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다. 잘못된 관개 체계가 이러한 질병을 증가시키고 있지만 주요 원인은 기술이나 재료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의 불평등에 의한 가난 때문이다.(1)

기술은 단순히 인간에 의한 자연에 개입을 의미한다. 즉 어떤 씨를 심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만큼 단순한 일이 기술의 기본적인 형태이다. 이러한 기술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마도 고된 육체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기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전 기술(household technology) 없이 살아야 하고, 냉장고, 통조림과 조제식품 없이 직접 음식을 준비하고 직접 손으로 옷을 세탁해야 할 것이다.

악마와의 거래?

하지만, 과학이 가져다주는 진보를 인정하지만 과학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의 이용으로 인간 생명과 자연세계가 크게 위협받고 있고 또 이 행성의 모든 부분이 현재 공해지역으로 변해가고 있다.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는 멸종의 공포를 안겨다 주고 있으며 전쟁은 대량 집단 학살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기술 그 자체가 종종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1984년 인도 보팔과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참사는 현대 과학의 ‘최종 산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체르노빌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역의 16만 평방킬로미터를 오염시켰고(이 면적은 잉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북 아일랜드 전체와 동일한 면적이다). 4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이 사고의 여파는 장기간 지속적으로 랩랜드(핀란드 북부 도시)와 북서부 잉글랜드 지역까지 미쳤다. 아직까지 당시 대기에서 나온 방사선으로 인해 장기나 팔 다리가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체르노빌의 최종 결과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최악의 결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보팔 참사

1984년 인도의 보팔에서 미국 소유의 화학 공장이 폭발한 참사로 인해 적어도 3천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일부에서는 1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더욱이 20만 명의 사람들이 뿜어져 나온 36톤의 맹독성 청산가리 화합물(메틸 이소시안염, MCI)에 의해 만성질환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 사건에서 안전 불감증에 대한 증거는 수 없이 발견할 수 있다. 공장의 소유자인, 유니온 카바이드사는 안전사고에 대해 많은 경고를 받았지만 보팔 참사 전에 오히려 안전관리 부서를 축소하고 직원들을 해고했다. 당시 안전관리 직원들에 대한 비용은 단지 1백만 달러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보팔 참사 후에 그 회사 경영인들은 주민들에게 피해 보상을 하지 않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이에 1만 4천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보팔 가스 피해 여성 노동자 연맹(Bhopal Gas Affected Women Workers Association)과 여러 노동조합 그리고 투쟁 전선(Struggle Fronts)은 사건 재발 방지와 보상을 위해 오랫동안 싸우고 있다. 그들은 당연한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데모, 행진을 조직하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보팔 참사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아무것도 나아진 것은 없었으며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의 화학물질 사고 건수는 증가하고 있다. 보팔 참사 이전 8년 동안 74건의 주요 사건이 있었지만 이후 8년 동안에는 100건이나 발생했다. 미국에서만도 1980년과 1990년 사이에 보팔에서의 가스량과 독성을 능가하는 15건의 가스 누출 사고가 있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은 도시에서 훨씬 떨어진 영역에서 발생했다.(2)

체르노빌과 보팔 참사는 무책임한 관리비 절감과 단기적인 경비 절감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듯 오늘날에는 많은 기술 실패들은 복잡한 원인들에 의해 발생되고 있는데, 이것은 과학기술이 사회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기술의 혜택과 피해에 대한 조사는 사회와 분리되어 할 수 없다.

과학적 견해

과학과 기술은 자본주의 성장으로 큰 동력을 확보하였다. 새로운 생산수단, 새로운 시장과 통신수단에 대한 자본의 추구는 과학 발전에 불을 지폈다. 과거에는 자연을 설명할 때 종종 종교와 신화에 기초를 두었다. 또 과거 일부 사회에서는 환경을 훼손하기도 했는데, 대개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 행동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접근방법이란 어떤 것에 대한 원인과 해석을 신이나 신들의 활동으로 돌리기 보기 보다는 물질세계에 기초를 두는 방법을 말한다. 과학은 사실(reality)을 탐구하고 원인을 밝힌다. 또 밝혀진 원인을 통해 실험할 것들을 미리 예측한다. 관찰과 설명의 끊임없는 과정은 사실을 좀더 정확하게 설명하여 보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과학 발전은 연구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부분 일반 노동 현장에서 이루어 졌다. 서구 농업 과학은 18세기와 19세기에 주요하게 숙련된 농부들의 노동에 의해 급격히 성장했다. 유독, 현 세기에서만 농업을 대학에서 배워야 하고 연구는 농장과 동떨어진 노동을 통해 진행된다. 오늘날 농부에 의해 실천적으로 얻어진 수많은 지식들은 연구실에서 연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과학적인 지식으로 취급받는다.

[소위 과학적이라는] 연구소에서 새로운 살충제가 개발되면, 완전히 성공했다고 주장하면서 재품을 내보낸다. 그러나 실제로 해충은 그 살충제에 내성이 생기고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다른 생물들이 죽거나 해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명확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 고려를 하지 않는다.

과학과 사회

인간 사회의 생산물로서 과학과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베스트셀러 과학 작가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의 책 [다윈 이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과학기술자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이론에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태를 반영한다. 사회의 특권 계층으로써 종종 그들은 기존의 사회 제도를 생물학적으로 운명 지워진 것이라고 방어한다.”

과학의 부정적인 면은 자본주의와 이윤에 복무하고, 자본주의의 단기주의(short-termism)를 반영한 결과이다. 과학에서 지배적인 사상 가치 그리고 우선순위는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과학자들은 종종 관찰 대상이 갖는 복잡한 상호관계를 무시하고 완전히 개별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변화는 종종 무시된다. 이렇게 과학은 자주 지나치게 단순화한 설명방식을 사용한다.

의학분야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은 예방보다는 치료를 강조 하고, 대부분의 질병은 하나의 원인과 치료 방법이 있다는 식으로 귀착된다. 그리고 직업과 사회적 직위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질병의 원인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결핵은 박테리아에 의해 발생되지만 사회적 조건들-더 좋은 집, 더 깨끗한 식수와 음식과 하수 시스템 등-을 개선하면 백신을 보급하기 전에도 결핵 발생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 오늘날 결핵은 다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자본주의 과학의 모순점을 잘 보여준다. 1995년에 3백 1천만명 - 기록한 이후에 최고 수치이다-의 사람들이 가난과 집이 없어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다.

또 다른 예로, 과학자들 사이에는 인간 유전자(genes) 지식이 과학을 통해 인간의 전부를 알게 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지나친 단순화와 환원주의자의 전형적인 예다. 과학자들이 ‘게이 유전자’ 심지어 ‘범죄 유전자’를 ‘발견’하는 것은 우파 정치인들의 구미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유전자 구성은 개별 개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미치는 복잡한 영향들-부모, 학교, 친구, 미디어 사회의 일반적인 전망과 훨씬 더 많은 것들-중 작은 부분일 뿐이다. (‘게이 유전자‘와 관련한 연구 결과는 과학적으로 명확한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환경 문제 또한 과학에 대한 이러한 협소한 시각에서 발생한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많은 요소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다. 앞뒤 연관관계를 배제하고 몇 개의 요소를 취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그 결과는 분명 재앙적일 수밖에 없다. 해결책들은 단순한 기술적인 조치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사회적 경제적인 요소와 정치적인 요소는 무시하고, 더욱이 노동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오존층 파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은 기업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과학의 응용 범위가 제한되는데, 오존층 파괴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1987년에 오존층 보호를 위해 CFC(이하 프레온 가스) 배출 축소에 관한 합의는 환경 보호를 위해 전 세계가 협력해야 한다는 좋은 사례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1992년에는 1996년까지 모든 프레온 가스 생산을 중단하게 하는 보다 강력한 합의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오존은 산소의 한 형태로, 지상에 남아 있으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지만 상층 대기에서는 태양의 해로운 빛(자외선)을 흡수한다. 프레온 가스는 특히 극지방의 차가운 상층 대기에서 반응해서 오존을 파괴한다. 오존이 부족하면 위험한 자외선이 지구상에 더 많이 침투하여 피부암, 백내장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식물 성장을 억제하고 수중 생물들을 죽게 한다. 이미 남부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와 관련된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많은 양들도 종기와 암에 걸렸고 수중 생명체들도 죽어가고 있다.

프레온 가스, 즉 염화불화탄소(chlorofluoro-carbons)는 처음 개발되었을 때 다른 화학물질과 잘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개발된 화학물질 중 매우 안전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환경친화적인 진보된 기술로 인식되었다. 프레온 가스는 냉장고, 산업용 세척제, 에어로졸 캔(스프레이)와 플라스틱 발포제를 만드는 등 폭넓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된 프레온 가스의 특성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안정된 프레온 가스는 지상에서 반응하지 않고 안전하게 높은 대기에 올라가서 오존층을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레온 가스에 배출 축소에 관한 합의는 계획한 것만큼 잘 진행되고 있지 않다. 1995-1996년 겨울에 북반구의 오존 양은 당시 가장 낮아져 지구상에 도달한 정상적인 자외선보다 훨씬 높게 관측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일상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업은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프레온 가스는 현재 마이애미를 통해 미국으로 수입되는 두 번째로 큰 밀수품이다. 작년에는 약 3만5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22,000톤 이상이 밀수입되었다. 대체물 또한 대부분 프레온가스 보다 약간 덜 위험한 정도일 뿐이다.

동시에, 미국정부의 우파 공화당은 1996년에 프레온 가스의 전면 금지 실행을 막기 위해 노력한 바 있다. 프레온 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존 파괴는 매우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3)

잘못된 기술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과학 분야도 엘리트들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 어떤 상황에서는 과학은 기존의 견해에 도전하고 탐구에 기초한 접근이라기보다는 어떤 때에는 새로운 종교로 보일 때도 있다. 상당히 많은 환경문제들은 지역 사람들의 경험을 무시하고, 서구 전문가들만이 과학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세계 많은 지역에서 환경 친화적인 취수와 자손 대대로 축적되어온 영농방법은 몇 천 마일 떨어져 있는 연구소에서 고안된 대규모 관개시설 프로젝트 혹은 슈퍼 작물을 때문에 무시되었다. 연구소에서 고안된 대부분의 결과들은 지역 주민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을 뿐더러 결국 재앙적인 결과만 낳고 있다.

명확하게 좋은 기술조차도 기술을 둘러싼 상호관계를 무시하면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과거 노르웨이 사람들은 인도의 캘랄라(Kerala)의 가난에 찌든 사람들을 돕고자 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전통적으로 소규모 원시 어로에 의존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전자 어류 탐색장치와 잡은 어류를 보관하기 위한 절연된 얼음 밴(van)이 있는 배를 선물하였다. 이 선물로 주민들의 생산성이 증가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역 주민들은 새로운 어획고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것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산물은 수출을 위해 새우와 가재에 더욱 집중되었고 지역 사업가가 자신의 얼음 공장을 세워 많은 돈을 벌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들을 돕기 위한 기술은 오히려 배고픈 사람들을 증가시켰다(4)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 추구 경향은 과학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심지어 지식까지도 싸고 팔아야 될 상품으로 취급받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 자금은 대기업이나 정부에서 제공받기 때문에, 대기업이나 정부는 과학을 잠재적으로 이윤을 높일 수 있는 분야로 이끌어가고 있다. 오늘날 기업 연구소는 단지 대기업을 위해 다른 수익원을 찾는 부서일 뿐이며, 대학의 공학과 순수과학 분야 역시 점차 기업의 연구개발 부서와 유사해져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대학 혹은 기업 연구소들 간에 연구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한다는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경쟁자들과 협력할 수 없다. 새로운 발견을 하면, 서로 경계해야하고 결과를 공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경쟁자에 의해 연구 개발된 것들도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중복 연구한다. 제약 산업에서 특히 심한데, 수백만 파운드의 자금과 수백 명 과학자들이 경쟁 회사에서 개발이 이미 성공한 약품을 복제하기 위해서 노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회에 유용한 새로운 생산물 개발 지체시키고, 왜곡시킨다. 실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면, 자본가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발명은 자본가에 의해 통제된다.]

종종 대기업은 환경파괴의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의 이면을 숨긴다. 아황산가스와 이산화질소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산성강화물, 대표적으로 산성비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정부와 공해물질 생산자는 이에 대해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만 한다.

이와 유사하게 일부 유기 화합물은 점점 훨씬 많은 수중 포유동물을 죽게 하고 수컷의 번식능력을 저하시키는 등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역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매년 3만의 새로운 화합물이 생겨나고 이와 유사한 화합물들도 수백만 개씩 생겨난다. 그 화합물중에는 석유제품과 살충제부터 맹독성의 다이옥신과 발암물질까지 포함하고 있다.

미국에서 발간된 책 『도둑맞은 우리들의 미래 Our Stolen Future』에서는 합성 화학물질의 영향에 대한 1만 건의 과학 논문과 보고서를 분석하였다. 이 책에서는 합성화학 물질은 남자의 정자 수를 줄이고 자궁속 태아의 뇌 발달을 방해한다고 결론 맺고 있다. 또한 그러한 화학물질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미 인구의 상당수가 화학물질 때문에 지능저하, 학습장애와 집중력 저하로 고통 받고 있다 .

이러한 물질의 상당수는 적절한 안전성 실험과 통제 없이 생산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과학에 대한 협소한 철학과 이윤에 대한 열망이 합쳐져 오직 무대책만을 내놓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오염자는 이윤을 챙기고 자연 파괴는 지속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로부터 과학과 기술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학 그 자체는 사회의 통제를 벗어나 세계를 파괴하는 괴물이 아니다. 통제를 벗어난 괴물이며 과학과 기술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진정한 민주적 통제만이 과학을 자본가적 이용과 우선순위와 협소한 철학의 쇠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죽이는 것

가장 적나라한 과학의 오용은 전쟁에 관련된 것이다. 1년에 8조 달러($800,000,000,000)이상이 무기에 지출된다. 이 액수는 지구상에 한 사람 당 160달러에 해당한다. 파키스탄의 군사비 지출은 농업, 교육 보건을 합친 액수의 6배를 지출하고 있다. 1970년대에 많은 국가에서 노동조합들, 예를 들어 영국의 루카스 항공(Lucas Aerospace)의 운수 일반 노조(the Transport and General Workers’ Union (TGWU))는 무기 산업에 사용된 기계류와 기술을 이용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 있게 변환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킨 바 있다.

루카스 항공 계획

1975년에 루카스 항공의 노동자들은 대규모의 인력감축을 이미 경험하였고 한차례 더 혹독한 일자리 감소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산업을 위한 대안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1976년에 출판하였다. 그 계획의 목적은 일자리를 보존하고 무기 생산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참여한 모든 노동자들은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자세하게 제공해 주었고, 노조 평의회(Trades‘ councils) 및 다른 노동조합과 커뮤니티 그룹은 어떤 생산물이 필요한지에 대해 세부 계획을 세웠다. 여러 루카스 현장의 현장위원회(shop stewards’ committees)는 이에 대해 자세하게 토론했고, 어떤 때에는 3천명의 노동자들이 모이는 대중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기존의 숙련된 노동력과 내부 보유 기술로 150 여개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들 중에서는 소방시설이나 채광 그리고 시추선 운영에 사용되는 원격 조정 장치; 대중 운송 수단의 대안적인 종류; 중장비용 전자기 페일세이프 브레이크; 태양열 주거 단지를 위한 태양전지 기술 그리고 장애인들을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었다.

루카스 항공 계획은 자동차 산업을 포함하여 공학 분야의 많은 다른 노동자 그룹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만약 이 회사가 사적으로 소유되어 있었다면, 이윤이 없는 상품들은 생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개발한 유용한 상품들 중 상당부분은 개발되는 과정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설계도면으로 끝나 버렸을 것이다.

방위 산업의 공공 소유는 당시 노동자 정부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였고, 그 시스템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시도한 이 루카스 계획은 방위산업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의 질과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바꾸어 놓았다(5)

무기 생산 노동자들과 산업노동자들의 숙련된 기술을 다른 유용한 기술로 전환하는 것은 환경과 관련해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미국에서 10억 달러 자금을 유도 미사일에 지출하는데, 이 것으로 12,1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같은 돈으로 대기와 수질 그리고 토양 오염을 제어하고자 하면 22,220개, 지역 수송에 사용하면 28,900개, 그리고 교육에 사용하면 84,7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아울러 모두 사회 전체적으로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더 유용하며 더 보람 있는 일들이다.

과학에 의해 개발된 핵무기와 다른 대량 파괴 무기들은 이 행성에서 환경에 가장 큰 위협으로 남아 있다. 일방적이든(개별국가에서) 혹은 상호적이든(다른 국가들 사이에 합의에 의해) 핵무기 폐기는 무조건 옹호되어야 한다. 아울러 태평양에서의 프랑스의 핵무기실험과 같은 쓸모없고 환경파괴적인 핵실험들은 모두 종식시켜야 한다. 당시 프랑스 핵실험은 단지 프랑스 지배계급의 명성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사람을 효율적으로 살해하기위한 기술 개발과 같은 연구 남용보다 훨씬 나쁜 것은 직접적인 전쟁 남용이다. 전쟁은 환경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베트남은 미국에 의해 아주 효율적(?)으로 융단 폭격을 받았다. -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미국의 연합군이 독일에 떨어뜨린 폭탄보다 2.5 배에 해당하는 양의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고, 1천 9백만 갤런(약 7천6백만 리터)의 고엽제를 그 나라에 쏟아 부었다. 그 영향은 100년 이상 미치고 있다. 이미 방대한 영역의 살림 지역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많은 아이들이 태아상태에서 부상당했다. 그리고 토양과 물은 독성물질로 장기간 오염되었다. 오늘날에도 세계에 약 4천만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피난하여 지옥 같은 전쟁 피난처에서 살고 있다.

환경 문제는 미래에 새로운 전쟁을 야기할 것이다. 물을 둘러싼 전쟁은 전면전은 아니지만 중동에서 인도대륙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나일강에서는 이집트와 나일강 상류 국가들 사이에 분쟁이 있다. 가난, 불평등 그리고 환경문제의 악화는 역시 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긴장을 증가시키고 있다. 세계가 권력과 이익을 위해 달려간다면 미래 전쟁의 공포는 항상 따라 다닐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연구 개발에 종사하는 과학자와 공학자의 3분의 1이 군사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 과학자들의 기술을, 그리고 전 세계에서 해마다 무기에 지출되는 8천억 달러 중 일부를 만약 인간의 생존을 위해 사용한다면 매우 효과적으로 환경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PSSP

-------------------------------------
참고 문헌
(1) Living in the environment, Miller, 1994
(2) Miller; Scientific American, July 1995; Morehouse in the Ecologist, September 1994
(3) New Scientist, 30/9/95
(4) How the other half dies, Susan George, Penguin, 1976
(5) Militant International Review September 1984: review of ‘The Lucas Plan: A New Trade Unionism in the making?’, Hillary Wainwright and Dave Elliot, Alison and Busby 1982
(6) Swords to Ploughshares, Renners, Worldwatch Institute
주제어
생태 이론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