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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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9.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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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의 저녁식사?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하여

이진숙 |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집행위원
다양한 운동공간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가상으로 구성했던 ‘김혜정씨 이야기’, 모성이 여성들의 자발적 선택의 영역에 자리잡기 위한 조건들을 시론적으로 밝혀주었던 ‘여성의 권리로서 모성을 사고하기 위하여’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이 글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사회진보연대와 그 (인근?)의 여성활동가들이 큰 주제를 놓고 벌이는 토론의 정리물이다. 딱히 이론적인 논의를 하는 것도, 특별한 토론의 형식이 정해져 있지도 않은 그야말로 자유토론이다 보니, 정리를 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다. 물론 형식보다는 ‘아는 것’으로 충분히 해명되지 않거나, 이제껏 언어화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았던 ‘경험한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더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지난달의 토론 주제는 ‘여성과 섹슈얼리티’. 그리고 이날의 참석자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비혼의 여성활동가들. 이 정도면 모인 풍경이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것도 같다. 영화로 따진다면 아마도 ‘처녀들의 저녁식사’ 같은? 그러나,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상상하지는 마시라. 모인다고 거저 식사가 되는 것은 아니니. 메뉴를 정하고, 밥상 차리고 모두가 맛있게 식사하는 것까지 이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가족관계처럼 함께 밥 먹는 것이 의무이자 행복의 표상처럼 강제되는 것이 아닌 관계, 대부분 혼자 밥 먹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리고 의무나 행복의 미소가 강요되지 않더라도 함께 식사하는 것이 언제라도 가능하고, 기분 좋고 맛있게 식사할 수 있는 그런 관계와 조건을 함께 만드는 일이다.

왜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려 하는가

우리는 왜 모여서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여성지를 포함한 수많은 매체들이 주도하는 사회적 성 담론에서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차고 넘치는 것이 현실이다. 섹슈얼리티라는 화두는 이제 페미니즘의 경계를 저만치 넘어가 버렸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가 ‘진실게임’ 따위에나 등장하는 은밀한 무엇이거나 손가락질 받을 만한 무언가도 아니다. 남들도 다 하는 얘기, 페미니스트로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뭔가 다르게 얘기해야 한다는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질문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섹슈얼리티라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을 실현하는 문제라면, 더욱이 여성에게 있어 임신과 출산이라는 그들이 담당하는 고유한 역할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에 있어서 이것은 분명히도 권리의 문제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역사, 페미니즘의 역사, 그리고 우리가 마주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현실에서도 이것은 한번도 권리로서 실현된 적이 없었다. 여성들에게 섹슈얼리티는 임신의 위험, (남녀)관계의 왜곡, 그리고 성폭력을 연상하게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연결되고 있는 실현되기 곤란한, 그래서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한 무언가이다. 이러한 ‘잠재적인 위험’들은 여성들이 섹슈얼리티를 권리로서 사고하고 실현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결국 현실을 변화시키는 문제라면, 그리고 여성들의 경험과 발언들이 그 변화를 만드는 힘이라고 했을 때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란 무엇인지, 이것을 권리로 정의한다고 했을 때 그 내용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남성의 섹슈얼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까지 이어진다.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우리가 토론하고자 했던 것에는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권리로 사고되지 않는 현실, 여성의 섹슈얼리티란 무엇이고, 그것을 권리화할 때 핵심은 무엇인가, 남성의 섹슈얼리티라는 것이 별도로 있는 것이라면 여성의 섹슈얼리티와는 어떻게 관계맺음 되어야 하는가.

경험과 기억들

섹슈얼리티에 대한 경험적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의외로 아주 어린 시절의 경험들에까지 소급되곤 한다. 이 어린 시절의 경험들 대부분은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사후적으로 의미가 해석되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것들은 여전히 의미가 모호한 채로 남겨져 있다. 토론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기억들에는 물론 학교의 남자 친구들과 선생님, 친척, 버스간이나 동네에서 만난 ‘아저씨’들에 의한 성폭력들도 다수이다. 어린 시절에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경험한 일들이나, 당시의 의미를 떠나 섹슈얼리티 차원의 해석이 가능한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오래도록 지속되고, 계기가 생길 때마다 돌발적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이런 기억들을 프로이드 식으로 해석하자면야 모든 것이 욕망, 거세, 콤플렉스 같은 개념들로 의미화 되겠지만 여기서 가능한 문제도, 또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진 것도 아닌 것인 만큼 이쯤에서만 언급하는 것으로 하자.
경험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거기에는 지난 연애관계에 대한, 연애관계와는 또 다르게 맺었던 어떤 관계에 대한, 소소하게 일상에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경험과 기억들 대부분은 유쾌하다거나 낭만적이거나 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런데도 무슨 주홍글씨처럼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렇게 말한다면 최근 몇 년 사이 운동사회 내에서 지속되고 있는 ‘성폭력’을 둘러싼 논쟁을 떠올리며, 결국 사후적인 기억의 조작 아니냐,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인 만큼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 아니냐는 불만이 제기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러한 논쟁들이 여성들에게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영역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들이 섹슈얼리티가 권리로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원치 않는 임신이나 성폭력과 같은 ‘잠재적인 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여성이 성적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욕망이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남성중심적인 성담론, 그것의 개별적인 재현 속에서 어떻게 미끄러지고 배제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성들은 하나같이 남성의 성욕에 여성의 성욕을 일방적으로 끼워 맞추는 것이 지금까지 성욕을 다루어 오는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간혹 여성의 성욕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더라도 언제나 결론은 남성의 성욕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라는 ‘방법론’이었지, 여성의 성욕이 무엇인지, 어떤 조건 하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를 관심사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여성들의 경험은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이러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해 준다.

또 경험과 기억들

섹슈얼리티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이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섹슈얼리티는 성성(性性), 성욕 등이 중심적인 개념이라 하는데, 문제는 이와 같은 사전적 의미 규정에 있지 않다. 앞에서 통일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을 반영하는 것일텐데, 섹슈얼리티에 있어서 성욕의 위치가 중심적이라 하더라도, 섹슈얼리티가 성욕으로 전적으로 환원되는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또한 섹슈얼리티와 성욕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한다 해도 남는 문제는 있는데, 성욕이라는 것을 또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다. 이 사회가 만들어온 성욕에 대한 남근중심적 이해가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지배적인 성욕개념화에 대한 비판을 경유하는 방식이 아닌, 여성의 성욕에 대한 독자적인 정의의 문제일 것이다.
상이한 경험과 이해를 나누는 과정에서 성관계를 특화하는 섹슈얼리티가 아닌, 이성(異性)적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상호 승인하는 관계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모호하지만 굳이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남녀간에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뭐랄까 어떤 이성적인 긴장이나 호감과 같은 것들을 경유하거나 혹은 필요조건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이러한 관계의 지위는 이중적인데, 그 자체가 어떤 특권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이라기보다 현실의 남녀관계가 보이는 소통의 불가능성, 그것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 특별한 사례 일 수 있다. 다른 한편 현실의 남녀관계가 (애인관계를 포함하여) 성애화된 관계이거나 무성적 관계라는 것을 환기한다면, 성차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남녀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시작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나온 하나의 해석일 수 있다. 현실에서 이러한 관계가 일반적으로 경험되는 것도 아니고, 그 성격을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다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이러한 토론에서 제기된 질문은 섹슈얼리티라는 것은 무엇인가, 섹슈얼리티를 정의하는 데 있어 성관계를 포함한 육체적인 관계는 필요조건인가 라는 것. 물론 이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섹슈얼리티를 실현하는 방식이 남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공유된다. 즉 남성의 경우 최종적으로(?) 삽입중심의 성관계 형태를 지향하지만,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는 그와 같은 방식의 종착점을 사고하지 않으며 관계의 재조작화와 동시적인 과정이다. 이것은 남성의 섹슈얼리티란 무엇인가의 문제와 연관된다. 이것을 규정하기 위한 별도의 토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역사와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여성들의 성욕과 유사하거나 혹은 대칭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

가족, 애인관계가 필요조건이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에서 가족과 연애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대부분 성적(초)자유주의를 생각하기가 일쑤이다. 현실에서 그러한 실천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고민의 틀이 가족, 나아가 지배적인 남녀관계로서의 연애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는 점을 사고해야 한다. 역사적 가족형태가 가지고 있는 여러 차원에서의 여성억압 중의 하나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가족형태 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강제해 왔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관계에서의 섹슈얼리티라는 것도 다르지 않은데, 일반적인 연애관계가 잠정적으로는 그것의 결론으로 결혼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의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는, 연애관계를 포함한 남녀관계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태도들은 일견 매우 개방적인데, 여성들의 순수하게 자발적인 선택인가 하는 측면에서, 다른 한편 배타성과 소유욕에 기반을 둔, 연애관계라는 형태로 구조화된 남녀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비판이냐 라는 측면에서의 평가가 필요하다. 여성들이 섹슈얼리티를 말함에 있어 가족형태를 정점으로 하는 배타적인 남녀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많은)다른 관계에서의 섹슈얼리티의 실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것이 권리로서 실현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탐색이다. 남녀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섹슈얼리티를 권리로서 사고한다는 것이 무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연관되는 문제인데, 가족관계나 연애관계 내부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한했던 역사적 시도는 결국, 임신과 출산이라는 재생산의 의무로서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강제하면서, 여성의 성욕을 남성의 그것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구조화하는 것이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권리로 실현될 수 있는 출발점

역사적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했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시절이 있는가 하면, 출산과의 연관 속에서만 사고되던 때가 있었다. 경악스럽지만
과거 어떤 시절에는 여성의 성욕은 통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시장을 비롯한 여성의 사회진출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통용되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부정하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따라 기능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시도들이다. 이와 반대편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존재를 드러내고 지위를 부여하고, 권리로서 실현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시도들도 있었지만,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있어 오늘날의 현실, 그리고 짧은 토론을 통해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은 이러한 역사의 면면한 유산들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태도나 그의 실현을 위한 조건들이 여성들에게 매우 억압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성들이 권리로서 섹슈얼리티를 말한다는 것은 성적관계에서의 자유를 넘어서는 것이며, 사회적 인식의 관대함을 요구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여성의 고유한 위험, 가족, 이러한 말들 속에 섹슈얼리티가 놓여 있다는 것은 결국 지금과는 다른 남녀관계가 조직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남근주의로 포섭되는 것이 아닌, 그 고유성과 독자성을 존중받는 것을 의미한다. 식상한 결론이지만 이것은 어느 일방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 여성과 남성 모두 성차를 존중하는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을 진행해야 하며,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자율성의 영역에 놓이게 하기 위한 조건을 함께 만들어야 할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토대 위에서 남성의 섹슈얼리티 역시 재조직되어야 한다.

사족처럼 달자면, 토론 과정에서 나왔던 다양하고 생생한 여성들의 경험이 제한적으로 서술된 것이 무척 아쉽다. 정리한 사람의 능력문제도 있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이 수용되는 현실이 미덥지 못한 탓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투박하고 제한적으로 정리된 이 글은 하나이면서도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이 글에서 다루는 내용,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여성들의 발언이 조직되고 수용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영화에 대한 비유가 앞부분에 나왔는데, 토론과정에서 이 영화(물론 이외에도 ‘바람난 가족’,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여러 ‘멜로’ 영화들이 언급되었다)가 실제로 인용되었던 맥락 역시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토론이 가지는 의미와 성격,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태도들.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이해한다면, 이러한 주제에 대한 여성들의 대화와 토론이 더 이상 ‘고백’이나 ‘수다’의 차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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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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