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0.39호

자본에 체제내화 되지 않는 물리적 투쟁을 조직하자!

박경석 | 노들 장애인 야간학교장
개 같은 장애인의 삶일 뿐이다.

“부모님이 배워서 뭐하냐고 그래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해요. 배우지 말고 그냥 집에서 개처럼 밥이나 먹고 있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요”

몇 일전 한 중증장애인에게서 온 문자의 내용이다. 그 장애인은 벌써 20대 후반의 나이다. 그는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해 집구석에서 혼자 한글과 산수를 공부하여 초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통과하였다. 그가 한번 세상 밖으로 나오려면 한 달에 한번정도 자원봉사단체의 행사가 있을 때, 그나마 그를 이동시켜줄 자원봉사자가 있을 때뿐이었다. 집에서 부모님은 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하신다. 먼저 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것이 싫고, 돌아다니면 세상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을 하니 그냥 집에서 가만히 있기를 원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 친구의 표현으로 ‘개처럼 밥이나 먹고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야학에서 늦게나마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데 집에서 부모님이 그에게 한 말이었다.
바로 이 땅에서 장애인의 삶은 바로 개(dog) 같은 삶이다. 모가지에 쇠사슬을 묶어두고 밥만 먹여주는 그러한 삶이다. 모가지의 쇠사슬은 바로 사회가 장애인에게 던져준 단절이요 소외였다. 모든 것이 비장애인중심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이 사회에서 장애인을 철저히 배제시켜버린 것이다. 모든 생활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여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수용시설을 지어 장애인 살게 하는 것이 이 정부와 사회가 그나마 자신들의 냄새나는 똥구멍에 향수를 뿌릴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던 것이다. 장애인복지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그렇다. 장애인은 개였다. 인간으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노동할 권리조차도 보장되지 못했던 그러한 개 같은 삶을 강요당해왔다. 오이도역 장애인추락참사, 발산역 장애인추락참사, 송내역 장애인추락참사 ■■. 이것은 단지 장애인의 차별을 상징하는 일부분일 뿐이었다. 모든 일상에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 받는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숨이 막혀온다. 바로 자신의 부모님에게조차도 자식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사회 속에서 철저히 격리 당한 채 집구석에만 쳐 박혀 20년, 30년을 지내야하는 현실이 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이 모든 부담을 개인이나 가족에게 전가하거나, 수용시설로 해결하였다.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어야한다.

오이도역 장애인추락참사를 계기로 중증장애인들이 불꽃처럼 들불처럼 이 정부와 사회를 향해 온몸을 던지는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 투쟁의 처음이 서울역 지하철 철로점거였다. 오이도역 장애인추락참사에 대하여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던 사실에 대하여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 3년 동안 투쟁은 계속되었다. 세종로 도로점거, 종로 도로점거, 서울시청 식당 점거, 버스점거,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서울시 장애인복지과 점거, 서울시청역 지하철 철로점거, 광화문역 지하철 철로점거.
지난한 투쟁의 결과로 서울시로부터 2004년까지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설치 약속을 받았다. 또한 저상버스가 서울시내 일반시내버스노선에 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을 지금은 시범운행을 하고 있다. 일정정도 정책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정책은 눈 가리고 아옹하듯 장애인을 기만하는 것이었다.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 내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조건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단순한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을 미화시키는 수준에서 단순한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동권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난 경찰의 대응

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와 경찰의 대응은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보고 분리적 대응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장애인들이 도로를 점거 할 때면 항상 비장애인들 중심으로 연행하여 24시간 내지는 48시간을 잡아두고 벌금을 부과하였다. 장애인들은 인도로 끌어내고 해산할 때까지 고착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일례로 지하철 점거 투쟁을 4차례에 걸쳐 진행했으나 경찰은 점거 당사자인 장애인은 구속하지 않고 철로점거를 지원해준 비장애인인 김도현 동지를 장애인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구속하였다. 경찰은 지하철을 점거한 중증장애인인 당사자를 구속하지 않고 비장애인을 구속한 것은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고려한 것이다. 그 첫째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철저히 분리시키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는 중증장애인을 구속하여 수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로 중증장애인을 구속할 만큼 이 정부와 사회는 과연 현실법의 적용으로만 그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알량한 자책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넷째로 여전히 장애인의 목숨 건 투쟁일지라도 ‘병신 육갑한다’는 정도의 반응일 뿐인 것이다. 이모든 것이 서로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경찰의 탄압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투쟁을 통해서 본 장애운동의 방향

지금까지 장애운동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인권을, 복지를 운운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부분 장애인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식개선을 언급하여 왔고 그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내어왔다. 언제나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 사랑과 봉사의 이데올로기에 장애인의 모습을 연출하여 비장애인의 시혜와 동정의 코드를 맞추려 열심히 노력했다.
또 한편에서는 장애인당사자주의를 언급하면서 장애인의 사회참여와 정책결정에서의 주도권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장애인들이 직면하는 문제들의 핵심적 근원은 편견 또는 차별적 태도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장애인들이 직면하는 장벽, 배제와 불평등을 야기하는 생산양식과 구제적인 사회관계로부터 관심을 멀게 하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이들 집단은 철저히 자신을 체제내화 시키면서 정부와의 아름다운 파터너쉽을 형성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 도하고, 장애인당사자를 팔아 자기 집단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쁘기도 하다.
지금까지 장애인이동권연대의 투쟁은 오직 투쟁만이 쟁취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지난한 투쟁을 통해 서울시의 기본적인 입장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 또한 자본의 손바닥 안에서 화장품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선에서의 변화인 것이었다. 그리고 장애인문제에 대한 사회의 이중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사회는 장애인들을 기본적으로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침해하면 당장 병신 육갑하는 개 취급을 했다. 지하철을 점거한 중증장애인을 개처럼 끌고 나오듯이 ■■. 바로 그것이 장애인에 대한 이 사회의 본질인 것이다.
이제 장애인에게 개 같은 인생을 강요하는 이 사회에 대한 본질이 자본의 탐욕에 기인한다는 것을 양파껍질처럼 낱낱이 밝혀내야한다. 그리고 장애운동이 자본에 체재내화 되지 않는 든든한 물리적 투쟁으로 대중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PSSP
주제어
빈민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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