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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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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1] 국제주의 : 연표

페리 앤더슨 | 번역: 정지영, 류주형, 임필수
국제주의만큼 매우 규범적이며 동시에 다의적인 정치적 통념은 거의 없다. 오늘날, 서구의 공식적 담론은 오랫동안 좌파의 등록상표였던 이 용어에 대한 호소로 가득하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간에, 국제주의의 의미는 민족주의라는 다소 앞서 존재하는 개념에 논리적으로 의존한다. 왜냐하면 국제주의는 오직 민족주의의 대립물을 가리키기 위한 배후 구조로서 통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모든 근대의 정치 현상들 중에서 그 가치를 두고 이론(異論)이 가장 크게 존재한다는 개념이기도 하다.―민족주의의 기록에 대한 판단은 대개 찬양에서 저주까지 180°로 매우 다양하다. 그렇지만 민족주의에 함축된 의미를 둘러싼 정신분열증이 국제주의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국제주의에 내포된 의미는 거의 언제나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주의를 승인하는 것의 의미를 확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만약 아무도 오늘날 민족주의의 현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면―그러나 민족주의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새 천년의 입구에서 국제주의의 지위는 다소간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편에서 국제주의를 가치로서 요구하고 있지만, 아무런 항의 없이 누가 국제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런 역설의 뒷면에는 조사되지 않은 역사가 있다. 민족주의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도 간결한 정의를 제시한 사람은 위대한 민족 지도자였던 마사리크[역주-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민족주의는 민족을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여기는 견해를 의미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그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민족주의 추종자가 어떠한 환경이나 어떠한 맥락에서도 다른 소속이나 동일성을 배제하기 위해 오로지 또는 무엇보다도 민족만을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민족주의의 의미는 항상 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식은 지금까지 결핍된 것 즉 국제주의의 기록을 경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국제주의에 관해 충분히 최소한 중립적인 [민족주의와 짝이 되는] 상대물로서의 정의를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국제주의라는 용어는 더 넓은 공동체를 향해 민족을 초월하려는 모든 견해나 실천에 적용될 수 있고, 민족들은 계속해서 그 공동체의 주된 단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실용적인 정의의 장점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에 대한 수많은 전통적 선입견을 불필요하게 하고, 또 양자의 상호관계를 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약 250년 전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근대적 형태가 처음 출현한 이래, 양자는 각각 일련의 변형을 겪어왔다. 어떻게 이런 변형을 가장 잘 인식할 수 있을까? 이 아래에서 나는 시대 구분을 제안할 것이다. 역사적 시간을 범주적 계열로 총체적으로 분할하려는 모든 시도에는 명백한 함정이 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 구분은 항상 임의적인 단순화를 포함하며, 그래서 적지 않은 뛰어난 역사가들은 역사적 시간이 전체적 과정이라며 시대 구분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말하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출판될 저작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 우리는 시대구분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글에서 설정된 도식은 약간의 간략한 기록에만 한정되어 있다. 이 도식의 목적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의 상호관계들을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국면들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국면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지배적인 것들’(dominants)간의 쌍으로 정의하였다. ‘지배적’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한계를 의미한다. 각각의 국면에서 ‘지배적’인 것을 속속들이 규명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것은 각 시대의 가장 새롭고 두드러진 형태들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들은 항상 일련의 반(反)경향들과 하위경향들을 포함하지만, 단순화를 위해서 단지 잠정적으로 그것들을 논외로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채택한 방식은 변화하여온 국제주의의 역사적인 판본들을 역사적으로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민족주의의 연속적인 이념형들과 짝을 짓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이념형은 다음의 다섯 가지의 좌표로 추적할 수 있다. 1) 각각의 연속적인 민족주의의 변종들과 동시대의, 또는 가장 유력한 자본의 유형, 2) 민족주의의 지리학적 주요 구역, 3) 널리 퍼져있는 철학적 언어, 4) 민족에 대한 유효한 정의, 5) 피지배계급과 특정 민족주의의 관계. 이 글에서 제시하는 도식의 전제는 국제주의의 역사는 이러한 민족주의의 좌표들에 상응하여 가장 자세히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시대에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에는 하나 이상의 변종이 있었다. 그리고 지배적인 형태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던 것처럼, 언제나 그러한 변종들 사이에도 중요한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엉켜있는 실타래 속에서도 지배적인 것들의 계보는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1. 애국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

세속적인 힘으로서 근대의 민족적 정서의 기원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용어로서,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을 처음 탄생시킨 두 개의 거대한 혁명―영국에 맞선 북미 식민지의 반란과 프랑스 절대주의의 전복―이 분출했다.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은 집합적 인민으로서의 민족이라는 우리의 관념을 실제로 발명했다. 두 혁명은 그 시대의 가장 앞선 사회의 산물이었다. 두 혁명의 이데올로기는 16세기 베네룩스 삼국과 17세기 영국의 혁명처럼 초기 유럽의 혁명들에 의해 고취된 세계관과 극적으로 단절했다. 베네룩스와 영국의 혁명은 철저히 종교적인 반란이었고, 인민의 이름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은 아직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아직 자본이 기본적으로 상업적이거나 농업적이었다. 그러므로 상업, 농업 엘리트들은 대체로 도시와 시골에서 직접 생산자들―달리 말해 주로 장인과 경작자로 구성된 인민 대중―을 그들의 뒤에서 동원할 수 있었다. 그 때는, 나중에 기계제 대공업이 그 사이를 벌리게 할 매뉴팩처의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균열이 아직 일반적인 사회 현상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단일한 범주가 상승하는 계급과 종속적인 계급 모두를 통념적으로 포용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애국주의(patriotism)였다. 미래의 미합중국과 프랑스의 투사들은 스스로를 ‘애국자들’이라고 불렀고, 그 용어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로마와 같은 고전적인 고대 공화국의 이미지와 유산에 의해 고취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애국주의 철학적 언어는 무엇이었나? 잘 알려진 것처럼, 그것은 계몽주의의 특유한 합리주의였다. 계몽주의의 최고 웅변가들―루쏘, 꽁도르세, 페인, 제퍼슨―은 공통 이성을 전통에, 집합적 의식을 육중한 관습에 대결시켰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민족에 관한 지배적인 정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이상이었다. 민족은 자유로운 시민이 창조할 무엇이었다. 민족은 영구적 현실로서 시민들의 개입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위적’ 특권이나 제한이 아닌 ‘자연적’ 권리에 기초한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로서 출현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유는 완전한 의미에서 공적 생활에 대한 시민의 참여로 이해되었다.

되돌아보면, 이러한 계몽주의 시대의 애국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보편주의였다. 전형적으로 그것은 문명화된 민족들의 이해들을 근본적인 조화 (문명화되지 않은 인민들은 별도의 문제였다), 전제정과 미신에 맞선 공동의 투쟁에서의 잠재적인 통일로 간주되었다. 낙관적인 합리주의의 전형은 칸트의 에세이, 『영구평화를 위하여』에서의 논증, 즉 왕자들 사이의 경쟁이 전쟁의 유일한 주된 원인이고, 공화정 체제가 확장되면서 왕위에 대한 야망이 과거의 것이 되었으므로 유럽의 인민들은 더 이상 서로 싸울 이유가 없게 될 것이라는 논증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애국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의 이상은 함께 행진하였고, 그 가치의 지평에서 볼 때 둘 사이의 모순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가치의 지평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삶과 행동에서도 상당히 그러했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에서의 라파예트의 역할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는 13개 식민지[역주-독립 전 미국 동부 13개 주]를 위한 팜플렛의 저자이자 국민공회에서 지롱드파의 대표부였던 페인이 필라델피아와 파리에서 보여준 삶과 행동을 생각해 보라. 그 남부 지역으로, 미국과 프랑스 격변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지대인 스페니쉬 아메리카의 독립전쟁의 해방자들―볼리바르, 수크레, 산 마르틴―은 지역적인 박애의 정신으로 멀리 있는 또는 이웃한 땅을 해방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지역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대륙을 가로질러 투쟁했다.


2.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와 제1인터내셔널

중남미에서 투쟁의 시기는 18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 무렵 유럽에서 계몽주의적인 애국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은 나폴레옹의 군사적 팽창주의로 인해 그 이념이 타락함으로써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제1제정에 맞서는 투쟁이 초래한 것은 스페인, 독일, 러시아에서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보수적이거나 종교적인 색조를 지닌 민족적인 저항이나, 왕정복고 시기의 유럽 군주들의 국제적인 제휴와 같은 각각의 반-혁명적인 판본들이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다루는 연속적인 국면들을 중단하는 일련의 ‘하위-지배적인 것’(subdominants)의 첫 번째 사례를 제공한다.

하지만 세계는 비엔나 회의에서 복구되었고, 신성동맹의 보호를 받으며 여전히 구래의 원리에 복종하였다. 여전히 왕조의 정통성과 종교적 신념에 기초했던 구체제에 대항하여 곧 새로운 지형이 출현했다 ― 약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애국주의와 구별되는 ‘민족주의’라고 처음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점점 더 산업혁명이 지배하게 된 세계에서 유산계급이 자신의 국가를 형성하려는 열망의 표출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산업혁명의 진원지인 영국보다 덜 발전된 지역이나 또는 그 뒤편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 계급은 무엇보다도 그 당시 주도적 산업국가들을 모방하는데―즉 따라잡는데―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유형의 민족주의의 폭풍지대는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였다. 그들의 수사적인 언어는 유럽 낭만주의에서 유래했고, 주요한 대변자들은 시인과 소설가들이었다―페퇴피)[역주-헝가리의 시인], 미츠키에비치[역주-폴란드의 시인], 만초니[이탈리아의 시인․소설가]는 이 시대의 인물이었다. 전형적으로 이들은 그 이전의 합리주의적 애국주의의 지적 작업을 뒤집었고, 그들 나라의 중세나 전(全)근대 과거에 대한 숭배를 들여왔다. 낭만주의적인 민족주의에게 민족의 본질적 정의는 더 이상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언어였다. 언어는 과거 세대들의 경험이 축적되어 재현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문화적인 특성에 대한 옹호의 선지자는 헤르더였다. 그러나 1830~70년대 꽃을 피웠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가 초기 애국주의의 다수의 기호들을 전도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가정을 공유하였다. 발트해 지역 출신인 헤르더는 독일 문화를 찬양하면서 이웃의 슬라브의 문화를 깎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독일과) 구별되는 유산으로 정당하게 칭송했다.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의 정신 세계는 더 이상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했고, 암묵적으로 일종의 분화된 보편주의를 옹호했다.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의 첫 번째 정치적인 성취가 왕정복고의 평화를 깬 그리스와 벨기에 혁명이라면, 가장 웅장한 표현은 1848년 ‘인민의 봄’이었다. 그 해 유럽을 뒤흔든 연속적인 혁명적 격변들에서 민족적 소요는 대륙을 가로질러 국제적으로 전염되었고, 파리에서 비엔나로, 베를린에서 로마로, 밀라노에서 부다페스트로 바리케이드가 이어졌다. 민족 통일이나 지배에서의 독립을 위한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의 투쟁에서, 물론 1848년은 실패한 자유주의 혁명의 해였지만, 『공산주의자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에서 선언된 것과 같이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투쟁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그 둘이 겹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에 대응한 국제주의의 형성은 1차 노동자 인터내셔널에서 그들의 상징적인 발상지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노동자 인터내셔널의―그리고 1848년의 대중적 도시봉기의 물결의―사회적 기초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매우 명확하다. 그것은 공장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전(全)산업적인 장인들에게 있었다. 이들은 생산 수단―도구와 기술―을 소유한 계급이었고, 이들은 높은 수준의 지식을 누렸고, 대체로 수도의 중심부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지리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젊은 도제들이 나라 안팎을 돌아다녔던 사실은 상징적이다. 1848년 파리에는 3만 명의 독일 장인들이 있었다―하이네는 모든 골목에서 독일 말을 들을 수 있었고 말하였다. 런던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에서 일하고 있는 독일 장인들을 위해 선언을 작성하였다. 베를린에는 폴란드나 스위스의 장인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비엔나에는 체코와 이탈리아의 장인들이 흩어져 있었다.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 설립 회의에서 어느 목수와 제화업자 옆에 서게 되었다. 달리 말해, 이러한 형태의 특징은 (문화적인 자신감과 높은 정치 관념을 포함하는) 사회적 탈고립과 (외국 생활을 직접 경험할 가능성과 인민들 사이의 연대감을 포함하는) 영토적인 이동성의 역설적인 결합이었다. 이는 민족적인 투쟁에서 국제적인 투쟁으로, 그리고 국제적인 투쟁에서 사회적인 투쟁으로 나아가게 하는 구성원이었다. 그 전형적인 인물은 쥬세페 가리발디였다. 그는 평범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선원으로 인생을 출발했다. 그는 생시몽주의 망명자 그룹을 통해 국제주의적 이념에 귀의했고―이는 그의 첫 번째 정치 신념이었다―그가 일했던 흑해로 가는 배에서 프랑스로부터 추방당했다.

물론 가리발디는 1848년 로마 공화국의 위대한 군사적, 정치적 영웅이 되었고, 이탈리아 통일운동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를 이끈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가장 관대한 측면을 체현했다. 하지만 공화국의 패배 이후, 그는 한때 선장으로 일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브라질과 우루과이에서 진보적인 대의를 위해 군인으로서 10년 동안 싸웠다. 그는 부르봉 왕가의 지배로부터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해방시킨 원정대를 이끌기 위해 돌아왔고, 이탈리아 민족 통일의 결말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1860년대 링컨은 그를 초청해서 미국 내전 동안 북부군의 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그는 노예제에 대한 링컨의 태도를 정확히 의심했고 제안을 거절했다. 그 반면에 그는 1871년 독일 군대에 맞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방어를 위해 사령관직을 수락했으며 프랑스 세 도시에서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파리 꼬뮌 이후 그는 공개적으로 제1인터내셔널과 마찌니(Mazzini) 스캔들을 지지했다. 가리발디라는 역사적인 인물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유럽 장인의 최고의 가치의 구현을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민족주의적, 국제주의적인 충동이 긴장 없이 공존하였다.


3. 쇼비니즘과 제2인터내셔널

1860년대의 전환 이후, 유산계급은 과거에 신봉하거나―피에몬테의 경우―교묘하게 조작했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를 버렸다. 유럽의 지주들과 상인들은 군대의 편성과 엄격한 정치적 통제를 통해 부르주아 혁명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아래가 아니라 위로부터 완수하는 것으로 나아갔다―군대편성과 정치적 통제는 비스마르크가 이룩한 독일 통일의 보증서였다. 그 후로, 서구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는 갑자기 변화했다. 이제 처음으로 진정한 쇼비니즘(chauvinism)―사회적 가상 속에서 오랜 동안 배양되어온―이 주요 산업국가인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서 널리 퍼져있는 담론과 분위기가 되었다. 이 때는 체임벌린, 페리, 뷜로, 맥킨리, 크리스피와 같은 정치인들의 시대였다. 이 나라들에서 자본은 점차 더 큰 기업에 집적되었고, 내부 시장의 독점적 통제를 추구하거나 식민지 합병을 강요했다―그 시나리오는 홉슨과 힐퍼딩이 어느 정도 보여 주었다. 새로운 팽창주의를 동반하고 보증하는 이러한 쇼비니즘은 전형적으로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에서 용어 형태를 빌려왔다. 그것의 지적인 언어는 본질적으로 실증주의였고, 민족에 대한 정의는 점차 인종에 관한 것이 되었다―즉, 문화적․물리적 요소들의 혼합물이었고, 앞서의 것들에 비해 그 사용범위에서 분명히 덜 이념적이었다. 인간들의 관계는 ‘적자생존’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이런 종류의 강대국들―또는 강대국이 될 나라들―의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체계 중심부의 외부 지역, 예를 들어 멕시코의 포르피리아토나 아르헨티나의 로카의 지배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고, 처음으로 다른 민족 또는 국민들에 대해 직접적인 적대감을 설교했다. 좋은 시절(Belle Epoque)의 쇼비니즘은 우월성에 관한 제국주의적 담론이었다. 그것의 기능은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시대의 제국주의들간의 경쟁을 강화하고 식민지 정복의 임무를 위해 각 국가의 인민을 동원하는데 봉사했다. 다른 한편, 그것은 대중들을 자본주의 질서의 정치적 구조 내로 통합하는데 봉사했는데, 그 시기에는 선거권이 노동자계급 부문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쇼비니즘의 군림은 선거권 확대의 위험을 중화하는 효과를 내었는데, 사회적 긴장을 계급적 적대로부터 민족적 적대로 전위하였다. 이 시대 선거 개혁의 설계사가 종종 새로운 주전론(jingoism)의 선동가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영국의 디즈레일리, 독일의 비스마르크, 이탈리아의 기올리띠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이 국면에서 국제주의의 지배적 형태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다―그것은 사회주의 정당들의 제2인터내셔널에서 발견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에 직접 반대하는 국제주의의 형태를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다―그것은 과거처럼 [지배적 민족주의와] 보완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대조적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이 인터내셔널은 앞서의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구조를 지녔고, 더 많은 정당들과 구성원들, 더 많은 실제 산업 노동자들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그 외관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실제로, 새로운 집단의 사회적 기초의 변화는 그것을 인터내셔널로서 강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시기 새로운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집단적 특징은 대체로 19세기 중반의 유럽 장인들에 비해 국가의 공식 정책에 맞서기에는 구조적으로 덜 호의적인 대칭성을 지녔다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노동자 대다수는 어느 지방의 공장이나 광산에 고립되어 있었고, 그들 나라의 정치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예컨대 영국과 프랑스의 북부, 독일의 루르. 그들은 생산수단을 전혀 소유하지 못했고, 과거의 장인들 수준의 전투적인 문화와 전통도 결여했다. 그들의 기초적인 상태는 그 선배들과 정확히 반대로 즉 지역적인 부동성과 사회적 고립의 결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 결과는 이 계급의 넓은 범위에 대한 훨씬 더 심층적이고 실제적인 제국주의의 매수였고―그것은 강대국이라는 그 민족이 형성한 가상적 공동체로의 투사(projection)를 동반했다―그 범위는 마르크스나 앞선 세대의 어떤 사회주의자가 상상했던 것보다 넓었다. 이러한 치명적 매력의 결과는 대중의 수동성과 열광의 혼합물이었고, 이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맞이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서구 사회주의 정당들은 그들의 가장 엄숙한 약속을 배반하면서―이탈리아는 예외였다―인민의 상호 대학살로 스스로를 던져 버렸다. 이러한 학살로 돌진하게 된 역사적 뿌리는―수치스럽게도―단지 정당 지도자들의 결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젊은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구조에 있었다.


4. 파시즘과 제3인터내셔널

제국주의간 전쟁의 발발이 제2인터내셔널의 겉치레를 묻어버렸다면, 전쟁의 종료는 단번에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양자의 새롭게 떠오르는 형태를 다시 정의했다. 전례가 없는 경제적 불황과 위기의 한 복판에서 자본은 훨씬 더 발전된 집적 형태로 나아갔지만, 그것은 더 이상 국제적 자유무역과 장기 호황의 맥락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무역과 경제자립정책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정세에서, 민족주의의 지배적 유형을 생산한 지리적 구역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하거나 좌절한 강대국이었다―즉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본. 여기서 출현한 세력은 파시즘이었다. 파시즘은 실증주의가 아니라 근대 비합리주의―이탈리아의 소렐이나 젠틸레, 독일의 니체, 일본의 국체(國體) 선언―에서 그 언어를 빌려왔고, 결국 인종과 같은 생물학적인 공동체로서 정의하게 되었다. 동시에 민족의 이념적 내용도 무지막지하게 축소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더욱 높은 권력으로 상승한 제국주의적 쇼비니즘이었다―전례가 없을 정도로 고삐가 풀린 반동적인 열광을 동반했다. 역시 그것의 기능은 이중적이었다. 첫째,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의 자본주의 전승국들에 맞서 제국주의간 경쟁의 두 번째 무대를 위해 종속 계급을 동원하는데 봉사했다. 두 번째 무대에서 이전에 패배하거나 좌절했던 국가들이 이번에는 승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 의미에서, 그 이데올로기의 주된 동기는 보상과 복수였다. 동시에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가 비가역적인 위기에 처하고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이 혁명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국가들에서 대중을 봉쇄하기 위한 과잉 메커니즘으로 기능했다. 이 두 가지 기능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었는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안정성이 침식되고 반(反)혁명적 강압에 반드시 의존해야 하며 동시에 대륙적 경쟁의 후편을 위해 두 배의 준비를 해야만 했던 것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하거나 좌절한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프로젝트는 거의 성공에 접근했다. 1941년 말까지 영국해협에서 발트해에 이르는 유럽 전역은 파시스트 질서로 통합되었고, 극동에서 일본은 매우 광대한 공간을 지배하였다. 파시즘의 흡인력은 이 지역들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세 개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험―브라질의 신국가(Estado Novo),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주의의 출현, 볼리비아에서 MNR의 출발―은 모두 파시즘의 자장으로 끌어당겨졌다.

한편, 자본에 의해 길러진 쇼비니즘이 파시즘으로 급진화했다면, 그것은―그 반대 방향으로―노동자 국제주의를 더욱 급진화했다. 한 나라에서는 유럽 노동자 운동의 도덕적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 1917년, 볼셰비키 당이 이끈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했다. 이러한 격변에서 출현한 정체(政體)는 자신의 이름에 어떤 민족적이거나 영토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였다―그것의 이름은 단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이었고, 위치나 인민[민족]을 나타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창설자들의 의도는 무조건 국제주의적이었다. 곧 이어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불이 붙여져서, 세계를 가로질러 솟아 나올 새로운 공산당들의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제3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이제 제2인터내셔널과의 대비는 극적이게 될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노동자계급 투사들의 한 세대에게 가르쳐준 끔찍한 교훈에서 태어난 유럽의 코민테른의 정당들은 지역적 민족주의의 모든 형태를 거부하는 강철과 같은 규율과 그들 국가의 지배 계급이 가하는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작 소련에서 소련공산당은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약속에 기초를 두고 있었고, 소련공산당에서 스탈린의 승리는 급속히 구조화된 독재에 특유한 민족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구체화했다. 제3인터내셔널의 활동가들은 스탈린이 해석한 대로 짧은 지령에 따라 소비에트 국가의 이해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그 최후의 결말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국제주의가 심각히 불구가 되는 매우 인상적인 현상이었는데, 자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거부하고 다른 국가에 무제적한적으로 충성심을 쏟는 것이었다. 그것의 서사시는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의 활동이었다. 국제여단은 모든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모집된 코민테른의 밀사들―코드빌라(Codovilla), 톨리아티, 게뢰(Gero), 비달리 등―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이는 영웅주의와 냉소주의, 사심 없는 단결과 살인적인 테러의 혼합물이었고, 이것은 전례 없이 완벽하고, 또한 악용된 국제주의였다.

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곧바로 제3인터내셔널에 중대한 시험이 찾아왔다. 그 시점에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모두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았다―의 공산당은 그들의 정부를 지지하기를 거부했고, 2차 세계대전이 다시금 단지 제국주의들간의 싸움에 불과하며 따라서 대중의 이해가 걸린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이 파시즘에 맞서 대의 민주주의를 방어하는데 모든 이해가 걸려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더 인기 없고 정치적 오류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당들의 태도는 역시 제3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었다. 2년 후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했다. 그 즉시 유럽의 공산당들은, 중국과 조선의 동료들이 일본의 팽창에 맞서 행동한 바대로, 나치즘에 맞선 전투에 온몸을 던졌고, 머지 않아 독일의 점령에 대항하는 대중운동들의 선두에서 레지스탕스 투쟁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모국을 지원하는 국제적 의무와 독일군(Wehrmacht)에 맞서 무기를 드는 민족적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그 둘 의무는 하나의 임무를 성립시켰고, 그들은 대개 화려하게 그 임무를 완수했다. 전투가 최고조에 올랐을 때, 스탈린은 갑자기 제3인터내셔널의 해체를 선언했는데, 공식적으로 제3인터내셔널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는 근거였지만, 실제로는 동맹국인 영국과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파시즘의 패배와 2차 대전의 종료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모두의 근본적 변형을 준비하였고,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유럽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 전역으로 확산될 것이었다.


5. 자본/민족주의, 노동/국제주의의 전도

지금까지 분석들은 필연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지역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그것은 이 지역들이 특별한 장점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대공황 그리고 2차대전에 걸친 장기간의 세계 역사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이는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결국 인류의 다수가 중심 세력으로서 [세계 역사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그리하여 1945년에 시작해서 대략 1965년까지 유지되는 새로운 국면에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에 관한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회고해보면, 우리는 이것이 20세기의 거대한 분수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계몽주의적 애국주의의 가장 숭고한 열망에서부터 파시즘의 가장 범죄적인 비인간성에 이르기까지―는 항상 유산계급의 어법이었고, 그 반면에 19세기 이래로 그것에 조응하는 국제주의의 형태들은―그것의 결함과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노동자계급의 어법이었다. 1945년 이후, 이러한 이중적 관계―자본/민족적인 것, 노동/국제적인 것―는 뒤집어졌다. 민족주의는 압도적으로, 서구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해 여러 대륙에서 잇달아 발생한 반란들에서 착취당하고 빈곤한 대중들의 주의주장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제주의도 자신의 진영을 바꾸기 시작했다―자본의 편에서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는 숙명적인 전환이었다.

1945년 이후 세계적 규모에서 지배력을 발휘하게 된 민족주의의 새로운 형태는 반-제국주의였고, 그것의 주요 지역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였다. 그것의 구조적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유럽 민족주주의의 연쇄적 형태에 비해 훨씬 더 이질적이었다. 당시 제3세계를 휩쓴 민족해방운동은 광범한 사회 계급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지역의 부르주아가 전과정을 지배한 곳도 있었다―인도가 가장 중요한 사례다. 다른 경우, 자본축적을 충분히 이루지 못한 중간계급이 주도하여 그 운동을 이용하고 권력 싸움의 승리 후에 진정한 부르주아로 탈바꿈한 곳도 있었으며, 멕시코와 터키의 초기 상황은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패턴의 더욱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변형들이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일어났는데, 이 곳에서 민족해방운동은 식민지 국가의 관료와 공무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밖에 인도네시아처럼 중하층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이 최고층에 오른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거대한 격변을 이룬 잡다한 계층의 간부들 중에서 어떤 단일한 집단을 밝혀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농촌의 학교 선생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공산당이 민족해방운동의 지도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자본에 대항하는 철저한 혁명으로 추진한 경우도 있었다. 쿠바는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험과 앞서의 변형들이 혼합되어 나타났다.

전후 반제국주의의 지적인 어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혼합적이었다. 상이한 민족해방운동들의 지도력에 어떠한 사회적 동질성이 없었던 것과 똑같이,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은 혼성적이고 얼룩덜룩하였다―극단적으로는 합리주의, 낭만주의, 실증주의, 비합리주의적 사조 모두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었다. 터키의 케말주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주의, 멕시코의 오브레곤, 깔레스, 까르데나스가 계승한 혼성 이데올로기는 그 전형이었다. 초기 교리들의 조합이나 반복이 넘쳐났다. 그러나 이러한 반제국주의의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고전적인 부르주아 사상의 범위 안에 기원을 두고 있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관념들(ideologemes)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에 앞서거나 자본주의 뒤에 나타난 신념의 체계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즉 한편으로는 종교를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활용할 수 있었다. 전자의 최근 사례는 이란 혁명을 포함할 것이며, 후자의 최근 사례는 니카라과 산디니즘을 포함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제국주의의 대중적 기초는 무엇이었나? 그것의 수적으로 가장 중요한 구성 부문은 소농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시대 공산주의 혁명에서 그러하였다―중국, 베트남, 유럽의 주변부인 유고슬라비아. 이 나라에서 벌어진 격변은 그들이 회고하던 10월 혁명과 질적으로 구별되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민족의 기치로 승리를 이룩했지만, 러시아 혁명은 그 승리의 시기에서 어떠한 민족주의적인 내포도 없었다.

한편, 자본 진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945년 이후 창조된 새로운 상황은 거칠게나마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은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 어떠한 나라도 향유해보지 못한 지위를 점했다. 독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는 패배한 뒤 몰락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힘을 잃고 쇠약해졌다. 미국은 영국이 19세기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명확히 자본의 세계를 지배했다. 둘째, 자본주의가 타도된 나라는 더 이상 하나의 국가―러시아―만이 아니게 되었다. 2차 대전의 소용돌이를 뚫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된 나라들의 광범위한 벨트가 출현했다―유럽의 절반과 아시아의 삼분의 일에서. 공산주의 블록은 이제 세계적인 규모에서 자본주의의 존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자본은 그 자신의 국제주의를 별안간 발견했다. 자본주의 국가들―두 번의 세계 전쟁을 야기한―사이의 민족적 분쟁은 완화되었다. 단일 헤게모니 권력의 존재는 그들의 이해를 두고 국제적 협력을 가능케 했고, 공산주의 블록의 존재는 그것을 필수적이게 했다.

그 결과로 상업적, 이데올로기적, 전략적 통일 과정이 시작되었다. 브레튼우즈 합의로 출발하여, 유럽과 일본의 재건을 위한 마샬플랜과 닷지플랜이 이어졌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창설되고, 미국의 독려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탄생하면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이러한 국제적 통합의 성장궤도는 자유무역의 일반적 부활로 시작하여 유럽공동시장(EEC)에서 민족주권의 철저한 대체로 나아갔다. 이는 전간기(戰間期)에 우세했던 경향의 극적인 전도였으며,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가 이를 표현할 용어를 찾는다면 상위-민족주의(supranationalism)라고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미는 이중적인데, 여타의 모든 나라들 위에 존재하는 미국의 지위, 그리고 서구 국가들 위에 존재하는 유럽공동체의 출현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 결론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변화인데, 그것은 민족국가에서 서구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통합의 지배적 수단이 된 자유민주주의로의 변화였다. 냉전 시기 동안 서구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민족의 방어에 높은 지위를 주지 않았고―그것은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그 기간 동안 최고의 가치였다―오히려 자유 세계(Free World)를 찬미하는데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상 처음으로 선진국의 자본주의 국가의 형식적 유형으로서 보편적 선거권에 기초한 대의 민주주의의 일반화와 실질적 강화와 동시에 일어났다―이는 본질적으로 1950년대까지의 현상이었다.


6. 초민족주의와 포스트-공산주의적 분리주의

1960년대 중반 이후, 선진자본주의 세계의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바꾸는 일련의 구조적 변화에 따라 이러한 지형은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일단 전후 재건이 완료되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경제 성장 속도가 미국을 앞질렀고,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브레튼우즈 체계가 쇠퇴하게 되었다. 동시에 특정 국가에 근거지를 두고 있지만 국경을 넘어서 활동을 확장하는 다국적기업의 비중이 더욱 강력하고 침략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축적 과정에 대한 각 민족의 당국에 의한 통제의 초기 형태는 점차 불확실해졌다. 그 결과로 특히 금융시장이 거대한 초대륙적 투자와 투기의 순환과 맞물리게 되었고, 어떠한 국내적 조절의 전통적 메커니즘이 미치는 세력권을 넘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독일 또는 일본 자본주의의 재강화가 전간기의 제국주의들간의 분쟁의 복귀의 신호를 의미하지 않았다. 관세장벽과 군비경쟁과 거리가 멀게도, 주요 자본주의 국가는 이제 높은 차원의 정책 조정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유럽공동체(EC)는 단일 시장으로 나아갔고, 궁극적으로 단일 화폐, 심지어 약한 의회를 성취하였다. 미국, 일본 등 다른 강국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상승과 하강을 공동관리를 촉진하기 위해 수많은 회의와 합의를 늘려 나갔다. 1970년대 후반 G7의 시대는 충격을 받았다. 카우츠키 판본의 ‘초제국주의(ultra-imperialism)’는 지나가 버렸다. 그 대신에 우리는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새로운 유형의 국제주의를 그 이전의 것과 구별하기 위해 ‘초민족주의(transnationalism)’라는 용어로 부를 수 있겠다. 여기서 ‘초민족’이란 이중의 의미이다. 첫째,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주요한 세 구역을 묶는 제도적 결합이 이루어지고, 둘째, 고전적 국경을 넘는 대륙간 기업과 금융투기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 시기에는 민족적 가치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위라는 공식적 담론이 포기되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이는 오히려 원격 지배되는 지중해 지역의 독재 체제의 민주화(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를 더욱 그럴 듯하게 하였다.

반면 선진자본주의 지역 밖에서 반제국주의는 7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주요한 전투는 지속되었으나, 베트남혁명과 포르투갈 제국의 해체는 그 이전 시기의 에필로그처럼 보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광범한 지역에서 탈식민화는 성취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는 고립으로부터 탈출하는데 실패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남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중앙아시아에서 지속되었으나, 과거와 동일한 세계적 의미를 더 이상 띠지 않게 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유라시아에서 파시즘에 맞선 투쟁으로부터 출현한 거대한 공산주의 블록은 매우 독특한 역사적 요소들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의 동유럽―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에서 스탈린은 군사적 압력을 통해 위로부터 공산주의 체제를 강요했고, 소련의 이해와 지도에 조응하는 종속국의 고리를 창조했다. 반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중국, 베트남은 토착적인 혁명을 성공하고 완전히 독립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창조했다. 그러나 혁명들을 이끈 공산당들은 스탈린화된 제3인터내셔널에 의해 그 교리와 규율이 형성되었다.

‘일국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 구축은, 각 나라의 당들이 박해받고 금지된 조직으로서 권력에 대해 투쟁할 때, 소련에 대한 무조건 충성을 배양했다. 그러나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동일한 교리는―필연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소련과 각각의 비-러시아 당들간의 격렬한 갈등이라는 그 대립물을 낳았다. 스탈린이 실천한 신성한 민족 이기주의(national egoism)는 일반화되었다. 그 결과로 공산주의 국가 수의 증가만큼 고전적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주의의 해체는 유례없이 가속화되었다. 먼저 유고슬라비아가 소련과 갈등을 빚었고 1940년대 후반 알바니아와 유고가 갈등에 휩싸였다. 다음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갈등이 1960년대 초반 폭발하여 국경에서 무장충돌로까지 발전하면서 공산주의 세계의 통일을 위한 기회는 영구적으로 파괴되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베트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 나선형 꽈배기처럼 연속해서 발발했다. 1970년대 후반 세계에서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는 공산주의의 동족살해, 분열번식이라는 게 명백해 보였다.

동시대 자본주의 국가들의 진화에 두드러지게 대비되는, 레닌주의적 전통의 급작스러운 혼돈의 역사적 뿌리는 무엇인가? 두 개의 상호 결합된 힘[생산력]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먼저 되풀이된 일국사회주의라는 구조 내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생산력이 선진자본주의 경제를 따라잡을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명백했다―공산주의 국가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서방보다 훨씬 후진적이었다. 선진자본주의 경제는 동구 블럭에 완전히 결여된 상업적․산업적 교차 결합을 향유하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조직적으로 생산력이 결코 민족적 경계를 뛰어 넘지 않았고, 일례로 소련의 평균적인 노동생산성은 서독이나 프랑스의 40% 수준에 머물렀다. 달리 말해 공산주의 진영에서 관료적 민족주의가 지속된 것은 자본주의에 비해 객관적으로 덜 국제화된 생산력에 물질적으로 뿌리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그 지체를 극복할 기회를 차례로 봉쇄했다. 유럽공동시장의 활성화와 비교되는 경제상호원조위원회(COMECON)의 고사는 그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러한 제한된 경제적 기초 위에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 민족주의의 쇠퇴는 사회 질서의 탁월한 정당화와 대중 통합의 기제로서 자유민주주의의 부상에 조응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적 생활은 지배 관료에 의해 완전히 몰수당했다. 그 대신에, 공산주의 체제는 대중들을 지배적인 정치적 틀로 통합하기 위해 민족주의에 훨씬 많이 의지했다. 마르크스가 제대로 간파했던 것처럼 민족은 실제의 자유, 평등의 결여를 보충하는 가상의 공동체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간 동안 공산주의 세계의 분열번식은 인민 주권을 억압했던 것의 직접적 결과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생산자연합의 부재는 숙명적으로 공산주의 간 분쟁에서 독살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갔다.

이 기간동안, 민족주의는 토착적인 혁명을 이루고 침략자를 패퇴시킨 러시아, 중국,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베트남에서 어느 정도 기능했던 대용물이었다. 반면 동유럽의 다수에서 공산주의 체제는 그러한 정통성이 결여되었다. 그들이 민족이라는 카드를 활용하려고 너무나 열심히 노력했지만―루마니아는 그 악명 높은 사례다―, 그들은 신뢰를 얻지 못했다. 1945년 적군(Red Army)이 강제적으로 위협을 가한 이후로, 그들은 소련의 반복적인 군사적 개입을 통해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를 보라. 인민 민주주의의 결여에다가 민족적 정서상의 철저한 굴욕감이 덧붙여졌다―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역학에 근접하여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자 사이의 거리를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지역의 대다수도 마찬가지였다. 동유럽에서 1989년의 대지진은 오랜 기간 준비된 것이었다. 그 여진은 두 인접한 국가, 유고와 소련을 탈안정화했는데,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더 정통성이 있었으나 다민족 연방이었다. 두 나라는 비가역적 해체의 동학으로 밀쳐졌고, 경제적 정치적 위기의 심화 한가운데에서 연쇄적인 분리주의가 분기했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인 오늘날, 무엇이 민족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인가? 모든 가능성 중에서도 포스트-공산주의적 분리주의에 의해 그 패턴이 드러났지만 포스트-식민주의 세계로 확장된 분쟁의 유형이 유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발칸에서 코카서스로, 혼오브아프리카[아프리카 북동부]에서 그레이트레이크[아메리카 5대호]로, 카쉬미르에서 민다니오[필리핀 남부 제도]로 확장되고 있다.


7. 국제주의의 미래

그렇다면, 무엇이 오늘날 국제주의의 지배적인 형태인가? 그 최근의 변형들 속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블록의 소멸과 함께 미국이 역사상 모든 나라의 꿈을 넘어 정점에 도달함에 따라, 처음으로 진정한 세계 헤게모니 권력이 등장한 시대에 있다. 국제주의는 관습적인 어법에 따르면―어떻게 이해되건간에―그 대립물로서 민족주의의 어떤 판본을 갖는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미국에서 국제주의라는 용어는 의미심장하게도 다른 반대말을 가졌는데, 그것은 ‘고립주의(isolationism)’였다. 국제주의/고립주의라는 쌍은 명확하게 동일한 전제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 쌍에서 민족적 이익의 우선성이 결코 문제가 된 적이 없었고, 국제주의/고립주의는 민족적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쌍의 역사적 기원은 미국의 공화주의가 예외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창조한 특수한 조합에 있다. 즉 미국의 공화주의는 그 제도와 자질의 측면에서 행운이 고유하며, 권력의 분산과 집중의 측면에서 모범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양면적인 메시아주의(janus-faced messianism)인데, 조국에 대한 강렬한 숭배 또는 세계에 대한 선교와 구원 양자 모두를 승인한다―또는 더욱 현실적인 스타일로 양자의 외교적 혼합물을 승인한다. 국제주의는 항상 이러한 전통의 이원론적인 용어법에서 영광스런 장소를 점해왔다. 실제로 국제주의는 미국 국가가 추구한 전진 정책을 위한 자기만족적 암호에 다름 아니었다. 고립주의가 먼로 독트린, 오르니 선언 또는 플래트 수정안의 쇠퇴를 결코 의미하지 않은 것과 같이, 미국적 의미에서 국제주의는 처음부터 미국의 권력을 유라시아로 확장할 준비와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멕시코로부터 러시아에 이르는 윌슨의 간섭 정책은 그 논리를 따른 것일 뿐이다.

20세기의 대부분 동안, 이러한 국제주의의 의미는 미국 국경 외부에서 거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기이한 국내적 어법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 외부에서는 미국의 국제주의적 실천이 표현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말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대안적 또는 대항적 권력이 부재한 가운데 미국 헤게모니는 처음으로 자신을 ‘세계적 규범’으로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UN을 무화과 잎으로 활용하며[회화, 조각에서 국부를 가리는], 러시아에 유순한 체제를 세우고, 독일과 일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 앞 바다에 보호령을 세우고, 종속국들에 기지를 배열시키며, 잠재적 라이벌들의 화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몇 배 더 많은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의지는 완곡한 어법으로 공영(公營圈)이라는 재세례를 받았다. 그것의 동의어는 정확히―다름 아니―‘국제공동체’다. 유엔 사무총장의 감동적인 체하는 말투도, 나토의 거만한 성명서도, 뉴욕타임스, 르몽드, 가디언의 과장적인 사설도, 매일 밤 우리를 안심시키는 뉴스해설자의 말도 이것[국제공동체]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주의는 더 이상 미국의 지배 하에서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간의 조정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는 냉전 시대의 부정적 임무였다), 오히려 미국의 이미지 속에서의 세계의 재건이라는 긍정적 이상이다. 자유세계라는 깃발이 내려졌다면, 그 대신에 인권이라는 깃발이 세워졌다. 그 의미는 국제공동체를 불쾌하게 만드는 나라들, 쿠바,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봉쇄하고 폭격하고 침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며, 국제공동체에 애원하는 나라들 즉 터키, 이스라엘,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을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첸, 팔레스타인, 투치, 사하라, 누에르에서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신법에 대한 저항은 아직 바람 속의 지푸라기처럼 보인다. 유럽의 동맹국은 종종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미국의 과잉 ‘일방주의’(unilateralism)로 전가하려 하며―이는 미국에 대한 유럽의 종속을 숨기기 위해 외교적 자문의 몸짓을 취할 때의 좌절스러운 실패를 본질적으로 의미할 뿐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UN 안보이사회에서 나약하게 협상하려 들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와 카톨릭 포스트-통합주의는 소비 세계의 관념에 덜 포획된 대안적 생활형태를 위한 잔여 공간으로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포르투 알레그레에 모인 운동들은 사회적 반대세력의 출현중인 디아스포라[바빌론 시대 이후 유대인의 외부 거주지]로서 깜빡거리고 있지만, 그 윤곽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그 곳에서 우리는 무한한 정의와 영구적인 자유의 하늘 밑으로 피난해 있다. 그러나 그리 먼 과거가 아닌 자본주의 문명이 별로 독실하지 않은 길을 걸어갔던 그 때를 후회할 수 있다면, 국제주의가 의미하는 그 길이 끝났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국제주의의 역사는 역설, 지그재그, 놀라움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가 국제주의의 최후를 본 것은 아닌 듯하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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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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