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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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국제2-말레이시아.hwp

역사 속에서 미래를...

말레이시아의 사회운동

배준범 | 민주노총 아시아연대팀
태국에서 일정을 마치고 방콕의 공항에서 쿠알라 룸푸르로 넘어가는 말레이시아 항공편을 기다리면서 착잡함을 누를 수가 없었다. 태국 노동운동의 취약함이야 사전 조사 과정을 통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심했고, 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운동도 사전 지식과는 달리 그 역동성이나 활동력에 있어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지의 운동 지형이 처한 상황과 조건을 정확하고 현실감 있게 파악하는 것 자체가 성과이고, 그 외에도 나름의 소득은 있었지만 말이다. 별 근거 없이 말레이시아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혹은 바램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사실 태국과 말레이시아는 인접한 국가이고 비행기로 2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같은 동남아 국가라는 것 외에는 유사성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두 국가 사이에는 차이가 많다. 비행기 대기실에서부터 히잡이나 부르카, 차도르를 두른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부터가 그렇고, 남편으로 보이는 한 남성을 쫓는 여러 명의 부인들 모습도 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 룸푸르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도심으로 향하면서 보이는 주택이나 건물의 모습 또한 다르다. 고속도로 양옆으로 새롭게 지어지고 있거나 막 완성된, 수없이 많은 같은 모습의 주택이나 저층 아파트들의 모습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북한식 계획거주 시스템을 연상케 한다. 산업화의 정도도 딱 한 눈에 태국보다는 월등히 위다. 도심은 서울보다도 더 많은 고층 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으며 길거리의 자동차들도 말레이시아산이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전에 알았던 내용이지만, 말레이시아는 개발독재,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으로 한국의 70-80년대와 매우 비슷한 양상으로 경제 성장을 이룩한 국가였고, 정부도 한국이 따라야 할 모범(?) 사례로서 제시한다고 현지인들은 전했다. 분위기 면에서도 방콕이 전 도시가 시장바닥처럼 무질서할 정도로 부산하고 활기찼던 것에 비해서 말레이시아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무거우며, 체계가 잡혀있었다.

한국에서 말레이시아를 논할 때 있어서 97년도 위기를 빼놓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외환위기가 동아시아를 휩쓸었을 때 한국과 태국이 IMF의 처방을 충실히 수행한 ‘모범 국가’로 칭송되고 있었던 시절, 그 이면의 고통과 절규를 아는 사람이라면, 강제된 구조조정에 맞선 사람이라면 한번쯤 말레이시아의 사례를 접하고 한국도 같은 길을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제 경제기구들과 초국적 자본에 맞서서 서방의 제국주의와 착취, 새로운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폭로하며 당시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다른 길’을 택한 국가가 바로 말레이시아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IMF가 강요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 거부, 자본 통제 실시, 고정 환율제 유지를 골격으로 한다. 근데 외환위기가 지나간 지 5년이 넘는 시점에서, 우리가 만나본 활동가들과 학자들에 의하면 경제위기와 그 이후 국가의 대처와 적응 방안에 대한 평가는 말레이시아의 진보 진영 내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인 사안이었다.
조사팀이 접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크게 보자면 세 가지 입장으로 갈리는데, 그 첫째가 마하티르 정부는 순전히 자신의 과오와 부정부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IMF 위기 국면에서 반서구, 반제국주의 수사를 동원한 것이라면서, 실제로는 IMF 처방은 이후 모두 관철되었다는 주장이었다. IMF로부터 긴급 차관을 받지 않은 대신 국내의 공무원 기금, 노동자 연금, 종교 기금, 석유로 저축한 돈 등 국내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자금을 집중하여 국내적으로는 외채 위기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로 나아갔다는 주장인데, 마하티르의 비타협적 자세가 사실상은 알맹이가 없는, 대내용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말레이시아의 경제가 외환위기 당시와 이후 회복 국면에서 피해는 최소화하는 동시에 성장은 빠르게 회복되었던 양상을 지적하면서, 마하티르의 정치적 한계와는 별도로 IMF의 획일적인 처방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평가를 해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IMF의 정책 처방의 핵심이 자본자유화와 변동환율제 도입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이러한 점을 거부한 것은 무시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IMF 외부에서는 물론, 내부 평가보고서에서도 동아시아 위기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비판을 가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말레이시아의 외환위기 당시의 대응을 전혀 의미 없는 것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그가 IMF 위기에 대응한 방향이 옳았고, 객관적인 경제 지표들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며, 그 이후의 경제 정책과 분리해서 사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외환위기 당시 한국과 태국의 경우 10% 내외의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인 반면 말레이시아는 5% 대에서 경제의 위축을 막았고, 이후의 성장 궤도로 복귀도 완만하게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이 둘 사이의 중간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마하티르가 당시의 경제위기의 원인과 처방에 대해서는 IMF와 의견을 달리 하였지만 그가 철저한 시장주의자라는 것을 전제한 후에, 국내정치의 복합적인 이해관계와 대외적인 압력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말레이시아의 경제 정책 기조가 규정된다는 의견이다. 이러한 이유로 말레이시아 사회는 완전한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에 대한 거부도 아닌 혼합 형태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국내 주식시장 개방과 민영화의 진행 등 다양한 경제 정책의 변화도 정치권이 무시할 수 없는 정실자본주의의 기득권 층과 국내 다양한 이익 세력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초국적 자본의 요구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 사이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종합해보자면, 이들 주장에는 배타적인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공통분모 또한 적지 않다. 외환 위기 당시의 수사나 행보가 어떻든 간에 이후 5년 동안에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의 프로그램이 말레이시아에서 관철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기간산업의 민영화, 이후의 자본과 투자 자유화, 노동 시장의 유연화와 산업구조조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떠한 긍정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당시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하티르가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혹은 취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 정치적 요인들과 구조에 대한 고려의 필요성을 모두가 인정한다는 점이다. 사실 말레이시아의 정치구도는 상당히 독특하다. 이주민들로 구성된 국가에서 인종 분포가 60% 말레이계, 30% 중국계, 10% 인도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정당도 이에 따라서 조직되어 있고, 경제 부문에서의 역할 분담도 인종에 따라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말레이계는 양분되어 농업 부문과 주요 산업의 기득권 층에 골고루 포진되어 있으며, 중국계는 화교 자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하여 상업과 금융, 하급 관료 집단에 상대적으로 많다. 마지막으로 인도계는 노동자 계급 구성원들이 주류를 이룬다. 마침, 얼마 전에 개최된 이슬람 정상 회의에서 마하티르가 유대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여 또 논란을 야기했는데, 이에 대한 폴 크루그먼의 기사를 보면, 미국 학자로서는 의외로 마하티르에 대해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해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마하티르의 행보나 발언들이 감정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서구에는 비춰지지만, 인종/민족별로 조직된 말레이시아의 정치 구조에서 그는 자신의 지지 기반과 이해관계에 따른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고, 경제위기 때나 지금이나 그의 말과 정책은 말레이계를 대변/지원함과 동시에 타인종들에 대한 포용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그의 조건에서 나왔으므로 단순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성격이야 어떻든 그는 인종별로 조직된 정당 구조 속에서 다수파를 관리하며 지지를 이끌어내고, 분열을 막으면서 기타 소수 정당들과는 제휴/연합하기도 하고 선을 긋기도 하면서 20년 넘게 집권을 해온 것이다. 이념에 따라 조직된 정치 구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의 지역주의와 비교도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후발 국가로서, 그리고 다인종 사회로서 말레이시아는 아직도 국가의 정치적 통합이라는 근대 국가 건설의 과제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투박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는 동안 국경일을 기념으로 거대한 국기를 관공서와 주요 기업 건물마다 걸고 있었고, 방송에서도 ‘공익’광고와 ‘땡전’ 뉴스 식의 보도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더욱 극명하게는 최근에 군 징병제가 실시될 계획이 정부에서 제출되었는데, 국가에서 내세우는 명분이 안보 위협이 아닌 ‘국가 통합’이라는 것이다. ‘군대’와 ‘교육’이라는 근대국가 건설의 두 필수 요소를 국가에서 보다 넓게 활용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배경에 대한 서술에서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역시 국민 동원형 국가 이데올로기,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 총리의 노련한 국정 운영, 인종별로 갈라진 정치 지형, 정부 소유의 언론, 그리고 국가보안법과 보안수사대와 같은 반민주 악법과 기구들이 존재하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니, 철저하게 체제 내에 포섭되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애초에 태국과 비교했을 때에는 단일 노총으로 조직되어 있는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 상황을 보고 적어도 태국보다는 상황이 나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조사팀이 방문한 말레이시아 노동총연맹(Malaysian Trade Union Congress: 이하 MTUC)은 조합원이 약 50만으로 공무원 조직을 제외하고는 단일 노총이었으나, 외형적으로 한 조직 하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 성격은 철저하게 정부에 의존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 체제 내화된, 법적 테두리 안에 완벽하게 가둬진 노동조합이었다.
마하티르 정부는 그간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온갖 회유, 협박, 법적/제도적 수단들을 총동원하였는데, 그 사례들을 들어보면 선거에서 어용파 지원, 노동총연맹의 산하 조합원 대표 자격 부정, 산별 노조 가입 제한과 기업별 노조 유도, 친정부파에 대한 금전적 지원, 공공부문 노동자들과의 분리, 단체교섭 사안을 임금, 승진, 작업 환경 등 직장과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의제로만 제한, 직권중재, 노동재판소을 통한 단체 행동 억압, 불가능하다시피 한 파업 성립 조건 규정 등,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리하여 정치적 파업이나 연대 파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말레이시아 노동운동에는 없어진 것을 물론이고, 파업 자체가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MTUC 산하 사업장에서 마지막 파업이 벌어진 지가 4년이 넘었다고 하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된 결정적 계기는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MTUC 외부의 제2노총 건설 운동의 실패였는데, 이후 ‘민주파’의 전술 변화가 있어서 지금은 MTUC 내부에서 개혁을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 위원장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2위를 하기는 했으나, 당선이 되어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노동조합운동 자체가 현재 너무 취약하고 이를 규정하고 있는 환경 자체가 단기간 내에 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때문인지 노동조합들은 이주노동자나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서, 이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거나 자기 문제로 사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회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관료화된 노조와 서유럽이나 미국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부유한 비정부기구들이 아닌, 독립적이며 변혁적인 전망을 지닌 조직들은 드물었다. 후자의 조직으로는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노동자원센터(Labor Resource Center: 이하 LRC)가 있지만, 상근 직원은 2명뿐이고 대표로 있는 티안 추아(Tian Chua)는 새롭게 형성된 민중공평당(People's Justice Party)의 부대표로 있었는데, 좌파라고 분류하기에는 좀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여성과 노동자 독립 미디어 훈련 센터(Women and Workers Independent Media and Training Center: WIMTEC)도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이었으나, 개인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조직(상근자 없음)이고 해외에서의 지원금이 떨어져 지금은 사업 구상 중이라고 하였다.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위한 감시단(Monitoring Sustainable Globalization: 이하 MSG)은 3-4 명의 활동가 겸 학자들이 결합하고 있는 세계화 관련 단체였다. 수도 민영화, 사회적 보호망, 가내 노동자 등에 관한 구체적 연구 프로젝트 진행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화와 초국적 기구들이 말레이시아와 동남아 지역 내의 경제 구조와, 생산 체계, 임금과 노동 조건, 삶의 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교육과 연구를 하고 있었다. MSG는 세계무역기구(WTO)나 현재 추진 중인 아시아 자유무역 협정의(Asian Free Trade Agreement: AFTA) 자본 자유화 움직임에 맞서서 필수공익 서비스를 보호하고 공공부문의 사유화를 막고자 하는 ‘시민들의 권리 헌장’을 다른 시민사회 단체들과 함께 제출하기도 했는데, 운동의 조건이 우리보다 열악함에도 지역 차원의 자본 자유화 흐름이 우리보다 앞선 배경에서 생겨난 조직인 만큼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 외에도 말레이시아판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 반대 투쟁과 양심수 석방 캠페인으로 인해서 해외에도 잘 알려진 몇몇 인권운동단체들도 있었다. 학생운동도 몇 해 전까지는 꽤 활발했다고 하나 지금은 경제위기와 소비문화로 인해서 많이 위축된 상태라고 노동자원센터(LRC)의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는 전했다.
좀 다른 운동의 전통과 기풍을 지닌 조직으로는 제릿(이하 Jerit: 말레이어로 소리치다라는 뜻)이 있었다. Jerit은 맑스-레닌주의 이념의 정치 조직인 사회당(Socialist Party)과 연계된 전국 네트워크로서, 학생, 공장 노동자, 플랜태이션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의 분야에서 2004년, 태국의 빈민들의 회의(Assembly of the Poor)의 90년대 운동과 비슷한 형식의 대중 투쟁을 조직하고 있었다. 관료화된 단위 노조와 보수적인 노총을 거치지 않고, 직접 플랜테이션 노동자들과 교류하면서 투쟁을 조직했던 6개의 노동운동 지원 단체들이 연합하면서 이 조직의 모태가 형성되었는데, 최근에는 공장 노동자들의 조직화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의 투쟁 사례에서도 독립적으로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캠페인을 통해서 여론 환기, 사측 압박, 노동자들의 의식 고양을 꾀하고 있었는데, 작년 메이데이의 경우, 이들은 노총이 조직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메이데이 집회를 조직(노총은 1000여 명, 이들은 2000명 정도)하기도 했다. 집회와 관련된 각종 악법에도 대중투쟁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운동에서는 드문 사례였다. 각 분야에서의 요구안들을 수렴하여 2004년에는 전 민중들의 투쟁을 전개하고, 이후 이를 바탕으로 ‘민중의회’를 조직하여 현존 노조와 정당들의 대안적인 조직이 된다는 목표의식 또한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현재 노동자들과 관련해서 노동법 관련 교육, 최저임금/수당 관련 요구안을 내걸고 접촉하며 조직화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말레이시아 노총은 어용이고 다른 기타 ‘진보’ 정당들은 사회주의를 포기했다면서 일갈을 했었는데, 그들 자신은 국제적인 사회주의 조직과의 연계는 없다고 밝혔으며 말레이시아식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있었다. 규모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개입하고 있는 공장의 수가 30, 농장이 50, 도시 빈민 공동체가 30, 10여 개의 농촌 마을인 것으로 보아서는 핵심 활동가는 최소 100여명, 동원력은 메이데이 집회에서 볼 수 있듯이 2000-3000 정도에 이르는 등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운동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말레이시아적 맥락에서는 이들의 한계이자 장점이었다. 내년 투쟁의 전개가 주목된다.

말레이시아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하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극소수의 세력을 제외하면, 말레이시아 진보진영의 기대와 염원은 여전히 우리의 과거에 묶여있었다. 김지하가 70년대에 박정희에 맞서 ‘타는 목마름으로’ 고대했던 것이 사회민주주의도, 인민민주주의도, 자유민주주의도 아닌 그냥 ‘민주주의’였듯이, 말레이시아의 활동가들도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그것의 실내용이 어떻게 구성될지 모른 채 마찬가지로 마하티르가 물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적 공간’의 확보를 통해서 자신들이 바라는 미래가 전개될 수 있는 시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대중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도 꽤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단선적이진 않겠지만, 우리의 ‘역사’가 그들의 ‘미래’와 상당부분 중첩되는 셈이다.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우리의 오류와 우여곡절을 겪지 않기를 바라지만, 낙관할 근거는 찾기 힘들었던 것이 솔직한 인상이었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에 진출한 한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관련된 얘기를 하고자 하는데,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현지 조사단이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태국에서는 사측의 노동자 탄압과 부정부패에 맞서 모나미 현지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조사팀이 간담회를 하는 곳에 와서 한국 기업들의 부당 노동 행위 와 인권 유린과 멸시의 사례들에 대해서 하소연하며 도움을 요청했었다. 태국 다른 지역의 귀금속 공장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탈의실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여 지역 노동자들의 원성이 높다는 얘기를 들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심지어 한 활동가한테서 한국 사람들은 사람을 패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냐는 질문까지 받았다.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어딜 가는 것이 아니다. 돌아와서 듣자하니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사단 모두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움만으로는 그때의 감정을 표현 못하리라.

한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불가피하게 항공편이 연기가 되면서 현지 조사 일정 중에 최초로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었는데, 근처에 있는 이슬람 박물관과 함께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외국 서점에 가게 되었다. 마하티르가 자주 서구나 1세계에 맞선 아시아인들의 연대를 주창하는 만큼, 서점에도 ‘아시아의 작가들’이라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구성이 흥미로웠다. 말레이시아의 인종 분포를 감안했을 때 말레이계 작가들과 중국, 인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 외에는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일본 작가들 소수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이나 필리핀, 인도 외의 남아시아의 국가들은 그들의 ‘아시아’ 관념에서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이는 하나의 사례뿐이겠지만, 그 내부에 이질성이 워낙 많고 종교, 인종, 경제 수준, 역사 모두가 상이한 상황에서 단일한 아시아 개념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닌가 싶다. 아시아에는 여러 개의 아시아가 존재한다. 이를 인정하는 속에서 공동의 의제와 공통분모들을 발굴하는 것이 지역 연대의 첫 단추일 것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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