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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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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집중분석-황선웅.hwp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카드사 부실채권 처리방안에 부쳐

황선웅 | 회원
공익광고협의회의 존재 말소 선고 풍경

TV를 켰다. 멀끔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어울린 듯 싶다. "덕분에 정말 잘 먹었다." "2차도 내가 쏠게." "우와, 괜찮겠어?" '하하하,' 그가 웃으며 대답한다. "괜찮아."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발이 정체불명의 하얀 액체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둘 다 계산해 주세요." 다음 장면에서 그는 또다시 카드를 꺼내 든다. 아마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려나 보다. 그는 다시 한 번 '괜찮다'는 말을 되뇌지만, 그의 발은 전보다 더 깊이 수렁에 빠져들어 간다.
그는 아직 그 흔한 자가용 한 대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자가용을 보유한 가구의 비율이 60%를 넘는 상황에서 자가용은 이제 이동의 편리함 뿐 아니라 자신의 누추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도 구매할 필요가 있는 상품인데. “남들 눈치가 있지…” 아내의 불만도 이해가 된다. ‘그래, 좋다. 다시 한번 카드로.’ 끈적거리는 액체는 이제 허리를 넘어 가슴까지 차 오른다.
찢겨진 지갑.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지갑은 비어 있고 어느새 목까지 차 오른 하얀 액체가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을 인식하고는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게 뭐야? 여보, 여보.” 그의 부인은 벌써 익사했는지 대답이 없다. 대신 한국방송공사 공익광고협의회의 음산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전해온다.
<신용이 사라지면 당신도 사라집니다.>

무서운 세상이다. 셰익스피어에 의해 여러 세대에 걸쳐 두고두고 욕을 먹는 희대의 고리대금업자 샤일록도 꿔간 돈 안 갚은 사람의 살점 몇 근을 떼어낼 뿐이었는데, 요즘 세상에는 백주 대낮 공영방송에서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인간존재 말소의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말이다. 죽을래, 갚을래? 일찍이 근대인의 존재 조건을 평생에 걸쳐 되물었던 수많은 철학자들조차 한국방송공사 공익광고협의회의 철학적 공갈에 기겁할 일이다.
2003년 9월, 한국방송공사의 존재론에 따르면, 335만 명의 사람들이 신용불량의 이유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림형제의 원작 「헨젤과 그레텔」에서 마귀할멈의 집으로 유인된 아이들이 사라져가듯, 경제활동인구 7명 중 1명이 신용카드 시장에서 ‘실종’되고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들 신용불량자들의 고통이 곧바로 전이되는 가족 구성원까지 고려한다면 존재 말소의 위기에 처한 인구는 최소 600만 명에서 최대 1천만 명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진정 사라졌던가
2003년 9월 29일,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은 국회 정무위에서 정부의 연체율 10%기준 적기시정 조치가 어떻게 은행들의 영업활동을 제한하는 지를 보여 연체율에 상관없는 현금대출활동의 자유를 옹호하려다 금융자본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의된 공익광고협의회의 광고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우를 범했다. ‘신용이 사라진 이들도 사라지지 않았다!’
엄씨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카드는 지난해 9월,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모씨에게 지난해 12월과 올해 6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46만원과 350만원을 현금서비스로 대출해 주었다. 수감 중인 김씨가 교도소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혹은 두부나 사먹으려고 담 넘어와 대출 받고 들어간 게 아니라, 우리카드가 본의의 동의 없이 임의로 대출을 한 것이다. 더욱이 우리카드는 지난 해 10월 사망했음을 확인한 김모씨에게도 두 달 후 3백 만원의 돈을 대환대출 해주었다. 그 결과 2003년 9월, 사망한 지 1년이 된 前부산남구문현동의 김모씨는 염라대왕 앞에서 총 633만 5원의 채무내용을 신고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신용은 소진됐지만, 죽음조차도 채무의 부담과 실존의 고민을 지우지 못한 것이다.
과중한 부채부담을 더 이상 짊어지지 못해 커다란 몸집의 사내에게 끌려간 이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들은 단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이미 떠난 사람들은 이곳의 광고를 듣지 못한다. 이는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공익광고협의회의 광고는 현실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사라지지 마라, 사라지지 마라’라는 주술이다. 광고는 살아남은 자들이 품는 ‘상실(喪失)’의 공포를 자극하여 이들을 더욱 강하게 얽어매려는, 문턱의 끝자락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부과되는 높은 수준의 연체이자율을 정당화하려는 거짓 선전임이 밝혀졌다.
연체의 지하감옥에서 성으로 끌려간 이들은 따뜻한 물과 향유로 씻겨졌고, 깨끗한 새 옷을 지급받았다. 이를 위해 사용된 한 가지 기법이 ‘대환대출’이었다. 대환대출은 원칙상 추가적인 신용거래가 불가능한 연체자로 하여금 현금서비스를 받게 하여 장부상에서 연체대금을 신규대출로 바꾸는 것으로, 대외적으로는 상환기간 연장과 분할상환을 통해 신용불량자의 회생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도입되었다.

대환대출
하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연체율 수치를 낮추기 위해 선택된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에게 돈을 빌려주는 카드사도 운용자금의 전부를 자기자본으로 충당할 순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와야 한다. 이를 위해 카드사들은 회사채(카드채)와, 기업어음(CP), 자산담보부증권(ABS) 등을 발행한 후, 이를 투신사와 은행, 보험회사 및 증권회사 등에게 매도함으로써 필요한 돈을 획득한다. 계약에 따라 만기일에는 원리금을 상환해야 하지만 카드사의 신용에 문제가 없을 경우에는 만기일을 경신함으로써 실제적인 지불을 피할 때도 많다. 2002년 말 우리나라의 9개 전업카드사가 발행한 카드채의 규모는 대략 89조원으로, 그 중 카드채가 30조, CP가 20조, ABS가 28조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드사들이 신용평점을 기준으로 고객들을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드사들의 채권자들도 카드사의 신용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마련한다. 카드사의 신용상태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준이 자산구성의 건전함이다. 이는 부채가 어느 정도냐, (위험 가중) 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이 어느 정도이냐를 뜻한다. 그리고 자산구성이 건전하다는 것은 자산운용의 원천으로 부채보다 자기자본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므로 만약의 사태 시 카드사가 돈을 떼먹을 확률이 적다는 것을 말한다.
2002년 중반 3.8%에 불과했던 카드연체율은 2003년 들어 8%, 9%, 10% 이상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카드사들이 연체율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연체채권의 증가가 자산구성을 부실하게 만들어 채권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융관행상 보통 6개월 이상 연체채권은 회수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장부에서 손실처리되기 때문에 연체율의 증가는 직접적인 손실 뿐 아니라 당기 순이익의 감소를 야기했다. 당기 순이익이 감소한다는 건 운용 가능한 자기자금이 줄어준다는 것이므로, 이 또한 카드사 채권자들의 우려를 증폭시킬 수 있었다.
채권자들의 우려가 증대될수록 조달금리는 상승된다. 혹 채권자들이 “못 믿겠다, 내 돈 내놔라”라며 몰려들지 모를 일이다. 당장 4월과 6월 사이에 만기가 도래하는 투신권 보유 카드채만 해도 10조 4천억 원 수준이었다. 압박이 카드사의 숨통을 조여 왔다. 게다가 정부가 예고한 대로 6월말 연체율이 10%를 넘어, 적기 시정조치를 받게 되고 채권자들의 우려가 마지노선을 넘어설 경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치달을 수 있었다.
‘당신’이 사라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신용을 잃은 카드사 자신의 존재가 말소될 위험이 있었다. 어떻게든 연체율을 줄여야 했다. 그런데 방법이 있나? 저이들도 소득이 없어 그러는 것을. ‘사라져라’라고 말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오히려 제발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기운 좀 차려보라고, 숨을 몰아쉬는 환자 앞에서 엎드려 빌어야 할 판이었다. 신용이 계급이고 관계인데, 그들이 사라지면 나는 어떡하라고?
이런 상황에서 대환대출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연체자들을 새 단장만 시킴으로써 위기를 탈출할 수 있게 할 묘약처럼 보였다. 임종에 임박한 노쇠한 환자에게 백일잔치용 꼬까옷을 입힌 후 잔치를 벌여라! 이별이 곧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고 삶은 윤회하므로 사망신고서 대신 출생 신고서를 작성하라! 카드사들은 재빨리 연체채권을 대환대출로 변경해 생존의 위기를 넘기고자 시도하였다. 수많은 연체자들이 신규고객으로 거듭 태어났고, 2002년 9월말 4조 7천억 수준이던 대환대출 규모가 올해 3월말에는 10조 6천억, 6월말에는 13조 6천억, 7월말에는 14조 7천억 원 수준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금감원). 연체율 증가세가 둔화되었고, 6월말, 모든 카드사들이 연체율 기준 적기시정조치를 피할 수 있었다. 대환대출은 현금대출 항목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독당국의 규제도 피할 수 있었다.
카드사와 금융당국의 요란법석에 환자들이 임종 와중 잠시 눈을 떴다. 꼬까옷에 금반지 끼고 백일잔치에 나선 이 노쇠한 신생아는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는 대신 힘들게 숨을 몰아쉬더니 “밥은 없수? 하다 못해 국수 한 그릇이라도”라고 묻는다. 하지만 잔치음식은 준비된 게 없다. 출생신고용 사진촬영을 마친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워 산소마스크를 썼다.
깨어난 현실은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경제는 여전히 침체를 거듭하는 가운데 소득은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신규대출에 대해서도 여전히 22-24%의 고금리가 부과되었다 (민주노동당). 아니, 연체금을 대환대출로 전환할 시에는 기존의 원금과 이자를 합한 원리금 모두가 원금으로 발행되기 때문에 조건은 오히려 전보다 안 좋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즉 연리 24%에 현금서비스로 100만원을 대출받은 후 1년을 연체하면 원리금이 133만원 정도가 되는데, 이를 대환대출로 전환하면 100만원에 대한 이자가 아니라 130만원에 대한 이자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체 전 현금서비스를 이용할 때와 달리 대환대출 시에는 보증인을 세워야 했다. 대환대출을 위한 가족 간 보증으로 파산이 가족전체로 확산되는 수가 급속히 늘었다. 신용불량자가 한 보증을 어떻게 신용할 수 있겠냐만 카드사들은 가족 간 보증에 난색을 표하는 연체자들에게 상호간 맞보증을 서게 했고,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남의 빚마저 떠 않게 되는 사례들도 적잖이 발생했다.
대환대출은 결국 개인채무자의 단기적 부담을 장기적 부담으로 전화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악성부채만 키울 뿐이었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자금의 회수기간이 길어져 자산항목(대출)과 부채항목(카드채)의 만기가 일치하지 않는 만기불일치의 문제와, 그로 인한, 유동성 부족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작년 말 24.7%이던 카드사의 대환대출 연체율은 올 상반기 카드사들이 대환대출 규모를 크게 늘리면서 일시적으로 10%대까지 떨어졌지만, 6월에는 다시 26.7%까지 치솟았다. 일부 카드사의 경우 대환대출 연체율이 8월말에는 무려 53.2%에 이르렀다. (머니투데이 10월 23자). 대환대출이 연체될 경우 보증인으로 나섰던 최소 2명 이상이 동시에 부실로 빠져들기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은 이상의 수치 갑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아사(餓死) 직전의 남의 언 발에 오줌을 누려 했던 카드사들의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끝이 났다.

개인파산제도와 신용회복제도
2003년 10월 19일 금융감독원은 적기시정조치에서 연체율 10%기준 조항을 제외시켰다. 스스로도 밝히고 있는 바, 기존의 1개월 이상 연체채권 비율에 대한 규제는 아무런 실효가 없기 때문이다. 대환대출 연체율까지 포함한 실질 연체율이 중요했다. 카드사들이 대환대출 규모를 급속히 늘린 이후 1개월 이상 연체채권 비율의 증가세는 다소 둔화됐지만, 카드사 실질 연체율은 지난 1월말 13.7%에서 8월말 27.3%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무언가 다른 조치가 필요했다. 수많은 세미나가 개최되었고, 관계부처 회의도 계속되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몇 가지 안들이 제출되기 시작했다. 파산해서 죽어도 못 갚겠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안락사를 허용하자, 사라지게 내버려두자! <개인파산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카드사의 입장에서는 일어나 기운만 차리면 자기 빚부터 갚아 줄 거 같은 이들의 산소마스크를 뗄 수 없었다. 돈도, 소득기반도 없이 누워있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꾸고 있는 대다수의 신용불량자도, 파산이 곧 사형집행을 의미하는 현행 제도 하에서, 나 좀 제발 죽여달라고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前부산남구문현동의 김모씨의 경우처럼 육신이 땅에 묻혀도 채무부담이 지워지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적 죽음인 파산이 채무부담을 해소시켜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올 상반기 파산 선고자에 대한 서울지법의 면책비율은 54.3%이었지만 인천지법이나 춘천지법 등 5개 지법의 경우에는 면책비율이 0%를 기록했다. 여타의 다른 모든 사회적 삶은 부정당한 채 오직 카드 빚을 갚는 존재로 살아갈, 21세기 형 노예의 삶을 살게 될 확률이 절반도 넘었다.
특정 기간 내에 연체금을 상환하면 원리금의 일부를 감면해 주는 등 카드사들이 자체적으로 <신용구제 프로그램>들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 역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는 물밑의 물고기들아, 원리금의 일정부분을 깎아주는 미끼를 던지니 이를 물어라!” 수십만 가구에 카드사의 우편물(DM)이 발송되었다. 이는 물고기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신발을 벗으며 잠깐을 고민한 물고기들은 이를 곧바로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계속된 소득감소와 장기간의 과중 부채부담에 시달려온 자기들로서는 미끼를 물래야 물 수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립된 섬에서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카드사의 입장에서야 자기 빚만 상환 받으면 그만인지라 이런 조치에 “혜택”이란 수식까지 붙이겠지만, 이를 물기 위해선 또다시 남에게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 연체자, 신용불량자에게 이는 회복이 아니라 채권자만 바꾸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그 대상도 대부분 채무관계가 자사에만 국한된 1,000만원 미만의 소액대출자로 국한되어 있었다. 해당자는 전체 신용불량자 335만 명의 24%, 81만 명에 불과했다. 국민은행은 지난 4-6월 2달 동안 자체신용불량자 5만 2천명을 대상으로 원리금 감면 40%, 분할상환기간 5년 등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신용불량자 구제에 나섰지만 지원자가 300명에 그쳐 (경향신문 10월 2일자) 엄청난 금액의 인건비와 우편 발송료만 날렸다.
‘별 다른 효과 없음’은 2개 이상 금융회사에서 3억 원 미만의 금액을 빚진 231만 명을 대상으로 하는 <신용회복지원제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신용회복복지위원회는 최고 원리금의 33%까지 감면해준다고 선전하였으나 위원회가 생긴 작년 10월 이후 현재까지 신청자 수는 2만 9,417명, 그 중에서도 실제로 채무재조정을 받게 된 이는 1만 773명으로 전체 대비 0.47%에 불과했다.
지난 8월 발표된 <신용불량자 특성에 따른 3단계 회복방안>에서 정부는 채무상환 ‘의지’와 ‘능력’이 있는 자의 경우 조속한 신용회복을 돕겠다고 했다. 모든 경제활동을 제약 당하는 식물인간 상태의 신용불량자 중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의지’가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신용이 불량하다는 것은 돈을 꿔 가고 안 갚는다는 것, 거짓말을 한다는 것인데, 돈이 거짓말을 시키지 어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하나. 신용은 곧 돈이고 계급이다. 문제는 ‘능력’이고, 노동자의 지불능력은 그의 임금수준일지니 금융자본의 이해에 따른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실질임금을 하락을 유도하면서 노동자가 그 외에도 뭔가를 갖고 있기를 바라는 정부의 공상이 가히 가공할 지경이다.

부실채권 유동화
카드사 부실 문제가 시시각각 심각성을 더해가면서 제 2의 금융위기가 오느냐 마느냐를 놓고 언론들이 나서서 다투고 있던 지난 4월 말,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과 대학교수, 민간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위시한 관련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신용카드산업과 회사채의 문제점>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재경부의 정책담당자는 카드채 시장의 불안과 관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표하면서도 “그러나 시장회복이 안될 경우의 대처방안에 대해선 현재까지 판단이 안 서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깊은 고심 속에 많은 논의가 오갔다. 그로부터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날의 많은 이야기 중 다음의 주장이 재경부 담당자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은 듯 보인다. “카드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신용회복지원이 가능한 카드연체자는 개인워크아웃을 받도록 하고 나머지 부실 카드채는 신탁방식으로 자산유동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별 세 개를 단 동네 양아치에게 100만원을 빚을 진 포장마차 주인이 구조조정과 실질소득감소라는 사건을 당해 의식불명의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왔다. 가족들도 자리를 뜬 늦은 새벽, 포장마차 주인의 침대머리맡에는 수심에 잠긴 양아치가 서 있다. 100만원을 다 날리자니 너무 아깝다. 안 그래도 자기도 돈을 빌려쓴 지라 하루하루 독촉이 장난이 아니다. 뜬눈으로 밤을 샌 양아치가 다음날 아침 동네 큰손에게 전화를 건다.
“형님, 괜찮은 물건 하나 나왔는데 보실라우?” 여관방에서 짬뽕을 먹고 있던 큰손이 시큰둥하게 되묻는다. “뭔데?” 양아치는 자기도 급전이 필요해, 아쉽지만, 100만 원짜리 채무각서를 단돈 9만원에 넘기겠다고 한다. ‘풋’ 귀가 번쩍 트이며 입에선 짬뽕면발이 튀어나온다. “그래? 살아날 확률은?” “의사말로는 반반이라던데요.” 더 이상 망설일 게 없었다. 양아치에게 전후 설명을 들은 큰손은 룸싸롱 주인과 나이트 클럽 사장 등 동네 형님들을 모셔놓고 얼마간 이자를 주겠다며 자금을 댈 것을 요청한다. 덧붙여 의사의 소견서를 보여주며 담보로 양아치에게 받은 100만 원짜리 각서를 내놓겠다고 제안한다. 동네 형님들이 보기에도 그럴듯한 투자인지라 선뜻 돈을 빌려준다. 이렇게 해서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포장마차 주인이 ‘괜찮은 물건’으로 둔갑하여 거래와 거래 사이를 오가며 자금을 유통시키고 이자를 낳는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포장마차 주인의 침대 옆에는, 그가 눈을 뜰 경우 채무액 중 일부를 나눠 갖기로 약속된 또 다른 양아치 하나가 앉아서 목탁을 두드린다. “영감, 제발 눈 좀 떠보슈.”
옴마니밤메홈. 현재 부실채권 처리방안 중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고, 심지어 원리금의 50% 가량 감면해주는 혜택을 준다고 선전되고 있는 자산유동화 방식에 의한 부실채권처리의 로드맵도 형식적으로는 이상의 스토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림 2]는 자산유동화방식에 의한 부실채권처리방식을 정리해서 그려 본 것이다. 카드사는 회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6개월 이상 연체채권을 대손상각처리 후 부실채권 투자전문펀드에게 원리금의 9-12%에 해당하는 저가로 매각한다. 부실채권 투자펀드는 이를 담보로 자산담보부증권(ABS)를 발행해 채권매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 이 과정에서 자산담보부증권 발행을 전문으로 하는 자산유동화 전문회사가 증권발행에 필요한 실제적인 업무를 대행하고, 산업은행이 부채상환을 보증함으로써 신용위험을 크게 낮춘다. 부실채권 투자펀드는 이렇게 매입한 연체채권들을 신용정보회사 등의 자산관리회사(채권추심기업)에 위탁해 채무재조정과 채권추심을 의뢰한다.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 본사를 둔 부실채권 투기전문 펀드로, 그 흔한 홈페이지 하나 없어 일반인들의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외로운 별’ 론스타(Lone Star)는 올해 상반기 삼성, 우리, 외한카드로부터 총 2조 6천억 원의 부실채권을 8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매입했다. 살로먼스미스바니(現 시티그룹 글로벌마켓증권)도 국민카드로부터 부실채권 7천 4백억 원 어치를 77% 할인된 가격으로 매입했다. 이처럼 올해 상반기에만 외국계 부실채권 전문 투기펀드가 매입한 연체채권 규모는 대략 4조원에 달한다. 그리고 이 중 대부분은 일본계 대금업자들이 매입자금을 제공했다.
한 편에선 국부가 유출된다는 비난이 제기되었다.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서는 자산유동화 시장을 더욱 활성화시켜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 카드사들의 숨통을 더 열어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자산관리공사(KAMCO)가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자산관리공사는 지난 3월과 6월, 세 차례에 걸쳐 삼성, LG, 외환카드로부터 총 3조 1천억 원 규모의 부실채권을 매입했다. 하지만 아직도 물량은 넘쳐났다. 카드사들은 붙잡고 있으면 뭔가 돈이 될 거 같은데 자금사정상 연체채권들을 부득이하게 헐값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던 게 불만이었다. 2003년 10월, 산업은행과 LG 투자증권은 우리 손으로 부실채권 인수전담 특별목적회사(SPC)를 설립해 부실채권들을 모은 후 부실채권담보부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고 연체채권을 공동으로 추심하자는 <다중채무자 공동추심 프로그램>을 제안하였고, 10개 카드사들이 거기에 붙었다. 규모는 대상인원 80만명에 5조 2천억원 수준으로 확정되었다.




자산유동화 시장이 활성화되고 부실채권들이 쏟아져 나오자 채권추심회사(자산관리회사)들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지난 한해 동안 국내 신용정보회사 26개 사의 총 매출액은 전년에 비해 23.4%가 증가했다 (6천 4백억 원). 올해는 그 규모가 더욱 늘어 1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신용정보업은 경기를 안타는 업종이다. 경기가 안 좋으면 물량은 많아지지만 회수율이 떨어지는 반면, 반대로 경기가 좋으면 물량이 줄지만 회수율은 높아진다 (한국경제신문 10월 3일자).” 양손에 연체채권들을 움켜쥐고 신용정보협의 전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외국계 금융자본들이 국내 신용정보업 시장으로 재빨리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한신용정보회사의 지분 49%가 론스타 펀드에 매각됐다. GE캐피털은 지난 7월, 서울보증보험, 삼성캐피탈 등과 함께, 채권추심업을 전문으로 하는 SG 신용정보회사의 설립을 금감원에 신고했다. 도이치 은행도 A&D신용정보의 지분 35%를 사들였다.
신용이 소진돼 의식불명의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이 사라지기는커녕 전보다 더 분주한 경제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물로 때가 씻기고 온 몸에 향유를 바른 이 ‘괜찮은 물건’들이 각각의 계기마다 이자를 발생시키며 성의 거실로 모여든 금융자본들의 존재를 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일어나 준다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한동안은 그저 죽지만 않고 버텨주면 된다. 오히려 일어나 촌스럽게 움직일 경우 고상한 연회를 망칠 수도 있다. 어차피 수익은 여기 모이신 이 신사분들이 사체(死體)가 일어나 걸을 수 있냐 없냐를 놓고 진지하게 내놓는 감정(鑑定)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신용회복. 신용구제. 갱생. 수식은 또다시 채무자를 향해 있지만 현실은 이 번에도 그와 전혀 무관하게 돌아간다. 100만원을 빚진 사람이 1년을 연체할 경우 원리금은 133만원. 이를 다시 원금으로 잡고 33%를 감액하더라도 채무자는 여전히 100만원을 빚지게 된다. 카드사는 빚을 제 때에 꼬박꼬박 상환하고 있는 나머지 고객들에게 자기 불안의 무게를 분담할 것을 요구하고, 연체채권을 매각해 추가적으로 손실의 일부를 충당한다. 부실채권 투자회사는 133만원의 연체채권을 13만원에 매입한 후 ABS를 발행한다. ABS를 매입함으로써 연체채권 매입자금을 제공한 이들은 높은 수준의 이자 수입을 챙긴다. 신용정보회사는 채권추심전 착수금으로 얼마를 받고 식물인간을 일으켜 세우는 염불이 통할 경우 후불로 얼마를 더 받는다. 이 모든 과정의 중간에 위치한 부실채권 투자회사는 100명의 채권자 중 20명만 눈을 떠도 엄청난 수익을 챙길 수 있다.

해피엔딩?
자산유동화 시장의 활성화를 통한 카드사 부실문제 처리방식은 97년 경제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온 경제 구조조정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였다. 이어 부실기업의 회사채를 유통시키기 위한 자산담보부증권 시장이 형성되었고 기업구조조정 전문회사들(CRC, CRV)을 주축으로 한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이 자리잡았다. 이 모두는 기업의 매도조건을 개선함으로써 되팔 때의 시세차익을 얻고자 하는 금융자본의 이해가 관철된 결과들이다.
개인 무담보 채권을 대상으로 하는 자산유동화 시장의 활성화도 이상의 과정에서 늘어난 부실채권을 담보로 노동자 계급에게 남은 마지막 파이의 흔적까지 뜯어먹고자 하는, 회사채 자산유동화 시장을 또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상시적 위기관리 시스템일 뿐이다. 신용관계가 계급관계인 상황에서 계급적 역학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노동자의 소득기반이 보전되지 않는 한 신용회복도 갱생도 있을 수 없다. 단지 이미 파국적인 상황이 한동안 더 이상 악화되지도 그렇다고 개선되지도 않은 채 지속될 뿐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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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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