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7-8.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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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갈월동기행.hwp

이름

권혁기 | 민중복지연대
무더운 장마철. 습기에 흠뻑젖은 커피와 프림, 그리고 설탕.
매번 습기가 차겠구나 생각이 들다가도 뚜껑을 닫아놓는 일을 잊어버리곤 한다.
화장실 세탁기에 수건을 넣어두고, 돌아가지 않는 세탁기를 그대로 내버려 둔지 일주일이 지난 듯 싶다. 월요일 청소시간, 아마도 누군가 수건더미를 다시 꺼내 걸레를 집어넣어야 할텐데...
때론 무수히 쌓여있는 싱크대의 컵위에 살짝 컵하나를 얹어두는 얌체같은 일도 서슴없이(?)하는 걸보면 나도 이제 갈월동의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이곳에 둥지를 튼지 어느덧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이름과 사람
사무실에서 반년동안 마주쳐온 분들이지만 아직도 이름과 그 분의 얼굴을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조금있으면 세 살이 되는 조카도 이제는 날 ‘쭌(삼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사무실에 계신 많은 분들중에서는 아직도 말한마디 제대로 건네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사실 어떤 호칭을 붙여야 할지도 나에겐 고민이 되는 사항이었다. 모두들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열심히 몰두하고 있는 순간에는 쉽게 인사조차 건네기 힘들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항상 사람들과 관계맺고 소통하게 되는 과정의 시작은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순간부터 였다. 그 ‘이름’ 위에 포개진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아직 그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때이른 ‘건망증’이 스스로를 ‘로빈슨 아저씨’로 만들진 않을까 한심해질때도 있다.

이름을 소개하기
누군가 ‘민중복지연대는 어떤 단체인가요?’라는 질문을 할때면 적잖이 당황할때가 있다.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이 나에겐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망설이지 않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답변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갈월동 사무실에 있는 단체들이 어떤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는지, 솔직히 알고 있는 부분들보다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궁금증이 생길때가 많다. 담배를 피우러 휴게실에 앉아 있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때가 우습게도 ‘소통’의 유일한 기회가 되버리곤 한다. 가끔은 학예발표회를 하던 국민학교(?)때를 떠올리면서 ‘갈월동’ 단체들이 서로를 소개하는 발표회 시간 같은게 있으면 나같은 ‘신입사원’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좋은 시간이 될거라는 우스운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오래도록 남아있는 이름
생활의 문제가 개인적 ‘의지’와 ‘필연’의 문제로 날 짓누르게 될 순간이 와도 꿋꿋이 버텨낼 수 있는 생활력을 갖추어 나가는건 언제나 풀어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물론 생활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로 머물지 않도록 함께 풀어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튼튼한 주춧돌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오래 버텨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리라고 생각해본다.
어떤 ‘이름’이 품고있는 전망과 또다른 세상을 향한 열려짐은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그 이름은 때론 사람의 이름일수도, 아직 가지 않은 어떤 길의 이름일수도 있겠지만...
이곳 갈월동에 계신분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들이 사람들이 아직 가보지 못한 매력적인 길이 되기를 바라곤 한다. 그저 누군가 걸어간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과정이 아닌, 사람들이 미처 내딛지 못한 그런 길을 말이다.

‘민중복지연대’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온 그동안의 활동들이 어떤 길을 열어갈 수 있을지 아직 나에게는 벅찬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이른 ‘건망증’이 자연스럽게 사라질때쯤이면 아마 나에게도 막연한 그 길이 보일때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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