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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7-8.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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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영화 탄생의 역사적 배경-페론주의와의 관계

이정일 |
20세기 초 유럽과 아시아에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2차 대전에 휘말려 있을 때 중남미는 여기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대륙 이외의 문제에 불간섭하는 오래된 관행을 따라 많은 나라들이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남미 각국이 내부의 정치적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5년 3월 아르헨티나가 돌연 독일과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다. 전쟁의 결과와 거의 상관이 없었던 이 전쟁 선포 결정의 이면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고자했던 발카르세 군사정권의 계산이 들어있었다. 미국과의 협력사실이 알려지자 발카르세 정권은 더 이상 계속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견디지 못하고 당시 쿠데타 혐의로 감금되어있던 도밍고 페론을 석방하고 대통령 선거 실시를 약속한다.
그리하여 1946년 2월의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도밍고 페론이 집권하고, 1955년 군부의 반란으로 스페인에 망명할 때까지 9년간 아르헨티나를 통치한다. 그의 정권초반기는 강력한 개혁 정책의 연속이었고 이 정책들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개혁정책을 정의주의(Justicialismo)라고 이름 붙이고, 공공사업, 교통, 교육,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노동조합 운영인사들을 대거 정부에 기용했다. 또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하여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했다. 노동자들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47년 25% 48년에는 24% 상승하였고 48년에는 선거법을 개정하여 선거인단제를 폐지하고 직선제를 도입했다. 1946년 말에는 프랑스인 소유였던 철도망, 국제 전화전신 회사(ITT) 소유의 전화회사 유니온 텔레포니카(Uni?n Telef?nica)를 그리고 47년에는 영국 소유의 철도망을 국유화 하였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경제는 호황을 맞아 국민 총생산이 29% 상승하였고, 47년 7월에는 그간의 모든 외채를 청산하는 놀라운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페론정권 초반의 노동자 중심의 개혁정책과 경제적인 성과는 페론이 물러난 후에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이른바 페론주의(Peron?smo)가 계속 나타나는 이유가 된다. 정권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페론은 군부와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페론의 부인인 에바 페론을 부통령에 추대하고자했던 노동자 총연맹과 이를 반대하던 군부가 마찰을 빚고 50년 9월에 군부 중 일부가 쿠데타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페론은 사회적 규제를 강화한다. 페론이 비록 51년의 재선에서 61%의 지지로 다시 정권을 잡았지만 틀어진 군부와의 관계, 억압적 정책으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한 중립인사들, 그리고 악화된 경제상황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기에 52년의 에바 페론의 죽음, 54년의 금속노조의 대규모 파업으로 노동자들의 지지마저 잃게 되고 정권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1955년 페론이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카이저(Kayser) 자동차 회사의 공장설립과 미국 스탠포드 석유회사의 유전 개발을 허용하자 많은 민족주의자들의 주동으로 폭동이 일어나고, 폭동은 곧 진압되었지만 군부의 잇따른 반란으로 페론은 스페인으로 망명을 선언하고 만다.(강석영, 1996: 59~63)
페론이 스페인으로 망명한 후 군부 및 자유주의자들과 페론을 추종하는 노동자 중심의 페론주의자들(Peronist)들 사이의 정권 다툼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면서 대다수 노동자들은 페론 집권 초기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며 공감하는 정서가 팽배하게 된다. 그리고 1966년 일어난 군사쿠데타가 아르헨티나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자 페론주의자들의 세력은 점점 커지게 된다.
페론주의에 관한 평가는 아주 극단적이다. 가장 흔히 이야기되는 것은 포퓰리즘이라는 견해이다. 즉 노동자의 비유를 맞춰주기 위한 인기 영합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발카로세 정권하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노동자들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한 것에 대한 악의 섞인 비난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미국과 미국 자본과 연계된 아르헨티나내의 자본가들은 그의 국유화 정책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의 집권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며 그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그의 정권 초반기 정책들은 지금에 와서 냉정히 판단해보면 정당성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전통적 좌파가 없는 아르헨티나 그때까지 역사에서 항상 소외되어왔던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페론이 비난받아야한다면 그가 인기에 영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권 후반기와 72년 재집권 시에 보여주었던 억압적인 독재자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해방영화의 주체들은 이러한 시대를 보내며 개혁 혹은 혁명에 관한 관점들을 형성한다. 이들은 페론주의자임을 자처했는데 페론이 추방되고 난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대표적 작품인 <불타는 시간>(La Hora de los Hornos: The Hour of Furnaces)(68)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중 두 번째 에피소드인 ‘해방을 위한 실천’은 페론주의하의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보여주며 ‘아르헨티나 역사 속에서 진정한 노동계층의 정치적 움직임은 페론주의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서울 영화 집단, 2000: 240) 또한 이 영화에 이어지는 두 편의 영화가 스페인에 망명 중인 페론과의 인터뷰였다는 것, 그리고 72년 페론의 재집권 시에 이들이 영화 정책담당자로서 정권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더구나 솔라나스가 이 시기에 만든 <다시 얻은 권력을 위한 페론주의자 독트린(A Peronist Doctrine Update for Regaining Power)>과 <마르틴 피에로의 아들(The Sons of Fierro)>은 유일한 지도자로서의 페론의 신화를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이들이 세웠던 이념적 전선이 정통 맑스주의에 의한 치밀한 계급관계에 입각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미국 등의 외국 자본에 의한 착취에 대한 분노와 노동자들에게 권리를 되찾아 준 페론정권 초기의 모습에 대한 갈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이면에는 당시의 군사정권하에서 탄압받고 있던 민족주의 페론주의좌파들의 헤게모니 싸움이 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공산당은 페론을 파시스트의 선동자라고 비난했었다. (스키드 모어, 1989) PSSP

참고문헌
강석영(1996) 『라틴 아메리카史 상』,大韓敎科書
스키드모어, 스미스, 민준기공역(1989) 「아르헨티나: 繁榮과 停滯」,『라틴아메리카의 民主 化』,法文社
서울영화집단(2000)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학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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