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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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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천막에서의 하루

정지현 |
여의도 천막에서의 하루

정지현 (운영위원)

예전에 집회에 나가면 소위 말해 운동권들 때문에 먹고 살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 사람은 단연 마스크 아저씨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가 멀다하고 뿌려대는 최루탄 속에서 마스크는 (물론 담배와 함께) 집회의 필수품 중에 필수품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일찌감치 학교 앞 약국의 마스크는 동이 나 버렸고, 그럴 때 집회장에서 나타난 마스크 아저씨는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즘 투쟁을 나서다 그때처럼 흔히 말하는 운동권들 때문에 누가 먹고살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천막이 집성촌을 이루는 여의도 한 복판에서 말이다. 그건 다름 아닌 천막집 주인 일게다. 사회가 진화할수록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가 드러나기 때문에 농성투쟁의 요구도 다양해졌다. 올해 여의도 국회 앞은 한마디로 농성천막으로 가득 찼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일하던 직장인이 지나가다 여기는 주소가 '영등포구 여의도동' 이 아니라 '영등포구 농성동' 이라고 했을까. 예전에도 농성은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 거리에서의 투쟁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대부분 농성은 장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천막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최첨단으로 설치하기 쉽게 천막이 발달된 것도 한 몫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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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투쟁은 거리에서 대중들과 만나는 투쟁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중들과 함께 하는 투쟁보다는 적들을 향한 항의의 의미로서 투쟁이 많아졌다. 거리의 싸움을 해본지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거리의 투쟁이 하나둘 농성투쟁으로 바뀌어갔다. 아니 거점으로서의 농성투쟁은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거점으로써의 의미였고 농성활동의 대부분은 거리에서 대중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주로 '투쟁=농성'만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러다보니 대중들이 있는 곳에서의 투쟁보다는 왠지 투쟁이 협소해 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정기국회, 임시국회가 있으니 그리고 그때마다 국회에서 민생법안이 거의 존경할 만한 여지도 없는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개악되고 있으니 주적을 상대로 한 거점 투쟁이라는 것이 전술상으로 고려되긴 해야하는 것은 맞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를 향한 농성투쟁이 아예 애초부터 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국회 앞이 1인 시위자로 넘쳐났던 기억도 난다. 1인 시위는 대규모의 집회를 할 수 있는 역량이 되지 않을 때 하는 최소한의 투쟁이다. 그나마도 하는 것은 정말 고무적인 일이지만 주적에 대한 항의의 의미가 많을 뿐 대규모의 파급력이나 대중들과의 소통이라는 부분은 적은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농성이 사람의 수는 많아졌지만 1인 시위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의도라는 공간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우리 역시 그들과 싸우기 위해 '그들만의 섬' 여의도에 고스란히 같이 갇혀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이 겨울의 천막투쟁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모두들 정말 열심히 싸우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단식농성도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그리고 비정규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삭발도 했다. 집회도 끊이지 않는다. 각 농성장에서도 대중들과 만나기 위해 시내로 선전전을 나가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의도에서의 집회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허허벌판에 우리끼리 모여서 울리지도 않는 메아리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2002년도에도 서울역에서 다양한 요구를 가지고 지금처럼 여러 단위에서 천막촌을 이루며 투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중들과 만나기는 참 쉬운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는 뭔지 모를 불안감이 적었다. 그런데 이 덩그런 여의도에서는 당초 그런 것이 잘 안 된다. 물론 여의도 인근의 직장인들을 만나긴 하지만 말이다.

그 다음으로 달라진 것은 이전의 농성투쟁이 종교계를 거점으로 만들어 졌다면 이제는 정부 입법 기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96-97년 총파업 때 명동성당에서의 기억이 난다. 96년도 12월 31일 명동성당에서 96년을 보내고 97년을 맞이했다. 2001년도 명동성당에서 최옥란 열사의 최저생계비 투쟁, 2002년도 명동성당에서의 발전노조 투쟁, 2003년 명동성당의 이주노동자농성투쟁... 주로 명동성당이 많이 이용되었지만, 그 곳 말고도 향린교회, 조계사 등 많은 종교계가 투쟁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물론 수배자들이 있기 때문에 성역의 장소에서 거점이 만들어지는 것이 고려된 전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편, 국회앞 국민은행에서의 농성장은 비교적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잘 지낸다. 그런데 마음 한 편에 가장 걸렸던 것은 우리의 천막촌 저편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터 여성들의 천막이었다. 그녀들의 생존권을 생각해 본적은 있을까. 어느 날 저녁에 한번은 모든 농성장이 모여 촛불집회를 했다. 그때는 건너편에 있는 군의문사 농성장에서도 함께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왜 그녀들은 오지 않았을까? 생존권을 걸고 투쟁한다면 그녀들은 우리와 연대할 수 없는 것인가. (물론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측면이 있지만) 성매매 방지법에 대한 복잡한 논의는 뒤로하더라도 여의도를 지나가다가 또 다른 민중들인 그녀들의 삶을 우리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 마음이 복잡했다.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도 그들처럼 대중들과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건 나만의 기우(杞憂)인지..

정권의 공세는 공권력을 투입하는 방식의 눈에 보이는 물리적 통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통제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법과 제도로 우리의 삶을 옥죄어 오고 있고, 그 방식도 세련되어 졌다. 그래서 우리는 입법 투쟁으로 맞서고, 입법기관인 국회앞에서 농성을 하는 것으로 그들과 맞서고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민주노총이 이번 총파업에서 너무 국회 일정만 쫓아다닌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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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스크 아저씨는 다시 빈곤해 졌다.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언젠가는 야광 팔찌를 팔고 깔개를 파는 모습을 봤다. 이제 마스크 아저씨의 전성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천막집 주인의 전성시대가 온 것인지 모른다. 마스크와 대중과 최루탄 냄새가 어울어졌던(?) 지난 시기와 달리, 천막과 국회와 입법쟁취를 위한 사회적 교섭이 혼재되어 있는 여의도 한 복판에서 나는 오늘도 현기증을 느낀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대중들이 아쉬워진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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