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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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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시선_경찰고용직노조.hwp

기능직으로 전환되어 고용안정이 되는 그날까지

장희정 |
기능직으로 전환되어 고용안정이 되는 그날까지

장 희 정 | 경찰청고용직공무원노동조합 사무국장


* 이글은 비정규노동 2005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처음 경찰서에 발을 내딛었을 당시 내가 아는 공무원이란 신분이 보장된 사람들을 말하는 줄 알았다. 19살 어린나이에 교복을 입고 출근하여 직원들 뒷바라지에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없는 일도 찾아가며 열심히 일했던 이유는 ‘그래도 공무원인데... 정말 내가 힘들면 그때 그만둬야지...’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누구하나 나에게 ‘고용직공무원은 나가라면 나가야 되고, 얼마뒤면 짤릴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

공무원도 생존권 보장?

고용직공무원의 직제는 사실상 1989년 폐지되었으나, 경찰청에서는 1989년 이후로도 2002년까지 지속적으로 신규채용을 해 왔으며, 1998년까지 일부 고용직공무원을 기능직으로 승급하고 2002년에는 일용직을 기능직으로 승급한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행정자치부의 외청으로 자리하고 있는 경찰청은 정부(행정자치부)의 일방적 지침을 빙자, 고용직공무원들의 직권면직을 자행하고 거기에 따른 인센티브 성격이 강한 경찰인력 증원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경찰청 고용직공무원의 경우, 같은 관서의 경찰청 기능직공무원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기능직과 유사한 대우조차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미 다른 국가직 고용직공무원들은 1989년 5월 경과조치에 의해 고용직 복무 3년 이상인 자는 모두 기능직으로 전환되어 일하고 있음에도 동일 직종내 근속년수를 훨씬 넘겨 복무중인 경찰청 고용직공무원에게만 직권면직을 강요하고 차별을 강요하는 것은 정부가 앞장서서 부당함과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통의 전화와 노조결성

2003년 12월 어느날 한 통의 전화가 날아든 날부터 내 생활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경찰서에서 고용직으로 근무하고 있던 한 동료가 고용직이 많은 경찰서에서 직권면직이 당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전화였다. 내가 근무하던 경찰서에는 고용직공무원이 1명밖에 없었기에 정보는 막힐대로 막힌 상태였고, 직권들조차 ‘넌 해당 없으니까 걱정하지마’란 말론 주저앉히기에 급급했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이미 전국에 퍼져 있음에 그동안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였던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고용직공무원이 현행법상, 문서상 현재 정규직이기는 하지만, 고용보장이 되질 않는다면 정규직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들이대놓고 비정규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그러는 동안 2003년 말 499명의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강제적인 직권면직을 당해야만 했으며, 2004년 말 584명의 직권면직 예정도 받아야만 했다.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뒤늦었지만 수소문 끝에 2004년 5월 대전에서 30여명이 모여 비대위를 구성하고 인권위에 진정서도 냈다.

그리고 약 2달간의 준비기간을 가진 후 7월 24일, 경찰이란 조직내에서 최초로 전국경찰청고용직공무원노동조합(이하 경찰고용직노조)이 출범하게 되었다. 노조가 출범한 후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직권면직’이란 큰 장벽이 앞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조로서 아니 노동자로서의 삶을 이제 시작한 사람들에게 사소한 하나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부와 싸움을 시작한다는 말에 어깨를 두드려 주는 사람보다는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큰 무게로 다가왔다.

노조결성하고 파업하니 이제야 공무원?

노조의 첫걸음은 노조설립신고였다. 역시나 결과는 ‘반려’.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하급법인 노동법으로 막는 정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반려취소소송’을 병행하면서 법외노조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사의 자유도 가로막고, 거기다 고용안정이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노조설립을 막으면서까지 인정하지 않는 저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들은 당당하게 노동조합을 통해서 투쟁하기로 각오하였다.

비록 법외노조지만 부당한 직권면직을 앞두고 있는 동지들을 찾아 전국순회 간담회를 진행하였다. 생소하게만 느껴졌던 노조란 이름이 동지들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었는지 참석률도 저조하고 참석자 명단에 이름 하나 쓰기도 굉장히 어려워하는 동지들을 보면서 경찰서에서 지낸 10여년의 시간동안 얼마나 고정관념에 박혀 살아왔는가 생각하면서 남몰래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러고만 있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2004년 9월 17일 경찰청 앞에서 처음 집회가 열린 후부터 한 번도 연행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우리가 여태까지 몰랐었던, 아니 취급받지 못했던 ‘공무원’임을, 이제야 집회투쟁을 하면서 비로소 공무원으로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집회투쟁을 지속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경찰청·행자부 책임자와의 면담, 청와대 1인시위, 경찰청 및 경찰청장 공관 앞 기습시위 등의 투쟁을 지속해 왔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지방에 분산해 있는 이유로 새벽이슬을 맞으며 무박 2일의 상경투쟁 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단단해지는 동지들의 얼굴을 보면서 거머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12월 16일, 자진퇴직 기한을 하루 남긴 날이었다. 경찰청에서 정한 ‘강제면직’을 우리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의지를 알리는 집회를 기자회견과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합법적인 집회신고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력으로 집회장소를 원천봉쇄하고, 집회현장을 전국 각지에서 따라온 추수형사들이 가득 매우는 기이한 현상까지 벌어졌다. 결국 간신히 기자회견만을 마치고 제2의 장소로 이동했지만 우리가 모여있는 자체만으로 ‘집단행동’ 운운하며 전원을 연행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에 민주노동당 중앙당사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 거점농성 40일이란 시간이 훨씬 지났다. 단식단의 단식도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가면 한가정의 엄마이고, 딸인 우리 조합원들... 날이 갈수록 몸은 지치지만 눈빛 하나만은 살아 있음이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순간 가슴에 새겨지고 또 새겨진다.

직권면직 철회와 고용승계를 보장하라

조합원의 대부분이 여성이고, 노조의 ‘노’자로 모르던 사람들이 경력들과 대치하고 연행되면서도 한치의 물러섬 없이 싸우고 있다. 저들이 우리를 두고서 ‘나가라면 나가야 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들은 10년 세월 공무원의 최하위직에서 묵묵히 헌신한 대가를 고용안정으로 보상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 동료가 아닌 동지로 똘똘 뭉쳐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다는 신념을 확인한다. 우리들이 소원하는 “기능직으로 전환되어 고용안정이 되는 그날까지” 경찰청에서 고용승계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더욱더 강경한 모습으로 끝까지 싸울 것이다.

이제 ‘투쟁’이란 단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동안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란 인식을 깨우치지 못했던 삶은 지우고 싶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한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앞으로 노동자로서 살아갈 날들이 더 많기에 우리 노조는 끝까지 싸워서 지켜내고자 한다. 노동자의 한사람으로서 길거리로 내쳐지는 수치스러움을 내던지고 기본적 생존권을 꼭 지켜내고 싶다.

끝까지 투쟁하여 빛나게 쟁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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