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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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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주의 비판 ④] 네덜란드 코포라티즘의 신자유주의적 변형

원종현 |
네덜란드 코포라티즘의 신자유주의적 변형

원 종 현 | 노동차장

* 이 글은 지난 12우러호 기획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네덜란드의 사회적 합의주의 사례에 관한 글이다.

네덜란드식 사회 코포라티즘
네덜란드 사회 코포라티즘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노동과 자본 간의 대결이라는 기본적 구도 외에 신ㆍ구교간의 오랜 종교적 균열, 독일 파시즘의 침략, 상업과 무역 의존도가 높으며, 해수면보다 낮은 국토를 가진 소국으로서 네덜란드는 언제나 정치적 협의와 경제적 타협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왔다. 이러한 특수성은 노동당, 자유당, 기민당이 연립을 통해서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정치지형과 비례대표제라는 정치적 여건을 형성하였고, 코포라티즘적 차원을 넘어 사회의 모든 계층과 집단을 아우르는 포괄적 협의주의(consociationalism)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른바 '국가중심적 협의 경제(etatist concertation economy)'로도 불리는 네덜란드의 경제체계는 국가주도적이고 중앙집중적인 코포라티즘의 성격 또한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협의 모델의 초기적 형태를 해면보다 낮은 네덜란드 해안 간척지(폴더 - 폴더 모델 Polder Model 이라는 용어의 기원)를 형성하기 위한 네덜란드 국민들의 협동이라고 한다면, 보다 근래의 역사적 기원은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에 노동과 자본의 대표가 전후 경제재건을 위해 형성한 사회 협력적 관계에 있다. 그 구체적인 형태가 2차대전 이후 1945년의 양자협의 기구 '노동재단'의 설립이다. 한편 2차대전 직후 네덜란드 정부는 신속한 경제재건을 위해 정부의 광범위한 개입이 불가피함을 밝혔다. 그리고 곧이어 정부는 ‘노동관계에 대한 특별명령’을 발효하였고 이에 따라 임금형성과정은 완전히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주도되었다.
네덜란드의 사회협의체적 산업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1950년대 초이다. 국가의 엄격한 임금가이드 정책을 받아들이는 조건하에, 모든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대한 전국적 노동조직들에게 정책참여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국가는 ‘사회적 동반자들’ 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경제평의회(SER: Sociaal-Economische Raad)’를 출범시켰다. 이 기구는 노동과 자본의 대표, 그리고 국왕에 의해 임명된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로써 노동재단이라는 민간 협의제도와 사회경제협의회라는 법적 협의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를 보유한 사회협의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협의체제는 중앙 노동조직들에게 산하 하위조직들에 대한 권위와 영향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사회경제평의회를 통해 국가는 완전고용과 사회복지의 확장 정책을 대가로 강력한 임금 가이드정책에 의한 임금자제를 요구했고, 노동재단도 이를 지지해 온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정부 중앙조정위(CvR: College van Rijksbemiddelaars)가 경제전망치와 임금권고안을 제시하면 사회경제평의회가 검토하여 노동재단과 노동부에 사회경제평의회 권고안 형태로 임금인상안을 다시 제안한다. 정부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노동재단과 정부의 정례 간담회를 통한 임금 관련 협의를 거친 후 최종 가이드라인을 공표해 왔다. 이렇게 이 두 기구는 네덜란드 사회 코포라티즘 모델의 양대 핵심 기제로 작용하였다.

전통적 네덜란드 사회 코포라티즘의 위기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 네덜란드의 단체협상은 매우 중앙집중화된 형태를 유지하였으며 국가의 강력한 임금 가이드정책을 통한 임금 자제, 그리고 그 대가로 완전고용과 사회복지의 확장정책은 노사 협의 기구인 노동재단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가 되자 완전고용을 토대로 한 노동조합의 영향력 증대와 노동자들의 임금상승 욕구가 분출하였다. 그간 엄격한 임금규제정책으로 인해 네덜란드 노동자의 임금은 인접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았으며 더욱이 네덜란드의 노동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있었다. 그 결과 노동시장에서는 정규임금 외에 각종 수당과 장려금, 보너스 등의 ‘임금 외 임금’이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본과 노동의 정상조직들은 산하 구성원들의 임금협상 과정에서 임금상승압력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1963년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이 철회되고, 정부중재원이 보유하고 있던 임금결정권은 노동재단에 위임되었고 임금 상승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정부는 1970년에 황급히 ‘임금협상법’을 제정하여, 임금을 동결 혹은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다시 장악함으로써, 이후 1982년까지 5차례에 걸쳐 임금결정과정에 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시도는 강력한 파업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러한 지속적 임금상승은 1970/80년대의 경제 위기와 맞물려 국가 재정의 파탄을 경고하고 있었다. 1960년대 도입된 임금-물가 연동제에 의해 물가는 고스란히 임금인상률에 반영되었고 최저임금과 실업보험을 비롯한 각종 복지급부가 민간부분의 평균임금에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물가-임금-복지비용의 동반 상승이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위기는 성장둔화/일자리 축소를 가져왔고 이는 다시 복지예산의 팽창과 국가의 재정 적자를 불가피하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유럽 전역이 자발적 파업투쟁에 달아오르고 있던 시기로서, 네덜란드의 1970년대에도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의 투쟁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는 두 차례의 유가 파동에 따른 충격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 측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타개해 나가려 하였다. 탈규제, 유연화, 외주, 하청 등 생산합리화 및 제조업 약화와 서비스업 증대라는 생산구조의 변화가 가져온 계급구조의 변화(사무직 노동자층의 증가와 이에 따른 사무직 노조의 각종자율노조의 분리, 중앙교섭의 해체와 기업별 단협의 증가)는 노동자 내 부문별 이해관계를 급격하게 세분화하고 이질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되었다. 노동 진영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도전에 대해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직종과 지위에 따른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노동시장이 급속히 탈규제되고 유연화되는 가운데 노동조합은 급격한 조직률 하락과 힘의 약화를 막지 못했다.

결국, 정부의 재정위기 해소,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공세와 노동조합의 영향력 회복이라는 이해관계의 급격한 변화는 조합주의적 합의체제를 이른바 ‘공동결정의 함정’에 빠지게 하였다. 코포라티즘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네덜란드 사회 코포라티즘의 위기와 바쎄나 협약
실업과 경제 위기로 인해 중도좌파 연립정부는 1982년 선거에서 실각한 후 기민당(CDA)과 자유당(VVD)의 중도우파 연립정부가 출범하였다. 루버스(Lubbers)의 중도우파 연립정부는 우선 경제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존의 노사정 협의체제에서 탈피하여 건전 재정 회복, 기업의 채산성 향상, 일자리 공유(work-sharing)를 통한 고용안정 등 산업 전반에 걸친 정부주도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노사간 자율교섭의 여지를 상당히 축소한다는 의미에서 노동과 자본에게 모두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에 실업률 증가와 조직률 하락에 직면한 노동조합은 자신의 노동시간단축 요구과 자본이 요구하는 임금인상 자제를 교환함으로써 실업률을 최소화와 조직률의 회복을 시도하였고, 자본 측도 기업의 인사관리 및 영업 전략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부의 물가 및 임금 동결에 지극히 부정적이어서 노동과의 자율적 협상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신정부의 정책에 대해 기민하게 대응한 노동과 자본은 같은 해 11월 24일 노동재단의 결정을 통해 헤이그 근처의 바쎄나라는 마을에 있는 사용자총연합회 회장 자택에서 이른바 '바쎄나 협약'(Wassenar Accord)을 체결하였다. 1993년 임금자제와 단체교섭의 분권화를 촉진한 신노선 협약(Een Nieuwe Koers Accord)과 1996년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파트타임 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회보장체제를 강화한 '유연화와 보장에 관한 협약(Flexibiliteit en Zekerheid Accord)' 및 그 후 일련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에 관한 협약과 법령들은 이 협약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 네덜란드의 사회 코포라티즘이 중앙의 거시적 협상을 선호하고 케인즈주의적 개입국가와 노조의 정책결정 참여를 중시했다면, 이 새로운 협의 구조는 산별/부문별 협상인 중위적 수준의 협상을 선호하고 노동시장의 공급측면에 중점을 두어 고용안정과 교육 및 유연화를 중시하는 것이다.

바쎄나 협약
바쎄나 협약의 핵심 내용은 첫째, 노동자대표는 임금물가 연동제의 폐지 등 임금인상 억제에 협력하는 대신 사용자 대표는 정규직의 주당 노동시간 단축과 고용확보를 약속함으로써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를 회생시킨다. 이것은 노동시장에 대한 인식변화와 노동조합의 '고용우선전략' 선택을 의미한다. 둘째, 이 타협은 또 하나의 정치적 교환, 즉 노동자 대표와 정부, 사용자 대표와 정부 사이의 타협에 의해 보완되었는데, 정부는 임금억제와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하여 기업에게 각종 세금과 사회적 부담을 줄여주고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생산과 고용의 확대를 유도했다. 셋째, 기존의 중앙수준 노자교섭을 산별 혹은 부문별 차원의 교섭으로 전환시키기로 합의하였다. 빠른 속도로 이질화되어 가는 산하 하위조직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중앙수준의 교섭과 협약이 '공동결정의 함정'에 빠지거나 하부조직의 저항을 받아 왔다는 점을 고려하여, 노자간의 교섭 및 협의 수준을 하향 조정한 것이다.
바쎄나 협약의 효과는 1984년 12%였던 실업률을 1996년 6.3%까지 낮추는 데 기여함으로써 가히 '고용기적'을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0년대 실업률 1~2%, 1970년대 약 6%, 1984년 12%. 1995년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하락하여 2001년 2%까지 내려감. 2002년 12월말에는 다시 2.7%로 상승(Ours 2003, 93). 그러나 '고용 기적'의 주된 내용은 파트타임 노동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의 증가였다. 사용자 측이 노동비용을 억제하기보다 오히려 정규직의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에서 38시간으로 단축함으로써 파트타임 노동자들을 크게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신노선 협약
바쎄나 협약의 효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위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0년대 초에 네덜란드 경제는 다시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노사정 협의가 다시 가동되었는데, 이것이 '신노선 협약'이다. 이 협약은 기본적으로 1982년 바쎄나 협약을 계승한 것으로서, 노조의 노동시간 단축과 파트타임 노동자 보호를 수용하되 공급조절 측면을 더욱 강화시켜 유연화를 확대한 것이다. 곧, 노조는 추가적인 노동시간 단축에 기초한 고용확보를 통해 유연화에 대처하였고, 사용자는 직업훈련제도의 확충을 통해 종업원의 채용가능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정부는 임금과 휴가 및 연금에 대해 파트타임 노동과 풀타임 노동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등 파트타임 노동자들의 사회보장제도의 정비와 확충으로 이들의 합의를 보완했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기간제 노동계약에 주로 의존했는데, 실제로는 기간제 노동계약이 갱신될 때에는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노동계약으로 전환하도록 되어 있는 등 상당한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기간제 노동 계약의 갱신보다는 파견 노동이나 호출노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편을 취했다.

1996년 이후 유연안정성 합의와 조치들
노조의 고용우선전략은 사용자 측의 노동시장 유연화 공세와 교환되어 1996년 노동재단에서의 유연성과 안정성에 대한 합의 이후 1997년 제출되어 1999년 1월부터 발효된 유연성과 안정성에 관한 법(Wet Flexibiliteit en Zekerheid)과 2002년 2000년 노동시장조정법(Wet Aanpaasing Arbeidsduur: 파트타임노동 보호법) 및 2002년 11월 '2003년 노사간 고용조건 정책'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 진전에 대해 파트타임 노동자들의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사실 1999년 법이 도입되기 전에는 사용자들이 노동계약 기간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는 기간제 노동계약과 파견노동계약을 교대로 활용하여 불안정 취업이 장기화되는 폐해가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노조 대표는 노동의 유연화를 받아들이는 대신 기간제 노동계약 노동자와 파견노동 계약 노동자의 법적ㆍ경제적 지위의 보장을 요구했으며, 사용자 대표와 정부가 이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2000년 노동시장조정법에서도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조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사용자는 엄격한 기업경영상의 이유에서만 이를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2002년 '고용조건 정책' 합의도 근로자 소득중 저축분에 대한 세금감면제도 및 정부보조 일자리 제공제도의 유지 등 노조 측 요구를 상당부분 반영하였다.
그러나 '유연안정성'에 관한 협약과 조치들은 이미 전 단계에 시작되고 강화된 노동비용 감축과 유연화 및 그 결과를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가운데 부작용들을 흡수하는 노조의 수세적 대응이었다. 특히 2002년의 '고용조건 정책' 협약도 2003년의 임금인상에 관한 단체협약이 2003년도에 인플레 예상치 2.5%를 초과하지 않도록 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노정하였다.

네덜란드 사회협약 해체의 전야
네덜란드 모델은 실업률의 해소와 비정규직에 대한 고려 및 경제회복을 이룬 성공적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 새로운 네덜란드 모델의 효과가 가리키는 지표는 적어도 1990년대말과 2000년대 벽두까지는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모델의 근본적 한계는 신자유주의적 탈규제 공세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아니라 그 결과를 인정하는 가운데 선택된 수세적 대응이라는 데에 있다.
그에 따른 네덜란드 노동시장의 변화는 일시해고에 필요한 행정절차 간소화, 초과시간근무, 해고, 단기고용계약 및 그 갱신의 고용계약절차 완화와 임시직과 비정규직의 확대로 현상하였다. 1990년대 중반 총고용에 대한 그 비중과 1983년 이후 10여년간의 증가율은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 1983년부터 1994년 사이 임시직 비율은 유럽연합 국가들에서 일정하게 유지되었던 반면, 네덜란드에서는 5.8%에서 2배 가까운 10.9%로 증가하였다. 비정규직의 비율도 1983년에서 1996년 기간 동안 21.2%에서 36.5%로 증가하여,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1996년도에 네덜란드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보인 스웨덴도 23.6%에 불과했고 이 기간 동안에는 오히려 감소하였으며, 증가율 면에서도 네덜란드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 프랑스가 9.6%에서 16.0%로 증가하는데 그쳤다. 전반적인 사회복지 혜택의 감소도 적지 않았다. 질병, 고령 및 실업에 대한 사회복지 혜택이 물론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는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기는 하나, 종전의 최종소득대비 80%에 비하면 10%나 감소하여 70%로 하락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결과들은 신자유주의적 탈규제의 공세에 근본적으로 대처하여 노동자들의 이익을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부작용만을 봉합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2000년 경 주택가격의 거품이 빠지면서 네덜란드 경제는 내수경기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안정을 유지해왔던 물가도 갑자기 오르기 시작해 2001년 5.1%, 2002년 3.9%의 고인플레를 기록했다. 저임금과 고용불안 등으로 인해 노동생산성 향상률도 2001년 이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실질경제성장률은 2001년 1.3%. 2002년 0.3%로 급락하였으며 지난해 4분기 이래 계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지속하였다. 그동안 네덜란드 경제의 자랑이었던 낮은 실업률마저 무너지기 시작해 2002년 4분기 3.1%, 2003년 1분기 3.6%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경제불안과 더불어 정치적 혼란도 가중되었는데, 2002년 5월 총선에서 집권당인 노동당-자민당-민주66당 연정(이른바 ‘자줏빛 연정’)이 대패하고 대신 인민당-기민당-자민당 연정이 성립되었지만 새 내각 역시 사회복지 삭감을 둘러싸고 노동당과 대립한 끝에 2002년 10월 붕괴되고 말았다.
2003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한 기민당과 자유당 연립정부는 경제 침제로 인한 정부 재정난에 대처하기 위해 2차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재정 삭감을 감행하면서 대규모 사회보장예산 삭감을 실시하였다. 사상 최대 규모의 공공 서비스, 연금, 고용지원, 퇴직금 지원, 의료비 지원 등 각종 사회보장지출 삭감과 2년간의 임금동결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예산 삭감 규모는 170억 유로(약 24조원)에 이르렀다. 당시 네덜란드 최대의 네덜란드 노총(FNV)는 당시에 정부에 대한 강경투쟁을 선포하고 시위를 조직했으나 노조의 시위 조직 능력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약했고, 노조는 결국 정부의 임금동결에 합의하고 사회보장제도 개편에 대한 논의를 할 시간을 버는 데 만족해야 했다.
노조의 힘을 확인한 정부는 노조를 국정의 협력 파트너로 삼는 네덜란드 모델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하며 더욱 대폭적인 사회보장제도 개편안을 들고 나왔다. 정부는 2004년 초 경제부장관과 사회정책부장관이 공동으로 제출한 '경제성장을 위한 보고서'에 입각해 대규모 수술에 나섰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일에서도 슈뢰더 정부가 거의 똑같은 내용의 정책(Hart Ⅳ)을 들고 나왔고, 경제성장은 모든 유럽연합 국가들의 구호가 되었다. 이는 2000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합의한 '리스본 합의' 때문이었다. 이들은 유럽연합이 미국에 비해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2010년까지 유럽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권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성장 우선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노조에게 모든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기업에게는 더 낮은 세금과 규제 완화를 약속했다. 세계적인 경쟁에서의 생존을 위해 임금비용 절감, 연금과 실업수당 등의 사회복지재정의 대폭적인 삭감으로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정부가 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현행 연금제도의 대폭적인 구조조정과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총공격 시도 중 대표적인 것은 노동시간 연장 추진, 조기 퇴직제도의 장기적 폐지와 정년 연령의 상승, 산업재해 판정 기준의 엄격화와, 기존 산재 판정자에 대한 재검사이다. 또 실업자 수당 적용 기준을 높여 실업수당을 줄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150만장의 무료기차표
노조는 2004년 상반기 사회적 협약을 거부했다. 사회적 협약체제에 해체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3대노조 네덜란드 노총(FNV, 조합원 120만), 기독 노총(CNV, 조합원 30만), 중간직 전문직노조(MHP, 조합원 15만)는 사회/노동부문의 거대한 후퇴를 가져올 이 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전선의 형성을 위해 모든 조직력을 총동원하였다. 70년대의 기억을 되살리는 과감한 점거농성과 조합 지도자들의 현장진입, 도시 총파업 등이 일어났다. 주요하게는 9월 20일 유럽 최대의 항구도시 로테르담의 도시 총파업을 들 수 있다. 노동자들은 로테르담 항의 크레인을 모두 멈추고, 버스와 전차, 전철 등 대중교통을 모두 마비시켰으며, 공무원 노조도 파업에 동참하여 시의 행정업무와 청소 등 공공서비스를 중단했다. 또한 이 날 노조가 조직한 시위에는 6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노조의 조직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연정에 참가하고 있는 우파정당들은 노동자들의 저항이 상당히 강경하자, 연금제도 개편의 폭을 줄이고, 교육예산 삭감도 철회하는 등 노동자들 달래기에 나섰지만, 노조는 정부의 양보가 자신들의 요구에 한참 못미친다고 보고, 일주일 뒤인 9월 27일 암스테르담 총파업을 강행했다.
이 날 파업시위에는 1만여 명이 참여했다. 로테르담에 비해서 대중동원 규모는 적었으나, 버스와 전차 전철 등 대중교통수단을 24시간 동안 완전히 멈추고, 시 행정과 공공서비스도 중단함으로써 노동자들에 대한 노조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정부에게는 상당한 압력이 되었다. 정부는 의회 토론에서 당초의 정부안을 후퇴하기로 약속했지만, 정부의 방침은 장기적으로 볼 때 꼭 필요한 개혁이라며 정부 계획의 대의는 철저히 옹호했다. 또 노조의 파업으로 경제적 손실이 크다며 노조를 비난하고 노조에게 파업 시위를 자제하고 대화로 풀자고 제안하면서, 날로 극심해지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부안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대안부재론을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노조는 정부가 고령화와 경제침체 등을 과장해서 불필요하게 공격적인 제도개편에 나서고 있다며 정부가 노조를 동반자로 인정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계획을 철회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네덜란드의 양대노총은 10월 2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시위에 조합원들의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서 조합원들 집으로 암스테르담 행 무료 기차표를 우편으로 발송했다. 네덜란드 노총, 기독 노총은 네덜란드 철도공사에 백만 유로를 지불하고, 기차표를 단체 구입해 전 조합원에게 기차표를 보낸 것이다. 노조와 철도공사 양측은 이 날 암스테르담 박물관 광장(Muzeum Plein)에서 열리는 집회에 약 십만 명의 노조원들이 참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일인당 10유로씩 값을 정했다. (총 금액 백만 유로로, 원화로 환산하면 14억이 넘는 다.) 양대 노조와 보조를 맞추고 있는 중간직 전문직노조는 조합원들 각자 표를 구입하는 대신 나중에 참가한 조합원들에게 교통비를 지불하기로 하였다.
결국 10월 2일 토요일 암스테르담에는 30만의 노동자 시민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네덜란드 현대사에서 세 번째로 큰 집회이고, 노조가 조직한 집회로서는 최대 규모이다(최대 규모의 시위는 1983년 55만이 모인 미국 핵무기 배치 반대시위이고, 2위는 역시 같은 주제로 1981년 40만이 모인 시위이다). 이후 노조는 부문별 연쇄 파업으로 정부를 계속 압박하였고 정부는 결국 11월 초 기존의 입장에서 대폭 후퇴해서 노조와 타협했다.

나가며
살펴보았듯이 네덜란드의 현실은 기적과는 거리가 멀다. 고실업과 조직률 저하로 약화된 노동조합을 굴복시켜 사회협약을 체결하고 저임금과 파트타임 노동자의 동원이 네덜란드의 실상이다. 그나마도 그 효과는 겨우 5년여밖에 지속되지 못했으며, 현재는 성장 정체, 주택가격 거품 붕괴, 실업률 상승, 소득분배 악화, 사회복지제도 후퇴, 그리고 정치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 네덜란드의 ‘기적’을 이야기하기에는 민망한 상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수동적이고 패배적인 분위기에 빠져 있던 네덜란드의 노동운동은 앞으로 어떠한 행보를 취할 것인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지만, 10월2일 30만이 모이게 될 것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네덜란드 코포라티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또한 아무도 정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자본의 달력이 19세기를 가르키고 있고 살펴본 대로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공세로부터 네덜란드 코포라티즘도 결코 자유롭지는 못한 상황을 볼 때, 분명한 점은 전통적 복지국가, 전통적 네덜란드 코포라티즘 혹은 사회협약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 판단에는 네덜란드 우파 정부는 노조와의 승부에서 결판을 내려하고 있다는 점도 근거로 작용한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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