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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7/8.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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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에 대항하는 온타리오 연합

제프 샌츠 |
번역 : 원종현(정책편집부장)

[편집자주] 이글은 Capital & Class, Autumn 2002 에 실린 Jeff Shantz의 Fighting to win: The Ontario Coalition Against Poverty를 번역한 것이다. 제프 샌츠는 빈곤에 저항하는 온타리오 연합의 활동가이다. 토론토의 요크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빈곤에 대항하는 온타리오 연합(the Ontario Coalition Against Poverty, 이하 OCAP)은 빈곤에 반대하는 직접행동 조직이다. OCAP는 지난 1989년에 건설된 이후1), 빈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빈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미래를 위하여 (이른바) 좌파, 우파, 그리고 중도파 등 모든 성향의 온타리오 주(州)정부에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 OCAP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주인 온타리오에서 신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중심점이 되었다.
온타리오의 좌파와 노동운동 세력 대부분과는 달리, OCAP는 1991년-1995년 집권지배세력이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았다. 신민주당2)이 점점 더 우경화하면서 OCAP는 그들의 집권기 동안 신민주당과 대결하였다.
그러나 OCAP의 투쟁은 주로 악의에 찬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진보보수당3)과 그들의 가혹한 정책에 맞선 것이었다. 약속을 어기고 우리의 등에 칼을 꽂은 비열한 신민주당4)은 1995년의 지방선거에서 골프와 스키를 가르치던 마이크 해리스가 이끄는 진보보수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토리당은 그들이 그토록 해체시키려 하는 사회서비스 자원을 고갈시키는 악한 무리들이 바로 복지 수급자와 빈민이라고 주장하며 사악한 반(反) 빈민 정책을 펼쳤다. 주지사 선거에서 해리스는 '기업하기 좋은' 온타리오를 선언했고, 선거에서 당선된 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노동조합의 권리와 공공서비스, 사회(복지)프로그램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시작하였다.
토리당은 정부 부채와 도덕적 타락의 모든 원인으로 온타리오의 빈민을 지목하면서 빈민에 대한 (대중의) 도덕적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선거를 큰 승리로 이끌었다 (Swanson, 2001을 보라). 선거 결과에 따라, 토리당이 제일 먼저 시행한 법안 중 하나는 복지 수급자를 위한 사회지원 예산의 21.6%를 감축하는 것이었다. 결국 토리당은 복지를 완전히 끝장내버렸고 노동연계복지(workfare) 체제를 실현하겠다는 선거공약을 지켰다. 설상가상으로 토리당은 17,000호의 저가 주택건설을 위한 기금적립을 취소해버리고, '세입자 보호법'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잘못 붙인 법안을 공표했다. 세입자 보호법은 온타리오에서 더 이상 주택 임대료를 통제할 수 없게 하였다.
또한 토리당은 온타리오를 기업투자가들에게 더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 조직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토리당은 파업중인 회사의 사업주가 파업파괴자를 고용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신민주당의 법령을 폐지했고 수많은 반(反)노동 입법활동을 펼쳤다. 노동조합 조직사업을 방해하는 사업주를 처벌하거나, 한번 대규모의 조직사업을 한 노조는 1년 안에는 다시 조직사업을 할 수 없도록 강요하는 사업주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리는 법안도 있었다.
2000년 집권 2기를 시작한 주 정부는 온타리오에 그나마 몇 개 남아있던 노동기준을 공격하는 새로운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1940년대의 '주인과 하인 법안'(Master and Servant Act)을 생각나게 하는 새로운 법은 주당 60시간 노동을 허용하고 종전의 1주일 휴가도 없애버렸다. 그 법은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 노조 설립 허가를 취소하는 절차를 공표하는 위임장이 되었다. 사업주는 '세계 경쟁력'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최저임금과 같은 정책에서 발을 뺄 수 있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공격이 착착 진행되는 동안 노동운동의 대응은 신민주당에 대한 믿음으로 더 깊숙이 후퇴하는 게 고작이었다. 신민주당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면 모든 나쁜 것들을 없애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이런 입장은 (오히려) 1999년 토리당이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하게 했지만 지금도 온타리오의 많은 노동운동 세력의 유일한 전망으로 남아있다. OCAP의 조직가 수 콜리스(2001: 4)가 썼던 것처럼, 노동운동은 토리당 집권기 동안 버티고 싸워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행동의 날

토리당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규모 저항운동의 상태가 항상 처량하진 않았다. 1995년 토리당이 선거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고난 한 달 후, 노동조합과 사회정의운동 단체들 그리고 지역공동체 집단들은 '행동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일련의 하루 대중파업을 일으켰다. 각 도시에서 상당한 비율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토론토의 '행동의 날'은 전 도시를 마비시켰고 이튿날에는 거의 30만 명이 참가한 캐나다 역사상 가장 큰 시위를 벌임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다. 투쟁이 도시마다 다양한 성과를 맺으면서, 행동의 날은 토리당을 후원하는 기업주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피해를 입혔다. 행동의 날은 광범위한 단체와 지역에서 온 다양한 참여자들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사회 운동의 잠재력을 지닌 연합으로 형성해 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잠재력은 결코 실현되지 못하였다.
토리당에 위기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온타리오 주 전체의 총파업으로 행동의 날이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기대는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다. 온타리오 노동연맹(Ontario Federation of Labour, OFL)의 조합원들은 총파업을 계속해나가는 데 찬성표를 던졌지만 신민주당과 관계를 맺고 있는 (노동조합의) 보수적 관료주의자들은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투쟁의 기선을 꺾어버렸다. '행동의 날'이 신민주당의 재선에 피해를 입힐 것이라고 두려워한 (노동조합의) 관료주의자들은 지원을 철회했고 운동이 천천히 사그라지게 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후퇴에 앞서, 정부를 권좌로부터 끌어내리기 위한 실질적 운동을 조직하길 원하는 사람들과 행동의 날을 그저 주요한 상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간의 분열이 나타났다. 아나키스트들이 증권거래소를 점거하고 토리당의 정책회의장에 침입할 때, 다른 사람들은 텅 빈 주 의회를 향해 행진시위를 벌이며 빌리 브랙5)의 노래에 귀 기울였다. 주 경찰 노동조합은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어떤 이는 공개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의 행동의 날 참여를 문제삼았다.
행동의 날이 와해되고 주 전체의 총파업을 끝까지 사수하지 못한 후, 온타리오의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은 산산이 깨졌고 지리멸렬해졌다. 또한 행동의 날의 붕괴로 인해 토리당은 반대세력의 힘이 그리 심각할 게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신의 의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OCAP는 주(州) 규모의 총파업을 주장하는 그룹들 중 하나였다. 행동의 날이 실패한 후, OCAP는 실패가 낳은 잔인한 결과에 대처하면서 토리당에 맞선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토리당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후퇴의 충격은 치명적이었다.

표적 단속

2년 전, 토론토 시의회는 2백만 달러의 공적자금을 지원 받아 팡파르를 불며 지역사회경찰활동(Community Action Policing, CAP) 프로그램을 시작했다.6) 작년에 그들은 빡빡한 예산에서 또다시 1백만 달러의 자금을 짜내었다. 뉴욕 시의 줄리아니7)가 벌인 야단법석을 모델로 삼아, 그 돈은 도시의 표적지역에서 빈민을 괴롭히고, 협박하고, 위협하기 위해 초과근무를 해야하는 경찰들에게 지급되었다. 경찰은 차창닦이8)를 도시에서 몰아내고 공원에서 무주택자를 쫓아내려고 시도했다.
경찰은 가을까지 전투를 지속했다. 그들은 겨울이 오면 자연의 법칙이 그들을 도와주리라 기대했다. 프로그램의 책임을 맡고 있는 조사관은 '범죄와 싸우는 최상의 도구는 영하 30도에 이르는 2월 달 온도'라고 말했다 (Globe and Mail, July 26, 1999, AIO). 그래서 이제 집이 없는 것은 범죄다. 무주택자들이 지난 두 차례 겨울 동안 토론토의 거리에서 동사한 사태는 결국 캐나다에서 가난이라는 죄명으로 사실상 사형이 자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전한 거리 법안

토론토의 시장 멜 라스트맨은 (그가 '흉악범'이라고 꼬리표를 붙인) 빈민과 무주택자에 맞선 공공연한 계급투쟁 작전에 오랫동안 개입했다. 온타리오 주의 범죄 정책을 감독하는 온타리오 범죄국장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CBC와의 인터뷰에서 차창닦이들은 가장 큰 골칫거리라고 공언하였다. 작년 24주일 동안 22명이 거리에서 사망한 주에서 말이다.
2000년에 마침내 라스트맨과 그를 지지하는 의원들은 주 정부에 압력을 가해 온타리오 도로법을 수정함으로써 차창을 닦거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안전한 거리 법안'(Safe Streets Act)은 '모든 분별력 있는 시민에게 염려를 일으키는'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이 법은 감정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경찰과 소상인이 빈민과 무주택자들을 학대할 수 있는 여지를 확장한다.
물론 정말로 악의적인 단속행위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경찰은 일상적으로 차창닦이들에게 딱지를 떼는데, 이들이 사유지를 침입하거나 어슬렁거리고 난잡하게 어질러 놓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는 토론토 도심지의 소상인과 부자동네의 거주자조합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CAP가 '공동체에 기반을 둔 경찰 모델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최신의 사고'(Globe and Mail, July 26, 1999, AIO)라는 극찬을 받았지만, 여기에 새로운 것은 없었다. 이것은 지배자들이 수백 년 동안 우리를 채찍질했던 것과 똑같은 술책이다 (17세기 영국에서 지배자들은 그것을 '빈민법'이라고 불렀다). 이름은 변했을지 모르나 의도는 그대로다. 노동연계복지, 사회복지서비스의 축소나 폐지 같은 프로그램과 함께, 범죄화 정책은 가난한 사람들, 실업자와 무주택자들을 임금노예 또는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직접행동

하나의 조직으로서 OCAP는 이러한 공격들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억압적인 (국가)기관과 법 집행을 분쇄하는 집합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억압에 대한 직접행동은 적대적 정책들과 싸워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우리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OCAP는 해로운 정책들로 인해 피해자들이 그러한 정책을 막는 일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스스로 한다'(do-it-yourself)는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 투쟁은 개인과 가족을 방어하고 더 광범위한 정치적 실천을 펼치려고 한다.
첫째로, OCAP는 '개별적 지원을 위한 직접행동'('direct action casework)9)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행동을 펼쳐야 상황이 벌어지면 OCAP는 많은 회원들과 연합단체들을 불쾌하고 오만한 관리들, 집주인 또는 작업장으로 직접 데려간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버티겠다고 주장한다. 만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이 억압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들을 공격한다. OCAP는 자신의 구성원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과 싸우려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Sue Collis, 2001: 4). 개별적 지원을 위한 직접행동은 복지 수급권 쟁취, 강제퇴거 반대, 국외추방 저지 그리고 체불임금 지급 등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집단적 직접행동의 방식은 더 광범위한 투쟁에도 적용되었다. OCAP는 정부와 정부를 후원하는 기업주들의 활동과 다양한 수준에서 직접 충돌하는 것만이 빈민이 자신의 삶을 실제로 통제할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OCAP는 적들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드는 행동을 찬성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명목에 지나지 않는 항의는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고 탄원하기보다는 OCAP는 우리의 적들이 그들의 계획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계발하려고 한다.
기업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OCAP가 자주 사용하는 전술이다. 종종 기업가단체는 집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과 연루되어 있다. 레스토랑 주인이 도심지의 (노숙인) 쉼터를 폐쇄하도록 압력을 가해 쉼터가 폐쇄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우리는 레스토랑 주인이 쉼터를 다시 열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쓸 때까지 그의 가게 앞에서 피켓팅을 하였다 (John Clarke, 2001a: II).
1997년에 OCAP는 탐욕스러운 투기꾼들이 부동산 가치나 임대료를 올리기 위해 아파트를 폐쇄하여 토론토의 아파트 수백 채가 텅 비워지게 된 상황에 맞서 싸웠다. OCAP는 무주택자들을 위해 문을 따버릴 생각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버려진 아파트로 행진하였다. 기마경찰이 동원되었고 경찰은 시위 참가자들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발했다. 1년 후 그 건물은 사회주택(공익형저가주택)10)이 되어 문을 열었다.
2년 전 겨울, 4명의 무주택자들이 거리에서 사망했을 때, 한 달 동안 토론토 시는 텅 빈 병원을 쉼터로 개소하는 계획을 수행하지 않고 늑장을 부렸다. 근방에 거주하는 여피 족과 주변 기업들로부터 배후 압력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건물을 점거했고, 그들이 우리를 쫓아내고 불법 집회 죄로 체포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보내려고 준비하는 동안 쉼터를 여는 계획은 다시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John Clarke, 2001a: II).
1998년 적극적 저항(Active Resistance, AR) 그룹에 속하는 아나키스트들이 개최한 토론토 집회의 절정은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행진과 시위였다. '거리의 청년들에게서 손을 떼라'라는 이름의 행진은 AR과 반인종주의 행동(AntiRacist Action, ARA)그룹, OCAP가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참가자들은 경찰과 시 관리들에게 차창닦이들에 대한 가혹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여름 OCAP는 법원의 벌금부과에 대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토론토가 가장 살기 좋은 지역" 이라는 정부의 선전에 도전했고, 사법체계에 의해 엄청난 액수의 벌금딱지를 매일 부과 받는 사람들이 적절한 변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Sue Collis, 2000: 10). OCAP는 대응한 모든 사건에서 승리했다.

앨런 가든

1999년 8월, OCAP는 CAP 프로그램의 표적 단속이 이루어지면서 경찰들이 일상적으로 무주택자들을 내쫓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또는 행색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가혹행위를 자행하는 곳인 앨런 가든 공원을 수백 명을 조직하여 힘차게 점거하였다. 점거 이전에 이미 공원은 인종차별적인 토론토 경찰 활동으로 인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근방의 주택소유자들은 앨런 가든 공원 남쪽 길 건너에 줄지어 서서 경찰의 공원 습격을 구경하면서 박수를 치고 응원하였다. 경찰은 그냥 돌아다니거나 축구를 하거나 도미노놀이를 하던 65명의 흑인을 검거하였다. 경찰은 그들을 무릎을 꿇게 하고 몸수색을 하였고 부랑자 딱지를 3천 달러나 끊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돌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Gaetan Heroux, 2001: 19).
공원은 17세기 영국의 디거스파11)(the Diggers)의 방식처럼 공유되는 '안전 공원'이 되었다. OCAP는 점거 성명서에서 '방해받지 않고 잠자고, 먹고 살 안전한 장소를 확보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라는 것을 시 당국은 알아야 한다'고 썼다 (August 7, 1999). 3일 동안 사람들은 함께 살았고 서로의 식사를 도왔으며 서로를 돌보았다, 경찰의 응답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공원은 금새 비워졌고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서 싸웠고 결국 안전공원 사건은 우리의 행동을 고조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한편 시장과 해리스 수상 모두 이 사건을 비난했다. 언론은 미쳐 날뛰었고 경찰은 탄압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John Clarke, 2001a: 12).
시위참여자와 많은 관찰자들은 당국의 행동을 보며 시 당국도 주 정부도 무주택자의 위기에 관한 합리적인 주장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점거시위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와 경찰의 행동을 보며 OCAP는 언론의 인식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상징적 행동은 전혀 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0년 6월 15일: 싸워서 이기자

2000년 여름 동안, OCAP와 노동조합, 지역공동체 그룹 등 연합세력은 저항의 수준을 점차 끌어올렸다. 직접행동의 여름은 6월 15일, 주 의회에 항의하기 위한 대중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OCAP는 빈민의 대표단이 주 의회에 항의하고 정부의 예산 삭감이 어떻게 그들에게 피해를 입혔는가를 설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참여자들이 의원들에게 전달되기 원한 세 가지 명확한 요구가 있었다. 첫째,1995년 이후 정부의 사회지원예산에서 이미 삭감되어버린 21.6%를 다시 원상 복구하라. 둘째, 온타리오의 세입자보호법을 폐지하라. 이 법은 (주택)임대료를 통제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앴고, 결국 법 시행으로 인해 토론토에서만 수천 명이 강제 퇴거당했다. 셋째, '안전한 거리 법'을 폐지하라.
많은 경찰들은 대열을 이탈할까 생각할 정도로 시위참여자의 저항이 매우 강력했지만 결국 그 투쟁은 대규모 경찰진압작전으로 끝이 났다. 기마경찰이 신속한 진압을 펼쳤지만 경찰이 집회장소에서 사람들을 끌어내는 데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후에 고참 경찰관들은 그렇게 단호하고 강경한 시위대는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그 후 진압부대장은 수치스러운 듯 기자들에게 '시위대는 경찰이 내려치는 곤봉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고 말했다.
6월 15일은 잠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첫째, 우리는 그들의 잔혹한 공권력에 견디며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둘째, 그 날은 급진적인 활동가들이 초국적 자본의 지역 대리기관에 맞선 더욱 광범위하고 희망에 찬 조직화를 위해 다시 모이는 계기였다. 그것은 시애틀, 워싱턴, 윈저(영국왕실)의 초국적 기관에 대항한 투쟁에 지역적이며 행동적인 중심점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빈민을 조직하거나 하나의 정부에 대항한 싸움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우리는 자본이 더 이상 타협과 양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본이 우리에게 하사한 정권은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모양새 좋은' 낡은 투쟁 방식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다줄 수 없다. OCAP가 계발한 힘의 원천은 우리가 대표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억제할 뿐인 상투적인 '타협'의 방식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 권력자들과 충견들은 우리가 그들이 마련해놓은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한다 (John Clarke, 2001a: 13).
6월 15일 이후, OACP는 매일 폭력이 벌어지고 있는 동네와 지역공동체에서 그 날의 투쟁 정신을 다시 만들어내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였다. 이것이 OCAP와 그 연합세력이 시작한 활동이었다.

공동전선

온타리오 공동전선(The Ontario Common Front, OCF)이 가을에 펼친 경제방해(economic disruption) 운동은 거의 1년 전 OCAP의 제안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토리당 주 정부의 정책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더 넓은 기초를 지닌 저항운동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공동전선은 80개가 넘는 지역사회그룹, 노동조합, 학생을 '행동의 날' 이후로 온타리오에서 볼 수 없었던 하나의 연합으로 묶어냈다. 우리는 상징적 항의가 무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가을 투쟁은 토리당이 그들의 의제를 계속 수행할 때 큰 희생을 치르도록 경제방해 전술을 사용하여 실질적 타격을 주기로 계획하였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후원자 기업들이 보수당을 후원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목표로 설정했다.
공동전선의 운동은 2001년 10월 16일, 토론토의 (그리고 캐나다의) 금융 중심부에서 벌인 경제방해 전술과 함께 힘차게 시작되었다. 무수한 경찰이 있었지만 거의 3000명의 사람들이 중심 거리를 행진했다. 공동전선은 토리당의 후원기업, 특히 거대 은행과 부동산 개발자들을 목표로 했다. 길게 늘어선 행진 대열은 금융 중심지를 완전히 폐쇄하지 못했지만, 많은 기업들이 평상시처럼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어떤 건물들은 시위대가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문을 닫아버렸고 다른 건물들은 보안조치를 강화하여 접근이 불가능하게 했다. 많은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그 날 하루를 쉬라고 하였다. 토리당의 기업후원자들이 받은 재정적 타격은 모두 합쳐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
서드베리, 해밀튼, 피터버러, 오타와 등 다른 여러 도시들에서도 뒤따라 운동이 일어났다. 판에 박힌 상징적 항의는 노동계급의 빈곤에 대해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어떤 관심도 없는 자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공동전선의 행동은 정부와 정부를 후원하는 기업이 실질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소와 같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도들은 해로운 정책의 수행을 방해하고, 무력한 '항의'에 지친 사람들을 운동으로 이끌어내는 하나의 수단을 제공하였다.
이 운동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평조합원 노동자와 사회정의운동의 활동가가 새로운 관계를 맺고 관계를 더 넓혀나가야 필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운동은 노동운동의 관료주의자들이 의회 밖에서 펼치는 어떤 운동에도 노조의 자원을 투여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어떤 운동이 효과적이려면 반드시 평조합원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빈곤에 반대하는 소규모 조직은 그러한 투쟁을 수행할 조직적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

근본으로 돌아가다

아마도 온타리오 공동전선의 가장 귀중한 교훈은 OCAP가 파크데일과 렉스데일과 같은 토론토의 주거지역에서 해온 지역 공동체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가을 투쟁이 끝나자마자 OCAP는 더 헌신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서구 제국주의 전쟁과 더 엄격한 국경통제를 요구하는 인종주의자들의 아우성에 직면하여 OCAP는 인종차별과 계급차별에 대항하여 이주자와 난민의 떳떳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지원 활동에 한층 더 노력을 기울였다.
공동전선은 정부 정책이 가하는 공격을 멈추거나 몰아내기 위한 일상적인 투쟁이 지역 공동체 속에서 기반을 쌓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더 강력한 운동과 더 전투적인 투쟁을 건설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아무리 작게 보이더라도 우선 승리를 경험해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작은 승리란 없다). 온타리오 공동전선의 가장 고무적인 발전은 많은 공동체에서, 특히 런던, 피터버러, 오타와에서 반격을 위한 연합조직과 OCAP와 유사한 개별적 지원을 위한 직접행동이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그룹들은 운동이 펼쳐지기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운동의 자원을 빈민에게 제공한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연출하는 개혁주의를 넘어서는 운동을 추구하는 활동가를 끌어당기는 데 필수적인 중심점을 형성하고 있다.
2001년 11월, OCAP는 토론토 내 세 번째 사무실을 요크 대학에 열었다. OACP와 캐나다 공공노동조합 3903지부12)의 빈곤반대 행동모임이 공동으로 사무국을 맡았다. 행동모임은 징세대리인, 집주인, 사장, 경찰에게 곤경을 겪는 사람들과 복지수급이나 정부의 다른 관료적 행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했다. 노동조합 사무실에 차린 새로운 사무실은 노동운동가들과 빈곤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한 데 모일 수 있는 하나의 모범을 제공한다.

결론

OCAP 활동의 토대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대한 헌신이다. OCAP가 사장, 토지소유주, 정부와 싸울 때, 우리는 억압적 기관들과 개인들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출현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한다. '억압적 기관과 개인들은 우리가 매일같이 맞서 싸우는 빈곤과 비참함을 낳는 부조리한 전체 사회시스템의 산물이다' (John Clarke, 2000).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것은 다양한 정책들이나 겉으로 드러난 우두머리 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이러한 견해는 OCAP가 제안하는 (사회에 대한) 분석의 근간을 이루며 OACP가 펼치는 전략과 전술을 형성한다. OCAP는 지배자가 우리에게 늘어놓는 '가능성', '현실성' 따위가 아니라 구성원의 요구에 따라 움직여 나간다.
만족스러운 보수를 받는 직업, 생활소득, 적절한 주거, 건강관리와 교육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왜 OCAP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조직인지를 밝히는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다 (John Clarke, 2001b: 13).
OCAP는 온타리오 노동계급을 재조직하는 중요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OCAP는 점점 더 늘어가는 일하는 빈민, 실업자, 불안정 노동자를 한 데 모으고 있다. 강력한 힘을 건설하기 위해서, 다른 부문의 노동계급, 특히 조직된 노동자와 연합을 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아직 할 일이 많고, '행동의 날'을 둘러싸고 연합이 붕괴한 후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다. 특히 직접행동을 우려하고 아직도 케인즈주의 식의 타협을 회복하길 희망하는 노동조합의 지도자와의 충돌을 예상할 수 있다.
OCAP의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를 실현하려는 열정적인 헌신 때문에 수 년 동안 많은 활동가들이 OCAP로 모이고 있다. 아마도 공동전선은 '행동의 날'에서 실마리를 얻은 것처럼 기업의 지배자들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진정한 저항을 시작할 것이다.

1) 1980년대 말, 캐나다 자유당(Liberal Party of Canada)이 집권한 온타리오 주정부는 복지개혁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정부는 복지개혁을 실시하기 위해 재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정부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높은 복지예산의 확충을 주장했다. 주정부가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실업노동자와 빈민을 중심으로 하는 시위와 행진이 벌어졌고 압력을 버티지 못한 정부는 약 9%의 인상안을 통과시켰다. 이 시위를 조직했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1990년 OCAP가 결성되었다. OCAP는 위원회에 압력을 넣던 방식을 지양하고 자유당 주정부에 대한 직접적 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하고 1990년 온타리오 지방 선거 과정에서 "빈곤원흉 주지사 타도(Down with the Poverty Premier!)" 구호를 외치며 피터슨의 주지사 재선을 막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 역주 본문으로

2) 캐나다에서 세 번째로 큰 전국적인 정치조직이다. 1932년 농민과 노동자의 지지로 구성된 CCF (the 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가 모체다. 1945년 연방선거에서 28석을 얻어 양당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위치로 부상하였다. 1961년 캐나다 노동의회(the Canadian Labour Congress)의 주요 노동조합과 연합하여 현재의 신민주당을 세웠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 번영과 냉전체제 하에서 사회민주당의 정강이 갈수록 우경화함에 따라 전통적 지지그룹인 노동조합과 지식인의 지지를 상실한 후 1993년 연방 선거에서 참패하였다 (의석 수가 43석에서 9석으로 크게 감소했다). 1997년 선거에서 다시 21석을 획득하였고 현재 보수당, 자유당에 이어 캐나다의 제 3당의 위치에 있다. - 역주 본문으로

3) 캐나다 진보보수당 (Progressive Conservative Party of Canada, 별칭은 Conservative Party 또는 Tory Party)이다. 1867년 캐나다 연방이 형성되기 전 1850년대 초 맥도날드 (John Macdonald)가 프랑스계 캐나다인, 온타리오 보수계 및 성공한 상업집단을 모아 구성한 비공식 정부지지단체와 토리당에 기원을 두고 있다. 2003년 12월 8일 캐나다 개혁 보수 동맹(Canadian Reform Conservative Alliance)과 합당하여 캐나다 보수당(Conservative Party of Canada)으로 개명하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정당이다. 그러나 진보보수당 간부회의가 계속 존속하고 있고 대부분의 주에서 보수당은 진보보수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 역주 본문으로

4) OCAP의 출범은 신민주당이 온타리오 주 선거에서 승리한 것과 같은 시기(1990년)에 이루어졌다. 신민주당 주지사 밥 래는 빈곤선 이상으로 복지수급비율을 늘리고, 푸드뱅크의 식품부족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공약한 사항을 모두 철회한다. 신민주당에 걸었던 대중들의 기대의 좌절은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무기력으로 나타났다. - 역주 본문으로

5) 영국의 저항가수. 대처정부 시기 노동당과 관계를 맺었고, 노동권과 사회진보를 주장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은 곡을 노래했다. - 역주 본문으로

6) 1960년대 미국의 사회정치적 위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당시 경찰은 흑인 민권 운동, 도시폭동,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시위 및 범죄발생과 약물사용의 증가라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대규모의 '범법행위'들을 통제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보였다. 점증하는 경찰에 대한 불신과 회의, 범죄에 대한 일반대중의 두려움, 그리고 법집행과 질서유지에 국한되는 임무로는 점점 심각해지는 범죄행위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에서 범죄통제(crime control)방식의 하나로 출발하였다. '형벌과 제재' 또는 '교정과 치료'보다는 '범죄예방(crime prevention)'을 통하여 범죄를 해결하려고 하며, 이를 위하여 경찰은 문제해결을 위해 경찰과 지역사회의 상호 협동을 강조하고 지역사회 순찰, 지역사회 범죄예방 프로그램, 동네감시프로그램, 신고제도의 강화, 경찰지소의 설립 등을 추진하였다. - 역주 본문으로

7) 줄리아니는 1994년~1997년, 1998년~2001년의 뉴욕의 시장이다. 공화당원이기도 한 그는 뉴욕을 '정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검거와 단속을 펼쳤다. 이로써 범죄율이 상당히 낮아졌으나, 범죄에 대한 막연한 정의로 인해 경찰에 의한 (주로 흑인과 걸인에 대한) 인권침해와 부당한 폭력과 살해 사건이 대거 발생하였다. 또한 재직기간 동안 "노동윤리를 도시생활의 중심으로"라는 구호를 들고 나오며 복지수급대장에 수급자로 기재된 인원의 절반인 64,000명의 수급권을 박탈하였다. - 역주 본문으로

8) 달리던 자동차가 서면 길로 뛰어나와 앞 유리창을 닦고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이다. - 역주 본문으로

9) 징세대리인, 집주인, 사장, 경찰 등의 억압적 행동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개별 사안을 조사한 후, 그 문제를 발생시킨 곳, 즉, 법원, 셋집, 회사, 경찰서, 병원 등으로 가서 점거 또는 시위를 하는 OCAP의 방식을 지칭한다. - 역주 본문으로

10) 빈민을 위해서 정부가 운영하는 주택공사가 비영리민간임대주택사업자의 등록을 받아 이들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건설 관리되는 것이 사회주택이다. 또한 낮은 임대료를 책정해 주거 빈민이 입주할 수 있도록 한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사회주택이 대표적이다. - 역주 본문으로

11) 진정수평파(眞正水平派, True Levellers). 영국의 청교도혁명 때 출현한 당파 중 가장 좌익적인 성격을 띠었던 일집단. 1649년 4월 G.윈스탄리에 의해 일어난 기독교 성격을 띤 농업공동체운동에 뿌리를 둔다. 개간파(開墾派, diggers) 라고도 불리는 이 운동은 평등주의파의 한 분파로 시작되었고 기독교 신앙원리에 바탕을 두고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였으며, 관리와 생산을 공동으로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들은 수평파(水平派)의 좌익으로 진정수평파(眞正水平派)라 자처하면서 토지를 잃은 소농(小農)을 배경으로 삼았다. 그들은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래 인민의 자유가 상실되어 억압과 전제 밑에서 생활하여 왔으므로, 이것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공유지 미경지를 개간 경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1649년 4월에 서리주(州)의 세인트조지스힐로 이주하여 공유지를 개간하고 잠두 등을 파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사유재산을 침해하거나 '인클로저'의 울타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지나 미경지를 경작할 뿐이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으로 이 운동은 1년 만에 실패하고 디거스도 해산되었다. 그 후, 같은 시도가 켄트 버킹엄셔 노샘프턴셔 등의 여러 주로 파급되었으나, 역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본문으로

12) 캐나다 요크 대학교의 조교, 계약직 교원, 대학원 조교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이다. 캐나다 공공노동조합의 지부들은 이런 식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 예를 들어 캐나다 공공연맹 3906지부는 맥매스터 대학교(McMaster University)의 조교와 계약직 강사, 그리고 시간당 급료를 받는 음악 강사들의 노동조합이다. - 역주 본문으로


참고자료
Clarke, John. 2001a. `The Meek Shall Inherit Diddley-Squat.' Briarpatch. 30(3): 9-13
____________ 2001b. `Anti-Capital/Anti-Poverty'. They Call it Struggle for a Reason. 4: 12-13
Collis, Sue. 2000. `Target Police.' They Call it Struggle for a Reason. 1: 8-9
___________ 2001. `Putting it on the Line.' They Call it Struggle for a Reason. 4: 4-5
Heroux, Gaetan. 2001. `Pigs in Poor Neighbourhoods.' They Call it Struggle for a Reason. 4: 18-20
Swanson, Jean. 2001. Poor Bashing: The Politics of Exclusion. Toronto: Between the 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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