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9.57호
첨부파일
57_갈월동기행_정희찬.hwp

호접몽(胡蝶夢)

갈월동까지의 기행

정희찬 | 정책편집부장
갈월동에 처음 출근했을 때가 올해 3월이었으니 『사회운동』9월호를 읽고 있을 때쯤이면 정확히 7개월이 되는 셈이다. 「갈월동 기행」코너를 쓰기로 한 다음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군대에 가 있거나, 이제 입대를 앞두고 있는 동기에게 편지를 쓸까? 얼마 전 많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던(?) 요즘 나의 고민을 진솔하게 털어놓을까? 아니면 대연정론이니, 대통령 임기단축이니 하는 온갖 잡설(雜說)이 난무하는 정세에 대한 단상을 적어볼까? 일전에 누가 얘기했듯이 「갈월동 기행」은 재미없기로 소문난 사회진보연대 기관지를 접하는 사람들이 「갈월동 기행」‘만’ 읽는 부류와 「갈월동 기행」‘부터’ 읽는 부류로 나뉘어 진다는 바로 그 어마어마한 코너가 아니었던가?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나에게 이것은 대단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1.
어릴 때부터 나는 소심한 편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는데 식구들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두 차례에 걸쳐 몇 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체격도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일상생활 하는데 불편은 없지만 어릴 때는 몸에 있는 교통사고의 상처와 수술자국을 매우 부끄럽게 여겨서 신체검사가 있는 날이면 굉장히 긴장이 되었고 혹시 학교친구들이 알아채고 놀려대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나에게 어떤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고 어째서 나는 이렇게 운이 없을까 하면서 의기소침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내 몸에 대해 어릴 때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불만은 약한 시력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는 한쪽 시력이 태어날 때부터 극도로 약했던 관계로 유치원 다닐 때부터 사시를 교정하기 위해 안경을 썼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던 꼬마가 안경을 얼굴에 달고 다녀야 하는 불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안경을 처음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특히 콧등이 매우 쓰리고 까지기 일쑤인데 이 통증이 참 고역이다). 내 몸에 대해 갖고 있던 이러한 불만족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나는 완력이나 물리적 힘을 동원해서 무언가를 도모해보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유치한 얘기지만 싸움 잘하는 애들을 부러워해서 가끔 (그때는 『드래곤볼』이 인기절정의 만화였는데) 내가 손오공이 되어 괴력을 자랑하며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꿈을 꾸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어릴 때 교통사고는 내가 책을 읽게 된 우연한 계기였다. 병원은 내가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는 행위를 처음 시작한 곳이었다. 내가 책을 가까이 한 것은 바로 이때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부터였다. 8살 정도의 어린이가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보낼 방법이 필요했다. 하루에 한두 번 각 병실을 돌아다니면서 환자나 보호자에게 무료로 책을 빌려주는 책 수레는 내가 책을 벗삼아 병원생활을 하게 된 계기였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나는 병원에서 책을 읽고 구구단을 외웠다(아파서 입원해 있는 애한테 구구단을 억지로 외우게 했던 어머니도 대단하신 분이다). 제 딴에는 이것저것 찾아서 읽는 습관이 생긴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때 내가 책을 좋아했던 이유는 내가 똑똑하거나 공부벌레라서가 절대 아니었고(즐겨 보는 책은 SF나 괴기담류의 소설이었으니 별로 특이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현실의 나를 보면서 푸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었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마 어릴 때 병원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성격, 체격, 외모 모든 것이 다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바꿈으로써 현재를 바꾸는 ‘나비효과’가 가능하다면 내가 제일 해보고 싶은 것은 8살 때 무더운 여름날 무심코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내가 왼쪽에서 달려오는 트럭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치는 것이다.

2.
대학에 합격하고 나자 주위에서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요지는 선배들이 시킨다고 그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운동권’ 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선배들을 많이 피해 다녔다. 당시 내 눈으로 보자면 그들의 주장과 선동은 뭐랄까 너무 자기 자신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과연 저 선배는 지금 자기가 말한 대로 평생 살아가려고 할까? 그럴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세상과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얼마나 살아갈 수 있으며, 또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젊어서 맑스주의자가 되어보지 못한 자는 바보, 늙어서도 맑스주의자로 남아있는 자는 더 바보”라고 말했던 누군가의 얘기를 떠올리면서 1학년 때 선배들에 대해 난 이상주의자에 열정만 가득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학교 근처에 살던 친척 - 6촌 형님뻘이었는데 가까운 촌수는 아니지만 친척이 원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1,2학년 때는 용돈도 탈 겸 자주 찾아가곤 했다 - 은 그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공인중개사였는데,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그런지 사회적 성공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집안이 어수선할 때 이런저런 신경을 써주셨던 굉장히 착한 분이지만 항상 내가 가면 항상 꺼내는 화두는 권력과 돈에 대한 내용이었다. 고시를 봐야 생활이 안정되지 않겠냐, 1학년 때부터 준비해도 늦는다, 주위에 **하고 ##한 여자는 없냐 등등. 어떻게 인생의 잣대를 돈과 지위로만 따질 수 있느냐고 얘기하면 네가 아직 사회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법을 이제 알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나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항상 반복되는 이런 류의 대화에 질린 나는 차츰 용돈이 궁할 때를 빼놓고는(?) 제 발로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상주의자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친척 형님처럼 ‘속물’로 살아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건 너무 무의미한 삶으로 보였다.

3.
1999년은 지하철 파업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때였다. 학교에 일찍 가보면 심상찮은 긴장된 분위기가 있었고 선배들, 그리고 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많은 동기들은 노동자의 파업대오를 死守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할 지 몰랐다. 실제 그 과정에서 나는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노동자의 투쟁에 자신의 안위를 내팽개치면서까지 헌신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앞서 두 가지와 구분되는 ‘현실 비판’의 의미를 우연히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내가 어느 날 읽게 된 일제 침략에 저항한 구한말 의병들을 다룬 책과, 그리고 농활을 준비하다가 읽게 되었는데,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속에서 나타난 농촌문제의 구조적 원인에 대해 분석한 책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전자는 충분한 경제적·문화적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서구열강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 이른바 애국계몽론자들이 당시 의병투쟁을 거의 폭도로 취급했다는 점에서(요즘 나오는 근현대사 교과서는 두 노선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별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후자는 역대 남한 정권들의 경제정책이 농민과 농촌을 자유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방기한 결과 오늘날 무수한 농촌문제가 파생된 것이라는 점에서, 내가 아직까지 그 틀 내에서 있었던 적자생존(適者生存) -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약자의 패배를 정당화하고 강자의 지배를 기정사실화 하는 자본주의/제국주의보다는, 그러한 지배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 - 자본주의 비판이 훨씬 설득력 있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초보적이나마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발견한 나로서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던 이상주의적 삶과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속물’적 삶이 아니라 이들과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현실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마 내가 앞서 두 권의 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어정쩡하게 있다가 결국 친척 형님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닐 수도 있고...

4.
사회진보연대 상근 활동이 어느새 7개월을 맞이하고 있다. 같이 들어왔던 동기들은 군대를 가고 이제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처음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들었던 감정은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과연 나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내년이나 내후년의 나는 어떻게 될까? 누구는 혁명을 꿈꾸고, 누구는 운동의 재편을 꿈꾸고, 누구는 노동자민중의 해방을 꿈꾸었을 텐데, 우습게도 출근 첫날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처럼 소심한 것이었다. 아직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이라는 명함을 돌리는데 익숙지 않은 나로서는(‘명함뭉치’는 아직 내 서랍 속에 쿨쿨 잠자고 있다...), 7개월이나 되었지만 갈월동 정류장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 아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아마 부모님이 세 번째로 얻은 여자아이를 일년만에 잃지 않았다면 아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서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거나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만약 내가 **대학 ##과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1999년 지하철 파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입추(立秋)와 처서(處暑)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에어컨을 켜야 하는 더운 사무실에서 교열을 앞두고 참 이렇게 쓸데없는 망상에 잠겨본다. 독자들은 그러니 이 글을 가능한 빨리 잊어주시도록.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