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9.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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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반전운동

파올라 만두카 |
번역: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이탈리아 헌법 11조는 "이탈리아는 침략전쟁을 할 수 없고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2005년 8월 현재 이탈리아는 점령에 개입하고, 분쟁 지역에 주둔해 있다. 8월 4일, 이탈리아는 유엔의 위임을 받아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하는 (1) 26개 나토(1946년에 설립한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국과 (2) 7개 다른 국가로 구성된 평화유지군(ISAF)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이탈리아는 ‘의지연합’의 일부이며 3000명의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이탈리아 부대는 2003년 5월 1일 이라크에 파병됐고, 공식적으로 ‘평화유지임무’를 띠고 낫시리아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낫시리아는 이탈리아의 국영 에너지 산업체 ENI의 석유 이권이 달려있는 지역이다. 그곳은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석유공급지로 기대되던 지역이다. 이탈리아에서 청년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제가 없어진지 2년이 지난 후 ‘직업’ 군대가 발전해왔다.
1990년대, 이탈리아가 NATO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파병되었을 때(이탈리아는 코소보에서 여전히 ‘정상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탈리아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은 평화주의 연합과 시민사회 조직들로 구성된 반전 그룹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반전 그룹은 정부가 선전하는 ‘평화유지 임무’가 이탈리아인과 다른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무력간섭이라며 분명히 비판했다. 또한 군사 예산 증액에 의해 사회, 공공 예산의 축소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전쟁과 점령의 동기가 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정치경제적 식민화 계획은 모든 정부가 공유한 것이었다(유고슬라비아 내전 참가는 사민주의 정부가 결정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 평화주의자와 반제국주의 그룹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미군 기지와 나토 확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리고 동유럽과 걸프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미국과 나토의] 최근 시도 이전에도 이탈리아는 지중해 지역에서 미국 헤게모니를 지키는 문지기였다. 이탈리아는 미국과 NATO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했다. 이탈리아에는 미군 173여단 사령부가 주둔하는데, 이는 2003년 이라크에 최초로 파견된 부대다. 이탈리아 미군 기지에는 무기가 저장된 병참기지가 있고, 거기에는 (의회의 토론 없이 비밀 양자협상에 의해) 핵무기도 존재한다. 1980년대 국민투표를 통해 민간 핵 발전과 군사적 목적의 핵 개발을 금지해서 이탈리아가 법적으로 핵 국가가 아니지만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 미 공군 비행대는(31전투비행단, 16비행대대)은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해 있다[이탈리아 아비아노 공군기지는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발칸반도와 마주한 전략적 요충지다. 유고 보스니아 내전 당시 작전에 참여한 나토 전폭기는 아비아노 기지에서 출격했다-역주]. 미군 해군 사령부는 나폴리에 있고, 해·공군 합동부대는 시실리에 있으며 이라크 전쟁에 활용된 잠수함은 사르디니아에 정박해있다. 이러한 부대는 (열화우라늄 무기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군인, 훈련시설과 사격장을 수반한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수 백 개의 군사기지는 공간 이용이 경제·생태·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나 법적 관점에서 볼 때 시대를 거스른다. 이러한 문제는 여러 군사기지 지역에서 기지반대운동 그룹이 성장한 이후로 오랫동안 제기되었다.
1999년 이후로 새롭게 등장한 군사화의 양상은 나토의 변형이다. 나토는 세계 곳곳에서 전면적이고 활동적으로 무력개입을 벌이고 있으며, 나토 가입국가의 수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나토 통합연합군(CJTF)을 창설하자는 제안은 초국적 군대의 권한을 완성할 것이다. 나토는 미군이 지휘하는 17000명의 ‘신속대응군’을 보유하고 있고, 타란토에는 (해상신속군) 해군기지가 있다. 동유럽으로의 확장과 나토의 지휘·병참 구조의 재배치는 현재 진행 중이다. 나폴리는 지중해에서 나토의 전략 지휘부가 될 것이며, 타란토는 지중해의 가장 큰 해군지원기지가 될 것이며, 사르디니아의 잠수함 기지는 확장될 것이며 투스카니아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될 것이다. 이러한 재배치는 지중해 남부 해안과 중앙아시아의 먼 곳까지 병력 투입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또한 군사화에 발맞춰 유럽 군대 창설도 제안되었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배경과 2001년 제노바 G8 반대시위

평화주의 그룹, 반제국주의 그룹을 막론하고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배경은 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 반대 운동, 미군기지 반대 운동, 이탈리아 주둔 미군의 1차 걸프전쟁 파병 반대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그것은 무기판매 반대 캠페인(이탈리아는 비인간적인 지뢰와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소형무기, 전자 표적장치가 탑재된 무기산업 수출분야에서 선두를 유지해왔다), 군사기지를 반대하고 (소음과 화학적, 원자력 오염에 대항하여) 오염되지 않은 바다와 하늘,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캠페인과도 연관이 있다. 평화주의 그룹과 반제국주의 그룹들은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1회 세계사회포럼으로 촉진된 더 광범위한 운동에 참여했다.
반전 그룹은 2001년 7월 제노바에서 열린 G8 반대 시위를 통해 성장했다. 이때 광범위한 세력은 G8이 민중의 삶과 경제를 세계적으로 통제하는 것에 저항하자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모였고 연합을 형성했다. 이때 반전 그룹은 이탈리아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발전시키고 부의 정의로운 재분배와 인권과 시민권을 위해 투쟁해온 운동들과 결합했다. 여기에는 페미니스트, 좌파정당, 청년들의 비판적 운동과 사민주의 중도파, 일부 노동조합 조직들, 환경운동가들 그리고 남반구 민중과 연대하는 그룹들(팔레스타인 연대 그룹, 걸프전·아프리카 내전 피해자 지원 그룹, 인권 페미니즘 운동, 종교 그룹과 교파통합 그룹)과 함께 했다. 행사를 준비하며 이러한 모든 집단들이 모여 1년 여 동안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조직적 토론이 진행되었고, 국제운동과 결합했다. 이는 상호 간에 만남과 이해의 계기로 작동했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차이를 메우고 연대와 교류를 형성해냈다.
제노바에서 열린 G8은 풍부한 생각들과 참여를 위한 만남과 많은 이탈리아인에게 보편적인 정치적 행동을 제공한 최초의 기회였다. 하지만 G8은 이탈리아에서 민주주의의 재앙이었고, 많은 참가자들이 G8의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G8 반대 시위에는 모든 연령대의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참여했다. 조직되지 않은 민중들이 참여했고, 우리와 전 세계를 위한 정의로운 세상을 요구했다. 물론 제노바 시내를 분할하기 위해 벽이 세워졌고, 회담에 반대하는 것은 폭력적이라고 주장하는 시끄러운 선동은 도시 거주자들을 교외로 떠나라고 외쳤다. 경찰에 의한 도발과 공격, 카를로 줄리아니 살해, 학교에서 잠자던 92명에 대한 폭력, 죄목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불법적인 구류가 벌어졌다.
제노바에는 불법적인 공격이 벌어진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시내로 돌아온 30만 명의 거리 목격자들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한번도 공권력과 경찰관을 공격자로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좀 더 나이가 많거나 정치적인 사람들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독재로 전환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후 반전운동의 성장을 지지하는 사고와 행동이 물결을 이루었고, 광범위한 반전운동을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가 결성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에 저항하기 위해 모인 거대한 “평화를 위한 사람들”은 제노바에서 G8반대 시위를 경험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광범위한 반전운동의 기초를 세우는 첫 번째 행동이었다. 이들은 각각의 정당, 비정부기구, 조직을 넘어서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합의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쟁의 나팔이 울려 퍼질 때 그들은 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지지와 세계 통치자들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2003년 2월 15일 로마 시위

9/11이 벌어진 후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침략 계획으로 화답했을 때, 우리는 11월 10일 로마에서 전쟁에 저항하는 첫 번째 전국 집회를 개최했다. 전쟁반대 깃발 아래 제노바의 모든 조직과 다른 지역의 더 많은 조직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부유한 전직 사업가이자 테러리스트의 옛 친구인 부시에 의해 지목된 소그룹을 목표로 한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역겨운 전쟁을 선포한 것에 저항하는 행진을 진행했다.
제노바의 모든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시민사회 그룹 등 몇 개의 크고 다양한 색깔을 가진 집단들과 몇 단체가 추가되어 2002년 11월 피렌체에서 최초의 유럽사회포럼을 조직하였다. 포럼의 폐회 행진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 위협에 대항하는 유럽 최초의 저항이었다. 포럼이 유럽 반전연합 프로젝트의 모양새를 잡아가는 동안 우리는 포럼이 전쟁에 반대하는 유럽의 모든 민중을 통합하고 힘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제가 되도록 노력했다.
연합은 두 가지 목표를 확정했다. 하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선언에 반대하는 유럽 민중의 광범위한 합의를 드러내도록 모든 정당과 시민사회를 포괄하는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도록 공격이 감행되기 전인 2003년 2월 15일에 유럽에서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자는 것이다. 연합은 “이라크 전쟁 반대”를 공통 구호로 확정했다. 2월 15일 집회를 세계적으로 더 확장하기 위해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회의를 열자는 이탈리아의 제안으로 세계 여러 단체들이 모였고 전 세계 반전, 반세계화 운동과 농민 그룹이 이를 지지했다. 이것은 피렌체의 씨앗을 72개국 수백만의 단단한 대오로 변형시켰다.
이탈리아에서 2월 15일 집회를 준비하기 <전쟁을 멈추자>(Fermiamo la Guerra)라는 이름의 연합을 형성했다. 이 연합은 단순히 기존 반전 그룹이 모인 게 아니었고, 이라크 전쟁 반대라는 목적을 위해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활동을 펼치는 모든 부문이 결집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국적 반전운동의 첫 단계에서 제기된 특정한 반전 이슈(이라크 전쟁 반대)가 다른 세력과 시민·정치사회의 그룹에게 확장되도록 해야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이슈가 제한되었다.
이라크 침략전쟁이 허약한 유엔의 결의를 위임받은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집회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무조건 이라크 전쟁 반대”라는 구호로 통일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구호는 참가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었다. 사민당과 중도파 당들은 과거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 개입하기로 결정했고 발칸전쟁에 참가한 책임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모호하게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고 선언하면서 유엔이 결의안을 통해 침략을 인정한다면 이라크 전쟁을 수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행진을 장려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지지자는 불만을 드러냈고 행진에 참여했다.
2월 15일 집회에 많은 참가자들이 참여하는 데 성공한 것은 2002년 11월부터 이탈리아 각 도시와 마을에서 조직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역적 동원 과정에서 전쟁 반대를 지지하는 전국적인 목소리가 표출되었다. 그리고 집회 참여를 고무하고 조직했던 조직을 통해 동원될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 모일 수 있었다. 2월 15일 집회에 수백만 명이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참가자들의 양심과 열성의 결과이자, 전쟁에 반대하는 이탈리아인의 진심이 우러난 결과였다.

이라크 전쟁 개전과 반전운동 내부의 논쟁

특이하게도 2월 15일 성공과 이라크 전쟁의 개전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이탈리아 반전운동은 두 번째 국면에 들어섰다. 반전운동에 참여한 그룹들 사이에서 반전투쟁의 방법론과 수단을 둘러싼 지속적인 토론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반전투쟁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았으며 대개 다른 관심사로 활동을 펼쳤던 그룹들은 2월 15일 집회를 위해 노력하고 다양한 참가자들을 결합시켰지만, 그들은 다른 사업과 목표를 증진하기 위해 동원의 성공을 활용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또한 운동에 참여하는 그룹들의 입장의 다양성 때문에 운동 노선이 전략적이지 못했으므로 더 많은 토론이 필요했다. 또한 UN 결의 이후 반전 집회를 중단하려는 그룹들이 연합으로부터 이탈했다. <전쟁을 멈추자>에 머물렀던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이 이어졌다. 이 논쟁은 우선 전쟁 반대 투쟁을 위한 수단이 적합한가와 관련 있었다. 투쟁방법으로 직접행동을 검토했고, 직접행동이 폭력적이면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세계 대다수가 반대를 무시하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사실에 사람들은 환멸을 느꼈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의견은 계속 높아졌고(도시의 창문마다 반전을 표현하는 무지개 배너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후에 전쟁을 반대하는 행동이 조직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4월 12일에 다시 한번 수십만 명이 모인 집회가 열렸다. 또 한편 이탈리아 정부가 미국의 전쟁을 지지한 바로 그 때 소규모 집단은 다른 행동을 취했다. 이탈리아 영토에 있는 미군 기지가 침략에 사용됐다. 이라크 침략에 쓰일 미국 군대와 무기가 이탈리아 영공과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했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은 수송을 저지하기 위해 행동했다. 사람들이 철도 선로와 도로, 군기지 입구에 앉아서 며칠동안 수송을 방해하고, 전쟁의 기계에 “모래 낟알”을 뿌렸다. 평화주의자, 사민주의 중도파, 단체, 여성, 일부 노조와 비정부기구들 사이에서 “불복종 직접 행동” 참가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불복종 직접행동에는 불가피하게 적은 수의 기동력 있는 행동 그룹이 적합했으므로 2월 15일 집회에 참가한 모든 세력들이 참여할 수 없었고, 시민 불복종은 반전운동의 모든 그룹이 참여하는 실천이 될 수 없었다. 경찰과의 대립이 다시 불거지면서 폭력에 대응하는 수단에 대한 내적인 논의가 강제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반전연합에 참여하는 그룹들의 정치문화의 차이가 드러났다.
이 논쟁은 전적으로 건설적으로 발전된 것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차이를 둘러싸고 역사적인 상호 불신이 다시 나타나 논의가 교란되기도 했다. 이는 제노바와 <전쟁을 멈추자> 연합 사이에 공존한 것이었다. 따라서 행동을 위한 공통의 수단을 명확하게 수립하고 일치된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쟁점의 하나는 경찰의 물리적 폭력을 어디까지 참을 수 있고, 언제 대응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좀 더 들어가 보면 논쟁은 투쟁을 일반화하기 위한 요구들 사이의 대립을 포함하고 있었다. 오직 사회체계의 급진적인 변화만이 세계의 “전쟁 건설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입장, 평화주의자와 시민 불복종 경향을 포함하는 중간적인 입장,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빼낼 수 있는 의회 내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회민주당의 관료들과 대화하는 것에 특권을 부여하는 또 다른 극단적 입장들이 대립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가 불거졌고, <전쟁을 멈추자>연합과 활동을 조정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2월 15일 국제적인 행동을 통해 결정했던 것, 즉 새로운 광범위한 연합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잊기도 했다. 또한 전쟁이 더 이상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크나큰 파괴를 불러올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도 했다. 좀 더 폭넓은 전망을 유지하는 것은 반전운동 내에서 전략적 논쟁을 발전시키고 정치문화적 차이를 객관적으로 다루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이와 유사한 갈등이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발생했다.

이라크 종전선언 이후 이라크 저항운동에 대한 토론

부시가 2003년 5월 1일 종전을 선언한 후, 이탈리아가 이라크 의지연합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은 평화유지임무라는 정부의 핑계로 인해 곤경에 빠졌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전쟁 “임무”에 반대하고 안보 관련 입법과 군비 증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사민당과 다른 정당들에 충분한 압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논쟁을 자극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유엔의 선언은 미국과 이탈리아 지배세력을 만족시켰다. 반전운동은 충분히 행동을 통일하지 못했고, 한 나라의 반전연합이나 국제 반전연합은 군사주의와 무기개발에 반대하고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캠페인을 벌여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3월 다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자는 거대한 흐름이 나타났고,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는 순회투쟁을 준비했다. 캠페인 조직화는 2004년 1월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조직화로 인해 잠시 주춤했다.
2004년 반전연합의 전략적 전망을 둘러싼 차이들은 이라크 인민과 함께, 이라크 인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것은 우리의 입장과 전략에 대한 토론이나 이라크의 서로 다른 분파들이 지휘하는 저항을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논쟁은 오히려 쟁점을 바꾸어 놓았고, “저항”의 적법성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전략적 견해가 드러났다. 따라서 유엔이 인정한 이라크인의 자결권을 위해 이라크를 지원할 실질적인 수단과 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했던 논쟁은 더 이상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자결권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며, 2차 세계대전에서 점령에 저항했던 이탈리아의 민족적 유산의 일부분이다).
2004년 8월부터 이탈리아 반전 투쟁 내부 혹은 주변 사람들을 겨냥한 납치가 시작되었다. 나자프가 공격당할 때 프리랜서 리포터인 엔초 발도니가 납치되었고, 1992년 이후로 이라크의 독립 비정부기구인 <바그다드로 가는 다리>에서 일했던 두 명의 시모나(이들은 이탈리아가 이라크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할 때 어떠한 정부 보조도 거절했다), 일 마니페스토 신문의 저널리스트로서 이라크 민중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일했던 줄리아나 스그레나가 차례로 납치됐다. 미국이 팔루자 공격을 시작했다. 팔루자 공격은 계획적으로 생명을 파괴했고, 화학무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에서 운동의 모든 요소들이 참여하는 연대 행동의 물결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2주년에 이탈리아 운동의 서로 다른 부문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운동의 한 부문은 “사회적 유럽”이라는 이슈에 더욱 개입하면서, 유럽사회포럼에 참여했고 브뤼셀 집회를 소집했다. 반제국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 그룹들은 로마에서 전국 반전 행진을 개최했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다양한 정신은 더욱 명확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인권과 시민권을 위한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과 이라크의 저항을 지지하는 투쟁이 형성되었다. 현재 이탈리아 반전운동 내에는 다양한 정신들과 운동들이 공존한다. 그 운동들은 연대를 나누었다. 이제 다양한 정치적 주체들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각기 다른 이라크 내부의 파트너들과 결합하고 있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다양한 경향들

이라크 전쟁 이전에 미국과 나토 기지에 반대하는 캠페인, 군비 증대와 분쟁국가들에 대한 무기판매를 금지하기 위한 캠페인, 이라크 시민사회와의 연대캠페인, 소위 󰡒작은 전쟁"을 고발하는 캠페인을 펼쳤던 반전운동 부문은 이탈리아 헌법 11조항을 존중하고 이를 유럽헌법에 포함시키자는 캠페인과 이라크 국제전범재판 운동(2004년 2월부터 2005년 3월까지 3회를 개최함)을 펼쳤다. 이러한 운동들의 대부분은 다른 나라의 동일한 운동과 통합되거나 통합을 모색했다. 다른 그룹들은 이라크와의 연대 캠페인에 중점을 둔다. 그들은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권리와 이라크인의 자율적인 선택을 지지하고 이라크 저항세력과의 연대하기 위한 캠페인을 펼친다.
이라크 사회의 구성요소인 사회와 시민 내의 대화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수단이 되고, 점령과 학대에 저항하는 도구가 되고, 이라크 사회에서 반제국주의 세력의 세력화를 위한 전략이 되며, 이들 세력이 미국의 점령에 대한 저항과 사회주의적인 새로운 이라크를 건설하는 핵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반전운동 집단들 내에서 공존한다.
양자의 운동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연방주의로 분할하고 종교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이라크 사회의 저항세력을 지지한다. 이라크 저항세력의 신중한 무장투쟁에 대한 이탈리아 반전운동 내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반전운동은 이라크 내의 서로 다른 집단과 연대한다. 교회와 가까운 관계를 맺거나 점진주의와 갈등의 제도적 해결을 선호하는 사회민주주의 전망에 가까운 평화주의 분파가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 노동조합, 도시 대표, 비정부기구, 시민사회 조직을 통해 현재 유엔을 “인민의 유엔”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엔 헌장의 원칙은 여전히 가치 있으나 내부적인 구조와 기능을 규정하는 규칙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엔을 개혁하기 위해 󰡒유엔을 다시 생각하자󰡓는 캠페인을 펼친다.
반전운동이 연대하고 공동의 장기적인 목표를 선언하기 위해서는 상호 교육과 투명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이는 대중들의 광범위한 반전 정서와 계속 결합하고 대중들이 더 강력한 투쟁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다. 군사적 침략 수단이 (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미국 정부와 동맹국들이 침략한 나라의 자원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고, 선례가 없는 파괴의 가능성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반전운동은 모든 경향들을 포함하고, 현재 점령과 확전에 저항하는 운동의 통합과 발전을 이뤄야 한다.
우리는 전술적 목표들을 발전시키려면 독자성과 협력 사이의 역동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공동의 목표와 통일성을 형성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활동가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활동을 통해 전쟁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운동들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캠페인을 조직하는 그룹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요소들 간의 토론을 촉진하며 전략적 동맹을 정의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문제들을 더욱 숨김없이 제기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점령당한 국가들을 외부가 지지하는 형태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군사주의의 단계적 발전을 막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지원을 받아들이는 주체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침략, 사회관계와 생활조직의 파괴, 변질을 겪은 곳에서, 게다가 테러리즘이 강화되고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게 현재 무엇을 의미하는지 토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저항의 행위자가 누구인지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부의 재분배와 시민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권리의 향유에 대해 평등주의적인 입장을 지닌 정치조직의 등장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이라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직시해야 한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발전을 위한 제언

마지막으로 아직은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행위자와 행동은 다음과 같이 발전해야 한다.
첫째, 평화주의 프로젝트. 이는 종교집단, 지역기관, 노동조합, 좌파정당의 분파, (비무장화, 국방예산 반대, 무기판매 통제, 지뢰 판매 반대, 유엔 개혁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탄생한) 소규모 직접행동 집단들의 집합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둘째, 보건과 교육 분야와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집단들의 시민사회 연대 프로젝트. 이는 독립적인 비정부기구, 시민사회, 노동조합, 서비스 조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는 이라크인이 이라크 외부에서 벌이는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활동을 증진해야 한다. 이는 페미니스트 집단과 연대해야 하며, 이라크 감옥에 있는 수천 명의 인민들의 구금에 반대해야 한다.
셋째, 저항과 연대하기 위한 프로젝트. 이는 반제국주의 집단, 노동조합, 일부 좌파정당의 분파, 청년과 불복종 집단의 중심세력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군사기지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
물론 위의 구상은 어느 정도 자의적인 방식으로 구분된 것이며 프로젝트들의 수렴을 고려하지 않았지만 행위자 각각이 자신의 정체성과 전략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정체성과 전략이 반전운동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지식인, 예술가, 활동가, 전국적인 반전포럼과 국제네트워크(예를 들어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 네트워크, 이라크국제전범재판, 사회포럼에 참여하는 반전 연합체들 대부분)는 반전운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촉진할 것이며 이탈리아 반전운동 내부의 열린 토론을 지속하도록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주체들은 지역적 행동과 국제적으로 조정된 행동들 사이의 변증법을 촉진할 것이며, 포위공격, 점령, 공습에 처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풀어야만 하는 진정한 모순에서 유래하는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제안들을 개방할 것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전쟁의 암운에 대처할 것이다. 이러한 주체들과 운동 사이의 동력은 인민들이 캠페인에 새롭게 참여하도록 이끌 것이며 일관된 반전운동을 형성할 것이다. 반전운동은 자원과 생명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재 진행중인 전쟁과 점령, 사회의 전반적인 군사화에 반대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며, 모두를 위한 선과 기회에 접근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위한 길을 발전시킬 것이다.
누군가는 최근 몇 년 동안 진정한 세계반전운동을 창출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할 것이지만, 수많은 나라에서 우리는 분명히 투쟁을 고양했고, 세계반전운동을 건설하는 데 따르는 몇몇 어려운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역사의 현 시점에서 반전운동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우선적인 기초다.
현재 반전운동의 방법론과 전략에 대한 토론을 시작한 것이 이미 중요한 성과일 것이다. 이러한 토론은 왜 현재 세계시민사회가 변화해야 하는지, 전쟁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입장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분쟁을 해결하고 새로운 분쟁을 금지하기 위한 인민들의 동맹을 어떻게 형성하고 무엇을 제안할 것인지 직시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반전운동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서 인민들의 자율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말

* 파올라 만두카는 이탈리아 생물학자로서 1970년대 이후로 성적·경제적·사회적·종교적·차별 철폐를 위해 페미니즘과 정치운동에서 활동해 왔으며 최근 국제 반전운동에서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또한 세계여성행진의 이탈리아 코디네이터로서 지중해 여성네트워크, 이라크 전범민중재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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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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