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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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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행동하는 자에게 있다

강석진 | 회원
풍경

늦은 밤이다. 11시쯤일까. 서울 남쪽 어딘가에 웅크려 앉은 XX전자의 앞마당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앙강수월래 가앙강수월래… 회사의 노동자들이 회사 앞마당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강강수월래를 하고 있다. 레파토리도 다양하다. 강강수월래에서 시작하여 동동 동대문, 쾌지나칭칭 까지. 그들은 대부분 파견노동자다. 떠들어서 해고당하고, 월차 쓴다고 해고당하던 그 회사의 노동자들이다. 이대로는 못산다며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회사와 싸우다 끝내는 현장 안에 들어앉아버린 대단한 사람들이 바로 이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투쟁은 보고 있노라면 절로 눈물이 흐를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지만 어째 이 풍경만큼은 내 머리 속에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남몰래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우리 투쟁이 언제나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정규직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별로 강조할 것도 없다. 내가 살고, 일하고 있는 이 동네에서 비정규직은 그저 일상이다. 이 동네에서 성업 중인 직업소개소를 가면 대부분 파견직 아니면 계약직 일자리를 제시한다. 정규직을 채용하는 곳은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찾기 힘들다. 담당하는 업무가 무엇이든 고용조건이 어떠하든 그건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또 실제 비정규직으로 현장에 들어가 보면 내가 하는 일과 정규직이 하는 일은 단 1%도 다르지 않다. 똑같이 기계를 돌리며, 똑같이 라인을 탄다. 한 정규직 노동자에게 물었다. 왜 똑같은 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으로 채용을 하냐고. 그 노동자 왈, ‘새로 채용된 애들이 한 달도 못 버티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러나 그 노동자와 하루 12시간을 같이 일하는 서른두 살 먹은 노총각은 2년 2개월째 비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이 많다보니 비정규직이 또 다른 비정규직을 통제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앞서 언급한 회사는 정규직이 전체 생산직의 10% 정도였고 20%는 계약직, 나머지는 모두 파견직이었다. 20%의 계약직노동자들은 대부분 UT라고 하는 조장 격의 관리자였고 이들이 파견노동자들을 통제했다. 정규직들은 계약직 뒤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파견직 노동자에게 승진은 계약직이 되는 것이었고 이러기 위해서는 2~3년을 꼬박 쥐죽은 듯 일만 해야 했다. UT한테 바른 소리 한번 못해보고, 월차 한번 못 내보고, 현장에서 쓰러지더라도….


암담함과 희망

주위에서 보고 듣는 일들이 이런 것이다 보니 때로는 노동운동에 대해 암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특히나 내가 있는 현장에서 온전한 조직화를 해내지 못하고 있기에 암담함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다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을 보고 운동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따위의 말은 기대하지 마시라. 내가 이 책에서 다시금 확인한 것은 내 머리 속이 많이 헝클어져 있었다는 것과 내가 몰랐던, 혹은 간과했던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이다. 아니 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가 현장에 들어온 1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살았구나하는 부끄러움을 뼈저리게 확인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불안정노동 철폐를 위해 투쟁하는 많은 이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고, 어쩌면 간과해왔을지도 모를 투쟁의 올바른 관점과 자세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책.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 대답은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희망은 투쟁하는 자에게 있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곳에서 원칙을 견지하고 현실을 냉철히 분석하며, 단호한 결의로 투쟁하는 자에게 희망은 있다. 상투적인 말이긴 하나 난 지난 1년간 이곳에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작은 일에 원칙을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현실을 알지 못했을 때의 그 답답함이 어떤 것인지, 또 굳은 결의가 없을 때 스스로가 얼마나 형편없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거들떠보자

매우 짧은 글이긴 하나 되짚어 보니 책 내용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명색이 책을 소개하는 글이기에 간단하게 내용을 거들떠보자.

1장에서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불안정노동을 어떻게 일반화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어려운 내용이었으나 다시 한 번 정독을 하고 내 것으로 소화시킨다면 지방 하나 없이 뼈와 살이 될 만한 내용이었다.
2장은 민주노총을 통해 한국의 노동자운동을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내용이다. 민주노총 출범과 비슷한 시기에 노동운동을 처음 접한 터라 2장은 매우 흥미 있는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 여러 사건들에 대해 명쾌하게 분석하며 ‘계급 형성적 노동운동’이 필요하며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이 그 시작이라는 결론을 에누리 하나 없이 이끌어내는 저자의 내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3장은 한국사회 노동의 불안정화 양상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난 온갖 비정규직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본의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비정규직의 형태와 노동의 착취는 3장의 내용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4장은 불안정노동이 빚어내고 있는 빈곤의 형태에 대해 분석하고 그에 따라 노동권과 생활권을 민중의 보편적 권리로 내세워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권의 박탈은 물론, 인간답게 생활할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이는 단지 돈이 없다는 것의 문제가 아니며 개인적 차원의 문제만은 더더욱 아니다. 노동권과 생활권을 제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불안정노동은 이 모두를 박탈하기에 노동권, 생활권의 제기는 신자유주의와 불안정노동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투쟁이다.
5장은 불안정노동과 여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각종 통계와 분석을 통해 드러나듯이 여성은 불안정노동의 일반화에서 가장 확실하고 가장 구체적인 표적이 되었다. 여성노동의 확산이 곧 불안정노동의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분석과 그에 따른 투쟁은 우리에게 최우선의 과제다
6장은 결론 격으로 불안정노동 철폐 투쟁의 방향성과 과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을 되짚어보며, 우리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심도 있게 고민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도망치며

내게 글을 청탁한 동지에게, 또 책 소개를 원했던 동지들에게 너무 부실한 글을 보이게 되어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당장이라도 다시 쓰고 싶으나 이미 밤이 깊었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하기에 도망치듯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희망은 행동하는 자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암담한 현실을 바로 보는 것만으로는 희망을 만들 수 없다. 또한 비판과 평가는 희망의 조건이기는 하나 희망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이 책을 통해 작지만 희망의 조건을 또 하나 만들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구체적인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책 머리말의 한 구절은 이런 나를 끊임없이 다그친다.

‘책 한 권은 노동자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책 한 권으로 노동자의 삶을 재단할 수 없고 미래를 밝힐 수도 없다. 다만 이 책은 투쟁에 함께하겠다는 약속이다.’
주제어
노동
태그
여성 노동자운동 페미니즘 서울지역여성조합원대회 여성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