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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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좌파현황

배준범 | 회원, 민주노동당 국제부장
* 이 글은 이론과 실천 2005년 4월호와 5월호에 실렸던 “남미 좌파 현황 1”과 “남미 좌파 현황 2”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남미에서 좌파 바람이 거세다. 군부독재에 맞선 오랜 기간의 민주화 투쟁, 그리고 격렬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폭발한 결과, 1990년대 말부터 ‘좌파 붐’이 대륙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칠레에서 아옌데 정부가 무너진 이후 처음으로 (중도)좌파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브라질, 우루과이, 볼리비아에서 줄을 이어 좌파세력이 집권했다. 그 사이 에콰도르에서는 좌파 원주민운동의 지지를 등에 없고 당선된 구티에레스 대통령이 주된 지지세력까지 가담한 민중봉기로 탄핵되는 일도 있었지만, 볼리비아에서 에바 모랄레스라는 급진적 원주민 지도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한 편, 멕시코에서는 좌파세력인 민주혁명당이 핵심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는 등 중남미에 부는 좌파 바람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지역에서 적실성 있는 질문은 좌파가 계속 정권을 잡을 것인가가 아니라, 이들이 권력을 잡아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남미 좌파들의 연이은 집권이 주목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지역 차원에서 대안적 협력 방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국내정치 차원에서의 정책적 변화뿐만이 아니라, 대외정책 차원에서도 지역 내 국가들 간, 그리고 남미 지역과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남미에서는 상징적인 좌파연대의 과시를 넘어 실질적인 협력의 초기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구체화되고 발전할 것인지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전반적인 좌파의 침체기 속에서 남미의 좌익 세력들이 수십 년 동안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던 대외정책과 신자유주의로 일관해온 경제모델과 분명한 선을 긋고 새로운 흐름을 창출할 수 있다면, 이는 세계 진보 진영에게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민중의 집단적 의지를 통한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미에서 좌파들이 권력을 잡아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하고, 지역 차원에서의 색다른 협력/연대 가능성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남미에서 최근 등장한 각각의 좌익 정권들과 부상하고 있는 좌파 정당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아시아와 달리 남미의 각 국은 언어, 문화, 역사적으로 공유하는 바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간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각 국의 정치제도가 다르고, 각 좌파 정권의 성격 및 이들이 놓인 조건, 정치적 지향 및 집권한 후의 행보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렇듯 다양한 라틴아메리카 내 집권 좌파들의 현황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그들 사이의 연대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은 남미의 여러 좌파 정권 중 가장 급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쿠데타 시도(2002년), 국민소환투표(2004년) 등 차베스 정권을 위협하는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1998년에 처음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9번의 선거를 모두 이길 정도로,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는 확고하다. 2004년 국민소환투표가 부결된 이후 차베스 정권의 지지기반은 더욱 탄탄해졌는데, 차베스 지지세력은 지방 선거와 총선에서도 압도적 지지를 받은 반면, 야당은 분열하게 되었다. 선거 때마다 60%대 이상의 높은 지지율도 자랑하고 있다. 차베스가 이끄는 <제5공화국 운동>은 작년 총선의 압승에 힘입어 80%를 넘는 의석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연합체는 사회주의운동당, 애국당, 그리고 공산당 등과의 연정을 통해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해나가고 있다.

남미 지역 전체가 그렇듯이 극심한 불평등과 빈곤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는 지난 7년 동안 적극적 분배 정책을 펴고, 사회복지 제도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과는 단절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공부문을 확대하고 국영 석유회사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등, 산업정책 면에서도 그러하다. 우루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여러 나라가 GDP의 절반을 넘는 규모의 외채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차베스 정권이 이러한 분배정책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베네수엘라가 세계 5위의 석유수출국이라는 배경 때문이다. 최근 고유가에 힘입어 확대된 수입을 통해 민중친화적인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정권 임기 초반에 기존의 기득권층과의 격렬한 투쟁에서 승리한 후에야 재원 분배의 우선순위를 뒤집을 수 있었다. 중남미를 통틀어 쿠바를 제외하고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단 한군데인데, 바로 베네수엘라다. 그만큼 남미에서 지금 차베스가 실시하고 있는 정책들은 독보적이다.

그러나 차베스의 존재를 골치 아파 하는 세력은 베네수엘라 내에서 그가 보이는 행보 보다는 대외적으로 취하는 정책, 그리고 그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에 더욱 신경을 쓴다. 남미 좌파 대부분이 쿠바와 관계가 좋지만, 그 중에서도 쿠바와 가장 가까운 지도자가 차베스이고1), 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고 있는 것도 차베스다. 그는 ‘남미 연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창하고 있는데, 다양한 좌익 세력들에 대한 지원2)에 나서며 남미 전체를 포괄하는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ALBA)'라는 지역통합 프로그램을 제안한 바도 있다. 지난해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미주정상회의에 참석한 차베스는 회담장 안에서는 FTAA 협상을 진척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을 좌초시키는 데에 힘을 쏟았고, 회담장 밖에서는 민중정상회의의 중심에 서서 사회운동들과 함께 했다. 그의 다차원적 역할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또한 범 대륙 차원의 정체성 강화를 위해 텔레수르(Telesur)라는 지역위성방송사를 설립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투자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근 들어 미국 국무부 내에서도 베네수엘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들을 마련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베네수엘라가 콜롬비아의 무장 게릴라 집단이나 타국의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혐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미 군부의 안보 라인에서도 최근 베네수엘라의 군사비 증강이 불안정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처가 시급하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물론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 중 가장 많은 양을 수입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원유 공급이 흔들리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부분이다.

차베스 정부는 또한 토지 개혁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상호 연관되어 있는 빈곤 해결과 토지 개혁이라는 두 과제는 남미 좌파의 오래된 숙원이기도 하고, 차베스 정부의 대안적 개발 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한 축에서는 복지 제도의 확충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 없이 도심으로 밀려오는 농촌 출신 예비 빈곤층의 삶을 본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 토지 개혁에 나서고 있는데, 베네수엘라는 국토의 75%를 인구의 5%가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토지 소유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하지만 토지 소유권을 건드리는 데에는 지주들의 반발도 만만치가 않다. 이 정책의 성공 여부는 브라질을 비롯한 타국에 가질 수 있는 파급력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진보진영의 차베스에 대한 평가 역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실제로 브라질노총(CUT) 국제국의 한 간부는 차베스를 “포퓰리스트(인민주의자)”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3) 군부 출신이라는 점, 쿠데타 시도 전력이 있다는 점, 그리고 집권당의 성격이 당과 이념 중심이 아니라 차베스의 개인적 카리스마와 지도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 등이 한계로 제기된다. 최근 군사비 지출을 대폭 늘리고 브라질과 러시아에서 전투기 등의 무기 구입에 나서는 등의 정책 결정에도 많은 좌파들은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5공화국 운동>이라는 정치조직의 급속한 성장하면서 정권에 가담하고 있는 많은 인사들이 이전 정권의 인사들이라는 점에도 많은 이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 필자가 만난 베네수엘라의 한 젊은 활동가는 “그에 대한 민중의 지지는 높지만, 차베스와 혁명에 관한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차베스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혁명이 완수되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단지 혁명의 출발이라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차베스가 이제 권력을 관리하는 역할을 할 것인지, 아니면 그의 정부가 민중들의 참여를 지속적으로 확대함으로써 그들의 지적, 의식적 수준을 고양시켜 변혁의 주체로 설 수 있게 하는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올해 대선을 치를 예정이다.

우루과이

일련의 좌익 정당들의 집권 속에서 가장 최근에 정권을 잡은 이는 작년 3월 1일에 취임한 우루과이 확대전선의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이다. 의사 출신인 그는 확대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사회당의 지도자이다. 또한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의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작년에 집권한 전선체의 공식 명칭은 ‘확대 전선/진보적 만남/새로운 다수’이다. 이 전선체에는 수십 개의 정파가 소속되어 있으며, 독립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지니고 있는 정당만 해도 9개이다. 공산당, 사회당 등의 전통적인 좌파, 과거 게릴라 조직도 있지만, 우루과이 회의처럼 상대적으로 오른쪽에 서 있는 정파들도 있다. 사유화 등의 핵심 쟁점들에 대해서는 내부에서 이견이 드러났던 전례도 있는데, 집권 이후 이러한 이념적/정치적 차이들로 인한 대립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하고 아직까지는 순조롭게 정국 운영을 하고 있다.

우선 정권의 정책 기조에 대해서는 작년의 취임 연설과 내각 인선 과정을 통해 그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타바레 대통령은 취임 초기 그가 이끌 정권의 방향을 소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독립적 외교 노선을 천명했고, 국내적으로는 심각한 빈곤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포괄적인 사회 정책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독립적 외교 노선이란 전 국가 원수들이 추구했던 친미 정책과는 대조적인 남미 중심의 대외 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것의 첫 출발로 전직 대통령 시절 단절됐던 쿠바와의 외교 관계 복원을 취임식과 함께 발표했고, 또한 취임 연설에서는 국제금융질서가 “사회 전체가 발전할 필요성과 권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며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완곡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인구의 3분의 1이 빈곤 상태인 국가에서 빈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정책도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에 1,100억원에 달하는 의료, 급식, 주택, 고용 대책을 뼈대로 하는 ‘긴급 사회 프로그램’ 도입도 정부 정책 기조의 한 축으로 설정했다. 어두웠던 독재 시절의 과거사에 대한 조사 및 규명에 대한 언급도 빠뜨리지 않았다.

룰라가 취임과 함께 발표했던 ‘기아 제로’ 프로그램과 유사한 ‘긴급 사회 프로그램’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전반적인 정책노선은 브라질의 룰라와 가깝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제금융질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전선체 내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인사들을 경제 부처의 책임자들로 이미 선임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와 같은 디폴트 사태는 상상하기 힘들다. 적어도 당분간은 룰라의 행보와 비슷하게 국제경제 질서가 강제하는 정책과의 급진적 단절보다는 그 틀 내에서 분배 의제에 보다 신경을 쓰고 외교 정책 분야에서 차별성을 꾀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반영하듯, 외무장관에는 사회당 좌파 인사인 레이날도 가르가노를 지명했다. 경제통합 분야에서도 미국과 남미공동시장(MercoSur) 양쪽 모두와 경제협력을 추구했던 이전 정권과는 달리 메르코수르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내부에 여러 분파가 공존하고 사회운동형 정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흔히 확대전선과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그래서 확대전선에는 ‘작은 PT’라는 별칭이 따라다니기도 한다.4) 하지만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정책기조가 비슷해지는 것은 확대전선과 브라질노동자당 사이의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다. 우루과이도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개방 정책의 결과로 외채가 GDP의 90%에 달하는데, 이는 브라질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외채 원금 및 이자 상환의 압력, 그리고 그 국제금융기구들이 강제하는 조건들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이념과 지지자들의 바람을 실현할 것인가라는 고민 속에서 나온 고육책이 바로 현재의 정책 방향이다.5) 물론, 이 방향 자체에 대한 많은 문제제기가 존재하지만, 바로 이 외채 규모가 좌파 정권의 엄연한 제약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외채문제는 남미 정치를 읽는 데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주변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와 같은 국가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인구 340만의 소국으로서, 독자 행보에 대한 이중의 제약이 있다는 점이 우루과이 좌파들의 고민이다. 남미 각국 정부의 미래가 대륙 전체 좌파 기류의 전망과 연동되어 있지만, 타바레 정권만큼 그런 곳도 없을 것이다.

소수당 신세인 브라질 노동자당과 달리 확대전선은 상, 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사사건건 집권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성향의 정당들을 고려하고 안배해야 하지만, 확대전선의 경우 내부 정파들 사이에서의 조율만 원활히 이루어진다면 상, 하원의 동의를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루과이에서는 분배 의제가 보다 선명하게 국내 정책에 관철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남미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많은 인구(3900만)와 경제 규모를 지닌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 좌파’로 분류되는 키르츠네르 대통령이 2003년부터 이끌고 있다. 90년대 말부터 이어진 금융위기로 인해 야기된 사회경제적 위기가 2001년에 말에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진 후, 아르헨티나는 2달 동안 4번 대통령이 바뀌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겪었다. 이 시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정치권의 무능에 맞서 실업자 운동, 공장 점거, 자주관리 운동 등 지역 차원에서 급진적 운동들이 전국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당시 해외 진보 진영은 아르헨티나에 많은 관심을 보냈다. 한편, 사회경제적 위기와 정치권에 대한 극도의 불신 속에서 아르헨티나는 2001년 12월 23일에 800억 달러에 이르는 채무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했다. 이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디폴트였다. 이후, 외국 채권단의 요구를 묵살한 채 작년 말까지 버텼는데, 이 과정에서 위기 극복과 외국 채권단과의 재협상이라는 이중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이 2003년 초에 당선된 키르치네르 대통령이었다.

사실 아르헨티나 정치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는 페론주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1943년 후안 페론의 집권으로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한 아르헨티나의 독특한 정치문화인 페론주의에 대해서는 논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진다. 하지만 페론주의가 다음과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어쨌든 페론의 집권 기간 동안에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 제도와 노동조합 조직의 합법화를 비롯한 기본권의 신장이 이루어졌다. 한국에 비해서도 오히려 노동자들의 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아르헨티나에서 높은 이유이다. 동시에 페론주의는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매우 개인 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페론주의에는 뚜렷한 이념이나 정책노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의 이념이나 노선 중심이 아니라 개인 중심이다 보니 지금도 페론당에는 인물 중심의 파벌주의와 기회주의가 횡행한다. 3김 시대와 비슷하다고 할까.

키르치네르가 당선된 대선 때에도 페론당에서는 내부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키르치네르를 포함한 3명의 후보가 출마했었다. 그런데 같은 페론당이라지만 3명의 후보들의 정책은 확연히 달랐다. 페론의 인기에 기대려는 것이 페론주의이지 그것을 구성하는 특정한 이념이나 방향은 없다는 증거였다. 어쨌든 키르치네르는 광범위한 반신자유주의 정서와 당시 결선 투표에 같이 올랐던 메넴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메넴 시절 무차별적으로 시행되었던 민영화와 시장 개방 조치들을 일단 중단하고, IMF에 갚아야 하는 돈의 상환 시기를 연기했다. 국제 채권자들과도 당분간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버텼다. 이러한 조치들은 국제통화기금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국민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고, 지금도 그는 50% 이상의 지지도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그는 IMF나 채권단과의 협상에서도 작년 말에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더 강경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행보는 한편, 남미에서 다른 좌파 정권들은 시도하지 못한 IMF 주도의 국제금융체제에서 이탈한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일부 좌파에게서 받았으나, 국가의 붕괴 위기와 민중들의 봉기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는 키르치네르나 IMF/채권단이나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IMF로서는 이미 동아시아 위기에 대한 대응과 국제금융질서의 운영에 대해서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르헨티나마저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고,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도 외채를 갚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3년 연속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성장하고 있어 키르치네르의 정국 운영은 아직까지는 안정적이지만, 키르치네르가 다른 국가 정상들에 비해서 좌파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아르헨티나 특유의 정치문화 때문이다. 개인 중심적이고, 정치노선에 의해서 움직이기 보다는 파벌주의와 기회주의가 만연한 풍토 속에서 진보적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회의적이다. 키르치네르는 4년 전의 위기 이전에는 원래 좌파로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를 반영하듯, 요즘 키르치네르는 룰라와 함께 남미에서 ‘책임감 있는 좌파 지도자’로 가끔 거론되기도 한다. 차베스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와 함께 대표적인 포퓰리스트로 꼽혔던 3-4년 전의 상황과 비교하면 180도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변혁을 밖으로부터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대중운동이나 좌익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좌파는 내부 분열로 악명 높은데, 지난 번 대선에서는 사회당과 트로츠키주의 연합이 따로 나와서 각각 1% 내외의 표를 받았을 뿐이다. 아르헨티나는 올해 가을에 총선을 치르게 된다.

칠레
남미의 좌파 물결 속에서 가장 먼저 ‘좌파’가 정권을 잡은 곳이 바로 아옌데의 땅 칠레이다. 사회당 출신 라고스 전 대통령의 6년 임기가 끝나고 2005년 같은 당 바첼레트가 당선되었는데, 상대적으로 차베스나 룰라에 비해 라고스가 집권 이후 외부로부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가지 이유는 칠레가 국력이나 자원 면에서 전략적 중요도가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바로 라고스 정부의 이념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라고스 정권은 취했다. 바첼레트 정부가 특별히 다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영국의 블레어 정권과 같은 ‘사회-자유주의’ 세력이 남미에도 있다면 바로 칠레의 사회당이라는 지적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재 칠레에서 연속해서 집권하고 있는 세력이 보수적 성격을 띠는 것은 중도, 혹은 중도-보수 성향의 ‘민주주의를 위한 당’, 기독민주당 등과 연정(콘세르타씨온)을 꾸렸다는 점에 기인한다. 콘세르타씨온 동맹은 90년 민주화 이후 4번 연속 집권을 하고 있는데, 첫 두 대통령은 기독민주당 출신으로서, 라고스 대통령이 아옌데 이후 최초의 사회당 대통령이고 바첼레트가 역시 사회당에서 그의 뒤를 이은 것이다. 라고스는 집권 초기에는 국내외의 좌파로부터 상당한 기대를 모으기도 했으나, 사실 현 정권은 좌파라고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정에 참여하는 정당들 중에서 사회당의 비중은 적다. 일례로, 작년 총선에서는 세력이 조금 늘긴 하였으나, 5개 당으로 구성된 콘세르타씨온 동맹 내에서 사회당의 의석 비율은 하원에서 23%, 상원에서는 40% 정도다. 사회당의 주도 하에 공산당과 연합해 총선에서 45% 가까이를 득표했던 아옌데 정권과 비교하면, 피노체트 독재가 칠레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에 미친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현 정권의 보수적인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는 바로 경제정책이다. 라고스 대통령 이전의 콘세르타씨온 대통령(기독민주당 출신)들은 모두 피노체트 대통령 시절 도입된 시장친화적, 개방경제 정책 기조를 이어갔는데, 라고스 정부도 이를 따랐다. 국영기업들의 민영화를 꾸준히 추진했고, 노사관계와 관련해서는 독재 시절의 잔재로 남아있는 억압적 조항들에 대한 개혁 요구에도 미진하게 대응했다. 칠레는 우리에게 한-칠레 FTA로 익숙한데, 이렇듯 칠레는 또한 남미에서는 드물게 타 지역의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과의 협상 이전에 미국, 그리고 유럽연합과도 FTA를 체결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과 같은 보수적 경제지로부터 항상 남미의 모범 국가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칠레의 ‘좌파’ 정부의 모호성은 대외정책에서도 나타난다. 남미의 좌파 정권들 대부분이 미국의 대남미 정책, 그리고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남미의 통합 및 역내 협력에 역점을 두고 있다. 칠레의 라고스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지금까지 북미와 남미 양쪽과 모두 경제협력을 추구하는 양면 전략을 추구해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칠레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 후한 점수를 줬던 영국의 보수적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마저 칠레의 대외 정책이 주변국들과의 갈등 내지 불편한 관계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6) 칠레는 지금도 미국과의 경제교류는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동시에, 남미공동시장(Mercosur)에 준회원국으로서 참여하고 있다.

바첼레트 역시 이전 정부의 이러한 경제, 외교 정책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바첼레트가 당선된 이번 결선 투표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연합의 토마스 히르쉬 후보를 1차 투표에서 지지했던 그룹들은 2차 투표에서의 지침을 두고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 히르쉬 후보가 1차 투표에서 받은 5.4%는 바첼레트한테는 당선되기 위해서 필수적이였는데7), 일부 그룹들은 바첼레트가 보수 진영 후보와 차이가 없다며 기권을 선언했고, 실제로 히르쉬 후보도 아무도 찍지 않겠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공산당은 결국 5개 항목을 내걸고 비판적 지지로 최종 입장 정리를 했다.

다만, 사회당 정부 하에서 칠레 사회는 과거사 청산 문제와 정치 개혁에 있어서는 더디지만 꾸준한 진전을 보여왔다. 아직도 의회 내에 군부 출신의 당연직(8석)이 있고 군 인사권이 완전하게 국가 원수에게 있지 않은 상태가 칠레 민주주의의 현주소이다. 칠레의 민중들 사이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독재 시절의 공포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며, 칠레의 사회에는 여전히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반이 공고하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라고스의 마지막 치적 또한 군에게 할당되는 상원의 당연직을 없애고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높이는 방안들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그나마 칠레의 국민들은 이러한 성과들을 높이 평가해서 그런지 라고스는 임기 끝까지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고, 이것이 바첼레트의 당선에도 큰 힘이 되었다.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진전, 형식적 민주주의의 발전과 동시에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노동배제 정책으로 요약될 수 있는 라고스의 임기를 보면, 부정부패로 임기 말기가 얼룩지지 않다는 차이 외에는 김대중과 굉장히 흡사하다. 그만큼 칠레의 사회당은 우경화된 것이다. 대외정책에서 미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유엔 안보리의 일원이었던 2003년에는 이라크 침략에 대한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칠레에는 집권 콘세르타씨온 동맹보다 왼쪽에는 칠레 공산당을 비롯한 몇몇 급진좌파 정당들이 있다. 작년 12월 총선에서 공산당이 주축이 되어 소규모 좌파 조직과 함께 구성한 “포데모스(Juntos Podemos Mas: 함께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동맹은 6-7%를 득표8)했고, 재작년 지방 선거에서는 10% 가까이를 득표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공산당이 칠레 사회에서 지니고 있는 영향력이나 상징성을 지지율이 반영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례로 지난 해 3월 12일에 암으로 타계한 공산당의 얼굴이자, 2000년 대선 후보이기도 했던 그라디스 마린 칠레 공산당 대표의 장례식에는 20만이 행진하면서 그녀를 추모했고, 그녀가 대변했던 좌파의 정신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지난 2003년 APEC 회의에 맞서 5만의 반대 시위를 조직하는 과정에서도 공산당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여전히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이끌고 있는 것은 공산당인 것이다. 평생 ”칠레의 젊은이들, 여성들, 그리고 남미에서의 평화와 통합”을 고민했던 그라디스 마린이 죽기 직전에 염원했던 것은 바로 “칠레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는 점만으로 이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정부 하에서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그룹들의 활동 방향과 이들의 지속적 성장 여부가 칠레에서는 주목할 부분들이다.


브라질
동구권의 붕괴 이후 침체된 세계 진보진영으로부터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국가와 정치세력이 바로 브라질과 노동자당이 아니었을까 싶다. 브라질이라는 대국, 당 강령에 민주적 사회주의를 명시한 ‘사회운동형’ 정당 노동자당과, 89년 대선 때 혜성처럼 등장한 룰라라는 카리스마틱한 지도자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민주노동당과도 창당 초기부터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국내 언론에서도 자주 소개되어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하다. 하지만, 2002년 말에 환희와 기대 속에서 집권한 룰라에 대해서 지난 2년 반 동안 국내에서 접한 소식들이 그리 좋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긴축 정책과 공무원 연금 개혁, 초국적 금융 자본으로부터의 긍정적 평가, 지체된 토지 분배 등의 부정적인 보도들은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었고, 노무현에게 보수 언론들이 훈계를 할 때 동원되는 것이 룰라이다보니, 인용의 부당함을 떠나서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작년 2월의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글들을 보면 일부 참석자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고 하고, 간간이 들려오는 노동자당 좌파의 출당 혹은 탈당 소식들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편치 않게 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책이론지 이론과 실천 2005년 3월 호에서 필자는 정부 주류에 대한 광범위한 노동자등 지지층의 실망으로 인하여 진보진영 주류의 기대가 노동자당 내 좌파로 모아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9) 활동가 층에서 적지 않은 수가 이미 노동자당을 떠났거나 떠나는 것을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당내 좌파 세력들은 당 내에서 잔류하면서 당과 행정부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당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고, 비교조적, 민주적 좌익 대중 정당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자 했던 사회주의자들은 당내 투쟁을 아직까지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있다.10) 작년의 부정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재선이 아직 가능하고, 아직까지는 노동자당 외의 좌파 대안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는 점, 그리고 작년 노동자당 지도부 선거에서 당원들의 참여도가 유례없이 높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만, 현재의 정부 정책기조가 유지되고, 당내 좌파들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민중들이 노동자당에 대한 기대 자체를 접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당의 경우에는 차기 선거 자체보다는 어쩌면 보다 중요한 것은 (경선 과정을 포함한)노동자당 내의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일지도 모른다. 지난 임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선거를 어떤 기조로 진행하며, 2기 행정부는 어떠한 원칙과 전망을 가지고 국정 운영에 나서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고, 이에 대한 결론이 무엇인지에 따라 노동자당과 브라질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11)

작년은 노동자당과 룰라 정부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당은 집권 정당이고 하원 내에서 1당임에도 불구하고 하원 의석이 전체 의석의 20%에도 못 미친다. 하원에서는 그나마 제2당이지만 상원에서는 제3당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려 8-9개 좌파/중도 성향 정당과의 연정을 꾸려야 하고, 그러다보니 장관 할당, 정부 직책 배분, 정책 조율 면에서 어려움을 집권 초기부터 겪어 왔다. 이 과정에서 선명성이 훼손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작년 상반기에는 노동자당 의원이 담당하고 있던 하원 의장이 타당 의원으로 교체되어 정치적 타격을 받았고, 그 결과 노동자당 주도의 법안들이 하원을 통과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 작년 말부터 선거 국면이 본격화되는 것을 예비하여 각종 정치적 계산과 자리 잡기가 치열해지고 있어 여러 당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기가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다. 안정적인 정국 운영이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당 내부에서도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노동자당 내부의 좌파 조직 중 가장 큰 ‘민주적 사회주의(DS)’ 그룹이 노동자당 정부 노선이 ‘당의 전통과 배치’된다고 비판하면서, 여러 가지 노선 전환을 촉구하는 정치 결의안을 제출했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안된 것 중 대표적인 것은 전국적 단위에서 참여예산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DS 그룹의 주도하에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꽃핀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인 참여예산제를 전국적으로 확장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결의안에서 (적어도 당분간)노동자당 내부에 잔류하면서 좌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반면 DS 그룹이 속해있는12)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제4인터내셔널의 국제기관지인 ‘국제시선(International Viewpoint: www.internationalviewpoint.org)’에서는 지난 4월에 노동자당을 특집으로 잡아 그간의 우경화와 보수적인 정책들을 집중 질타했다. 더 나아가,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부가 노동자당의 DS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1)노동자당 내 좌파의 강화와 단결을 위한 노력, 2)‘사회주의와 해방을 위한 당’의 강화 용인, 3) 그리고 노동자당 내 좌파와 최근 탈당파/출당파가 주축이 되어 건설한 ’사회주의와 자유당(PSoL: 뻬솔)’ 사이의 대화 촉진을 촉구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내용은 DS의 노동자당 잔류 결정을 최대한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룰라 정부가 이들로부터는 신뢰를 잃은 것이다.

이 모든 것에 겹쳐 부정부패 스캔들이 터졌다. 지방정부에서부터 최고위직에까지 이르는 노동자당 인사들의 부정 의혹은 작년 하반기 내내 끊이질 않았으며, 이로 인해서 당과 정부의 최고위층 인사 셋이 사임했다. 룰라의 지지도도 급격히 떨어진 것은 물론이다. 차기 대선 여론 조사에서도 처음으로 다른 후보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억울한 면이 없진 않을 것이다.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자금을 한나라당의 10%를 넘게 받았으면 사퇴하겠다는 발언의 배경처럼, 룰라의 정부도 상대적으로 더 청렴하고 투명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룰라가 노무현처럼 입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또한 기존 보수정당의 부패 사례와 기존 정치 관행과의 단절을 약속으로 당선된 룰라의 부정은 궤를 달리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동시에 집권 초기부터 노동자당 내외로부터도 룰라 정부의 가장 긍정적인 정책 분야라고 인정받는 대외정책에서는 추가적인 성과들이 없지 않다. 유엔과 같은 다자기구들의 개혁 노력, 미주자유무역협정(FTAA)에 대항하는 남미공동시장(Mercosur) 강화 정책, 남미 통합의 구심점 역할, 이라크 전쟁 반대 및 WTO 내에서 G-22 주도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외에도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과의 남-남 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고,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는 에이즈 퇴치 의약품과 기술 이전에도 나서고 있다. 작년에는 우루과이에서 당선된 확대전선의 바즈케스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남미공동시장 강화를 선언해 룰라 정부에 힘을 실어줬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도 임기 내내 협력 수위를 높이고 있다. 작년에는 정상회담을 통해 ‘전략적 동맹 관계‘에 합의해 국방, 에너지, 무역, 석유 개발 등 20여개 분야에서의 협력을 약속했다. 남미에서 좌파의 선전이 당분간 이어질텐데, 브라질에서 국내정치 영역에서의 실망을 대외정책으로 보완하는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의 연계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작년 12월에 민주노동당당을 방문했던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MST)의 간부들은 룰라 정부에 대해서 “이전 정부와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2-3년 전 이 조직의 활동가들의 평가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었다. 조직적 지지까지 하면서 당선시킨 바로 그 룰라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룰라 정부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현재 남미의 독특한 정세 때문에 룰라 정부에 대한 입장을 순수 국내 정책을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즉, 남미 좌파 정부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새로운 실험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보수 정당에게 남미의 가장 큰 국가의 정부를 넘기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음 선거에서도 룰라를 조직적으로 지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했다. 브라질에서는 올해 총선과 대선이 모두 치룬다.

쿠바, 멕시코, 볼리비아

아마도 남미 좌파의 부활의 가장 큰 수혜자 중에 하나가 쿠바의 카스트로일 것이다. 베네수엘라, 브라질, 우루과이 등에서 줄줄이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과의 외교 관계가 개선되고 물질적 혜택들도 늘고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 사실상 저가에 도입하고 있고, 브라질과의 무역은 룰라 취임 이후 2배가 늘었다. 양 국가로부터 경제 원조가 확대된 것도 물론이다. 우루과이에서는 좌파가 집권하면서 이전 행정부 때 단절되었던 쿠바와의 외교 관계가 복원되었다. 우리에게는 북한 문제로 관심을 모았던 최근의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는 미국 주도로 제출된 쿠바 인권과 관련된 결의안이 다수 남미 국가들의 반대로 단 1표 차이로 통과되기도 했다. 미국의 보수화와 함께 경제 봉쇄 및 제재는 더욱 더 거세지고 있지만, 남미 각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인해서 타격이 그리 크지는 않다.

카스트로는 물론 남미 좌파가 주목하고 있는 국가는 최소한 둘이 더 있다. 바로 멕시코와 볼리비아이다. 멕시코에서는 내년 초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는 수도 멕시코 시티의 시장(안드레스 오브라도르: 중도좌파 민주혁명당 소속)이 피선거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수십만이 그를 위해 거리에 나서자 복권되었으며 현재에도 대선 후보 여론 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동시에 싸빠티스타는 전국 순회 운동을 통해 기존 민주혁명당을 포함한 기존 정치권에 대한 거부를 명백히 하고 있어 이 긴장관계가 대선 국면까지 어떻게 진행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005년 볼리비아의 경우 가스 산업의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국가가 준위기 상황으로 가고, 강력한 사회운동의 압력 하에 당시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했다가 국가의 안정적 통치를 위해 이를 번복, 이후 다시 사임하기도 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이후 실시된 조기 선거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MAS)’의 총재였던 에보 모랄레스가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넘기면서 당선되었다. 모랄레스라는 지도자의 부상, 코카 산업의 중요성, 급진적 사회운동의 역사, 남미 좌파 세력들 중에서 사회운동과 정당 사이의 가장 독특한 관계 등 볼리비아 좌파의 특수성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는 것은 추후로 미루고, 여기서는 위에서도 강조한 지역적 차원의 함의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볼리비아에서는 제헌의회 구성이 사회적 의제로 최근에 등장을 했는데, 이 의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볼리비아의 사회운동들이 차베스의 초기 변혁 노선에 영향을 받아 제헌의회 구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했고, 현재 정부가 이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운동 사례가 어떻게 확산되고 타국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역동적인 남미 정세의 표현인 것이다. 모랄레스가 대선 직후 당선자 자격으로 순방했던 나라는 중국, 남아공, 쿠바, 유럽 일부 국가 등인데, 브라질이나 차베스가 채택했던 남-남 연대 및 남미 통합의 대외전략과 상당히 유사하다. 좌파 정권들의 경험이 누적되고 전략이 공유되면서 하나의 흐름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남미 지역은 좌파의 약진 속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주도하고 있는 남미공동시장, 차베스가 제안한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ALBA)' 등 남미 국가들 사이의 협력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양자간 협력 증진 등도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어 역내 협력이 다차원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끊고, ‘남미의 단결’을 이념적 좌표로서 설정했던 남미 좌파의 전통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회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국가 차원에서 민중친화적인 정부들이 줄줄이 집권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긍정적이지만, 오히려 대륙 내에서 비교 대상이 생기고 서로에게 협력의 대상인 동시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상대가 여럿 확보 되었다는 것이 남미 좌파에게는 더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차베스의 토지 개혁 및 사회 복지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룰라가 국내에서 더욱 많은 압력을 받게 되고, 역으로는 룰라의 대외정책 때문에 차베스나 우루과이의 정부가 미국에 비판적인 대외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듯이, ‘상호 상승 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석유를 낮은 가격에 쿠바에 공급하고 있으며, 카스트로는 베네수엘라 내의 의료 시설 개선을 위해 쿠바의 의사 2000명을 베네수엘라에 파견하는 등, 두 국가 사이의 교류 및 협력은 확대되고 있다. 차베스는 자신을 ‘피델리스타’(피델 카스트로의 추종자라는 뜻)라고 칭한 적도 있다.. 본문으로
2) 특이한 점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국가간의 협력과 연대에만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타국의 사회운동들과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브라질의 MST와 계약을 맺어 교류협력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본문으로
3) 이 간부는 차베스 정권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차베스 정부로 인하여 대륙 전체가 좌쪽으로 이동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점 역시 지적했다. 본문으로
4) 장석준, ‘라틴아메리카 좌파부활의 또다른 주역-우루과이의 확대전선’, 이론과 실천, 2004년 11월호. 본문으로
5) 이를 두고 박노자는 “주변부 좌파의 비극”이라고 평한 바 있다. 본문으로
6) “Chile's Foreign Policv", The Economist, 3월 11일, 2004. 본문으로
7)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바첼레트는 45.95%의 지지를 받았다. 본문으로
8) 적지 않은 득표에도 불구하고 현재 공산당은 의석이 없다. 거대 동맹들을 선호하는 선거 제도 때문에 쿠데타 이전에 3선 의원이었던 그라디스 마린마저도 의원직에 당선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칠레의 선거 제도이다. 본문으로
9) ‘브라질 5차 세계사회포럼.‘ 이론과 실천 2005년 3월 호. 본문으로
10) 잘 알려져 있듯이 노동자당 내에서도 사민주의 우파와 중도파, 그리고 좌파를 비롯한 4-5개의 큰 정파들이 존재한다. 당내 좌파 조직 중 최대 정파인 민주적 사회주의(DS) 그룹이며, 이 조직 출신이 현재 농업개혁부 장관을 맡고 있기도 하다. 당내에서 15%의 정도의 지지도를 확보하고 있으며 여러 좌파 세력들을 합치면 약 25%에서 30%정도의 세력군을 형성한다. 본문으로
11) 작년 하반기에 진행된 당 지도부 선거에서 당내 좌파는 결선 투표 끝에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고, 노동자당은 통합 집행부를 꾸렸다. 행정부와 당 활동을 평가하는 당대회는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상 파울로에서 열린다. 본문으로
12) 정파등록제 시행에 따라 노동자당에서는 내부 정파들이 따로 국제조직에 가입할 수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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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노조 노동자운동연구소 박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