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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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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속의논쟁]통한(痛恨)의 서울역 회군과 야비-전망논쟁

홍석만 | 편집실장
준비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여기 20년을 이어왔던 논쟁이 있다. 대중에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서 이후 투쟁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먼저 문제제기를 하고 투쟁을 벌여나가면서 대중적 기반을 넓힐 것인가하는 논쟁이 그것이다. 가령, 노동조합에서 이러한 대립은 종종 발생한다. 사측의 탄압이 있지만 노동조합의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정면대응보다는 노조의 일상투쟁을 강화하여 조합원들과의 결합을 넓히자는 주장이 있다. 반면, 사측의 공세에 맞서 오히려 노동조합이 파업투쟁을 통해 사측의 의도를 분쇄하고 조합원들의 지지를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이에 대립하기도 한다. 비단 '운동노선'이라는 중량감있는 문제가 아니라도 살아가면서 '준비'할 것인가 아니면 '전진'할 것인가 하는 갈등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항상 안고 살아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대립은 20년전 군대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났다. 투쟁이 계속되면 군대가 투입되고 누구든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야 하는 상황에서, 후퇴하여 기반을 다질 것인가 아니면, 다소간 희생이 있더라도 전진하여 저들의 실체를 대중 앞에 낱낱이 드러낼 것인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인 수십만의 시위대는 그런 상황을 맞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삶과 죽음의 순간에서 죽음을 선택한 상황 역시, 적지 않았다. 불과 며칠 뒤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최후통첩을 받고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했던 노동자, 도시빈민 그리고 학생들이 그러했다.
후세 사람들이 '통한의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르는 당시의 대립은 그 이전 유신잔당의 척결과 군부독재의 타도투쟁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대립은 이후 무림-학림 논쟁과 야학비판(야비)-학생운동의 전망(전망) 논쟁으로 계승되면서 노선적으로 정립되는 계기가 된다. 이 고고한 논쟁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막론하고 현재 운동진영에서도 사실상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고 보면 20년간 이어내려 온 역사만큼이나 반추의 의미는 항상 존재한다.


주전-주화 논쟁과 서울역 회군

1979년 10월 26일,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유신독재의 철옹성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로 무너졌다. YH노동자들의 투쟁이후 거세지던 민중들의 투쟁이 '부마항쟁'을 거쳐 박정희 정권타도투쟁으로 번져가던 도중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지배세력은 일대 혼란 속에 빠진다. 이들은 곧바로 서울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법 개정'을 완료하기로 하는 등 민중들의 투쟁을 통제하고 관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재자의 몰락을 수습해 가던 유신잔당들이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려고 하자 11월 24일, "민주주의를 열망해왔던 애국시민은 민주주의를 위한 최후의 결전으로 궐기해야 한다"라는 호소가 울려퍼졌다. 이른바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즉,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 국민대회]의 개최를 통해 민중들은 유신철폐와 민주주의 수호의 열망을 분출하였다. 그러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당시 국민들의 열망을 외면한 채, 12월 6일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유신독재에 이은 새로운 독재권력의 등장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6일 후 12월 12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은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중심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걸린 쿠데타'로 평가되는 8개월간의 권력장악 시나리오를 완성시켜 나갔다. 이런 가운데 노동자 민중은 '80년 서울의 봄'을 열어 젖힌다.

민주화의 봄을 맞이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약진의 기회를 갖는다. 상당부분 임금체불과 관련된 사건이긴 했지만 1980년 4월말까지 넉달동안 800여건에 달하는 노동쟁의가 발생하였다. 그 이전 연간 쟁의건수가 100∼200건에 불과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북탄광의 노동자들의 사흘 밤낮을 걸친 투쟁은 관제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되는 가운데, 유혈사태로 번지기도 하였다.

한편 12·12사건으로 인해 군부의 권력장악 음모가 표면으로 드러난 가운데 서울의 봄을 맞이한 학생운동진영은 준비론과 투쟁론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준비론은 주로 학생운동내 재학생 그룹들에 의해 주장된 노선으로 투쟁역량을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학생회 구성, 학칙개정 등 학원민주화, 학생자율화투쟁을 과제로 설정하면서 군부에게 탄압의 명분을 주는 정치적 시위는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투쟁론은 복학생 그룹들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 전면적인 투쟁을 통해 군부파쇼의 반동성을 대중에게 폭로하고 이를 통해 군부파쇼의 집권의도를 분쇄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노골적으로 민중들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1980년 4월 30일 전두환 계엄사령부는 전군 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과격한 노사분규, 학원소요, 정치인들의 학원 내 집회 금지"를 공포하면서, 서울의 봄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국 학생들은 상황적 대세에 밀려 군부와 정면대결로 나아가게 된다.
바야흐로 1980년 5월이 왔다. 5월 2일 학생들은 10여일간을 민주화투쟁기간으로 설정하고 이른바 '민주화 성회'를 통해 투쟁의 열기들을 모아나갔다. 주로 이 기간동안 즉각적인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는 대신 정세를 관망하면서 학내집회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5월 12일 친위쿠데타설과 군부의 학원점령에 관한 정보가 입수되자 운동역량의 손실을 우려한 학생회장단은 학생대중을 해산하고 철야농성을 철회한다. 반면, 이러한 학생회장단의 결의에 반대한 몇몇 대학에서는 가두진출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5월 13일 밤, 고려대 학생회관에는 전국의 27개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가두진출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다. 결국 "우리의 평화적 교내시위는 이제 끝났다.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싸울 것이다"고 결의하고 다음날 30여개 대학에서 교내시위 후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는 수십만의 시위대가 운집하였다. 유신독재와 군사파쇼의 청산을 염원했던 학생들, 서울 일대의 학교에서 전교생의 90%가 이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청산과 민주정부의 수립을 눈앞에 둔 듯했던 시위군중에게 계엄군의 진격소식이 시시각각 전해져 왔다. 이 상황에서 지도부 사이에 이른바 주전-주화 논쟁이 진행되었다. 진격하여 군부독재의 실체를 폭로할 것인가, 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복귀할 것인가. 준비론과 투쟁론의 논쟁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총학생회장단과 학생운동의 주요 지도부들은 준비론 즉, 주화론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국민운동파라 불리웠던 재야에서 활동하는 복학생 그룹들은 전면적 투쟁론 즉, 주전론의 입장에서 당시의 행동방향을 규정하고 진군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밤 10시, 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하고 저 뼈아픈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진다.


서울역 회군의 쓰라린 상처

당시 상황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가능할 것이다. 제2의 4·19의거와 같은 상황이 다시 도래할 수도 있었다든가, 결과적으로 군사파쇼에 의해 모두가 당하는 상황이었다면 주전론이 올바랐다든가 하는 평가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서울역 상황 자체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러한 평가는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위대는 주로 학생들이었고, 게다가 서울지역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참여한 대중적인 시위였다. 그에 비해 지도부의 투쟁준비는 주전과 주화파를 막론하고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직되어 있던 투쟁대오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피를 흘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노동자, 정치운동 등 다른 운동과의 연대 또한 척박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서울역 회군은 패착으로 인식된다. 서울역 회군과 함께 수십만의 학생대오는 다시 조직되지 못하고 흩어진다. 5월 16일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들은 '우리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시위를 중단하고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자며 수업복귀 결정을 내리고 만다. 결과는 바로 다음날 나타났다. 17일 밤 12시를 기해 계엄사령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재야과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간다. 결국 휴교령이 발동하면 즉시 투쟁한다는 지침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지도부의 붕괴와 함께 광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투쟁은 중단되고 만다.

따라서 서울역에서 당장에 군부와의 정면대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투쟁의 토대를 구축하고 대중적 투쟁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직적인 계획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서울역 회군과 수업복귀 결정은 원칙도, 계획도 없었던 뼈아픈 패착이었다.
서울역 회군의 상처는 광주항쟁으로 더욱 쓰라리게 나타났다. 광주는 서울역 회군과 수업복귀가 이루어진 서울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광주의 학생들은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상황에서도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5월 16일 전날보다 더 많은 3만여명의 학생, 시민이 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 횃불시위를 벌인다. 또한, 5월 18일 계엄군이 투입되고 계엄군에 의해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된 상황에서도 광주민중들의 광범한 대중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비록 당시의 상황에서 광주의 고립된 투쟁으로 군부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광주민중들의 항쟁은 군사파쇼정권의 실체를 폭로하고 이후 1980년대 운동의 목표와 과제를 분명히 인식시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림-학림과 야비-전망 논쟁

1980년 5월 투쟁의 패배는 무자비한 군사파쇼통치를 불러왔다. 학원은 물론 노동조합과 사회의 전부문이 강제재편되었고 살인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 탄압은 급기야 삼청교육대로 대표되는 정화운동, 순화교육으로 이어져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은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순화교육을 감내해야 했다.
5월 투쟁의 패배 원인에 대한 진단과 계획을 놓고, 학생운동은 여전히 준비론과 투쟁론을 바탕으로 한 논쟁을 계속했다. 이 논쟁은 경찰이 무림과 학림이라 부른 학생운동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다.
무림과 학림은 1980년 5월의 투쟁이 민중의 조직된 주체역량의 부족이라는 점에 대해 공히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 결론은 서로가 완전히 달랐다. 무림의 주장은 1980년 5월 투쟁에서 운동진영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역량을 아끼며 전체운동의 전위형성의 모태가 되기 위한 장기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위 위주의 형태는 지양되어야 하고, 학생 지도부가 그대로 사회운동으로 이전하여 전체운동의 지도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학림은 학생운동은 전체 민중운동의 지도부가 아니라 선도적 문제제기 집단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때문에 전체 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위투쟁을 자제하자고 주장하던 무림진영은 12월 11일 급조된 시위를 벌여 이로 인해 대대적인 검거를 당하고 만다. 학림 역시 1980년 5월 이후 암흑기 속에서도 어두운 침체를 벗어나는데 일조했으나, 무리한 전국 단위의 하향식 체계를 시도하다가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1981년 학림사건 이후 학생운동은 다시 침체기에 들어간다. 그런 상황에서 1981년 2학기 향락축제 거부투쟁 이후 합법공간의 활용과 대중투쟁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 된다. 이 때에 등장한 것이 바로 [야학비판]이라는 팜플렛이다.
야비는 서울대 10월 축제 시위를 예로 들면서 종래 학생운동이 시위 만능주의였음을 비판하고, 학생대중의 일상적 이익을 대변하는 일상투쟁의 강화와 대중조직 건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지나친 정치투쟁으로 인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주체역량의 건설을 소홀히 해온 점을 비판하면서 학생운동 인자의 현장으로의 대규모적인 존재이전을 주장하였다.

야비의 노선은 준비론, 주화파 그리고 무림의 맥을 잇는 최초의 팜플렛으로 이후 상당기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 많은 학생운동가들이 야비가 주장한 존재이전론에 따라 노동현장으로 투신하게 된다. 또한, 공개써클의 조직과 학예제 등 합법공간의 폭을 넓혔고 심지어 학도호국단까지 장악하는 등 운동의 대중적인 기반을 넓히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야비의 시위자제론의 결과로 인해 학생운동은 1981년 하반기부터 1982년 상반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정치투쟁을 거의 전개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운동의 전망]이라는 팜플렛은 야비의 노선으로 대중적 기반이 확대되었지만 대중적 투쟁력이 고양되어가면서 형성된 운동의 새로운 방향모색이라는 배경 속에서 발행되었다. 전망은 야비의 노선으로 인해 학생운동이 합법적인 행사에 경도되어, 이철희-장영자 사건에 대한 정치적 대응을 하지 못한다고 적극 비판하고 나섰다. 전망은 투쟁론, 학림의 맥을 이으면서 1970년대 이후 학생운동사를 정리한다. 그에 따라 당시 한국상황에서, 정치국면에 대해 유일하게 대응능력을 가진 학생운동의 임무를 선도적 정치투쟁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노동현장으로의 이전 준비를 위해 학생운동의 당면과제를 방기하는 야비의 입장을 비판하며 이를 실천적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아무튼 전망의 발행으로 그간 활발하지 못했던 정치투쟁이 다시 복원되고 암흑기 속에서도 학생운동의 투쟁력은 서서히 살아나게 되었다.


야비와 전망 이후

야비와 전망의 논쟁 당시와 지금의 상황은 많은 차이가 난다. 학생운동의 조건과 학원가의 분위기만하더라도 지금과는 많이 다르고, 학생운동의 대중적 토대는 물론이요, 정치적 투쟁도 예전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또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계급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전체적인 운동관계와 학생운동의 역할도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무림과 학림, 야비와 전망 논쟁을 통해 학생운동의 역할, 투쟁방법론 그리고, 전위형성의 문제에 대한 폭넓고도 진지한 사고가 이루어졌다. 또한 이 논쟁의 출발로 인해 이후 무림의 맥을 잇는 MC와 학림의 맥을 잇는 MT와의 논쟁으로 전개되었고, 1985년 백가쟁명식 논의를 통해 사상적 성숙을 이루는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논의의 전개과정은 차치해 두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당시 논쟁을 회고하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교훈은 논쟁 결과에 대한 실천적인 치열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세적인 절실함이 동반되지 않고 그에 따라 실천적으로 조직되지 못한 공수표식 논의들이 최근 운동진영의 논쟁 분위기이고 보면, 이 논쟁들의 치열함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림과 학림, 야비와 전망의 논의들은 말과 글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노선과 입장에 따른 학생운동가들의 적극적인 실천이 있었고, 군사파쇼 정권하에서도 짧은 시간동안 운동의 급성장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야비의 현장이전론에 따라 학생운동가들의 대규모 현장이전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또 노동운동의 양적·질적 성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전망의 노선은 당시 다른 운동이 조직되지 못한 상황에서 학생운동이 가장 정력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도록 하여, 이후 노동자 민중이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선배 운동가들, 당시 5월 투쟁을 이끌고 논쟁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역사의 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1980년 당시 오류도 많이 있었지만 그 당시 역사적 요구에 주저하지 않고 싸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당일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던 지도부의 상당수가 정치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의 운동과정에서 보수정치권에 진입한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서울역 회군의 패착과 5월 광주의 한(恨)을 뒤로 한 채, 이들은 보수정치꾼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서울의 봄을 이끌었던 주요 지도부라는 경력을 자랑스레 앞세우면서 말이다.

어찌되었건 일상투쟁을 통한 정치투쟁으로의 상승인가, 선도적 정치투쟁을 통한 대중투쟁으로의 발전인가 하는 문제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대립되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극단적으로 선택될 문제가 아니다. 준비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앞서서 투쟁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목표로 준비하고 투쟁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의미있는 이유는, 특히 격동기에 과제를 잘못 설정함으로써 민중투쟁의 패배로 귀결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1980년 5월투쟁은 물론, 1987년 6월 항쟁속에서도 민중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언제, 어떻게 투쟁해야 했던가를 반문하는 이유도, 또다시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결국 이를 극복하고 수렴하는 과제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지만, 당시 사람들도 그랬듯이 항상 문제는 실천적으로 바로 오늘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 다음 주제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반미논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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