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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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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과 남근

장귀연 | 서울대사회학과 박사과정
<b>수수께끼 1 : 자궁 없는 여자는 무엇인가?</b>

지나치게 개인적인 얘기라서 독자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내 얘기부터 시작해 보자. 작년 나는 병원에서 자궁에 큰 근종이 자라고 있으니 시급히 자궁 제거 수술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물론 나는 아찔했다. 병원의 계단이 너무 가팔라 다리에 힘이 빠졌다. 어디선가 잠시 쉬고 싶은데, 병원 주위에는 지하철 공사장의 풍경만 황량하게 널부러져 있을 뿐 그 흔하던 커피숍이나 다방도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찾아 들어간 시장통 지하 다방의 공기는 여전히 탁하고 어두침침했고, 계속 줄담배를 피워댄 탓에 목이 메었다. 다방'아가씨'와 '사장님'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다방 구석자리에서, 나는 어디엔가 호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지하라서 핸드폰은 잘 터지지도 않았었다.

며칠 후 조금 충격이 가라앉고 냉정하게 큰 종합병원을 찾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나는 친구를 만났다. "혹시 나 수술받다 죽으면 어떡하지? 의료사고도 의외로 많다던데, 간단한 수술인데도 마취 잘못 되어서 안 깨거나 반신불수 되는 경우도 있대." "뭘 그렇게 겁이 많냐?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된다고. 걱정을 사서 해라." 이러저러하게 나를 위로해 주던 친구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렸다. "그런데 자궁 없는 여자란 건 좀 이상하지 않니? 여자라기도 그렇고." 그때 난 병원에서보다 더 충격 먹었다.

자궁 없는 여자. 시쳇말로 '엽기적'인 거였다. 나 자신 결혼이나 임신·출산 같은 것을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난 여자였고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해 본 바가 없었다. 여자라는 존재의 정체성, 그것은 모성이고 모성을 담지하는 자궁이 아니었던가. 뮐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우리식 미의 기준으로 보면 전혀 아름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너스'라는 여성 최고의 상징어를 부여받게 된 것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붙어 있지 않은가. 바다를 예찬하는 모든 문학적 언어들은 바다를 생명을 탄생시킨 자궁에 비유하면서 그 여성성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자궁이 없는 여자가 진정한 여자일 수 있을까?

그날 밤 달은, 초생달이었다. 달도 여성의 상징이다. 나는 초생달을 올려다 보면서 배가 둥근 보름달을 생각했다. 옛날 여자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달숨 들여마시기'라는, 보름달의 기운을 배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힘껏 들여마시는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여성과 출산의 상징인 달. 그러나 초생달은, 창백했다. 초생달의 배는 허공으로 비어 있었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에 빈 배를 찔린 초생달은 위태로워 보였고, 어둠을 움켜쥘 듯 갈고랑 모양으로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배가 빈 달, 배가 빈 여자. 나는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자궁을 제거하면 나는 영영 보름달로 부풀어 오를 수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뱃속에 빈 공허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고 살아야 할 것이었다……

1999년 12월, 나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여기서 수수께끼 하나, 나는 자궁이 있을까, 없을까? 만약 내게 자궁이 없다면 나는 여잘까, 남잘까,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엽기적인 존재일까?


<b>수수께끼 2 : 그는 좆 달린 남자인가?</b>

이제 나름대로 언론을 장식한 좀 더 사회적이고 시사적인 얘기로 가 보자. 탤런트 홍석천의 동성애자 '커밍아웃'과 방송에서의 '퇴출'이 화제가 됐었다. 그가 커밍아웃하게 된 과정과 거기에 개입한 황색 저널리즘의 더럽고 치사한 작태는 <한겨레 21> 10월 5일자 327호를 보면 잘 나와 있다. 그리고 그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하고 방송사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에서 울리고 있으므로 나는 거기에 단지 한 목소리를 보탤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좀 더 궁금해 한 것은,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의 말대로 다만 '성적 취향'일 뿐이고 홍석천 자신의 말대로 '나 자신, 그 뿐'인 문제를 두고 도대체 왜 그렇게 떠들썩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대학가에서부터 동성애자 운동이 막 시작될 무렵, 한 남자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만약 네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겠냐?"
"글쎄요, 별로 개의치 않을 것 같은데."
"나라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정이 뚝 떨어질 것 같아." 약간 놀란 내가 "왜요?"하고 되묻자, 그 선배 왈, "사내 새끼가 말야, 그게 뭐냐? 남자라고 할 수도 없다구."

나는 그때 동성애혐오증(homophobia)를 표방하는 사람을 처음 본 것이었다. 왜 그게 처음이었냐 하면, 그 이전에는 동성애에 대해서 공개적인 얘기 자체가 거의 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나는 비슷한 반응을 여럿 접했다. 물론 동성애 운동의 적극적인 전개 덕분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는 많이 관용적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반응들. "알아, 안다구. 동성애는 성적 취향일 뿐이고 그런 걸 차별해서는 안되지. 나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동성애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데 찬성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싫단 말이야. 남자들끼리 그게 무슨 짓이야, 징그럽게."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관용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지만,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여전하다고나 할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남자들에게는 불공평한 얘기가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관찰한 바로는 이러한 반응들은 거의 예외없이 남자들에게서 나왔다. 그들의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동성애자 = 좆을 달고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남자, 그게 남자라고 할 수 있냐? 따라서 징그럽고 혐오스럽다.
나는 남근의 권력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 자궁이라면, 남성을 상징하는 것은 남근이다. 여성의 자궁을 가득 채우는 부푼 남성의 성기, 자궁에 씨를 뿌리는 힘찬 분출, 완벽한 음양의 조화(!).

솔직히 말하면, 그것은 조화라기보다는 권력이다. 남근의 권력, 남성의 권력에 대해서는 사실 더 이상 얘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뿐이다. 동성애에 대해서 남자들이 더 혐오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남근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성의 자궁을 채우지 않는 남자, 즉 동성애자는 남근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다. 동성애자는 남성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적어도 상징적인 의미에서 남성이 아니다. 기득권을 가진 남자들이 동성애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아,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항의할 일부 남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솔직히 고백해야 하겠다. 게이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혹시나 뭐 별다른 점들이 있을까 하고 슬쩍슬쩍 몰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고 한쪽 귀에 점처럼 박혀 있는 귀걸이 외에는 특별한 것을 발견하기 어려운 보통 남자들이란 것을 알고 조금 실망했었다. 한 게이 후배에 대해서 한 친구(남자)가 "역시 걔가 말하는 게, 누나아∼, 혀엉∼ 그러는 게 여자 같고, 좀 징그럽지 않냐?"고 했을 때, 무심코 "그래"라고 맞장구쳤었다. 그러고 보니 홍석천도 그랬다. 남자 같지 않았다.

정말 홍석천을 좆 달린 남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엽기적인 존재인가? 두번째 수수께끼다.


<b>신화와 권력</b>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이란 것은 반박할 수 없다. 여자는 자궁을 가지고 있고 남자는 남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이 '사실'은 '상징'화된다.
여성의 자궁은 남성의 성기를 받아, 초생달이 보름달이 되듯, 부풀어져야 한다. 자궁은 여성이며, 여성성이며, 좀 과격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여성의 본성 자체로 간주되는 모성이다. 그래서 자궁이 없는 여자는 빈 공허일 뿐이다. 그녀는 어머니도 아니고 또 여자도 아니다.

반대로 남근은 여성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그 배를 채워주는 것이다. 여자의 빈 곳을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에 그것은 권력의 장소이다. 그러한 남근의 역할을 거부하는 자는 남자가 아니다. 그래서 게이는 남자가 아니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선명한 이분법에 근거한 이 사회에서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흐트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위협적이며 혐오스럽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반사회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교단에서 아웃되어야 했던 것처럼, 게이 홍석천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공중 방송에 적합치 않으며 더군다나 어린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뽀뽀뽀>에서 아웃되어야 한다. 어쨌든 불순분자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엽기적인 존재인가? 분명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궁의 신화와 남근의 권력을 받아들일 때, 그러하다. 그것을 거부할 때, 수수께끼의 답은 달라진다. 홍석천이 너무도 잘 표현했듯이, 그들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나 자신, 그 자체"일 뿐이다.
인류학에서는 자연적인 특성을 상징으로 전화할 때 문화가 성립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너무 자주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권력은 너무 자주 우리의 가슴을 짓누른다. 투명한 사회, 권력이 없는 사회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밝은 사회, 좀더 억압적이지 않은 사회를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지나치게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이 내 버릇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내가 홍석천 지지 서명을 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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