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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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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lty by suspicion

고지훈 | 서울대국사학과 박사과정
침묵은 곧 유죄

매카시라는 상원의원 한 명 때문에 온 미국이 떠들썩했던 때가 1950년대였다. 미국 내에서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1952년 결성된 '반미활동 조사위원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가 소동의 원인이었는데, 이 위원회 때문에 헐리우드도 많은 영화인들을 잃게 된다. 이 위원회에서 8명의 동료 영화인들 이름을 말한 엘리아 카잔(Elia Kazan)이란 감독은 그로 인해 5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건만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기립 박수를 남발하기로 유명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명예상(Honorary Awards)은 그 중 유명하다. 몇 년도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구로자와 아키라는 직접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분 몇십초 동안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단다. 암튼 상대를 높이는 것이 곧 나를 높이는 길임을 잘 알고 있는 집단이다. 헌데 1998년 엘리아 카잔이 이 명예상을 수상할 때 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객석의 정중앙을 경계로 정반대의 분위기가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한쪽에서 기립박수를 보낼 때 다른 한쪽에서는 팔짱을 낀 채 그대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경계선 쯤에서 저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는 서지도 앉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어정쩡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고, 시상식장 밖에서는 카잔의 '비신사적' 행동을 비난하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피케팅을 하던 중이었다. 이 묘한 분위기 때문에 트로피를 손에 쥔 노인네는 허겁지겁 고맙단 말 몇마디만 남긴채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당시 카잔에게 트로피를 쥐어줬던 사람은 로버트 드니로란 배우였다. 그는 '심증으로는 유죄(Guilty by Suspicion)'란 영화에 출현했었는데, 영화는 바로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드니로가 맡은 역은 카잔이 처한 입장과 비슷했었는데, 영화 속에서 드니로는 카잔과 달리 동료 영화인들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 이 '심증으로는 유죄'가 제대로 된 번역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영미법에서는 'suspicion'이란 일정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를 가진 당사자가 그것을 제출하지 않음으로써 불이익의 추측을 받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즉, 소송에 휘말린 원고든, 위 '조사위원회'에 불려나온 증인이든, 자신을 겨냥하는 특정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증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출하기를 거부할 경우 당하게 되는 불이익을 말한다. 실제 영화에서는 드니로 자신이 공산당원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라,

드니로 자신이 문제가 된 영화관계자들의 공산당 입당 사실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답변을 거부함으로써 헐리우드에서 축출당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심증으로는 유죄'의 뉘앙스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건 카잔은 guilty by suspicion을 피해가기 위해서 동료들의 공산당 입당사실을 증언했고, 영화 속의 드니로는 거부했다. 헐리우드는 50년 가까이 지난 과거사를 기회있을 때마다 화제거리로 만든다. Guilty by suspicion말고도 당시 사건을 다룬 영화들은 몇 편이 더 되고, 최근까지도 영화로 만들어졌으니까.


내가 사랑한 스파이

오래 전 일이다. 한국사를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에 와서는, 사실 한국사 공부보다는 1980년대 학원가에 존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전공을 잠시 외면하고 있을 때였다. 과에서는 2, 3학년을 중심으로 현대사 세미나를 진행하던 팀이 있었는데, 대동제를 맞이하여 '심포지움'을 개최했었다. 주제는 '남로당과 박헌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남로당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중학교 때인가 즐겨 보았던 TV 주간드라마였다. 이승엽, 김삼룡, 이주하 등은 그 드라마의 영향으로 범죄자의 전형적인 이름 석자를 떠올리라면 가장 먼저 눈앞에 어른거릴 이름들이었다. 게다가 박헌영까지!

심포지움에 그다지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발표문을 나르라는 선배의 강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심포지움이 열리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장소는 이삼백 명을 족히 수용할 수 있는 대형강의실이었다. 살면서 참 부끄러운 짓을 많이하게 된다. 1학년 교양과목을 두 세개 신청했었고, 그 중 하나가 심포지움이 열렸던 바로 그 강의실이었는데.... 사실 그날 처음 가 봤었다. '대학생이 강의를 빼먹고 뭐하는 짓인가'라는 자책보다는 '이렇게 큰데서 하는 강의니까 빠져도 잘 모르겠지. 정말 다행이야. 출석을 매번 부를 수는 없겠어'라고 안심하는 철부지였다.

아무튼 발표문을 배포하려고 강의실에 들어선 순간 깜짝 놀랐다. 대형강의실 좌석은 물론 통로와 벽에까지 빼곡하게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학술발표회나 심포지움 같은 행사에 여러 번 가 보았지만, 아직도 그렇게 많은 청중들이 참가했던 것을 보지는 못했다. 대학이 학문의 상아탑이니 어쩌고 하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대충 발표문만 날라다 주고 도망가려고 했던 맘을 고쳐먹고, 행사진행요원 자격으로 토론석 바로 옆에서 심포지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당시 나의 행동준칙은 '사람 많이 모인 곳엔 뭔가 있다'는 것이었으니.

대형강의실이 빼곡히 들어찰 정도로 모여든 그 많은 인원들이 한결같이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게다가 발표자들은 그보다 몇 배 더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토론장에 팽팽한 긴장감을 돌게 했던 이유는 한참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순수하게 학문적인 호기심이나 현대사에 대한 관심 때문인 줄만 알았다.
사실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노력중이지만, 십 년도 더 전의 일이고 또 남로당이나 현대사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을 때여서 정확하게 심포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최근에서야 박헌영 전집 발간 작업이 마무리되었던 만큼 남로당이나 박헌영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부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던 심포지움의 수준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표의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다. 발표가 끝나고 방청객의 질문시간이 이어질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발언기회를 요청했었는데, 이런 저런 질문들이 있던 차에….아까부터 집요하게 발언을 요청하던 사람이 기회를 잡았다. 그가 던진 질문은 매우 간명했다.

"그래서, 박헌영이 간첩이란 말입니까? 아니란 말입니까?"

찬물을 끼얹는다는 표현은 그럴 때 써야 한다. 끙얼거리던 발표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릴만치 장내는 조용해졌다.

"사실 그 문제는 너무도 민감하고 또 본 심포지움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서…."

두 번째 이유는 지금도 많은 학술발표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회피성 답변이니 그렇다치고,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첫 번째 이유였다. 박헌영이 간첩인지 아닌지가 왜 민감한 문제지? 박헌영이 아들이라도 살아있나?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봐서 답변을 했던 발표자는 박헌영이 간첩인지 아닌지에 대한 나름의 확신은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똑 부러지게 대답을 안해주는 걸까? 그 뒤로 약간의 소란과 웅성거림이 발표장 내를 잠시동안 어지럽혔던 것 같고, 마치 마지막 질문이 나왔으니 이제 끝내도 되겠다는 방척객과 발표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라도 이루어진 양 심포지움은 막을 내렸다.

마지막 질문이 불러일으킨 묘한 파장에 대해 뒷풀이에 따라가서 묻고 싶었다. 허나 심포지움을 준비했던 학구파 선배들과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어서 관두고 말았다.
그 뒤, 가끔 기회가 있을 때 근데 '박헌영이 간첩이요 아니요?'라는 투의 질문을 선배들에게 던져보기는 했지만 누구도 명쾌하게 답해주지는 않았다. 대답해주는 선배들은 한결같이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만 반복했다. 그런 선배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심증적으론 유죄라고 돌려돌려 말하는 부류와 심증으로는 무죄라고 또 돌려돌려 말하는 부류. 40년 쯤 전에 북한에서 처형된 빨갱이 하나를 두고 참으로 난처해했다. 학자적 품성이 부족했던 터라 남로당과 박헌영에 대한 호기심은 그 정도에서 끝이 났다.

박헌영이 간첩인지 여부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지만 한가지 사실은 그 뒤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한 선배들의 반응이 두가지로 또렷하게 갈렸던 것처럼 학생운동권도 양대진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능력도 안되면서 '역사읽기'의 연재(당시는 일회성 원고청탁인줄 알았지만)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인물은 박헌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헌영의 간첩협의에 대해 아직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십년이 더 지났고 또 설익은 학부생이 아니라 현대사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선배연구자들이라고 해서 좀 나을까 싶었는데. 대답은 비슷했다. 심증으로는 유죄, 심증으로 무죄. 두가지 반응이었다. 그렇다는 증거도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또 분명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태가 좀 나아졌다면, 박헌영 재판을 참관했던 인물들의 증언이 더해지고 있고 재판기록도 공개되었으며 이런저런 자료들이 종합되어 곧 박헌영 전집이 나온다고 한다.

먼저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혹은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가장 유력한 증거는 우선 그의 자백이다. 자백이라기보다는 반대증거 제출에 대한 그의 침묵이다. 필자도 아직 박헌영 재판기록을 모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전언에 따르자면 그는 자신에게 씌어진 혐의에 대해서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여러 가지의 정황증거들이 있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 그는 공산당 운영을 종파적이고 모험주의적으로 운영하여 결국 남한의 혁명역량을 소모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결국 남조선 반동정권의 성립과 "미제국주의의 북조선 침략"을 도왔다는 결론으로 과대포장 될 수 있음은 상식이다. 대부분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과 남조선 혁명운동 지도와 관련된 죄과는 논쟁의 여지가 많으니 넘어가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술적인 오류일 뿐이었다고 평할 수 있고, 또 본인이 그렇게 우기기만 했어도 범죄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어쩌면 그저 단순히 한국공산당 1세대가 겪었던 시행착오 정도로 '조선공산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에 그쳤을지 모른다.

보다 직접적인 증거들은 그가 일제시대 공청(공산주의청년동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던 前歷, 미군의 남한점령 당시 박헌영이 접촉하였던 군정관리들과의 관계, 한국전쟁 당시 당 중앙의 고급정보들이 계속 새고 있다는 의혹들, 이런 모든 의혹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 있었던 유력한 물증으로 박헌영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문의 무전 감청결과였다. 박헌영 간첩사건(1953년 3월) 당시 북한검찰소 검사로 근무하다 남파 간첩으로 체포되었던 한 인사의 증언에 따르자면, 박헌영을 체념시켰던 결정적인 증거가 수신지를 알 수 없고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혹은 확인할 수 없는) 무전이었다고 한다. 북한쪽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박헌영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의 침묵은 곧 유죄를 의미한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사후적이지만 조선의 최초.유일 전위당으로서 승인받았던 제1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한지 29년만에, 그는 (재건)조선공산당 당수와 북조선인민공화국 외무상이란 화려한 직함을 뒤로 하고 간첩죄를 인정한채 처형당한다.

개인의 불행이자 지금까지 파장이 지속되는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의 불행이다.


나 웃으며 불태워지리라!

한때 일국의 혁명역량을 총동원할 수 있던 자리에 있던 좌파 이데올로그이자 정치지도자였던 인물이 있었다. 천운이 그의 편에 있는 듯 했고, 다른 어떤 경쟁자들보다 더 활동적이고 응집력이 높은 정치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결정하면 조직은 전진하고, 그가 번복하면 조직은 후퇴한다. 좌익을 위장한 야심가에 불과했건, 인민과 운명을 함께 하고자 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분명 해방공간에서 가장 많은 기대와 성원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허리를 굽신대는, 사람과 투표용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런 정치꾼들, 선거만이 조선문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우기던 奸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민과의 신진대사를 나누었던 인물이었다.

통일독립된 사회주의 국가건설만이 유일한 목적이었지만, 조국은 분단되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생명이 희생되었다. 자신의 명령과 지도에 순종했던 많은 남로당 관련자들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은 남부군으로 끝까지 저항하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그가 유학을 했고 또 조선공산당을 공식적인 지부로 승인해 주었던 사회주의 모국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휴전회담은 지리하게 계속되었고, 남북분할은 남북분단으로 굳어질 게 뻔했다. 그가 꿈꾸었던 '사회주의 조선'은 전쟁의 상처와 분단으로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애지중지 키워오던 꿈이 산산조각 나 버린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반신불수가 돼버린 아들을 보는 심정이 그와 다를까? 이쯤이면 누구나 자살을 생각해볼 만하다.

책임감은 보스가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다. 삼십년 가까운 혁명가로서의 삶을 정리할 때가 온 것이다. 박헌영이 돋보이는 대목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밑거름이 되기로 한 것이다. 비록 조선의 반쪽에서나마 사회주의가 꽃필 수 있는 거름이 되기로 했다. 북조선 인민공화국을 담당했던 권력집단들도 박헌영만큼은 아니지만 '남조선해방전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썩은 가지를 도려내고 반도 북쪽에서나마 사회주의의 꽃이 만발하는 것을 죽어서라도 봐야 했다. 그래서 그는 거름이 되기로 했고, 똥을 태우는 휘발유가 되기로 했다. 그래, 내 몸을 더럽혀다오. 니 손에 묻어있는 오물까지 죄다 내가 닦아주마. 활활 타올라 그 속에서 화려한 꽃이 필 수만 있다면, 나 웃으며 불태워지리라!

활활 타오르는 불빛에 놀라 깨어보니 꿈이다. 등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고, 문득 고등학교 땐가 교과서에서 읽었던 燒身供養에 관한 소설이 생각났다. 등신불이었던가....


통일이 되면 여러 사람들이 할 일이 많을터이다. 등기소에서 뻔질나게 출장을 나갈테고, 주민등록 재정리요원들이나 하다못해 예비군 동대장들까지 바빠질테다. 그런 사람 가운데 짐 게리슨 같은 무대뽀 정신으로 무장한 검사나 혹은 그와 비슷한 연구자가 나오길 기대한다. 처음부터 사건을 전면재조사해야 할 그들에게 한가지 추측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해 보라면, 죽은 그를 위해서 기꺼이 꿈이야길 해주고 싶다. 개꿈인지 예지력의 발현이었는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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