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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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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정당한가?

이진숙 | 인천지부 회원
성을 영어로 sex가 아닌, gender로 표기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sexuality라는 용어가 성적 정체성의 구성과 성적 실천에 대한 아주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말이라는 것. 이것을 나는 운동사회 안에서 배웠다. 넘쳐나는 성폭력 사건들 속에서 정작 보아야 할 것이, 그 엽기성이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통속적인 세간의 룰이 아님을 또한 배웠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성추행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남자가 내 엉덩이를 만져요'가 아니라 '이 남자가 내 가방을 뒤져요'라고 소리침으로써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방어능력을 터득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운동단체에서 '너는 남자니까 할 수 있는 소리지', '남성중심의 권위주의에 숨이 막히겠어' 정도의 이야기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다(물론 어느 정도 만만한 나이와 직위를 가진 상대에 대해서).

이런 문제들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는 않다. 늘 부족하다 싶어 고민이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싶다. 그런데 요즘같이 운동사회내의 성폭력 문제나, 성차별적인 권력구조에 대한 문제가 뜨겁게 논쟁이 될 때면,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들게 된다. 저 혼자 득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온 것이 아닐까 하는. 그리고 주변의 남성활동가들을 보면 속으로 자문하게 된다. '내가 니들을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 거냐?'


<b>반(反)성폭력운동의 역사, 성폭력 개념 확장의 역사</b>

지난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성폭력이라는 용어자체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무언가로 취급되었고, '정조에 관한 죄'라는 당시 존재했던 법조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와 순결을 갖고있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적 보호만이 있었다. 지금은 비디오가게의 구닥다리 창고 어딘가쯤 자리잡고 있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영화는 여성운동사에 '변월수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남아있는 1988년 말경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정당방위/과잉방어 논쟁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데, 보호가치가 있는 여성의 정조만을 인정했던 당시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피해자가 음주상태로 밤늦은 시간에 돌아다녔으며 가정적 불화가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성폭력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피해여성의 성적권리 보다는 가해남성의 잘려나간 세치 혀에 더 가치를 둔 것이었다. 피해자와 여성운동단체의 끈질긴 법정투쟁으로 결국 무죄판결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빼앗긴 정조'를 강조하여 법원의 선처와 인정주의에 호소함으로서 가부장주의에 기대어 있는 사회통념과 법의 권위를 스스로 옹호하는 자기모순을 감수하는 대가였다.

성폭력이라는 용어자체가 생소할 당시에 '여성의 전화'에서는 '성의 폭력'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일상생활에서 가해지는 각종 폭력'이라고 그를 개념화했다. 그런데 1987년에 '여성의 전화'에서 발간한 성폭력 자료집에서는 '결혼시 퇴직 강요, 강간, 생존권 탄압 수단으로서의 성폭력, 직장 내 성차별 사례,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등을 성폭력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성'이라는 수치스럽고 은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적용되던, 침묵의 미덕이라는 사회적 금기가 균열되기 시작했으며, 피해여성의 주체적인 대응사례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으로도 1990년대의 반성폭력운동, 성폭력사건에 대한 대응의 진일보성은 충분히 드러난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여성문제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여성운동 그룹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 역시 주목되어야 한다. 이러한 많은 조건들의 변화는 성폭력 개념에 대한 논란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것이었는데, '정조에 관한 법'이라는 현행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성운동단체 스스로도 개념화하기 어려운 '정상적인' 남성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아내구타, 근친사이의 성폭력, 아동과 장애인 등에 대한 성폭력 등의 다양한 성폭력 사례들이 사회적으로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조에 관한 죄'라는 법조항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성폭력처벌법을 개정하려는 여성운동단체들의 시도들이 '성폭력특별볍 제정 특별위원회'로 모아지면서 한층 열기를 더해갔다.
특위로부터 촉발된 초기의 개념화 논쟁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냐와 '성과 관련한' 폭력이라는 것이 중심이었다. 법제도의 안에서의 이러한 논쟁 이외에도 많은 입장들이 경합되었는데, 그것은 명확한 '합의'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개념화의 확장이라는 진일보한 방향성을 유지해 왔다. 그로부터 성적인 어떤 사건에 이름 붙이기나 사례들을 유형별로 분류해 규정된 개념을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성적 주체성의 구성과 불평등한 권력구조 등, 성과 관련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의 분석과 의미의 구성이라는 문제로서, 성폭력의 개념화가 갖는 중요성이 각인되어 왔다.

규정된 성폭력개념의 '합의'가 아닌, 성적행위가 성폭력으로 구성되는 맥락의 중요성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러한 논의들에 힘입어 최근에는 선후배나 동료와 같은 친근한 사이에서의 성폭력, 부부, 애인사이의 성폭력에 대한 문제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이 성폭력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는 이러한 사례들은, 강조하지만 규정된 개념으로서가 아닌, 관계 내에서의 권력과 성적 주체성이 구성되는 맥락을 이해할 때만 대답이 가능하다. 부부간의 성관계가 남편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다 못해, 배우자의 성을 정복의 대상쯤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는 너무나 자명하다.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가정, 학교, 사회에서 전방위적으로 혼전 순결의 중요성라는 단 한가지 말 속에 왜곡되게 구성되는 사회분위기도 문제이지만, 이를 '사랑한다면'이라는 이름으로 한칼에 무너뜨리고 마는 불평등한 성적권력관계는 또 얼마나 문제인가?

성폭력이 사건 당시의 행위 장면으로 규정될 것이 아니라, 남녀간의 불평등한 성별조건과 일상적인 관계에서의 권력을 고려한 가운데서의 '연속선으로서의 성폭력 개념'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유의미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회적 담론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명제를 전제로, 성폭력을 인간의 성을 강제와 억압으로 침해한 폭력의 문제로 규정해야 하는 것의 문제의식은 성폭력이 구성되는 맥락을 사고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b>운동사회내의 성폭력 현주소</b>

일반사회에서의 성폭력에 비해, 운동사회에서의 그것이 보다 접근이 어려운 것은 실은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굴레일지 모른다. 사회의 진보와 해방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당연히 더많은 진보와 자유가 넘실거릴 것 아니냐는 근거없는 발상. 더욱이 도덕주의와 상식이라는 것을 무시하고는 어떠한 진보라는 이름도 설 자리가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말이다. 도덕주의와 가부장성, 권위주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얼마나 절실하게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를 다른 곳이 아닌, 도덕책과 국민윤리책을 통해서 배워온 우리들이라면 말이다.

성폭력의 개념이 확장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친근한 관계에서의 성폭력사건의 빈번함은 운동사회도 예외적이지 않다. 사회에서도 역시 그러한데, 친근한 사이에서의 성폭력은 그것이 발생한 공간이나 관계가 매우 중요한 분석의 대상이 된다. 내재화되어 있는 성차별적 권력구조와 암묵적 동의를 가장한 억압과 강제가 허용되는 곳이 바로 그 공간이라는 사실 말이다. 운동사회에서의 이런 것들은 암묵적이라기보다, 운동의 역사성이나 사회적 상황, 싸움의 대상이라는 것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리고 구체성이 필요하다면, 성차별적 구조에서 불리한 위치는 늘 여성들의 자리였고, 그리고 억압과 강제는 대부분 여성들에게로 향해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의심이 든다면, 자신들이 거쳐왔던 운동단위 어디라도 좋으니, 진지하게 관찰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조직의 형식적 대표를 누가 맡고, 조직내의 역할분담이 일의 경중에 따라 공식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들의 언어와 담화방식을 중심으로 짜여진 실질적인 의사소통 구조와 남성중심 권력구조, 반여성적인 조직문화 등. 이런 가운데서도 동지애라는 이름으로 표상되는 다양한 친분관계는 남녀사이에도 충분히 존재한다.

물론 관계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은 조직의 분위기이고 조직의 위계질서이다. 그것이 강제하는 여성활동가들에 대한 통제와 억압들은 정말이지 잘보면 보인다.
이러한 조직구조와 분위기, 속에서 성폭력의 발생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성폭력 사건의 경중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를 위해 성적대상화, 성희롱, 언어폭력 등의 다양한 분석개념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연속선에서의 성폭력 개념' 에 대한 동의가 가능하다면, 다양한 유형의 '성적인' 폭력이 구성되는 맥락 저기 어디쯤엔가, 필연적으로 운동사회내의 성폭력의 자리는 있다. 그리고 수동적으로 의견개진하고, 각주 달고, 활동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여성활동가 일반에 대한 조직내의 인식과, 그것을 묵인하는 운동사회의 가부장성, 권위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능력주의의 어딘가에 피해자의 위치는 있다.

그리고 피해자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을 거꾸로 세우면 드러나는 공간에, 가해자의 위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성인 이상, 그의 자리는 피해자의 자리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다. 성폭력 사건의 발생 이전부터 남성인 그가 곧 조직이었고 앞으로도 그것이 변할 여지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조직내에 공개되었을 때, 조직의 신경은 온통 외부공개를 막는 것으로 향해진다. 대학사회에서 있었던 공개된 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 정치적 계산과 타협에의 압박을 거쳤는지는, 적어도 운동사회 내에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사회운동을 하는 공간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 않다. 지난 여름의 보건의료노조 성폭력 사건은 이를 드러내주는 좋은 사례이다. 공개가 가져올 사회적 파장, 조직내의 문제제기, 그리고 잠시잠깐 실수한 한 명의 소중한 활동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협박, 이 모든 것들이 조직보신주의와 조직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성폭력 사건의 공개와 피해자 중심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제도와 권력의 물질성을 빌어 피해자를 압박하여 종국에는 사건을 은폐시키는 실질적인 위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재생산하는 많은 것들은 또 어떠한가? 조직내 성차별과 성폭력을 척결하는 기회가 되기는커녕,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귀결이 된다. 사건의 은폐는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조직내에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만한 어떠한 구조적, 의식적인 문제도 없다는 자기최면에 다르지 않다. 결국 운동사회 내에서의 성폭력은 '가해자의 신체적, 물리적 힘과 같은 자명한 힘의 우위에 의해 자행되는 성적인 폭력'이라는 지극히 협소한 개념화가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가해자의 왕성한 활동, 피해자의 활동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 그리고 조직의 투쟁성과 활동성에 의해 사후적으로 또 한번 정당화된다. 2차 가해라는 개념은 이 과정에서 구성되는데, 실상 운동사회 내의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2차 성폭력을 경험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b>피해자 중심주의는 공정성이 아닌 원칙</b>

'성폭력특별법'의 제정을 통해 과거 '정조에 관한 죄'가 '강간과 추행에 대한 죄'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법의 개정이 사회적 통념이나 왜곡된 인식까지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다.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라는 인식과 순결이데올로기의 맞은 편에 서있던 성폭력사건에 대한 피해자 유발론이라는 사회적 통념은 여전히도 위력적이다. 개정된 법이 실제 적용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의 저항여부의 증명은 가장 중요시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여전히 힘을 갖는 사회에서, 제아무리 법이 개정되고 반성폭력운동이 활발히 일어난다고 한들, 피해자들이 사건의 공개를 꺼려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 해결방안으로 제기된 것이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 폭력'으로 성폭력을 개념화하려는 여성운동단체들의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성폭력특별법에서도 일정하게 반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때에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여성, 남성보다 열등한, 보호할 정조'를 가진 여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성적 자기 결정권' 개념의 엄밀화라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러한 혼재된 개념과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경합 속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존재조건이다. 성폭력의 노출 자체가 지극히 어려운 사회적 현실의 이면에는,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올바로 인지할 수 없는 조건 또한 존재한다. 오랜 시간동안 주입된 성관념과 그로 인해 왜곡된 성적 주체성은 억압적 분위기에서 강요된 성폭력을 성관계로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던 친근한 사이에서의 성폭력이 개념화와 해결이 더욱 어려운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는 것인데, 원래 남녀사이의 성관계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친근한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폭력이라는 인식이 피해자에게 명확한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명확하다 하더라도 피해자의 고통이나 심리적 불안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신의 성적욕망이나 주체성에 대해서는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고통과 상처, 의심에 대해 타인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해결해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성폭력이 구성되는 맥락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인데, 구성되는 맥락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피해자의 경험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 그 과정과 사후적 고통과 상처를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스스로 언어화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기 경험에 대한 규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폭력사건의 해결에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것은, 정확히 말해 피해자의 경험과 그에 대한 스스로의 표현을 중요시한다는 것이고. 그를 중심으로 성폭력 사건의 맥락을 구성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사건, 장면이라고 했을 때는 주체로서의 가해자의 위치가 마련되어야 하겠지만, 행위장면으로 사건을 절단해 내지 않고 권력과 억압, 주체성, 언어라는 분석도구들을 통해 그 맥락을 구성한다고 했을 때는, 그것의 중심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가해자는 주체가 아닌 분석대상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2차적으로 피해자의, 봉쇄되었거나 왜곡되어 있는 성적 주체성을 새로이 구성해 나가는 과정이며, 이로부터 자신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고통을 성적 자기결정에 대한 권리로 새로이 해석하고 구성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b>성폭력 사건에 있어 조직적 책임을 다한다는 것의 의미</b>

논란이 되고 있는 100인위의 성폭력 가해자 명단 발표에 포함된 가해자 16명 중 유일하게 조직적 입장을 개진한 민주노총의 성명서에는, 사건에 대한 조직적인 책임을 다할 것과 소속단체들의 성폭력 현황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겠다는 나름의 계획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100인위의 명단발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주로 제기되었던, '도대체 100인위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이 되었는가?', '이거 유령 조직아닌가?'라는 잔뜩 의혹어린 질문을 민주노총 역시 잊지 않았다. '만나서 책임있는 논의를 진행하자'는 표현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책임있는 논의?
민주노총의 경우 입장을 제출했기 때문에 어쩌면 동네북이 된 것인지도 모르고, 침묵하고 있는 다른 조직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이거나 회피하려고 하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든 성폭력사건을 대하는 지금까지의 운동조직들의 모습은 그다지 다르지 않아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임있는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말에는 운동사회라는 공동의 기반이 전제된다. 그것은 목표나 방향이 무엇이든간에 서로 운동을 하는 단체로서, 운동사회 안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지고 해결을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려는 또 다른 논리에 불과한다. 민주노총의 경우와 같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가해자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의 경우, 명단발표 이후 개진된 100인위의 입장에 잘 드러나 있듯이, '가해자 소속조직은 피해자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징계 등 조직과 관련된 문제에 한해 행정적인 처리를 하는 단위이며, 동시에 사후에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집단적으로 수행하는 단위'일 뿐이지 해결방안을 자체를 논의하는 단위가 아니다.
이는 성폭력사건에 대한 조직적 해결의 원칙이기도 하다.

운동조직 내에서 성폭력이 은폐되고 축소될 수 있는 힘은, 순결과 정조에 대한 숭배로 표상되는 사회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다르지만 보다 더 치밀하다. 동지애라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기풍이 있고, 위계서열화를 중시하는 운영원리가 있고, 운동의 대의라는 명분으로 약자를 억압하고 통제할 수 있고, 가부장주의를 근원으로 하는 남성중심주의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많은 문제들이 물샐 틈 없이 그것을 방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에 맞선 대안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부당한 현실이 있다. 앞서 열거한 많은 운동사회내의 보수성들을 지적하는 것이 대부분 여성활동가나 여성운동집단임은 당연할 터인데, 그 때마다 번번히 요구되는 '그러면 대안은 무엇이냐'는 질문은 부당하다. 문제에 대해 동의를 한다면, 그리고 그 책임의 절대량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답 또한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지 외부로 돌릴 것이 아니다. 외부로 돌림으로써 스스로의 책임없음, 해결 불가능한, 그렇다면 어쩌면 문제없는 것 아니냐라는 암묵적 논리도 이제는 집어치워야 한다.

생각난 김에 한가지 더, 민주노총의 명단공개하고 책임있는 논의를 진행하자는 입장도 그렇고 100인위에 대한 운동사회내의, 정확히는 남성활동가들의 인식과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100인위의 활동이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사건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것의 해결을 위한 공간을 열었다는 의미를 부정하지 말자. 그렇지 않다면, '계속 침묵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
그리고 여기서 시작되는 많은 과제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거나, 운동사회내의 여성주의 노선을 정립해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하는 것과 같은 너무 많은 것들을 100인위에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무능하다거나, 한번도 실현된 적 없는 공동의 책임을 강조해서가 아니다.

100인위가 여성'활동'가들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많은 '활동가'들의 전제부터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활동가 인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100인위 내에서는 그리고 100인위는 운동사회 내의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주제어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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