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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4.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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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중동, 21세기의 중동 (1)-위기의 땅, 팔레스타인

김용현 | 집행위원
<b>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그리고 현재</b>

<b>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본질</b>

중동은 평화보다는 어쩌면 잠정적인 "위기"의 지역이다. 잠복된 여러 위기 원인들 중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이 중동의 분쟁과 평화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그리 심한 말은 아니다. 이 문제의 출발은 19세기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범아랍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수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루었다. 그렇다면, 이 갈등과 반목 그리고 상호간 폭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유태인들, 이 양 그룹들은 각각 내부적으로도 다른 종교들을 갖고 있으므로(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크게 이슬람교도, 기독교도와 드루즈교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적 차이가 그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갈등의 본질은 '땅'을 둘러싼 상호간의 투쟁이다.


<b>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과 발생</b>

팔레스타인 문제는 원래부터 아랍인과 유태인의 대립적 관계가 아니었다. 19세기 초반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이 유럽에서의 반유태주의와 민족차별 정책에 견디지 못해 다시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민족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랍주민이 유태인들과 공존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그 첫번째 원인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대거 이주한 사실이다. 하지만 유태인들이 무작정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이스라엘 건국을 가져온 시온주의(Zionism)가 싹튼 것은 공교롭게도 프랑스를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드레퓌스 사건의 폭풍우 속에서였다. 1896년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프랑스 군중의 반유태주의 폭동에 놀라 『유태국가』라는 책을 집필한 유태인 언론인이 있었다. 유럽 문화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던 비엔나의 언론인 헤르즐(Teo Herzl)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유태 민족주의자로 전향했음을 고백하면서, 유럽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자기들끼리 따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순수 유태국가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에도 이같은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헤르즐의 책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어디에다 유태국가를 세울 것인지를 검토한 끝에 유태인들이 2천년 가까이 떠나 살았던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시온'(Zion)은 유태교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천국,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의미한다. 신앙심 깊은 유태인들의 메시아를 향한 열정, 성서가 일깨우는 정감들, 게다가 유태교를 등진 유태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갖는 민족적 전통들에 비추어 팔레스타인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약속의 땅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의 철폐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혁명에 뛰어든 동유럽과 러시아의 유태인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땅을 사서 이민을 갔다.

하지만 시온주의가 고개를 든 바로 그때,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의 아랍민족 역시 같은 성격의 이념, 즉 아랍 민족주의에 눈뜨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민족자결의 미래를 그리면서 이민족 지배자에 대한 반감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은 한편,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영국의 중동 지배전략을 축으로 하여 구(舊) 오스만 투르크령의 영토분할을 획책한데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은 1915년 10월, 아랍인이 전쟁에 협력할 경우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요르단의 후세인 왕과 비밀 약속을 하였다('후세인-멕마흔 서한'). 영국 외상 발포어는 1917년 미국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내려고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발포어선언'을 발표했다.

영국은 결국 전쟁이 끝난 뒤, 시리아와 레바논을 분리하여 이 두 나라를 프랑스가 신탁통치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식으로 연합군은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했던 아랍지역을 무려 20여 개의 식민지로 분할점령하였다. 이후 영국은 '발포어선언'을 이행하려 하였고, 우수한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온 유태인들은 효율성이 높은 농업 정착촌과 협동조합, 각종 산업시설과 금융기관, 노동조합과 정당, 행정조직들을 활발하게 건설함으로써 실질적인 국가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와 더불어 영국 정부에 대해서까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여 테러를 가했고, 영국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잇달았다.

계속되었던 아랍인들의 반영국-반유태인 테러와 습격에 넌더리가 난 영국은 이 문제를 당시 미국이 주도하고 있던 국제연합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리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팔레스타인 분할결의안").
그러나 국제연합은 그 결정을 집행할 힘도 의지도 없었고, 영국은 1948년 5월 15일을 기해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민족 사이의 유혈투쟁은 불가피해졌는데, 한 뼘이라도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양측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어졌다. 이윽고 영국군은 마침내 골치 아픈 땅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같은 날 당시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다음날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국가들의 연합군인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했다(제1차 중동전쟁). 그러나 군사력 및 사기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에 뒤진 연합군은 전쟁에서 패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유태국가의 수립을 기정 사실로 만들었다. 반면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들은 하루 아침에 집과 농토와 생업을 잃어버렸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사조차 알 길 없이 피난민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이스라엘이 엄청나게 늘어난 유태이민자들을 수용하고, 아랍에 대한 자국의 국방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 유태인들이 보내준 성금과 미국 정부의 차관에 힘입은 것이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이용했다. 때문에 아랍인들의 반(反)시온주의 항쟁은 반미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된다. 통일 아랍국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던 아랍민중은 이스라엘을, 심장 깊숙히 들어와 박힌 제국주의 첨병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아랍국가도 이스라엘과 타협은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아랍 각국의 혁명세력은 국내의 지배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활용하였다.
제 2차 중동전쟁, 이른바 수에즈전쟁은 이런 사정을 뚜렷이 드러냈다. 1952년 7월에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나세르는 혁명 4주년을 맞이하여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는 수에즈운하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를 박탈한 것이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을 부추겨 수에즈운하를 탈환하려고 계획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운하로 진격했다. 다음날 영국과 프랑스군대가 운하 입구의 도시 포트사이드를 공격했다.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이집트는 영토의 일부를 잃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미국이 막대한 경제원조를 중동에 제공하면서 그 공백을 메웠다. 나세르는 전쟁에 지고서도 아랍의 영웅이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은 1967년 6월 5일에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6일간의 전쟁에서 아랍연맹은 또다시 참패했고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완전히 빼앗겼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 참패를 설욕하고 시나이 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걸고 1973년 10월 6일 수에즈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제4차 중동전쟁). 그는 자기 군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아랍 민중의 정치적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이다. 사다트는 3주간에 걸친 이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네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의 과정에서도 보았듯이 이들 전쟁의 성격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된다.


<b>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발전</b>

초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은 이스라엘의 점령하에서 게릴라에 의한 반이스라엘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주민들에 의한 봉기라기보다는 점령지 밖에서 진행된 해방투쟁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그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1964년 창설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였다.
PLO는 처음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전체를 영향권 하에 두기 위하여 창설을 제안하여 실현되었다. 그러나 당시 무장 투쟁을 조직적으로 주도해 오던 양대 흐름이었던 아라파트가 이끄는 '파타하'나 하바쉬가 이끄는 '아랍 민족주의운동'은 모두 이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였다.
시리아와 알제리로부터 지원을 받은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준비해 나갔다. 아라파트는 파타하 내에 '아쉬파'라는 무장특공대를 결성하여 1961년부터 대 이스라엘 공격작전을 개시하여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무려 70여회에 달하는 기습작전을 통해 이스라엘의 군사, 교통, 농업부문의 주요시설을 파괴하였다.

특히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아랍 전역에 굴욕감이 팽배해 있던 1968년 3월 파타하 소속 450여명의 무장 병력이 전차부대로 무장한 1만 5천여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군의 요르단강 서안 공격을 물리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심어주었으며, 아울러 게릴라 투쟁의 유효성을 입증해 주었다. 한편,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파타하는 PLO 내에서 핵심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며, 동시에 아라파트의 지도력도 크게 부상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1969년 제5차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PNC)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아랍 민족주의 운동에 의존해 온 기존의 노선을 폐기하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무장 투쟁에 의거한 운동노선을 채택하였으며, 파타하, 사이카(시리아가 지원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ELP(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등을 망라한 해방기구들이 참여한 가운데 새로이 PLO의 조직구성을 완결짓고 아라파트를 그 의장직에 선출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들은 단일한 해방투쟁조직을 구축하고 아랍 각지에 흩어져 있던 민족해방운동의 역량을 PLO에 결집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의장에 취임함으로써 질적 전환을 이룬 PLO는 세계의 주요한 해방운동의 하나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면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중동정치에서의 비중을 증대시켜 왔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팔레스타인 투쟁조직의 지도부로 등장한 PLO는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병행하면서, 아랍국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권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를 순조롭게 발전시켜 UN 분할결의 당시와는 정반대의 강력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1973년 2월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PLO는 팔레스타인 인민의 유일한 헌법적 대표로 인정받았으며, 다음해 10월 모로코에서 개최된 5차 아랍정상회담에서는 이것을 재확인하고, 요르단은 자국의 주권이 요르단강 서안에는 미치지 않음을 공식 발표하였다. 같은 해 8월 UN 총회는 이스라엘 건국 후 최초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상정, 아라파트를 총회에 초청하였다. 여기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에게 평화적이고 인종차별 없는 평화적 공존을 제창하고 민주적인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을 제안한다. 이 총회는 팔레스타인 인민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는 UN 분할결의 이후, UN이 팔레스타인 인민의 민족자결권을 무시해 온 잘못을 인정한 최초의 일이다.


<b>평화의 노력과 남아 있는 쟁점들</b>

43년에 걸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당사자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만나는 중동평화회의가 1991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개최되었다. 3일간의 전체회의에서 12월과 1992년 1월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측 당사자와의 사이에 개별교섭을 행하게 되어 중동분쟁사상 처음으로 직접교섭에 의한 문제해결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회의에서 양측은 '팔레스타인 잠정자치'와 '평화와 영토의 교환(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놓고 원칙론을 서로 고집했다. 전체회의는 쌍방의 주장만 계속 주장하다가 끝나 실질적인 합의는 아무 것도 없이 폐막되었지만 평화교섭을 앞으로도 계속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국가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이것이 최대성과가 되었다. 그 의미에서 이 회의는 '유대와 아랍'에 역사적인 화해를 재촉하는 동기를 불러 일으킨 것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93년 6월, 이스라엘 총선거의 결과로 타카派의 리쿠드 정권을 대신하여 온건파인 노동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새로 수상이 된 라빈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조속히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1993년 9월 13일 미국 백악관에서 역사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수십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중동평화의 새 장을 열었다.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총리와 마무드 아바스 PLO집행위원은 이날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 등 3천여명의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① 상호실체의 인정 ②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시와 가자기구의 팔레스타인자치에 관하 원칙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평화선언문에 서명했다.
'가자·예리코 협정'으로 불리는 이 협정은 가자지구와 예리코시 주둔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1993년 12월 13일 개시해 1994년 4월 13일까지 완료하고 1994년 7월 13일까지 점령지 주민투표를 거쳐 5년 시한부의 팔레스타인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또 1996년 4월부터는 점령지역과 예루살렘의 최종지위문제에 관한 협상을 개시토록 돼 있다. 이 협정은 걸프전 직후인 1991년 10월 31일부터 4일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제1차 평화회담을 연 이래 11차회의를 거듭하는 진통끝에 마련됐다. 그러나 이 협정은 2개 지역에 국한된 제한된 자치라는 점과 이스라엘철군 규정의 모호성 등 때문에 이스라엘의 외교적 승리이며 소련해체와 걸프전 이후 수세에 처한 아라파트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1948년 이후 사실상 교전상태를 유지해온 요르단과 이스라엘도 워싱턴 평화협정체결 당일인 1993년 9월 13일 美국무부에서 평화협상개최합의안에 서명한데 이어 11월초 후세인 요르단국왕과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외무장관이 경제협력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평화조약의 대강을 논의했다. 이에 대해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가져올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이 아닌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한 안정적 '봉합'의 일정한 형태를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라파트는 "이 협정으로 한 세기나 계속된 고난과 괴로움이 끝나기를 진정으로 갈망하며 평화와 공존의 시대, 모두가 같은 권리를 누리는 새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치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는 철수를 시작했고 해방기구는 경찰병력을 만들어 치안을 넘겨 받았다. 이스라엘은 감옥문을 열어 팔레스타인 정치범을 풀어주었고 수만 명에 이르는 추방당한 사람들이 고행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과도정부로 변신했고 이 협정을 두손 들어 환영한 서방 선진국 정부들은 앞다투어 팔레스타인 재건을 돕기 위해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주변 모든 아랍국가와 평화회담을 맺어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왔다거나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이 땅에 얽힌 문제가 너무나 복잡한 데다 그 동안 치른 희생이 너무나 컸고, 쌓인 원한이 너무나 깊은 탓일 것이다.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은 이스라엘의 과격 시온주의 세력과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상대방과 함께 사는 것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치협정을 비난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아라파트를 암살하겠다고 공공연한 협박까지 나타났다. 상존하는 폭력의 문제는 이스라엘 내부에도 있었다.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민병대를 만든 유태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며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는데, 1994년 2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헤브론 이슬람 사원 총격사건이 그 본보기이다.


<b>다시 위기로 내몰린 팔레스타인</b>

최근 3년간 중동은 다시금 '위기의 시절'로 회귀하였다. 거리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유혈충돌이 벌어지고 있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강경 입장을 취하여 최초의 국민투표에 의해 이스라엘의 새총리가 당선된 것이다. 또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현재 옛날의 게릴라식 생활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시 소형 기관단총을 차고 다니며 날마다 잠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이스라엘과의 유혈분쟁이 발생한 이후 평화협상의 결렬과 산발하는 유혈분쟁은, 그를 다시 게릴라식 생활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지난달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요르단강 서안에 갔을 때는 신변위협을 줄이기 위해 비밀리에 요르단 군용헬기로 갈아타고 라말라에 들어갔다. 이달초 팔레스타인 운전사의 버스 공격으로 이스라엘인 8명이 사망하자 서둘러 터키 방문일정을 만들어 외국에 나갔다는 후문이다. 아라파트는 무장 독립투쟁을 펼치던 게릴라 지도자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변신한 그가 다시 게릴라식 생활로 돌아간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이 결렬되고 유혈분쟁이 발생하면서 아라파트의 고난도 다시 시작됐다. 이스라엘과의 유혈분쟁은 아라파트 수반의 입지를 여러모로 약화시켰고, 그가 이끄는 파타하 정파는 분열된 반면,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 무장 저항단체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라파트 수반이 과연 팔레스타인의 폭력 사태를 제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분석이 늘고 있다.
제약요인들이 산재하다. 지난 이라크 폭격에서 보여지듯, 미국의 중동정책은 다시금 강경노선으로 회귀한 듯하다. 따라서 클린턴 정부처럼 적극적인 개입을 아직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고, 아랍의 각국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기 급급하다. 오히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의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은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제약요인들은 다시금 팔레스타인을 '위기'로 내몰고 있다. 평화협상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리'가 거부하는 이유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들은 정치적 야합에 의한 문제의 해결을 바라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직도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팔레스타인人의 문제이다.'

<다음 달에 계속>


<font color="##003366">연재순서
(2) 중동의 혁명: 이집트, 리비아, 이란 혁명을 중심으로
(3) 걸프전쟁과 이라크
(4) 중동경제와 석유
(5) 기타</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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