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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8.7-8.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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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의 쟁점들

촛불시위를 어떻게 볼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이상훈 | 회원
이명박 정권은 끝내 쇠고기 고시를 강행하고 강경진압을 선택했다. 두 달여 간 청와대를 에워싼 명박산성은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의 대표가 아니다.”라는 이명박의 선언이고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위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대표는 누구란 말인가. 민주주의의 위기는 곧 정치의 위기이며, 인민주권의 위기인 것이다.
과연 촛불은 무엇이며, 뒤늦게 촛불로 들어가 함께 달려온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숨 막히는 보수압승의 대선-총선 결과를 놓고 조직된 수많은 좌파세력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얼어붙어 있을 때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올라 타오른 촛불의 의미는 무엇인지.가 바로 우리의 첫 번째 고민이라면,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원초적인 당혹감이 두 번째 고민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촛불의 본질에 대해, 이것을 이해하는 상반된 두 방식으로 이야기되는 대중의 양면성과 역동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두 방식을 종합하는 방향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지 고민해보았다. 또한 통상 대의제 민주주의, 정당정치, 조직운동의 위기와 무력감이라고 진단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기본진단으로부터 촛불을 확대하고 이어가기 위한 ‘조직과 대안’, 즉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념, 조직, 운동의 재건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촛불시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중의 양면성과 역동성에 대하여

대중은 12월 대선에서 이명박에게 ‘묻지마 지지’를 보내고, 4월 총선에서 뉴타운개발을 선택하더니, 5-6월에는 성난 촛불로 돌변하여 광화문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촛불은 무엇인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한 가지 설명방식은 대중의 양면성 혹은 이중성을 중심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대중의 양면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촛불의 정념적(감정적) 성격과 그 한계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이라면, 뒤의 방식은 대중의 앞선 행동에 뒤처져버린 운동조직들에 대한 비판에 무게를 둔다. 그러나 대중의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조반유리(造反有理)는 좌파의 대원칙이다. 더군다나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미 촛불은 정세의 중심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대중의 모든 변덕을 합리화하고 좇을 일은 아닐 것이다. 대중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것이냐 낮을 점수를 줄 것이냐를 다투는 것은 난센스다. 모든 운동은 대중의 이해와 요구로부터 행해져야 하고, 대중은 언제나 양면적이면서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과제는 대중이 처한 모순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실천적으로 극복해가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촛불의 문제는 그 모순이 무엇인가에 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광우병이라는 이슈 자체는 다분히 정념적이고 감정적인 이슈라는 점이다. 그것은 주로 식품안전이나 검역주권의 쟁점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분히 감정적인 차원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은 광우병사태 초기에, 촛불의 문제제기를 주로 홍보부족으로 인한 국민이해부족, 혹은 왜곡과장보도로 인한 해프닝으로 호도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불타오른 대중의 분노는 단지 광우병 공포라는 인터넷 괴담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대중의 분노는 생명안전이라는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한 유일 방책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인민주권에 대한 요구라는 측면에서 이성적이고 정당한 요구와 결합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은 더 이상 괴담이나 비과학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 시기 촛불을 치켜든 대중의 첫 번째 모순이다. 또한 광우병사태 초기, 촛불을 치켜든 대중들은 많은 부분에서 ‘이슈 몹(issue mob)’의 외양을 띠었다. 주로 인터넷상의 제안을 통해, 특정 이슈를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형태의 시위(캠페인)를 벌이는 불특정 군중을 ‘이슈 몹’이라고 한다. 여기서 몹은 다양한 계층의 불특정 군중을 뜻하는 것으로, 직역하자면 ‘이슈군중’ 쯤 된다. 즉 이슈몹은 주로 TV나 인터넷여론에서 제기되는 이슈를 중심으로 번개 형태의 집회를 한다. 예컨대 “몇 월 몇 날 몇 시에 무슨 집회를 하자”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어떤 이념이나 조직적 기반에 근거하지 않을뿐더러, 이념과 조직을 터부시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는 미디어 정치의 주요한 한 단면인데, 미디어정치가 제기하는 이슈는 항상 뉴스미디어가 요구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는 당연히 어떤 연속성이나 일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이들이 다루는 이슈는 논리적 역사적 학습을 중시하기보다는 모든 문제를 호불호의 문제로 단순화하고, 감정적인 선정성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구조적 문제도 특정 개인의 스캔들로 뒤바꾸어 놓는 특성을 가진다. 4월 29일 PD수첩과 인터넷 광우병 괴담으로 촉발된 초기 광우병 집회는 이러한 이슈몹의 양상을 많이 닮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5월의 촛불집회는 분명 “미친소, 너나 먹어라!”는 식의 광우병 공포와 괴담 이슈를 동반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출발로부터 민주주의와 인민주권에 대한 보편적 요구와 함께 했다. 더욱이 5월 중순 이후로 대중들은 보다 급진적인 직접행동, 일찍이 보지 못했던 창발적이고 진정성 있는 대중거리시위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에 등장한 촛불시위대중은 독도문제나 황우석 사태, 디워 논쟁에서 드러난 전형적인 이슈몹과는 다르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제 두 번째 문제를 보자. 촛불이 대두되기 불과 한 달 전에 치러진 총선에서 투표율은 50%에 미달했으며 투표를 한 이들의 다수는 이명박과 뉴타운을 선택했다. 이것은 분명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변덕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대중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전혀 다른 분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광우병 촛불은 시종일관 경제적 사회적 생존권에 대한 반민주적 위협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라는 대의를 공공연하게 제기해 오고 있다. 즉 자신의 생활과 경제를 망쳤다고 여겨진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발심이 이명박에 대한 ‘묻지마 지지’로 이어진 일이나, 쇠고기 파동을 계기로 이명박의 오만과 독선을 심판하기 위해 촛불을 든 것은 동일한 원인의 결과라는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반발과 이명박 심판의 촛불은 동일하게 신자유주의정책의 광범위한 피해대중의 선택이고, 이는 이념적으로 모순되고 표면적으로 상반되지만 민주주의와 생존권이라는 일관된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표현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피해대중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2004년 탄핵반대 촛불과 2008년의 촛불은 구별된다.)
이것이 촛불을 든 대중의 두 번째 모순이다. 특히 이러한 대중의 태도의 이면에는 작금의 현실을 적합하게 설명하거나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효과적으로 대변하지 못하는 이념과 정치에 대한 거부가 존재한다. 실제로 이번 촛불집회에서 정당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만큼이나 대중들은 전통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였다. (지도하고 대표하려는 것과 가르치려는 것에 대한 거부.) 그러나 이러한 반응을 대중이 단순히 반정치-반지성적 정념에 빠졌다고 단정 짓고 말아버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대중들은 더 이상 현실을 적합하게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무력한 낡은 이념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념과 지성을 거부한다기보다는 새로운 이념과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라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이명박과 노무현을 우파와 좌파로 나누는 기존의 이념에 따라 대중은 우파도 좌파도 싫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은 자신의 이해와 요구가 위협받는 시점에 이르러 어느 이념가나 급진조직보다 앞서서 급진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하지만, 그러한 저항의 시작과 끝을 하나의 과정으로 통일되게 인식하지 않고 자신의 조건과 이해관계의 틀 내에서 머무른다. 그런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계급적 단결과 연대로 나아가는 (혹은 그에 미달하는) 과정이야말로 대중정치주체의 형성(과 해체)이요, 노동자계급의 재형성(과 해체) 과정인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념과 조직, 운동의 재건이다

이번 촛불시위에 대한 중간평가와 대안을 토론하는 중에 가장 빈번하고 핵심적으로 제기되는 쟁점들은 ‘중심 없는 강력함’, ‘조직 없는 자발적 시민행동’, ‘(지식인이나 정당 지도의) 권위적 구조 없는 자발적 인터넷 토론과 참여’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쟁점에 관한 토론은 어김없이 ‘어떤 대안과 조직을 남길 것이냐’는 실천적 과제에 대한 토론으로 모아진다.
실제로 이번 촛불시위는 인터넷 토론카페에서 활동 중인 고등학생들의 자발적인 제안과 참여로 촉발되었다. 더구나 5월 24일 첫 거리진출 이후 등장한 ‘야간 밤샘 거리시위’라는 완강한 투쟁양식 역시 대책위나 조직된 어떤 급진정파의 뜻과도 무관한 대중의 자발적 의지와 역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첫 거리진출이 이루어진 5월 24일 당일은 물론 그 후 며칠 동안 시위대오 내에서는 이후 일정을 고려하여 새벽녘에 접어든 시위를 마무리 지을 것을 제안하는 조직대오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장면들이 속출하였다. 항의의 내용은 주로 “갈 사람은 가고, 이래라저래라 말라.”는 것이었다. ‘밤샘거리시위’ 양상은 그러한 논란의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 또 5월말 시위 중에는 종종 깃발 없이 개별적으로 참여한 시민과 학생들이 전경과의 최선두 몸싸움전선을 도맡는 반면, 뒤늦게 참여하기 시작한 조직대오들은 2선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6월 중순 이후로는 조직대오들의 역할이 현저히 증가한다.) 조직단체대오의 당혹감은 대책위 소속의 온건한 시민단체들이나 몇몇 급진적인 좌파정치단체들이나 매한가지였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의 당혹감인데 아침 해가 뜨는 시점까지 해산하지 않고 대오의 숫자가 줄지 않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경찰은 마구잡이로 거리의 시민들 모두를 연행하지 않을 바에야 누가 시위대 대표인지 누구와 어떻게 협의하거나 누구를 선별 타격해야할지 도통 알 수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야말로 난감한 지경을 맛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는 2002년 촛불 시위 때 논란이 되었던 ‘깃발논쟁’과는 또 다른 형태의 ‘다함께’ 논쟁이나 역시 2002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 비폭력 논쟁 등을 경험하였다. (특히 2008년 촛불의 진화된 비폭력논쟁은 단순한 반운동권 정서에 가까운 폭력시위 반대라기보다는 보다 복잡하고 유연한 대중적 전술토론의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여하튼 위에 열거된 복잡다단하고 흥미로운 촛불시위 양상의 구체적인 경험들에 대한 자세한 평가와 분석은 다른 기회로 넘기고, 그러저러한 경험을 통해 내려진 대체적인 결론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촛불은 쇠고기 재협상이라는 문제로 시작했으나 그것이 단지 쇠고기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인민주권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했고, 신자유주의 5개 의제로 쟁점을 확대했으며, 모든 요구과제들을 이명박 퇴진이라는 정치적 요구로 집약하는 것에 대한 합의를 높여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들 속에서 무언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의 새로운 운동양식과 주체들이 등장했는데, 기존의 운동들은 그에 뒤처지거나 그러한 새로운 요소들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구조를 지닌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대중들의 요구를 받아 안을 뚜렷한 정치적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비조직 대중들의 행동과 사고들은 매우 무정부(주의)적인 양상과 흐름으로 표출되곤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대안적인 조직, 혹은 통합적 전략과 전술에 대한 요구와 토론이 빈번해지고 있다. 특히 쇠고기 고시 이후 이명박 퇴진운동이 실질화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이러한 토론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다.
이런 저런 토론과 고민들의 결론은 매우 단순한 듯이 보인다. 새로운 정치주체를 형성하는 것, 나아가 대안적 민주주의(어떤 정치적 조직 혹은 민주제도)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고, 어떻게 그러한 과제를 이룰 것이냐와 관련된 쟁점은 복잡하다. 87년 6월 항쟁의 고민은 직선제쟁취라는 중심요구를 경계로 하여, 보수야당(신자유주의 야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던가, 그들과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하자는 양단간의 정치적 결론으로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터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대안으로 그 성과들이 수렴되었다. 하지만 2008년 촛불항쟁의 고민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지 여전히 모호하다. 쇠고기 재협상이 중심요구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을 중심에 놓고 어떤 정치적 조직적 대안을 모색하기란 곤란한 일이다. 대중의 인민주권적 자각과 결합된 이명박 정권퇴진 요구가 넓은 동의를 얻고 있지만, 이 또한 진정성 있는 실행전략이냐는 면과 현실적인 정치적 대안 면에서는 여전히 모호한 내용과 위치에 놓여있다. 또 그렇다고 미선효순 촛불과 달리 이번 촛불의 성과를 손쉽게 민주당이 찬탈해갈 수 있을 듯이 보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민주당의 지지율은 촛불시위 내내 답보중이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열, 전국민중연대 해산과 한국진보연대의 정파조직화라는 상황이 현실적으로 매우 아쉽고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분열이 없었다는 가정을 해보더라도, 촛불국면에서 드러난 민중운동진영의 취약한 대응력이 결정적이고 근본적으로 달랐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지지율 역시 그리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1)
결국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의 대안이란 (너무나 당연해 보이고 별다른 방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실질적이고 전진적인 방향의 연대망들을 복구하는 것에서부터 실천적인 해법을 찾아 나아가는 길뿐이다. 그러나 이번 시위과정에서 엄연하게 확인된 바, 공동의 경험을 통해 실천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어떤 선험적 조직화도 대중적으로는 큰 의미 없는 무망한 시도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그저 그런 (무슨 좌파, 무슨 연대 이름을 내건 낯선) 단체깃발 하나가 더 늘어나는 의미 이상은 없다. 이미 현실적합성을 잃고 교조화된 관념에 의해 끼워 맞추어진 정치슬로건을 내거는 것만으로 대오의 주목을 받고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순진한 태도다. 정치슬로건은 보다 명확한 투쟁목표와 투쟁형태, 조직형태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현재 국면이 대립되는 투쟁목표를 지닌 세력들 간의 슬로건 논쟁이 정치적 국면을 가름하는 관건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중적으로 제안되고 토론되지 못한 채 외삽되는 구호를 가공하는 데 지나치게 골몰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컨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국민발의/소환제의 도입 요구는 인민주권적 요구와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제도화시키는 주요한 고리로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국민발의/소환제는 개헌사안이라는 점에서 현 국면을 전면적인 개헌정국으로 확대시켜내지 못하는 한 현실적인 투쟁요구가 되기는 어렵다.2) 그렇기 때문에 국민발의/소환제라는 제도도입 요구는 이명박정권 퇴진 운동의 확대발전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역으로 국민발의/소환제 요구가 작금의 투쟁을 돌파하고 확대시키는 무기가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한편 현재 범야권 정당 다수는 거리의 투쟁을 국회 내의 원내 일정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특히 원내로 들어갈 수도 장외 투쟁에서 유의미한 활동을 할 수도 없는 민주당은 무기력에 빠져있다. 민주당은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민주당 일각은 가축전염예방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하기도 했다. 또 진보신당에서 5월 말 ‘이명박의 신임과 연계된 쇠고기 재협상 국민투표’안을 제안했다.
이명박의 재신임과 연계한 국민투표 요구가 이명박정권 퇴진의 요구를 실제로 현실화시킬 구체적 방책일 수 있을까. 재협상요구 지지율이 80% 가까이에 이르고, 이명박에 대한 지지도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은 국민투표요구를 공세적인 요구로 만들어주는 요인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렇게 객관적 여론이 유리한 국면에서 그것의 실시여부는 물론 실시방식의 결정권이 이명박에게 있는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는 의문이다. 더욱이 만에 하나 이명박이 국민투표를 수용한다면 선거법의 제약으로 촛불시위가 전면 중단될 것이다. 현재의 촛불국면이 정부와 정당이 주도하는 국민투표 정국으로 반전된다. 이명박에게는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몇 개월의 시간이 주어지고 촛불은 자기요구에 따라 스스로 금지되고 해산되어야 한다.3) 국민투표가 이명박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재협상과 퇴진 요구와 다를 바 없지만, 실제로 재협상-신임 투표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촛불을 끄고 저들에게 유리한 경기장을 내주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는 ‘쥐박이 OUT!’으로 표현되는 이명박의 지지율 급락과 정치적 위기를 실제적인 지배계급 전반의 분열과 체제위기로 발전시켜내는 것이다. 그리고 현 시기 그러한 목표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집약하는 것은 “이명박 정권 퇴진”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목표와 슬로건이 여전히 현실적으로 모호하며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조직적 대안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가장 시급하고 주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촛불의 완강한 저항과 보다 창발적이고 다양한 투쟁 형태들의 지속적 시도 속에서 실천적 연대를 복구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제는 크게 볼 때 첫째, 시민단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광우병대책위를 조직적, 내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둘째, 화물파업과 7월 파업을 기점으로 뒤늦게 촛불에 결합하기 시작한 노동자 대중운동과의 실질적 결합을 조직해내는 일이다. 사유화반대, 비정규직투쟁대오들의 결합을 강화하고 대정권 투쟁연대의 차원에서 재조직해내는 것이 그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셋째, 무엇보다도 어떻게든 청와대를 향한 힘 있는 행진을 통해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끈질긴 의지를 이어가고자 하는 시위군중의 실천적 고민을 집약하고 일 진전 시키는데 실천적으로 기여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위한 조직적 모색을 지속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민주주의와 인민주권을 외치는 시위군중과 명박산성을 포위 압박하는 야간거리시위의 한복판에서 대중으로부터 배우고 끊임없이 자신의 조직과 이념을 재형성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자발적인 대중운동 자체는 파도처럼 일어나 거품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다. 촛불 또한 언젠가는 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은 다른 무엇보다도 촛불(거리시위)이다. 현재로서는 얼마나 더 완강한 저항으로 버틸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협상이나 이명박 퇴진보다도 촛불이 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촛불만이 해체되어 버린 연대를 복구하고 재형성하는 토대이고, 대중 조직과 이념을 재건해낼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념과 조직의 부재라는 현실로부터 이러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내하고 그로부터 전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건 이미 촛불은 역사적으로 지울 수 없는 대사건이고, 어떤 식으로든 이후 정세는 촛불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은 광화문 촛불시위에서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정권은 강경진압으로 선회했지만 그것은 이명박의 헤게모니적 통치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명박정권은 이후로 오랫동안 촛불로 받은 타격을 온전히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4) 이명박의 탄압은 혹독하고 강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통치력이 그만큼 좁은 운신 폭에 갇혀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고유가와 고물가에 경기침체의 풍랑을 겪고 있는 미국의 압력이 이명박을 옭죄는 첫 번째 제약일 것이고, 실패한 노무현-NGO 거버넌스(협치)를 대체할 새로운 거버넌스 파트너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두 번째 제약일 것이다.5) 물론 그는 그런 식의 대책을 세울 의사 자체가 없어 보인다. 애초에 이명박의 뇌리에 촛불을 체제내화하려는 구상 같은 것의 자리조차 없는 듯하다. 그는 한손으로는 폭력으로 촛불을 누르고, 한편으로는 “100g에 900원짜리 쇠고기를 안 사먹고 배길 것이냐”는 식으로 시간을 끌고 뭉개자는 태도다. 하지만 이제 국민들의 분노의 대상은 쇠고기나 광우병 자체가 아니다. 그는 일생동안 일단 일은 일대로 저질러놓고, 반발은 무시하고, 사후에 실적으로 반전을 노린다는 배짱으로 일관했다. 현 정세는 모두가 이런 통치자의 모습에 놀라고 질려버린 형국인 것이다.
그런 마당에 (미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명박이 뒤늦게 재협상을 택하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만에 하나 그가 다시 한 번 더 재협상에 준하는 어떤 기만책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분노한 민심을 속 시원히 수습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났다. 이것이 물대포와 곤봉으로 무장했지만, ‘제2의 6.29’는커녕 식물정권의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운 이명박의 딜레마다. 이명박의 탄압에 맞서, 촛불의 행진을 하루라도 더 버티고, 한발이라도 더 디뎌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기회에 현실적으로 당장 이명박을 퇴진시킬 수 있겠느냐, 촛불의 제도적 현실적 대안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다. 이명박을 옭아매고 있는 국내외적 제약과 딜레마들이 이후 어느 정도 수준에서 지배계급 내 분열과 체제균열로 확장될 것이냐 여부는 물대포 앞에 흔들리고 있는 촛불이 앞으로 얼마나 더 완강하게 버틸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1) 민주노동당은 이번 촛불시위 과정에서 유일하게 촛불연단에 오를 수 있는 강기갑 의원을 전면에 내세우고, 독자적인 의원단 당직자 청와대앞 시위농성을 전개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적극적인 활약상에 비해) 당 지지율이 크게 높아지거나, 촛불 거리시위 과정에서 대중적 지지 양상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촛불 초기대응에 고전했던 진보신당은, ‘칼라TV’라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입경로를 개발함으로써, 전통적인 정치정당의 모습과 달리 촛불시위에 일주체로 참여하고 봉사하는 정당의 다른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어필했다. 또 한편으로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전의원의 전통적인 정당 지도자로서의 역할 역시 촛불시위에서는 크게 돋보이지 않았다. 본문으로

2) 다만 이 사안은 올해 말 내년 초경에 현실일정으로 예상되는 개헌논의에 개입하기 위한 유력한 과제중의 하나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과 보수 세력이 이미 단독개헌처리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헌논의 전반에 대한 정치적 방침을 어떻게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가 우선 고려되어야만 할 것임은 물론이다.본문으로

3) 2004년 2월 부안은 자치적인 주민투표로 원자력 폐기장 선정을 무력화했다. 하지만 자치적인 주민투표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6개월 이상 주민들의 치지한 투쟁과 압도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부안은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투쟁의 정당성을 전국적으로 확보하고, 이미 지역 내에서는 압도적이었던 반대 운동의 최종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방책으로 주민투표를 택했다. 그러나 정부는 부안에서의 실패 이후 주민투표를 역으로 이용해 경제적인 급부를 약속하고 지역 간 경쟁을 유도했다. 결국 2005년 11월 경주, 군산, 영덕, 포항에서 진행된 원자력 폐기장 선정 주민투표에서 경주가 압도적인 주민들의 찬성으로 원자력 폐기장 유치를 결정했다. 정부가 주도한 주민투표 와중에 선거법의 제약으로 인해 원자력 폐기장 반대 세력은 실질적인 운동 및 여론 조직화에 완전히 실패했다. 이로써 1986년 영덕 이후 약 20년 간 실패를 거듭했던 원자력 폐기장 건설 시도는 정부의 완승으로 끝났다. (2003년 부안 이전에도 1986년 영덕, 1990년 안면도, 1994년 굴업도에서 강력한 주민투쟁으로 정부의 선정을 취소시켰다.) 2005년의 주민투표를 통한 원자력 폐기장의 경주 유치 결정은 한국 환경운동과 반핵운동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본문으로

4)이명박이 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국면전환용 카드는 개헌논의다. 실제로 4월 총선의 결과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은 국회 내 개헌의결선을 확보하고 있다. 물론 현재와 같은 정세에서 개헌논의는 현직 대통령의 권력누수를 재촉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근혜나 정몽준과 같은 한나라당내 차기 주자들과의 정치적 타협에 기초한 재편전략이 아니라면, 이명박에게는 촛불에게 받은 타격을 회복할 수 있는 별다른 방책이 없다. 문제는 개헌과 관련된 논의는 단순한 국면전환용 카드로 사용하기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폭과 수위의 논란으로 비화될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총선결과 한나라당이 개헌의석을 확보하자마자, 재계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일찌감치 119조 2항 사회적 시장경제 조항 삭제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급속한 북미관계 개선과 관련하여 통일관련 조항들의 개정 등에 관한 이야기가 활발히 오고가고 있다. 결국 촛불이 어느 시점까지 버티고, 어떤 형태와 성과로 마무리 되느냐의 문제는 올해 말 내년 초로 예정된 개헌정국의 향방을 결정짓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5)보수연합, 혹은 새로운 거버넌스 구축과 관련하여 부연하자면, 이명박은 6월에 심대평을 총리로 하는 자유선진당과의 연합을 추진한 바 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자유선진당의 현재 규모로는 만족할만한 정치적 효과를 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뉴라이트 전국연합등과 같은 극우보수단체들과의 협력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들의 시대착오적인 행태는 지나치게 비이성적인 양상을 띠기 때문에 이들과의 연합은 촛불시위를 훼방질하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나, 현실집권세력이 거버넌스의 파트너로 삼기에는 부적절하기 이를 데 없다. 이들 극우세력의 좌장격인 조갑제는 최근에 “미국경찰이라면 벌써 총을 쏘았을 것”이라는 둥 “맞서 싸울 의지가 없다면, 이명박은 하야하라!”는 둥의 망언을 일삼고 있다. 더욱이 북한의 냉각탑 폭파이후 북미관계가 급속히 화해모드로 돌입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인공기를 불태우며 폭력적인 반북친미주의로 일관하는 이들의 행태는 대중적인 설득력과 친화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결국 이명박이 기댈 곳이라고는 한나라당내 소수파 그룹인 박근혜계와의 협력뿐인데, 이는 거버먼트(정부에 의한 통치)의 합리화 효율화의 전략이지 효과적인 위기관리 대응체제로서의 거버넌스(정부-NGO 협치)가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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