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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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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불평등의 주범이 "평준화"라고?

손지희 | 편집위원, 진보교육연구소 교육이론실장
<b><교육의 형평성과 과외에 관한 실증 연구(KDI 연구보고서)> 비판</b>

지난 4월 2일 KDI(한국개발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가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TV뉴스를 통해 꽤 비중있게 다루어졌다. 보도내용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KDI 국제정책대학원 이주호 교수팀이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의 용역(하청?)을 받아 실시한 것으로, 제목은 "교육의 형평성과 과외에 관한 실증분석"이다.
제목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충분했다. 필자 역시, 보고서 관련 언론 보도내용에 촉각이 곤두섰다. 'KEDI(한국교육개발원)가 아니라 KDI라고? 하긴 둘다 정부정책을 충실히 뒷받침하는 연구보고서 생산에 바쁘다는 점에서 거기서 거기지만….'

미심쩍은 마음은 들었어도, 일단 제목만으로는 상당히 쓸만한 내용을 - 심지어는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생각을 품기까지 했다. 이런 생각이 순진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몇 초 안 걸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그러면 그렇지. 니들이 달리 한국'개발'연구원이냐?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소개된 보고서 내용(특히, 결론)을 접하고 나서는 어이없다가 우려가 되기 시작했다. 이 보고서가 "교육의 형평성"이라는 '진보적' 주제와 연관지은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평준화'였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도 해보고, 공짜가 힘들다면 구입하리라는 맘까지 먹고 교보문고(KDI 보고서를 비교적 많이 취급)에 문의하기를 여러 차례. 그러나 보고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EBS에서 PD로 근무하는 사람의 말이 가관이었는데, "뉴스 팀에 알아보니, 자기들도 지금 구하려고 노력 중이라며, 만일 구하게 되면 그 쪽에도 알려달라더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이런 참! 없는 시간 쪼개어 좀더 정보를 수집해보니 '대박 터뜨린' 중앙일보 기자는 연구자와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연구자를 쑤셔서 공개되지도 않은 보고서에 대해 기사를 작성했다는 후문이었다. 그리고 연구팀 책임자는 보고서가 발표된 직후 외국에 나가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이 글은 일정 정도 한계를 갖는다. 데이터의 수집 및 분석의 신빙성과 타당성, 그리고 결론 도출논리 등, 보고서를 조목조목 따지자면 물건을 먼저 보는 것이 순서이지만, 껍데기조차 구경하기 어려웠다는 구차한 변명으로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한다.

사실, 보고서를 전부 공개하지 않고 살짝 보여주기만 했다는 것 자체도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보고서 내용이 언론에 소개된 내용과 설사 '딴판'이라 해도 이미 특정한 형태의 언론보도만으로도 이데올로기 효과는 발휘된다. 여러 가지 한계는 인정하지만, 보도된 내용만을 가지고 '감'에 기대어 분석을 하는 일이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전제를 미리 한다. 마이클 애플 교수의 말대로 "보수주의자의 학교에 대한 공격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잘 편곡된 관현악처럼 울려퍼지는 공격이 몇 년 이어지면 일반대중은 그 논리에 은근히 사로잡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에서도 학교(공교육)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언론의 공격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런 종류의 논리에 이미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평준화 논란'을 부추기는 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b>평준화→교육형평성 훼손???</b>

"교육의 형평성과 과외에 관한 실증 분석"이라는 보고서의 제목은 '과외'를 '형평성'의 측면, 즉 평등주의적 입장에서 분석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실증 분석"이라는 수식어는 분석결과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만든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요 공격대상은 형평성이 깨어진 교육현실과 그 근본원인이라기보다는, '평준화'이다. 보고서에서는 평준화 비판, 나아가 평준화 해체 주장을 위해 전자(교육 불평등 심화)를 동원하고 있다. 이는 모순적이다. 오히려 "교육기회 확대"와 "중학교 단계 입시경쟁 완화"를 평준화의 긍정적 성과로 꼽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평준화 비판은 무엇보다도 학력의 하향평준화에 집중되었고, 학교 선택권의 박탈, 사학의 자율성 침해 등이 평준화 반대의 주요 논지였다.

이는 주로 교육의 효율성에 기반한 반박논리로서 평준화 정책의 '지나친' 평등주의를 문제삼는다. 이런 측면에서 평등주의적 교육정책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수월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평준화 제도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주범이라는 논리전개는 매우 전향적으로 보인다. 이처럼 '형평성' 문제와 평준화를 연루시켜 비판하는 것은 기존의 평준화 관련 논의에서는 보기 어려운 새로운 주장이다.
언론은, "과외의 힘만 키워준 평준화 4반세기 - 강남학군 서울대 진학률 최고 타지역 10배"라는 매우 선동적인 제목을 뽑아 이 보고서를 소개했다. 강남학군의 서울대 진학률이 타지역에 비해 높다는 사실은 사실상 1990년대 중반 이후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최고 10배"라는 수사가 붙으면서 사람들은 "역시!"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최고의 교육문제 중 하나로 인식되는 "과외"문제와 직결시키면서 신뢰감을 갖게 된다.

"평준화로 학교교육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면서 과외비 지출이 많은 지역일수록 상위권 대학 진학률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중앙일보, 2001년 4월 2일)

"보고서는 이[과외비 지출 급팽창]와 관련, '평준화 정책이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을 줄이기 보다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과외 의존도를 높였고, 결국 학보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자녀의 학력성과 대학 진학성과가 결정되는 파행적 결과를 초래했다'고 밝혔다."(조선일보, 2001년 4월 2일)


보도사실을 근거로 KDI보고서의 논리를 압축하면,
평준화 --> 학교교육의 질 하락 --> 과외비 지출 확대
--> 진학률(특히 명문대진학률)의 지역간 격차 --> 교육불평등 심화

이다. 이를 보다 단순화하면 평준화로 인해 교육이 불평등해졌다는 것이고, 달리 말해 평준화는 사실상 교육불평등을 심화시킨 주범이나 다름없다는 논지이다. 물론 한국의 교육불평등 수준은 이미 심각한 정도에 이른 상태다.
지난 10년 간은 교육 불평등이 그전 수십 년 동안 보다 훨씬 더 심화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앞으로의 불평등 심화의 본격적 출발점이다. 이는 1990년대 들어 노골화되기 시작한 사회양극화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평준화 및 보충수업 폐지 등(깃털)을 가지고 교육불평등(몸통)을 전부 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매우 환원주의적이다. 시행된 평준화의 과오를 추궁하려면, "지금까지의 평준화 정책 가지고는 교육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교육불평등을 완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평등주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논리적으로 그리고 현실에 비추어서도 그다지 무리가 없다.
그러면 KDI보고서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무엇일까? 다음에서 KDI보고서가 "평준화 → 교육불평등 심화"라는 '새로운 가설'을 통해, 정작 하려던 얘기가 드러난다.

"KDI 우천식 박사는 "학급당 학생 수 감소 등을 위한 교육재정 투자확대와 자립형 사립고 도입, 선발 자율화 등 수월성·다양성 교육의 실시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여기에서, "학급당 학생 수 감소 등"은 너무 상투적이다. 이는 불평등의 적극적 극복책이라기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교육환경 개선과제여서 그냥 해본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 국민 누구나 교육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래서, KDI 연구팀 아니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의 본심은 "자립형 사립고 도입, 선발 자율화"라는 특정 정책의 추진력 얻기에 있다는 의혹이 자연스레 생긴다. 물론 자립형 사립고 도입은 몇 년 전부터 계속 추진준비가 물밑에서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평준화를 찬성하는 국민이 70%가 넘는 현재 상황에서 평준화 해체나 다름없는 정책을 추진하기에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부담이 따른다.

그래서 이 보고서는 특정 정책의 실증적,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저의(!)에서 출발한 "하청보고서"에 불과하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매우 선정적인 형태로 언론에서 다루어진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은 평준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될 지도 모른다고 보아야 한다. 평준화가 형평성을 훼손시켰다는 논지를 폄으로써, 기존의 평준화 찬성논리인 평등성 확대는 설 자리가 좁아져 버린다. 이는 정년단축을 추진하면서 노령교사 1명이 나가면 젊고 팔팔한 교사 2.8명을 쓸 수 있다며 여론만 호도하고, 교사 수는 늘리지 않은 꼼수와 다르지 않다.


<b>"뜨거운 감자" -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b>

새로운 방식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고등학교 평준화는 사실 시행초기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제도이다. 대다수의 국민은 평준화에 찬성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평준화 해체를 과제로 삼는다. 다음에서는 "뜨거운 감자" 취급을 받고 있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b>2-1. 평준화 정책 시행의 배경과 전개과정</b>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는 보다 정확히 말해 고교 "입시" 평준화 제도이다. 학교별 선발이 아니라 일정 지역 내 고교 진학자들은 지역 내 학교에 학군별로 배정(이른바 뺑뺑이)받는 식으로 학생선발이 이루어진다. 이는 배정되는 학생들의 학교간 학력차를 감소시킴으로써, 학교간의 격차(서열)를 줄이는 방식이다. 이는 곧 학교의 질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인 입학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평준화가 한정되었다는 뜻이다.

평준화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에는 서울 시내에도 일류고, 이류고, 하류고 등 학교간 서열이 매우 명확했으며, 지금 대학서열의 정점에 서울대가 서있듯이 경기고와 서울고는 당시 최대의 라이벌이자 일류고로 행세했었다. 비평준화 시절에 입학하신 '어르신'들은 평준화 실시 이후의 입학생들은 후배 취급도 안하고, 동문회도 저희들끼리 한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다룬 한 연구에서는, 평준화 시행의 중요한 배경요인 중 하나가 당시의 학교팽창 추이였다고 지적한다. 평준화 실시 전에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가 앞서 도입되었고, 이는 중학교 진학률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당시 중학교 교육은 종결교육이 아닌 상급학교(고등학교) 진학의 전단계로서 자리 잡아가는 단계였다. 중학교 인구의 팽창에 비해 규모가 작았던 당시 고등학교의 학생수용규모는 고등학교 진학단계에서 정체현상을 빚어냈다. 이에 따라 고등학교(특히 인문계) 진학을 위한 경쟁이 과열되었다. 결국, 고등학교 비평준화 시기에 학력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단계는 중학교→고등학교로의 진입에서였다.

이러한 치열한 고교 입시 경쟁에 따르는 부작용은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부각되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나이어린 학생들이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야 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고교간 서열은 공공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시절에는 '고3병'이 아닌 '중3병'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처럼 평준화가 도입되었던 시점은 후기 중등교육의 팽창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도 맞물린다.
게다가,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후 장기집권 국면에 돌입하였던 박정희 정권은 교육기회 확대를 일종의 정당성 확보 수단으로 간주했고, 이는 평등주의적 이념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평준화 정책 시행'으로 현실화되었다. 정권의 특정한 목적이 반영된 평준화 제도의 도입은 그 기본성격이 '평등주의적'이라고 볼 수는 있으나, 온전한 교육 평등의 측면에 비추어본다면 매우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선, 자본진영과 노동진영의 사민주의적 합의에 따라 이루어진 '자유주의적 교육개혁'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왜냐하면, 실업교육과 인문교육의 차별을 학제상으로나마 제한하는 '종합고등학교' 체제-단선형 학제-로의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당시의 인문계 선호경향은 실업학교의 위축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었고, 이는 당시의 산업계의 인력요구에 맞는 노동력을 생산해내기 위한 실업교육 육성에는 걸림돌이었다. 사실상 실업계와 인문계간의 교육적, 사회적 서열과 구분은 인문계 학교간의 서열 이상으로 평등주의에 반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정권은 교육기회 확대 요구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지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현재까지 서울에서 실시되고 있는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이다.

평준화 제도는 시행 초기부터 논란에 휩싸였는데, 주로 사학재단들이 평준화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주체였다. 이들은 사학의 자율성 위축과 운영상의 문제를 들어 평준화를 반대하였으나, 서열화된 구조 속에서는 비평준화로 인해 이익을 보는 학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평준화가 실시되기 시작한 이후 해당 지역의 사학들은 정부의 사학재정지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행 전과는 달라진 태도를 보인다. 왜냐하면 평준화 실시는 사학-학생의 선택에 의존해야 하는-이 안정적으로 학생을 확보할 수 있는-공납금 수입이 일정하게 유지된다-기반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학의 태도는 평준화에 대해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일류고와 하류고 사이에 명암이 교차했다.

고등학교 평준화 실시 이후 일류고를 향한 중학교 단계의 입시 경쟁은 상당히 완화되었고, 고등학교 진학률도 평준화를 기점으로 꾸준히 상승하여 1980년대 후반에는 고등학교 교육이 보편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학생 수, 및 학급 수는 평준화를 실시하면서 크게 늘어났으나 학교는 그다지 많이 증설하지 않았다. 이는 평준화가 학교간 시설·교원·학생의 평준화였지, 학교의 증설, 즉 교육환경의 전반적 개선까지 포함하는 정책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당시의 평준화 정책 시행은 교육기회 확대 요구에 대한 정권의 대응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주목하게 되는데,

첫째, 고등학교 평준화(더 정확하게는 고교 '입시' 평준화) 실시 이후 학력경쟁은 <중학교→고등학교> 단계에서 <고등학교 → 대학 단계>로 상향조정된 것에 불과하다. 이를 바꾸어 생각하면, 고등학교 평준화의 해체는 과거의 중학교 단계에서의 진학경쟁을 다시 유발하게 된다는 의미로 연결된다.

둘째, 고등학교 평준화의 실시 당시 교육기회의 양적 확대에만 치중했고, 중등교육팽창을 학급 증설이라든가 학급당 학생 수 확대 및 사학형태에 의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교육환경의 질은 제고되지 않았다.
즉, 평등주의적 성격을 띤 평준화 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화된 모습은 공공성의 확대 측면에는 매우 미미하게만 기여했을 뿐이고,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에 크게 의존하는 형태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평준화 정책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근원적 불평등 문제는 일단 차치한다 치더라도, 체제질서 내에서의 형평성조차 온전히 고려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평준화의 이런 점에 대해 KDI 보고서가 우리네의 평준화 제도를 비판하고 이에 대해 더 '화끈한 평준화'를 제시했다면 웬만큼 수긍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지는 이것과 전혀 다른 경로로 달려가고 있다. 현실에서의 평준화가 문제점과 한계투성이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KDI의 주장대로 평준화 정책 자체를 교육형평성 훼손의 주범으로 모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는 기존의 평준화 정책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불평등성을 보완하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지금보다도 더욱 후퇴시키는 방향으로의 선회를 의미한다. 실은 KDI보고서는 지금보다도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달려가자고 '청유'한다. 그것도 형평성을 내세워.


<b>2-2. 왜 고등학교 평준화 해체를 대안인 양 내세우는가?</b>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구 농촌지역과 학군이 혼재된 고양시는 최근 고등학교 입시를 평준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 고등학교 평준화를 해체한다고 해서 과외비나 입시경쟁으로 인한 학교교육 피폐화 등의 병폐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일산의 경우는 소위 초등학교에도 입학하기 전부터 학부모들의 사교육경쟁(특히, 최근에는 영어과외)이 시작되는 '교육열이 매우 높은' 곳이다. 그리고 특정 고등학교(일산의 B고에 들어가기 위해 중3학생은 고3보다 더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 곳이다. 고양 시민들 다수가 평준화에 찬성했다는 사실은, 비평준화가 결코 현재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일 수 없다는 점을 반증한다.

그리고 명문고 입학의 경쟁대열에조차 낄 수 없는 대다수 학생들에게 눈길을 돌리면, 부모의 지원을 철저히 받는 아이들의 입시경쟁고민은 사치스러울 정도다. 일류고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거의 슬럼화 되다시피 해버린 실업고나 하류인문고의 학생들은 그에 걸맞는 사회적 대접에 노출된다. 따라서 서열화 체제에서 다수의 학교는 평준화 상황보다 훨씬 더 열악한 조건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처럼 KDI보고서가 전면에 내세운 <평준화 →학교교육의 질 하락→과외비 상승> 논리는 현실과 들어맞지 않는, 다시 말해서 반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거짓명제일 뿐이다. 과외비 부담의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중산층 학부모들의 이해와 요구에 충실해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런 논의구조에서 아예 배제당하고 있는 절대다수 민중의 고충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부가 이들을 위해 그나마 취해온 정책은 '저소득층 자녀지원'이 전부다.

이 보고서가 유발할 지도 모르는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교육불평등의 근본원인을 거론하지 않은 채 평준화와 교육형평성 훼손을 곧바로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KDI가 밝힌 과외비 지출과 명문대 진학률과의 상관관계는 상당정도 진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들이 도출한 평준화 정책과 교육의 형평성 훼손과의 상관관계는 허구적 상관에 불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컨대, 계층간 불평등이 지역간 격차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과 이것이 사교육비 지출규모의 격차에까지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한국의 교육불평등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편 시도에서 비롯된 교육정책들과 사회구조조정으로 인한 빈부차 심화문제와 다른 문제가 아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는 평준화제도만 손보면 불평등이 해소될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보고서를 다룬 언론은 한술 더 떠서 사교육비 팽창의 책임을 '학교교육의 저열함'에 전가시키려 든다. 물론 한국교육개발원(KEDI)은 이에 대해 '적당한 실증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난해 11월 한국교육개발원의 과외실태 조사 결과 학부모들은 과외를 시키는 이유에 대해 '학교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70.6%), '학교에서 제대로 배울 수 없어서'(22.5%)라고 했다. 교육개발원 김흥주 연구원은 "공교육에 대한 불신·불안감이 과외 교습의 주된 이유"라고 말했다." (같은 기사)

이들은 이렇게 기사를 써버리면서, 사교육에 의존하는 근본이유가 '명문대 진학에 목매게 만드는 사회구조'(학력주의)나 학부모들의 불안감(경쟁심리)에서보다는 '학교교육의 질 하락'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물론 현재의 학교교육이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펼칠 생각은 없다. 다만 식을 줄 모르는 사교육 의존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는 점이다.


<b>2-3. 평준화 해체 → 과외비 지출 감소 → 교육형평성 고양 ! -???</b>

보고서가 시간적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해석하여 제시한 평준화와 교육 형평성 훼손간의 관계는, 갈수록 골이 깊어져온 사회계급간 경제적 격차를 빼놓고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허구적 상관'이다. 이미 지적했다시피 1990년대 중반이후 IMF 사태를 결정적 포인트로 하여 계층간 불평등은 급속히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계층간 불평등 현상은 서울에서는 지역(강남/강북)간 격차의 심화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보고서에서 주장하는 바대로 이것은 과외비 지출규모의 차이로 나타난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평준화 정책 가지고는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요인에 따른 학력격차의 문제를 해소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학교간의 효과가 비슷해짐으로써 새로운 불평등 요인을 추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아주 소극적인 수준에서 불평등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구실정도는 했다. 따라서 고교 입시 평준화를 지금 상태로 그대로 놔두는 건 KDI 말마따나 "교육의 형평성"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언급한대로, KDI 보고서는 현재까지의 평준화 제도만으로 극복되기 어려운 교육의 불평등문제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다. KDI 보고서가 주장하는 바는 "배경적 격차"+"학교간 격차"이다. 즉, 배경적 격차의 '재생산'을 '은폐'해주는 공교육의 소극적 구실("배경적 격차"+"0"(학교효과)에 성이 안 차서 이제는 학교간 격차와 배경 격차를 '조응'시켜 증폭시키겠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보고서는 수월성의 논리를 동원한다. 그리고 하향평준화의 명백한 실증자료가 부족하자 정보사회론과 교육의 다양성을 들먹인다.
KDI보고서가 구체적 대안으로 내세우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도입은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학교간의 서열로 반영하여 교육의 평등성 추구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이 보고서를 하청준 것이, 다름 아닌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였다는 점은 이 선언이 누구의 선언인지를 뻔히 알게 해준다. 이 때 학교의 서열이 '학생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면 선택의 기준은 현 추세로 보아 오로지 하나만이 존재할 수 있다. 바로 '대학에 얼마나 잘 들어가냐'이다.

이것이 '소비자'의 학교 선택기준이 될 것이고 선택받은 학교는 '질 좋은 학교'로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질 좋은 학교'에는 누가 갈 수 있는가? 그건 바로 중학교 때 얼마나 많은 입시교육을 받을 수 있느냐가 결정해준다. 즉, 구매력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에서 이 보고서의 노림수인 과외비 문제 해소전략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탄로나 버린다. 과외비 지출을 언제 더 많이 하느냐, 즉 중학교 때 더 많이 하느냐 고등학교 때 더 많이 하느냐의 차이이지, 과외비 지출 총액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이 때 과외비를 댈 수조차 없는 계층은 논의에서 배제되어 버린다. 7차 교육과정과 맞물리면서 전체 과외비는 중학교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고등학생 수준의 과외비를 지출하기 시작해야 할 지 모른다. 20년 전의 '중3병'이 이제 다시 전국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과거보다 과열양상이 더 심한 현재의 경쟁구도에다 평준화 해체가 가미된다면, '좋은'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중학교 배정을 받기 위해 이사를 다녀야 할 것이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이들은 학원에서 학원으로 전전해야 할 것이다.

한편, 과외비 확대 원인을 '평준화'로 인한 학교 교육의 질 하락에서 찾는 것은 곧바로 교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데, 교사 공격은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써먹는 공교육 공격법의 기본이다.

"교사의 자질도 문제가 있다. 한번 교사가 되면 연구 안하고 놀아도 정년까지 직장에 다닐 수 있다. (…) 참고서 복사해다가 나눠주는 걸로 수업을 때우는 교사도 봤다. (…) 내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 좋은 선생님이 있다면 유학을 보낼 사람이 어디 있나. 학원강사 수준의 교사가 가르친다면 학부모가 학교에 얼마든지 돈을 더 낸다. 과학고 등은 외부에서 강사를 초빙한다. 일반고는 안 된다. 학부모들이 "우리들이 얼마씩 갹출해서 토플강사를 데려오겠다"고 해도, 교사들이 "여기도 영어교사 있는데 뭣하러 외부에서 데려오느냐"며 반대한다. 특활 시간에도, 잘하는 교사의 반에는 아이들이 몰린다. 아이들은 영악하고 똑똑하다. 한번 들어보면 그 시간에 자야 할지, 들어야 할지 무섭게 판단한다. 자기에게 도움되면 절대 안 잔다. 실력이 없으면서 아이들을 짓누르려고 하면 아이들이 교사를 무시하고 대접하지 않게 된다." (<교육, 이대론 미래 없다-환부와 처방>, 2001년 4월 6일자 조선일보 4,5면)


이는 수요자에게 선택권을 확대하여 학교간, 교사간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교육의 질은 절로- 국가가 손대지 않고도- 제고될 거라는 1995년의 발상 그대로이다. 이들의 일관성 있는 주장은 칭찬하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여전히 다양성(사실은 수월성을 더 중시하면서)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다. 이제 KDI보고서는 다양성과 수월성으로는 부족했는지, 한국 특유의 평등에 대한 갈구에 기대어 진보적 교육이념의 핵심인 '평등성'까지 동원해서 교육시장화를 추진하는 초석을 만들려 한다.
사실상 현재의 교육불평등의 원인을 평준화에서 찾는 KDI보고서나, 이를 얼씨구나 하고 얼른 이용해먹는 조선일보 같은 꼴보수들이나 위험하기로 치면 거기서 거기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평등 심화 등 신자유주의적 교육재편 시도로 인해 되려 증폭되어버린 문제들을 한층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해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KDI의 주장이나 '보충수업 부활'과 '엄격한' 학교규율'을 다시 정착시켜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조선일보나 위험하기로 치면 50보 100보라는 말이다!


<b>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b>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평등마저도 자신들의 세계관에 따라 재구성하여 이데올로기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들이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매우 위험하다. 민중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이들은 세상을 사고 팔 수 있는 자원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않은, 혹은 그래서는 안되는 부분마저도 사고 팔 수 있는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이다. 안타깝게도, 진보진영은 현재 수세적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교육의 평등은 사회의 평등과 함께 간다. 현 사회는 매우 불평등하며,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집단은 착취를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따라서 불평등한 사회 현실 속에서 교육의 평등만을 추구하는 시도는 사실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추구를 멈출 수가 없다.

진정한 평등과 진정한 자유 역시 함께 간다. 누군가가 자유로워지는 댓가로 누군가 속박당해야 하는 구조라면, 이는 만인의 평등-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구조이다.
이들은 고등학교 평준화를 형평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상당히 위험한 움직임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평등은 진보진영이 진보적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기존의 공교육을 공격하는 메뉴에 평등을 본격적으로 포함시키기 시작하면, 평등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은 바뀔 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의 교육은 재구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재구조화의 방향은 평준화를 해체하는 식의 재구조화 전략이어선 안된다. 만일, 지금까지의 평등주의적 교육정책(욕먹지 않는 수준에서 시늉만 했기 때문에 별로 적극적이지도 않았지만)이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를 아예 폐기하자는 주장을 들이대는 것에 부화뇌동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놓고 근원적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구조의 제약 속에서라도 평등주의적 제도를 구성하고 제시하는 것이 진보적 교육운동 진영의 과제이다. 이는 레이몬드 윌리암스가 말한 '장구한 혁명(The Long Revolution)'의 한 부분이다.
주제어
교육
태그
노무현 대안세계화 정치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