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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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연대'운동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

정종권 | 정책기획부장, 전국민중연대(준) 정책실장
<b>되돌아보자!</b>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을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객관적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도록 강요하는지,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이 지난 3월 중앙위원회에서 2001년의 투쟁기조로 결의한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에 대한 평가와 그 실천적 함의를 둘러싼 논란이 성과있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현실 전개과정의 의미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전술기조를 둘러싼 판단의 차이는 활동가들의 세계관과 사상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현실 인식'에 대한 판단 차이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다. 그러기에 김대중 집권 3년여의 시간이 흐르면서, 정권과 사회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가 '주체적 측면'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또 그 시간동안 '객관적 현실'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에 대한 냉정하고 사실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주·객관적 변화라는 양자의 측면에서 특히, 작년 하반기와 지금까지의 시기가 중요하다. 이 사이에 발생했던 사건과 변화들의 질적 의미와 비중에서도 그러하고, (선진활동가의 태도가 아닌) 대중들의 정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질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다.
최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4월 10일 대우차노동자에 대한 경찰의 살인적 폭력탄압을 살펴본다면, 그 날의 경찰폭력은 우연히 발생한 것도, 예외적인 경우도, 심지어는 전례없이 극단적인 폭력탄압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김대중 정권 출범시기부터 정권과 경찰의 물리적 폭력성은 4월 10일 부평 폭력사건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작년 사회보험노조와 롯데호텔노조에 대한 경찰폭력은 4월 10일을 능가하는 군사작전 수준이었다. 철거민투쟁과 빈민투쟁의 경우, 경찰의 공적 폭력과 용역깡패집단의 사적 폭력이 결합한 물리적 폭력성의 강도와 잔인함은 노동자 탄압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4월 10일 사건은 2001년 4월 10일의 몇 분 사이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민중투쟁의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권과 경찰 공권력의 폭력성과 반민중성에 저항하면서, 이것을 국민적으로 폭로하고 규탄하는 투쟁들은 소규모로, 국지적으로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분노와 투쟁들이 하나씩 쌓여왔으며, 마침내 4월 10일 사건으로 점화되고 폭발한 것이다. 생생한 경찰폭력 현장에 대한 폭로가 국민적 분노를 촉발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배경에는 작년 하반기부터 급격하게 분출하기 시작한 노동자 민중들의 대규모 투쟁과 정권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점점 노골화되기 시작한 정부의 폭력성과 반동성, 경제위기의 살길은 구조조정 뿐이라고 외쳤던 정부 정책의 실패와 파산이 명명백백해지면서 국민의 분노와 비판이 밑에서부터 서서히 확산되고 있었던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b>'당신들의 투쟁'이 아닌 '우리들의 투쟁'</b>

작년 하반기 이후의 굵직한 사건만 나열해보자. 사회보험노조와 롯데호텔노조 투쟁과 정권의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탄압, 이랜드노조와 한통계약직노조로 대표되는 비정규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투쟁, 한통노조와 금융노조 등 공공부문과 국가기간산업 노동자들의 투쟁과 파업, 국가보안법 유지와 국가인권기구의 유명무실화, 박정희기념관 건립 등 인권과 민주주의적 가치의 파괴에 저항하는 사회적 투쟁이 있었다.
여기에, 매향리 국제폭격장 폐쇄와 소파(SOFA)협정 개정투쟁, 아셈(ASEM)반대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투쟁…. 각각의 경우 적게는 수천수백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이 '직접' 투쟁에 참여하였으며, 수십만명이 이러한 투쟁들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투쟁에 대한 공감대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경우들이다. 이랜드노조의 투쟁이 단순히 기백명의 이랜드노조 조합원만의 문제가 아닌 이미 50%가 넘는 수백만명 비정규노동자의 문제였듯이, 한통노조의 투쟁도 3만여 조합원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이고 과제였던 것이다.
이렇듯 작년 하반기와 올해의 투쟁들은 직접 투쟁의 당사자가 특정 노동조합일 수 있지만, 그 투쟁에 대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범위와 대상은 끝없이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투쟁들의 의미가 개별화되고 특정 집단과 주체의 문제로 한정되는 한, 그 투쟁의 규모가 아무리 크고 전투적이라 하더라도 공세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기는 힘들다.

역으로 투쟁의 주체가 비록 초기에는 적고 미약하더라도 그것이 개별 사업장과 특정 주체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 사회적 파장을 낳는 투쟁은 공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물론 투쟁의 성격이 자생적으로 성장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성의 개입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전략과 전술은 바로 이러한 개별 투쟁의 사회적 성격을 확장시키면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투쟁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넘어 투쟁대열에 동참하도록 조직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또 그것이 전략전술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b>본래 김대중 정권은 개혁지향적 세력이었다? </b>

김대중 정권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10%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의 특징이라고 하던, 폭넓지는 않지만 강력하고 조직된 지지집단의 존재도 점차 해체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김대중 지지성향을 보여왔던 호남 농민층에서도 정권 반대의 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김대중과 호남 농민의 정서적 일체감과 친화성으로 감싸기에는 우리 농업현실의 절박함과 파탄 정도가 심각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농민 생존권에 대한 어떠한 개선방안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농업파탄의 원인이었던 농산물 시장개방을 더욱 전면적으로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 김대중 정권의 농업정책이라는 것을 농민들 스스로가 자각해가고 있다. 마치 노동자에게 구조조정이 정리해고와 실업·비정규직화로 체감되듯이, 농민들에게 정부의 농업정책은 시장개방 정책과 농축산물의 저가격 정책으로 체감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김대중 정권의 정권재창출 가능성(찬성여부가 아니라)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는, 2/3이상이 불가능하다고 예상하였다고 밝혀졌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맥락에서 김대중 정권의 국가운영 능력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보수적인 집단에서도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한 반증이다. 모성보호법 제정에 대한 경총과 자민련의 보수반동적 책동에 부화뇌동하면서 끌려다니는 것이 현 정부의 개혁성이다. 정권의 각종 정치경제 정책들은 극우보수주의 정치세력인 자민련과 재계의 조정, 조율을 거치지 않고 실행될 수 없다.
이것을 인식할 때, "개혁적인 김대중 정권이 권력기반의 협소함과 불안정성으로 인해, 보수적 집단과 공조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로 타협과 야합으로 개혁이 실종되거나 후퇴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건 완전한 잘못이다. '본래 김대중 정권은 개혁지향적 세력이었다'는 허구적 신화에 눈이 먼 자들의 비뚤어진 시각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 안경이 깨어지고 금이 간 줄 모르면서, 세상이 비뚤어져 있다고 비분강개하는 희극에 다름아닌 것이다.


<b>개혁에 대한 두가지 이해방식 </b>

김대중 정권의 개혁성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의 개혁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종되거나 후퇴해서는 안되는 긍정적 의미의 것들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시스템과 구조개편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함의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대상에는 재벌체제와 각종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요소들, 비민주적인 각종 제도와 관행들, 부정부패와 비공개적이고 불투명한 사회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보자.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지배하는 경제논리와 구조, 관행에 대한 개혁이 하나이며, 이를 사회문화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였던 정치사회적 제도와 질서에 대한 개혁이 또 다른 하나이다. 흔히 4대부문 구조조정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전자의 경우라면,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으로 불리우는 것이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정치 사회적 민주화와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가 두가지 맥락에서 상호 적대적이다. 즉 후자의 경우, 과거의 반민주적이고 사회억압적 구조와 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의 형식적 측면과 실질적 측면을 진전시켜야 한다는 맥락이 있다. 이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위해서(!) 과거의 보수주의적이고 경직된 군사주의적 정치사회문화를 유연화시키고, 형식적·절차적 측면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는 맥락이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이질적이고 적대적인 맥락을 보지 않은 채 그 외형에만 매몰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자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의 보완물로서 정치사회 개혁을 사고하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변질되거나 기형화될 수밖에 없다. 특정 인물과 세력의 의지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개혁에 대한 상호 적대적인 측면에 대한 인식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김대중 정권이 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하고, 각종 정치사회적 민주화를 왜 급속하게 추진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분석과 접근방법이 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의 주류적 사고방식은 이렇다. 김대중 정권의 개혁실종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원인이 보수적 세력과의 권력분점에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진영이 보수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면서 압박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사회적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각종 정치사회문화적 개혁조치들은 진행해 왔다. 자본의 필요에 의한 민주화, 즉 각종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 철폐(기업활동에 대한 억압과 규제를 해체하고 민주화시킨다?), 공기업 민영화의 필요성에 대한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세(공기업의 관료적·폐쇄적 운영을 극복하고 민영화를 통해 공개적이고 민주적 운영을 지향한다?), 노사정위원회 설치와 의미부여(민주적으로 사회적 의견을 모아내고 조정하는 합의기구?)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질을 넘거나 그 목표에 필수적이지 않은 과제와 영역이라면, 정권의 태도는 결정적으로 동요하거나 변질되는 것이다. 이는 안타까움의 대상이 아니라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에서 필연화될 수밖에 없는 결과들이며, 압박과 로비·캠페인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비판과 김대중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b>'김대중 퇴진투쟁'에 대한 잘못된 논점</b>

이른바, 전략과 전술은 백지 위에 그리는 설계도면과는 다르다. 전략 전술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의 주객관적 요소와 역관계에 기반하여 현실적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대중의 분노를 주관적으로 축소하거나 해체해서도, 또 과장하거나 부풀려서도 안된다. 전략 전술은 사회의 객관현실에 대한 분석과 이것의 계급투쟁적 양상들, 대중의 주체적 상태에 대한 분석,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가지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에 대한 운동의 분명한 방향과 침로를 제공해야만 한다. 대중의 상태(분노와 절망의 수준)에 대한 추종으로 그쳐버린다면 그것은 의식성의, 자생성에 대한 굴종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전략 전술의 실종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의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은 전술적 함의상, '모든 투쟁의 계기와 모든 투쟁의 방향을 김대중 정권에 대한 공격으로 맞추어가며, 그 의미를 정권반대의 선언을 넘어 정권퇴진으로 정치적 행동을 조직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여기서 두가지 오도된 논점이 제기된다. 하나는 현재의 주체적 역량과 객관정세가 퇴진투쟁을 조직할 수 있느냐의 문제제기이며, 또 하나는 김대중 정권의 반동성에 대한 폭로와 반대투쟁은 일상적으로 전개해오지 않았느냐라는 문제제기이다.

지금 김대중 정권 퇴진이 전면적으로 제기된 것은, 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감과 분노가 특정 계급과 특정 집단의 감성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3년여의 노동자 민중의 투쟁과 경험과 생활 속에서 절망과 분노가 쌓여왔다. 정리해고와 실업의 수렁에서 노동자들은 절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였으며, 또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라는 공포와 위기 속에서 고통받았다. 농민과 빈민의 생존권이 극한으로 떠밀리면서 분노가 쌓여갔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정책의 허구성과 거짓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민의 절망과 좌절을 강요하면서 오직 구조조정만이, 개방화 정책만이 살 길이라고 협박해왔던 정부의 경제정책이 파탄나고 있다. 그러나 정권은 또다시 거짓논리로 우리의 삶을 극한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나 이제 민중과 국민들은 순응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서서히 투쟁으로 정권의 거짓논리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분노의 대상이 개별 사업주와 눈앞에 보이는 누군가에서 서서히 정권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김대중 퇴진투쟁은 즉자적 분노와 감성적 대응이 아니며, 지난 3년간의 대중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정권퇴진투쟁은 정권을 물리적으로 퇴진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투쟁의 방향을 정권에 대한 비판과 투쟁으로 집중시켜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정권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선언으로(선전슬로건의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권 퇴진을 요구하고 조직하고 강제한다는 정치적 행동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b>정권 퇴진 투쟁의 실천적 함의</b>

지금이 정세의 고양기라거나 1987년 6월 항쟁과 같은 정세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고양기가 아니라는 것이,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을 조직하거나 전면화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대중의 자생성에 기생하려는 태도에 다름아니다. '정권 퇴진' 전술의 핵심은 정권을 물리적인 행동으로서 퇴진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실정상태가 이 정권이 퇴진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을 '민중의 조직된 행동으로서 주장(!)'하고 '중간층과 일반 대중을 설득(!)'하고 '정권을 압박, 공격(!)'하는 정치투쟁이 바로 정권 퇴진 투쟁의 실천적 함의이다. 그리고 이 점이 일상적으로 정권의 반민중성과 기만성을 선전 폭로한다는 점과의 차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권 반대의 의미는 일상적 선전과 폭로 수준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또다른 측면에서, 정권 퇴진을 운동진영의 높은 의지와 결의 수준의 문제로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니, 이 경향은 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 퇴진 투쟁에 걸맞는 전술계획을 고민하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정권 퇴진 투쟁은 정권과의 대립각을 세우면서 대중 속으로 확산되어야 하는 것이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권 퇴진이 물리적 정권퇴진의 문제가 아니듯이 투쟁의 격렬함과 투쟁강도의 문제로만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정권의 총체적 문제점과 실정에 대한 구체적인 선전과 폭로가 진행되어야 한다. 또 대중들이 체감으로, 즉자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점과 의식성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포괄적이고 입체적인 계획이 수립 실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적 분노과 의식에 근거하여 이들이 참여하고 동참할 수 있는 실천계획을 조직해야 한다. 조직된 대중들의 투쟁을 넘어, 조직되지 못한 대중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투쟁의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동요하는 세력과 전선을 교란하는 세력에 대한 단호한 비판이 수행되면서, 중간층을 견인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조직되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하지만 노동자 투쟁으로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정권 퇴진 투쟁의 전술적 과제이어야 한다. 이것이 조직되지 않으면 정권 퇴진 투쟁은 정치적 수사와 투쟁의 강경함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b>6.15선언을 위태롭게 해선 안된다?</b>

최근 정세에 대한 인식에서 주요 변수로 떠오르는 것이 남북관계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의 문제이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민중운동의 전략전술의 주요 변수인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한반도정세를 둘러싼 분석과 실천적 결론이 국내 계급투쟁과 민중투쟁의 방향을 역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두가지의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김대중 정권의 국내정책(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과 대북정책(햇볕정책)이 서로 상이한 논리와 전망을 가지는 이질적인 것인가 둘째, 민중운동의 투쟁방향과 계획이 남북관계와 민족문제의 우위성(?)에 의해 재규정되어야 할 하위범주의 문제인가.
논점은 결국 햇볕정책과 6·15남북공동선언의 연관성, 그리고 이것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 정책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다. 민중운동의 한 흐름에서는, 김대중 정권·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 그리고 대북 햇볕정책이 상호 이질적인 것 또는 일정한 차별성을 가지는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이 견해를 거칠게 정리하자면 구조조정정책은 반민중적이지만 햇볕정책은 일정한 진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운동의 다수 의견도 이러한 기조에 서 있다. '김대중 정권의 다른 정책들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은 일정한 긍정성과 진보성을 갖고 있다'는 식의 관념이 민중운동의 일각과 시민운동의 대다수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세계화 정책은 결국 초국적자본의 지배질서로 한국 시장을 적극적으로 편입시키면서, 금융자본의 이윤 추구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경제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리프로세스와 햇볕정책 또한 남북한의 대결적 대치상태를 평화공존적 분단체제로 연착륙시키면서, 남북한의 경제통합과 자본투자를 통해 북한을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부로 편입시키겠다는 전략에 다름아니다. 이 양자는 미국과 김대중 정권, 초국적자본의 공통된 전략 하에서 추진되고 있는 동일한 과정의 양면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이 한국 독점자본의 지배력과 모순구조를 전혀 해소하지 않고 오히려 독점자본의 지배방식을 합리화시키고 지배력을 강화시키면서, 그 외형과 형식에서의 변화와 개혁성을 부각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과 유사하다.

분단구조의 모순과 적대적 갈등을 해소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시켜 유지하면서 갈등과 모순을 재생산하고 있지만, 외형적으로 대화와 협력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 페리프로세스이고, 햇볕정책이다. 문제는 6·15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하였던 김대중 정권의 정책적 태도가, 이러한 햇볕정책의 전략에서 변화하고 수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햇볕정책과 달리 6·15선언은 북한이라는 또하나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정책과 전략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과 대북정책은 투쟁의 대상이지, 지지와 협력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민중진영의 한 경향은 6·15선언의 의미를 절대화시킨다(이 경향은 6·15선언에서 북한의 전략적 주동성이 관철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6·15선언의 한 파트너였던 김대중 정권과 햇볕정책의 의미를 긍정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견인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6·15선언의 의의를 훼손하거나 남북간의 대화 협력을 위태롭게 하는 내외의 시도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 한 측면이 미국 부시정권의 대북 적대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김대중 정권과 부시정권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활동(양자의 간극을 심화시키면서 한미 동맹관계의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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