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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0.1-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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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현대가족 이야기』

권형은 | 인천지부 집행위원
노동자 운동이 다시 서야할 곳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대대적인 정리해고, 구조조정은 고용불안을 확산시켰다. 저임금, 불안정한 고용상태의 비정규직 증가는 청년 세대의 절망을 낳았고 안정된 고용에 대한 열망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구조조정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는 정규직 노동조합은 정부와 자본이 붙여놓은 ‘이기주의’라는 딱지를 떼버리지 못하고 있다. 신축화 , 사유화가 최선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세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가 되고 있는 지금, 상황이 이리 되도록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현대가족 이야기』는 대표적인 제조업 공장인 울산 현대자동차 사례에 비추어 민주노조 운동의 실패를 평가한다.『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엘리트 중심의 노동자 문화, 노동자 정체성의 변화, 물량의 논리가 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 가상화되는 파업들을 다루며 ‘민주노조’ 정치양식을 분석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존의 파업이 조합원들이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활동가가 재생산되는 ‘노동자의 학교’로서 역할을 했다면 현재 파업은 사측과의 협상을 위한 물리력 동원으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파업의 가상화’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다음으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몰성적(sex-blind)이었음을 비판하며 가족임금의 신화, 가족중심성의 문제를 짚는다.
『현대가족이야기』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가족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특징적인 것은 현재 ‘전업주부’의 삶에 생애사적으로 접근하면서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현대자본과 노동조합의 적대, 지역(공동체)에서의 삶, 노동운동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그래서 두 책이 주는 결론은 다른 듯 유사하다. 그것은 노동자운동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변화한 자본의 전략을 적절히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실리주의와 조합주의에 빠져 자본이 만들어 낸 게임의 룰에서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은 엘리트 활동가만의 조직이 되어 현장에 군림하고 노동자 대중의 신뢰를 잃어 ‘민주노조’라는 말조차 무색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실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노동운동, 바로 그 민주노조운동의 시효소멸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책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노동운동 혁신’의 과제를 부여잡고 2010년을 맞이하는 노동자운동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장소가 무지개 넘어 어딘가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이념과 가치로 재구성되어야 하는 곳은 바로 여기라고 말한다는 것, 그걸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시효소멸

과거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이었고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민주노조운동은 국가의 노동배제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에 저항하는 사회민주화 투쟁이자, 인간해방과 평등세상을 추구하던 해방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공장, 지역, 가족, 학교 등의 공간을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장소, 노동자 정치의 현장으로 구성한 정치양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유효성은 점차 상실되기에 이른다.

‘고용안정’의 배타적 강조

유효성 상실의 첫 번째 근거는 민주노조 운동이 내세우던 노조 민주화, 노동해방의 가치를 ‘고용안정’이 대체한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갑작스러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는 전국적인 노-사 대리전이었던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인정하던 순간이 계기가 되었다고 지목된다.
1990년대 내내 현대 자동차는 사측의 신경영전략과 노조 간의 현장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현장 자체는 여전히 민주노조의 가치가 사측의 노사협력적 가치와 경쟁하던 정치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1998년 ‘정리해고자는 단 한 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던 지도부가, 함께 투쟁하던 남성 노동자와 여성노동자 277명의 정리해고에 합의하면서 조합원 개개인에게는 그 무엇보다 ‘고용안정’ 논리가 우위에 서게 된다. ‘불황으로 물량이 감소하고, 물량이 감소하니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사측의 논리에 노조가 무릎 꿇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자동차 조합원들은 불황과 해고의 불안으로 고용주와 노조 모두에 이중몰입(혹은 충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 잘릴지 모르니 돈벌이가 될 때 쎄 빠지게 벌기’ 위해 조합원 개개인은 더욱 잔업, 특근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고용불안은 잔업, 특근으로 가능한 ‘상대적 고임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조합원과 그 가족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부인의 인터뷰를 보면 정체성 혼란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남편 월급으로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내가 뭔가를 하고 싶을 때 바로바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 빈부차가 거의 없는 동질화된 집단거주지에서 “기죽을 일도,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지만” 98년 명예퇴직을 하면서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고 떠나 “잘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며 중산층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계층적 지위를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생활비를 최소화하고, 저축액수를 늘리고, 각종 보험에 가입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자녀교육을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두게 된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불안을 대비하는 동안 노조는 아무런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불황이면 물량이 감소하고, 물량이 감소하면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자본의 논리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이 ‘물량 감소=구조조정’이라는 등식에 충실하게 물량확보에만 열을 올린다. 그리고 이는 조합원의 요구이니 노동조합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자위하는 것에 그친다. 노동자의 최우선 가치가 변하고, 노조 역시 다른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파업’ 역시 더 이상 ‘노동자의 학교’일 수가 없다. 비전 없는 노조가 이끄는 파업은 사측과 협상하기 위한 물리력 동원 이상이 될 수 없고, 조합원들의 파업 참여도 형식적으로 관리되는 수준에 머문다. 그나마도 특근처리가 되어야 파업에 참가하는 정도이니 투쟁이 ‘속전속결’로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설상가상으로 노동조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2000년 현대자동차 지도부는 노동비용 삭감을 위해 노동현장의 신축성을 높이기 원했던 사측의 요구를 수용하며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완전고용 합의서’를 체결한 것이다. 차별받고 억압받던 노동자가 부르짖었던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가치가, 그 가치의 구현이자 상징이었던 노동조합 스스로에 의해 훼손된 것이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민주노조운동의 보루가 아니라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 고용안정의 방패막이가 될 수 있는 상대적 고임금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상징되고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은 현장에서 화석화되고 말았다. 물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들은, 같은 노동이지만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해 ‘동등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같은 노동자로서 조건 없이 연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고용불안 앞에서 비정규직과 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현장 활동가가 말한 대로 ‘당시에 노조가 정리해고를 끝까지 반대하고 나섰다면... 조합원들은 정리해고를 끝까지 반대하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합원들은 그렇게 순응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런 순응의 방식은 노조에 대한 불신과 노동자 계급의 분열, 노동자 개개인의 파편화로 이어졌다.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부재

두 번째로는 민주노조 운동이 자본의 남녀 노동자 분할 - 통제전략을 바로 보지 못했거나 실리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전략의 부재를 들 수 있다. 1998년 정리해고 투쟁에서 144명의 여성노동자 전원 정리해고에 합의한 사건은 노조가 남성노동자-부양자, 여성노동자-피부양자 혹은 생계 보조자로 가정하는 자본의 남녀 노동자 분할 - 통제 전략에 실천적으로 동조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실제로 ‘현모양처’를 만들기 위해 회사가 진행하는 조합원 부인 대상 교육은 그 내용이 노조의 활동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노조가 방관해왔다. 조합원 설문조사를 보면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결혼한 여성은 남편과 자녀를 중심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여 다수의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을 아내이자 어머니로 유폐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사가 진행하는 각종 교육과 매체는 자본이 바라는 이데올로기와 논리를 주입하는 일상적 통로로서 ‘고생하는’ 남편, ‘훌륭한’ 아버지, ‘대견한’ 아들의 이미지를 노동자에게 주입한다. 좋은 가장되기, 자기 계발교육, 부부감성교육, 재태크 교육 등을 통해 생계부양자이자 고용불안에 처한 ‘회사인’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발적으로 노후를 대비하는 ‘노동하는 주체’로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불가능한 가족임금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고강도 장시간 노동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 부인인 여성 역시 ‘행복한 가정 만들기’, ‘공장 견학’ 프로그램 참여 등을 통해 ‘내조’의 내용과 형식을 배우게 된다.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에서 큰 불만 없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의 교육에 충실하여’ 남성의 노동력을 효과적이고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가사 전담자로서의 여성의 자기 인식은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따라서 저임금의 노동인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실제로 교육에 참여한 여성들의 평가를 보면 회사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먹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교육이 초기 노조비판, 경영현황, 판매기법 등에서 ‘교양특강’이라는 형태로 바뀌다 보니 참여를 꺼리던 여성들은 ‘노느니 뭐해’ 하며 참여하게 되었고 “회사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고, 이렇게 큰 회사 덕택에 별 그거 없이 산다고 고마운 마음도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가서 남편 내조 잘하고 자식 교육과 건강에 더 신경써야 겠다”는 다짐이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회사 교육 참여에는 사측의 동원전략도 한 몫 한다. 초청장을 남편 노동자를 통해서 부인에게 전달한 뒤, 교육 참여에서 초청장을 수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확인이 되다보니 회사에 찍힐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남편이나 부인이나 매한가지다. 초청장을 주는 남편이나 받는 부인이나 ‘노느니 뭐해’라며 참가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회사는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친기업적인 정서를 심어주고, 중산층을 지향하는 남성 생계부양 가족 형태와 가족 중심성을 강화하면서 남녀 모두의 노동권을 축소하려 해왔다. 그리고 이에 대응했어야 하는 노동조합,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이 만들어 놓은 계층 피라미드에서 여성의 노동권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조해왔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이 자신의 역할을 남성 노동자들의 노동권 방어로 한정하며 상대적 특권에 안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본의 공격은 다시 그들에게 향하고 있다. ‘노동의 여성화’라는 말처럼 자신이 의도적으로 방기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조건이 전체 노동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을 파괴하고, 끊임없이 노동비용을 삭감하려 하는 자본의 공격은 저임금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려고 하는 ‘정규직 고임금 노동자’라는 칼날을 벼려 민주노조를 향해 겨누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공동체주의 훼손

세 번째는 노동자 거주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투쟁의 해방구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던 ‘민주노조’운동의 공동체주의가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구 시가지인 양정동에서 노동자 거주 밀집지역을 형성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새롭게 형성된 중형 아파트 단지로 이동하면서 노동자 공동체 거주 지역은 파편화되고 조합원을 비롯한 조합원 가족들 간의 네트워크는 상실되었다. 공동육아, 공동투쟁, 정보교류, 상호 토론이 이루어지던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앉을 의자도 없이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공돌이 인생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노동자와 전업주부는 자녀의 계층상승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좀 더 학군 좋은 곳으로, 더 잘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목돈이 들더라도 해외유학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남편은 잔업, 특근에 부인은 남편 건강, 자식 교육의 최전방에 나서고 있다. 민주노조의 공동체적 가치가 사라진 곳에 노동몰입, 중산층 지향성이 뿌리를 내리면서 노동조합 역시 기본적인 노조 활동 이외의 지역 차원의 집단적 실천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방범활동, 경로당 자원 봉사 활동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조합원들이 동네 일에 관심 없다. 회사, 노조도 지역 기여도 거의 없다....”
노동조합과 조합원이 지역 공동체에 개입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동안 현대자동차를 상징하는 빨간 조끼에 대한 울산 지역의 거부감은 시기와 원망 섞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지역의 부정적 시선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상대적 고임금’인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이야 파업을 하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조건이 개선되겠지만 현대차 하청업체, 협력업체는 부도위기에 빠지고 해당 기업 노동자는 생계의 위험에 처하는 일이 지역 내에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갑득 후보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노조 전체가 지난 18년 역사에서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한 적이 없다.” 2005년 울산 북구 재보궐 선거에서 지역 비정규직이 정규직 출신 정갑득 후보에 대해 보인 반응이다. 이 말은 사내하청을 제도화한 정갑득 전 위원장에 대한 비판이자, 정갑득으로 대표되는 정규직 노조에 대한 지역 비정규직의 비판이기도 하다. 18년 역사에서 협력업체와 연대한 적이 없다는 표현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같은 노동자로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와 같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현대자동차 노조에 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역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민주노조운동’ 가치의 재구성

지역과 공장, 가족이 자본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분화되고 파편화되었다고 해서, 노동자 정치가 가능한 공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치가 가능한 공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비가시적인 것일 뿐이다. 자본과 노동이 교차하고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희망과 불안의 모순에 노출되는 그 현장을 포착하고 비판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곳이 노동자 정치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과거 민주노조 운동이 회사,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의 통합된 이미지와 그 재현을 깨뜨려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가치를 통해 공장, 지역, 가족, 학교를 ‘정치의 장소’로 재구성했던 것처럼 새로운 노동자운동 역시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 경쟁과 착취, 억압으로 보이지 않게 된 장소들을 새롭게 구성해 나갈 수 있다. 물량과 고용안정의 논리를 부수고 노동자 단결의 가치를 복원할 때, 고용 시간에 귀속된 일상을 깨고 지역의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 실업, 빈곤층과 연대해 나갈 수 있을 때, 여성을 착취ㆍ주변화하고 결국엔 남성에게도 굴레가 되는 가족임금과 성별분업, 가족중심성을 비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노동자 정치의 공간이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의 정치 양식이 시효소멸 했을 지라도 정치의 공간을 발견하고 재구성하려 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 멀리 더 높이 뛰려면 움츠려 긴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긴장하다 주저앉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주제어
노동 여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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