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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6.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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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중동, 21세기의 중동 (3)제국주의 '깡패'들의 이라크 폭격의 이유; 걸프전쟁, 그 이전과 이후 그리고 현재

김용현 | 한반도위원회, 집행위원
작년인가 개봉했던 헐리웃 영화중에 "쓰리킹즈"가 있었다. 사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영화들은 이제 지겨울 정도로 많았지만, 걸프전 이후 10여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에 관한 영화가 나오지 않아 의심스럽던 차에 이 영화가 개봉하여 반가운 마음에 극장으로 달려가 본 기억이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미군의 전투기와 전투함으로부터의 엄청난 폭격이후 쿠웨이트에 지상군이 투입되어 전쟁을 종결짓는 종전직후이다. 이 영화는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은 결국 이 영화도 걸프전쟁의 성격을 후세인의 '전쟁책동'으로 보고 있고, 아메리카의 보안관들이 결국 전쟁 직후 잔여문제를 '서양식으로' 해결하는 구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랍인들이 미개하다는 생각은 많이 바뀌었겠지만, 적어도 이라크가 '깡패'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시각을 우리 또한 고스란히 따르고 있지는 않을까? 이 글에서는 우선 걸프전쟁의 배경이 되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내외적, 상호 조건들을 살펴보고, 전쟁의 경과와 의미들을 함께 생각해 보는 것으로 하겠다.


<b>이라크-쿠웨이트 영유권 분쟁</b>

이라크와 쿠웨이트 사이의 국경분쟁은 1961년 6월 19일 쿠웨이트가 영국의 보호령으로부터 독립되면서 표면화되었다. 쿠웨이트는 최초 1756년 아라비아반도의 걸프지역에 국가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유목민들이 경계 없이 분산되어 생활)에서 왕국으로 탄생하였다. 당시 유목민의 실력파였던 앗 사바하족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여 군주제를 채택하고 '쿠웨이트 왕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그 후 당시 중동지역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걸프지역의 지배권을 추구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에게 1829년 종주권을 인정하고 1852년에는 그 보호 하에 들어가기로 하였으며, 오스만 터키 바스라주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면서도 쿠웨이트는 내정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아라비아반도에 대규모 유전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쿠웨이트의 전략적 가치가 급부상되었다. 이에 영국은 쿠웨이트에 대한 종주국이라는 지위를 내세우면서 유전의 독점을 주장하였고, 미국 역시 이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렇게 하여 영국과 미국은 쿠웨이트 유전을 놓고 상호 대립하였고, 두 나라는 마침내 1934년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영국)와 걸프 석유회사(미국)가 공동 출자하여 '쿠웨이트 석유회사'(KOC)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쿠웨이트는 영국과 미국의 철저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정을 지내온 쿠웨이트는 1950년대부터 중동지역에 급속히 확산된 민족주의 조류(1956년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 1958년 이라크에서 혁명으로 친 영국 왕정 붕괴 등)를 타고 1961년 6월 19일 독립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독립과 더불어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국경분쟁이 표면화되었다. 이라크의 혁명 정권(카셈정권)에게는 쿠웨이트가 오스만 터키시대에 자신의 영토인 바스라주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근거가 있었다. 이라크는 국경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라크보다 열세한 쿠웨이트는 과거의 보호국인 영국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영국도 막대한 국가이익이 걸린 석유자원 확보 차원에서 1961년 7월 1일 항공모함 1척과 해병대 병력을 쿠웨이트에 파견하였다. 이라크의 카셈 정권은 이와 같은 영국의 군사개입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1963년 10월 쿠데타 발생으로 카셈 정권은 붕괴되었으며, 그 후 새로 출범한 정권은 쿠웨이트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면서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쿠웨이트의 독립과 더불어 발생한 이라크와의 국경분쟁은 무력 충돌 없이 종결되었다.

쿠웨이트를 지원해 오던 영국이 1960년대 후반부터 철수하고, 그에 따라 이 지역에 세력공백이 발생하자,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다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아랍세계내의 또 다른 친서구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영국군을 대신하여 쿠웨이트의 안전보장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마침내 이라크는 1972년 말 국경지대의 쿠웨이트 영토인 앗 삼다 지역의 조차권을 요구하였고, 이로 인하여 1973년 3월 양측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으며, 이라크가 이 국경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쿠웨이트를 지원하기 위하여 1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견, 이라크 군과 대치하였다. 이 국경분쟁은 중동 각 국의 조정과 양 당사자간의 협상으로 수습되어 이라크 군이 1973년 4월 점령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종결되었다.


<b>영토분쟁의 확전(擴戰)</b>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분쟁은 1980년대에 전개된 일련의 걸프지역 및 이라크 내 정세 변화와 연계되어 다시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라크는 이란과의 오랜 전쟁과 경제정책의 실패 및 유가의 계속된 하락, 그리고 서방국가들과 걸프 산유국들의 차관 공여 거부로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세인의 정치적 기반은 상당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남부지역의 쉬아파 이슬람 세력과 북부지역의 쿠르드 게릴라 세력이 후세인 정권에 위협을 가중시켰다.
국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의 위기를 후세인은 쿠웨이트와의 재분쟁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쿠웨이트를 합병하여 석유수출국기구(OPEC) 산유량의 40%를 점유함으로써 경제강국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낫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사망이후 쇠퇴한 '범아랍주의'를 부각시켜 자신의 바스당 통치이념을 바탕으로 아랍권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수행으로 경제가 피폐하였으나 군수산업이 발전되고 군비증강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아랍세계에서 강력한 군사국가가 되어 있었다.

한편, 쿠웨이트는 해묵은 국경문제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얻을 것이 많은데다 안보, 군사능력이 취약했다. 이라크는 1990년 7월 23일부터 쿠웨이트 국경부근의 유전지대에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한 최고 정예 부대인 공화국수비대 2개 사단 약 3만 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쿠웨이트도 전군에 비상사태를 발령하고 국경지역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① 루마일라 유전을 이라크 영토로 인정할 것, ② 이라크의 유전을 도굴한 배상금으로 24억불을 지불할 것, ③ 이라크가 쿠웨이트에게 진 부채 100억불을 탕감할 것, ④ 부비얀과 와르바 두 개 도서를 이라크에 할양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쿠웨이트로서는 이러한 이라크의 일방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를 기해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였다. 공화국수비대 3개 사단을 선봉으로 병력 10만 명, 구 소련제 전차 300대 이상, 헬기 300대 등이 사막의 경계선을 넘어 쿠웨이트를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군의 쿠위이트 침공에 따라 UN 안보리는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 무조건 철수를 요구하였다(유엔 결의 660호). 8월 6일 안보리는 對이라크 무역의 제재를 선언(유엔결의 661호)하였다. 8월 25일 안보리는 헌장 제7장에 의거해 對이라크 금수조치 이행을 위한 '필요한 조치'를 가능케 했다. 또 안보리는 1991년 1월 15일 까지 이라크가 철수하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철수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유엔결의 678호). 이를 전후하여 미국이 대 이라크전에 대비한 다국적군의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43만의 미군을 포함한 33개국의 다국적군 68만 명이 페르시아만 일대에 집결하였다.

이에 대해 이라크도 50여 만의 정규군과 50여 만의 예비군을 동원하고,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 공화국 수비대 15만을 쿠웨이트 및 이라크 남부 지역에 집중시켜 대치하였다. 미국은 이라크의 철수시한 이틀 뒤인 91년 1월 17일 대공습을 단행하여 이로부터 1개월간 미사일 10만여개를 쏟아 부은 공중폭격을 감행, 이라크의 주요시설을 거의 파괴하였으며, 2월 24일에는 전면 지상작전을 전개,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군을 축출한 뒤 지상전 개시 100시간 만인 2월 28일 전쟁종식을 선언했다. 이라크 역시 유엔안보리가 채택한 결의안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라크군은 42개 사단 중 41개 사단이 무력화되고 15만 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패퇴하였으며, 다국적군은 125명의 전사자를 냈다.


<b>걸프전쟁의 의미와 후과(後果)</b>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분쟁은 과거 열강에 의한 식민통치가 남긴 전형적 영토분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랍식민지를 통치하면서 자신의 편의에 의해 경계를 확정하였는데,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영토분쟁도 근본적으로는 그 유산이다. 따라서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게된 배경으로 '아랍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아랍인들은 중동지역의 국경선을 식민지 시대 서구 열강에 의한 '분할과 지배'(divide and rule) 전략의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보고, 오랫동안 통일아랍국가의 건설을 추진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걸프전쟁은 '아랍민족주의'와 反시오니즘 및 反서구주의'라는 깊은 이념적 뿌리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낫세르에 의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면서 '아랍민족주의의 대변자'를 자처하던 후세인에게 있어서 쿠웨이트가 '서구와 결탁'한 것은 배신의 행위로 간주되었다. 당시 쿠웨이트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함께 親서방적 석유부국으로서 OPEC의 제한조치를 무시하고 원유를 생산, 국제유가의 하락을 야기시켰다. 이는 원유값 인상을 통해 이란과의 '8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내경제를 재건하고 석유를 무기로 '반제국주의'를 실현하려던 이라크에게 '일부 석유부국들이 미국과 결탁, 석유쿼터를 위반함으로써 공급과잉과 유가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걸프전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랍권 내부에 형제주의보다는 국가주의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됨으로써 범아랍주의와 아랍민족주의의 쇠퇴의 상징으로 작용하였다. 아랍의 여러 국가들이 이라크의 지역적 패권을 봉쇄하기 위해 이라크를 '응징'하는 다국적군 편에 가세하였으며, 이는 범아랍 명분보다 국가 실리가 우선함을 보여준다.

걸프전쟁은 명실상부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과시했다. 걸프전쟁은 소련의 협력과 유엔의 결의에 의거한 의장국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미국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하는 단극 구조하의 다자간 협력체계를 형성했다. 즉, 냉전이 끝나자마자,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오랜 이해갈등은 1990년 11월 후자가 전자를 점령하는 사태로 치달았고, 서방―무엇보다 독일과 일본 ―의 군비분담 아래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걸프전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냉전체제의 종식이 "역사의 종언"이 아닌 대단히 불안정한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라크는 냉전 종식과 더불어 초강대국의 지역문제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쿠웨이트를 군사적으로 침공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탈냉전시대에 분출될 수 있는 지역분쟁의 전형적 양상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해 볼 수 있다.

한편, 걸프전쟁은 고도의 '첨단기술이 동원된 전쟁'이었다.
걸프전쟁에서는 이전의 전세계적인 전쟁에 나타난 노동집약적인 지상전, 즉 전투장에서 육체적으로 적군과 아군이 직접 교전하는 전쟁장면을 볼 수 없었다. 전세계의 TV를 통해 십자를 그린 스코프의 장면과 미사일이 공격하는 장면이 중개되었으며, 이는 앞으로 국제전쟁의 양상을 예상케 하는 상징적인 기술전쟁의 모습이었다.


<b>미국의 의도는 무엇인가?</b>

전쟁 후유증으로 후세인 정부가 어려움에 처한 가운데 북부의 쿠르드족 자치구와 남부의 시아파 반군은 분리독립 움직임을 보였다. 1992년 5월 쿠르드족 자치구는 이라크와 별도의 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한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선거 결과 쿠르드민주당(DPK:Kurdistan Democratic Party)과 쿠르드애국동맹(PUK:Patriotic Union of Kurdistan)이 각각 50석씩 차지하였다. 후세인은 쿠르드족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남부 시아파 반군에 대한 전면적 소탕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은 1992년 8월 북위 32도 이남의 이라크 영공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선포하고 1993년 1월 대대적 공습을 감행하였다. 또한 1996년 9월에는 이라크 영내 남부 비행금지구역의 북발선을 북위 33도로 확대하여 공격을 감행, 이라크와 충돌하였다.

이처럼 미국은 어쩌면 이라크의 '국내문제'에 국제평화와 소수민족의 인권 수호를 내걸고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미국은 세계 제1의 석유소비국이다. 따라서 미국은 저유가정책을 계속 유지할 필요성과 함께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아랍의 봉건왕정국가들을 지탱시킬 필요가 있다. 미국은 2차 세계전쟁 이후 이란과 이스라엘을 두축으로 대중동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이슬람혁명이 일어나 팔레비왕정이 전복되자 미국의 전략은 큰 차질을 겪게 되었다. 미국은 이란을 대신할 중동지역의 중요 전략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이제까지 유명무실하던 페르시아만 협력협의회(GCC)를 1981년부터 활성화시켰다. GCC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및 아랍에미리트의 6개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중에서 최대유전은 가진 사우디와 쿠웨이트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우디와 쿠웨이트를 중심으로 중동지역에서 헤게모니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으며, 후세인은 이러한 질서에 '감히' 도전하는 '깡패'였던 것이다.
또한 미국은 이미 걸프전쟁 참가 때부터 중동에서 반비·반이스라엘 강경파의 구심인 후세인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쳤다. 이는 후세인을 제거하고 아랍연대를 붕괴시켜 미국의 최대 난제인 이스라엘의 안전보장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한편 미국의 잇따른 폭격과 군사개입은 군수산업의 이해와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공급과 개발을 지원하면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이라크의 화학무기 개발 및 근거도 없는 핵개발을 트집잡아 무역제제조치를 취하고 있다. 사실 이는 미국이 냉전의 종식이라는 상황에서 군수산업의 수용공급을 어떻게든 원활하게 하는 것은 관건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년 미국으로부터 200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구매하고 있다. 또한 SIPRI에 따르면 1980년부터 1988년 동안 중동지역의 무기수입은 340억달러로 제3세계 전체무기수입의 46%를 차지하고 있으면 이라크는 5년간 160억 달러어치를 구입했다.


<b>누가 진짜 '깡패'인가?</b>

올해 2월 16일 밤 조지 부시는 '아버지'의 뜻이라도 따르는 듯, 지난 1998년 12월 약 4일간에 걸쳐 계속됐던 '사막의 여우' 작전 이후 최대규모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였다. 이라크 남북부 비행금지구역의 이행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이 일대를 비행하는 미·영 공군기들에 대한 이라크 방공포대 공격이 최근 부쩍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위협적일 정도로 정확성이 향상되고 있는 것이 이들 레이더 시설 때문이고, 따라서 이것을 파괴해야 했다고 미국은 설명했다.
그러나 과연 이라크가 전쟁준비를 할 수 있을까는 여러 가지로 의문에 부쳐지고 있다.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걸프전 패배와 10년간의 경제제재로 이라크 국민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고, 유엔의 대이라크 제재는 엉뚱하게 이라크 국민들의 삶만 황폐화 시켰다.

빈곤과 영양실조, 영아 사망률, 범죄율이 크게 높아졌으며, 거지와 매춘부 숫자도 늘어났다. 혹독한 제재에 따른 식료품·의약품 부족으로 히로시마 원폭투하 때보다 많은 50여만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다. 오일 달러 덕분에 탄탄했던 중산층은 전쟁 이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결과가 왜곡되자 최근 프랑스 등 일부 국가들은 이라크 국민들의 고통을 담보로 한 더 이상의 제재는 의미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랍권과 러시아와 중국이 제재에 반대함은 물론이다.
또한 최근 미군 내부에서 이라크가 대량무기를 과연 보유했는가, 혹은 제조할 능력이 되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 제6함대 사령관인 찰스 무어 해군 중장은 이라크는 자금부족 때문에 걸프전 이후 대량 파괴무기를 개발할 능력이 없으며, 이라크는 유엔 제재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대량 파괴무기 개발프로그램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조선일보> 2001년 3월 20일자).

이러한 인식을 근거로 최근 미국 내 한 씽크탱크의 보고서는 중동에서의 미군감축이 가능하고 또 그러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10년간의 경제제재로 이라크의 군사력은 절반으로 축소되었고 전쟁능력도 거의 전무하다는 평가이다.


미국이 현재까지 취한 중동전략을 가만히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결국 깡패가 한 놈만 잡고 두들겨 패서 나머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격이다. 얻어맞은 한 놈은 심각한 경제위기와 사회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고, 게다가 맞고도 '깡패'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다. 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돌파하는 길은 요원하기까지 하다. 이미 중동의 주요국가들은 미국의 '시다바리'가 되어 있고(이집트마저 충직한 미국의 하수가 되어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팔레스타인만의 문제로 된 지 오래다. 이것은 시대의 정신이었던 범아랍주의와 아랍민족주의·사회주의의 파탄이 가져온 후과일까? 결국 현재의 상황을 돌파하는 길은 범아랍주의와 아랍민족주의 아래 아랍이 똘똘 뭉치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일까? 적어도 함부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분명한 것은 누가 '깡패'인가 하는 점이다.


"오 위대한 인민들이여, 빛나는 군대여, 아랍이여, 영웅적인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여! 인민들의 적인 미국과 시오니즘이 침략과 사악함에서 하나임을 확인시켜주는 새로운 증거가 드러났다. 오늘 16일 밤 바그다드 근교의 목표물들을 향해 자행된 침공은 미국이 시오니즘 체제와 제휴할 계획임을 명백히 했다. 지난 10년간 계속된 끊임없는 침략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그러나 이번 침공의 새로운 면은 시오니스트 적들이 아랍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자행하려는 작전의 적절한 기반을 마련하려는데 있다.

그들은 이번 침공 등을 통해 아랍형제들을 적기에 지원하려는 이라크의 결의를 저지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스러운 땅을 이라크의 지하드를 공격하는데 내줌으로써 범죄행위에 가담한 사우디 아라비아 및 쿠웨이트와 함께 실패했으며 또 실패할 것이다. 그들은 이라크가 침략과 위협에 굴하지 않음을 알게될 것이며 이라크가 달성하려고 결정한 목표들은 신의 도우심으로 실현될 것이다. 미국과 시오니스트들은 이라크와 아랍, 팔레스타인에 대해 기도하고 있는 침략행위에서 실망과 실패만을 얻을 것이다." [2001년 2월 16일 폭격직후 발표한 이라크의 성명]


<font color="##003366">* 기획연재임에도 불구하고 연재순서를 지키지 못하는 점 사과드립니다. 이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다음호에 어떤 글이 실릴지 앞으로 예고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궁금해하시는 중동관련 주제가 있다면 yhkim76@mail.skhu.ac.kr로 연락주십시오. 적극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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