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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6.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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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에서 조로당까지(3)-북한 지도집단의 형성과 '만주·소련체험'

염복규 | 서울대국사학과 석사졸
<b>반세기의 신화</b>

한국현대사에서 실재했던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그 경력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알려져 있는 사례는 적지 않은 터이다. 그러나 그의 과거를 구성하는 사실들이 송두리채 정반대로 알려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마 김일성은 그러한 유일한 예일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북한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성과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기 전까지 남한의 유일한 공식적인 김일성론은 이른바 '가짜 김일성론'이었다. 즉 전설적인 항일유격투쟁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소련군의 힘으로 북한정권을 장악한 일개 무명 대원 출신 김성주가 도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반대의 논리는 1930년대 이후 만주에서의 모든 항일유격투쟁을 김일성이 지도한 것처럼 그리고 있는, 그리하여 수많은 고참 유격대 지도자들을 무분별하게 김일성의 수하로 묘사하고 있는 북한정권의 공식입장이다.

이러한 편향된 논리들은 북한이라는 실체의 엄존과 더불어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역사적 인물 김일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허구의 신화로 채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화의 장막을 걷어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1994년까지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은 분명 1930년대 이후 만주 항일유격투쟁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북한의 주장처럼 그의 모든 활동이 그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김일성의 유격투쟁이 '직접' 민족의 해방을 가져온 것도 아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의 유격투쟁이 어떠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속에서 김일성의 실질적인 역할과 위치는 무엇이었는지, 그리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 그와 그의 동지들은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사실관계의 연결일 것이다. 그 속에서 북한정권의 형성과정과 오늘날의 북한사회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은 또 다른 각자의 몫이라고 여겨진다.


<b>재만 한인 민족해방운동과 김일성의 등장</b>

알려져 있다시피 김일성은 1912년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당시 아버지 김형직은 미션스쿨인 평양 숭실학교 학생이었으며, 뒤에 역시 기독교계통인 명신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3.1운동 직전에는 독립전쟁론을 채택한 계몽운동 좌파 조직인 조선국민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어머니 강반석 역시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특히 그의 외조부는 목사였다. 1919년 가족을 따라 만주로 이주한 김일성은 1926년 민족주의자 최동오가 운영하던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의 가계와 성장과정에서 묻어나는 분위기는 '기독교 민족주의'이다. 이 점은 이후 김일성의 행보와 사상을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언제부터 공산주의사상에 접하게 되었을까?

1927년 김일성은 재만 한인 무장단체인 정의부의 학자금 지원을 받아 중국인 학교인 길림 육문중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 곳의 진보적 교사들에게 처음으로 공산주의사상을 배우게 된다. 이는 단지 학습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1929년 5월 김일성은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하게 되며, 일경의 정보자료에 처음으로 그 이름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공산청년회는 어떤 맥락의 단체였는가?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 만주지역 운동세력의 동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재만 한인 공산주의운동세력은 1927년 들어 국내외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에 따라 여러 민족주의단체들과 합작하여 1929년 4월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국민부 결성 무렵 이미 코민테른은 '12월테제'를 발표하여 재만 한인 공산주의세력에 대해 '계급 대 계급'전술 실행과 함께 조선연장주의의 폐기와 중국공산당(이하 '중공') 입당을 지시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국내 파벌들과 연계되어 있던 화요파와 ML파 등은 국민부와 극단적으로 대립하였다.

그런데 1929년 6월 결성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라는 조직(재건설파)은 '12월테제'를 수용하면서도 다른 파벌과는 달리 국민부에서 자신의 조직원들을 철수시키지 않는 등, 민족주의세력과의 연대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김일성이 참여한 조선공산청년회는 바로 이 재건설파와 노선을 같이 하는 조직으로서, '반ML 국민파 좌파(소장파)' 성향의 조직이었다. 청년회에서 소년단 조직 임무를 맡은 김일성은 1929년 가을 길림 제5중학교 독서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930년 5월 경에 석방되었다. 이 시기부터 김일성은 이종락이 이끄는 ㅌ.ㄷ(이른바 '타도제국주의동맹', 이 시기 'ㅌ.ㄷ'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는 여러 개가 있었다고 하며, 김일성은 그 중 하나의 조직원이었다), '제3세력'을 지향한 세화군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김일성을 비롯한 국민부 좌파세력은 매우 독특한 입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즉 '12월테제'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중공 입당 지시에 따르지 않았고, 민족주의세력인 국민부 상층부와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결국 이는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쥐고 가려는 노선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중공 입당=중국혁명운동에의 복무=조선해방에의 간접적 복부'라는 등식을 완전히 믿기 어려웠던 재만 한인 공산주의자의 난감한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제3세력'을 지향하는 운동에 대한 중공의 견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1931년 9월 만주사변의 발발과 더불어 일제의 군사적인 위협은 이제 턱밑에까지 다다라 중공과 완전히 같이 하지 않고서는 일체의 반일투쟁은 불가능한 시점에 이르렀다. 이 무렵 김일성도 중공에 입당하였다. 이후 김일성이 참여한 항일유격투쟁은 모두 중공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며, 김일성의 모든 활동은 그의 '주체적인 판단'에 따른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중국 역시 1980년대까지는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여 공식 당사서술에서 김일성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b>유격대 지휘관으로의 성장과 '반민생단투쟁'에서의 시련</b>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여 화북지역을 분리시켜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건국하자, 중공은 만주지역 당원들에게 반만·항일유격투쟁을 지시하였다. 이 무렵 백두산 산록의 안도현에서 공산청년조직에 참여하고 있던 김일성도 1932년 4월 중국 구국군 산하에서 별동대를 조직하여 유격투쟁에 나섰다. 이후 왕청현의 왕청유격대에 합류한 그는 1933년 9월 동녕현성 전투에서 지휘부와의 교신에 끊어져 퇴각하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침착하고도 교묘하고 영활한" 지휘능력으로 "아무런 손실도 없이 매우 안전하게"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함으로써 "모든 반일전사들에게 마멸할 수 없는 양호한 인상"을 남겼다.(1938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탄생 및 그 발전경과>> 중에서) 이 전투는 유격대 지휘관으로서 김일성의 성가를 높히고 중공의 신임을 얻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김일성은 여러 전투에서 전과를 올려 1934년 3월에는 중공 동만특위 서기 동장명의 장례식에서 사회를 맡을 정도의 지위를 확보했으며, 같은 해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편제를 이루어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사 3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당시 만주 항일유격대원들의 대부분은 빈농출신의 문맹자들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김일성은 중학교 수업까지 한 학력에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보태져 22세의 나이에 일약 단 정치위원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김일성에게 일대 시련이 찾아왔다. 이른바 '반민생단투쟁'의 여파에 휘말린 것이었다. 김일성은 왕청현에서 열린 '대중심판대회'에서 민생단으로 몰려 구금되었다. 처형 직전까지 갔던 김일성은 그를 신임하던 주보중 등 동만특위 군사지도자들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한동안 민생단 혐의자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아동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35년 2월 동만특위 확대연석회의에서 3단 정치위원으로 복권되면서 겨우 자유로와질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유격대원들의 상당한 신뢰를 받는 지휘관으로 성장하였다.

당시 그의 지휘 하에 있었던 한 중국인 유격대원은 김일성을 "고려인, 학생, 23세, 용감적극, 중국말을 할 수 있으며 유격대원에서 승진한 사람,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여러 차례 있으나, 대원 속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대원 속에서 신뢰가 있음"(1935 <<중공동만특위 서기 풍강의 보고>> 중에서)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시기 김일성은 어린 시절 형성된, 그리하여 국민부 좌파 시기까지 견지했던 민족주의적 성향을 상당히 감추고 중공 산하 유격대 지휘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거부할 수 없었던 '12월테제'의 일국일당주의가 그 첫 번째 외적 조건이었으며, '반민생단투쟁'이라는 또 다른 민족주의의 광풍은 한인으로서의 김일성의 민족주의에 대한 너무나 큰 위협이었던 것이다.


<b> 반제통일전선운동시기의 항일유격투쟁과 조국광복회</b>

1935년 7월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의 '반제민족통일전선' 방침 채택은, 비록 소련의 조국방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숨겨진 목적이었지만, 식민지 공산주의자들이 각자의 민족해방투쟁에 복무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은 한인이 주축이었던 동만 유격부대를 조선혁명의 주체로 인정하면서 기존의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하였다. '연군'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항일유격부대는 계급간, 민족간 '연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1936년 3월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3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유격대 통합편제로 인해 곧 제1로군 6사로 개편된 그의 부대는 과반수 이상의 한인을 포함한 약 600여명의 부대로서 조선해방과 관련된 임무 수행을 지시받고, 조·만 국경지대인 장백현과 백두산 일대를 작전지역으로 배정받았다. 6사는 주로 만주지역에서 주로 전투를 수행했지만 때로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치뤄진 유명한 전투가 바로 북한에서 매우 강조하는 '보천보전투'이다. 1937년 6월 김일성이 지휘하는 약 100여명의 유격대가 함북 갑산군 보천보로 진공을 감행하였다. 유격대는 면소재지의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대중들을 상대로 항일을 선전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린 뒤 안전하게 퇴각하였다.

이 전투는 그 규모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1935년초 도지사회의에서 조·만 국경지역은 '금성철벽'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총독부의 뒤통수를 친 사건이었다. 따라서 국내 신문에도 크게 소개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김일성이라는 이름 석자를 각인시켜준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국내사정에 어두운 사람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는 어떻게 일제 군경의 감시망을 뚫고 국내 진공에 성공했던 것일까? 일경은 만주의 유격부대와 연계된 어떤 국내 조직의 존재 가능성을 의심하였다. 사실 김일성이 지휘하는 제1로군 6사의 임무 가운데에는 국내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의 조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37년 초 장백현에서는 조국광복회가 조직되었다. 조국광복회는 국내에서 선을 확보하여 함북 갑산군에 조직을 만들었으며 적색노동·농민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원산, 함흥, 흥남, 명천, 성진 등지에도 조직원을 파견하여 결정적인 시기에 반일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한 이른바 '생산유격대'의 결성을 시도하였다.

일경의 의심 대로 보천보전투의 승리 뒤에는 갑산군 조국광복회원들의 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국광복회는 보천보전투 뒤 일경의 철저한 검색을 견뎌내지 못하고 1937년 10월, 1938년 7월 두 차례 검속으로 739명의 조직원이 체포되는 등 완전히 와해되었다.
일제의 탄압은 국내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 무렵 만주의 항일유격부대들도 일본군의 날카롭고 집요한 추격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김일성은 유격대 편제개편으로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군장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일제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승리가 쌓일 때 마다 일본군의 추격은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국내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전향한 것처럼 만주 항일유격부대의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일제에 투항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이제 생존을 위해서는 또 다른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었다.


<b>소련으로의 월경과 '만주파'의 형성</b>

일제의 무자비한 유격대 토벌이 계속되면서 동북항일연군은 더 이상의 유격투쟁이 불가능할 정도로 역량의 손실을 입었다. 이에 따라 항일연군은 최소한의 자기 보존을 위해 소련측과 협의하여 소련의 임시적 지도와 원조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항일연군의 지도자들은 만주 각지에서 활동중이던 부대들에게 소련령으로의 월경을 지시하였다. 월경은 1939년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김일성도 그의 처 김정숙을 비롯한 자신의 유격대원들을 인솔하여 1940년 10월 23일 마침내 소만국경을 넘었다. 소련은 월경해 오는 항일연군의 생활보장을 위해 하바로프스크 근방에 야영지를 설치해 주었다. 이 곳에서 김일성은 그 동안 항일연군 제2·3로군에서 활동했던 최용건(1900∼76, 평북 용천 출생, 항일연군 2로군 참모장, 해방후 조선인민군 총사령군, 초대 민족보위상, 국가 부주석 역임), 김책(1903∼51, 항일연군 3로군 정치주임, 해방후 초대 내각 부수상, 한국전쟁 전선사령관 역임)등과 처음으로 상면하였다.

후일 북한권력의 핵심이 되는 이른바 '만주파'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최초 항일연군은 어느 정도의 정비가 끝나고 장비가 보충되면 다시 만주로 돌아가 유격투쟁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41년 4월 일본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소련은 항일연군의 만주행을 중지시키면서 항일연군의 역량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 일환으로 처음 시행된 것은 대원들 중 능력자들을 선발하여 군사교육을 시키는 일이었다. 김일성도 다른 간부급대원들과 같이 이 교육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소련은 이러한 교육의 성과를 바탕으로 항일연군을 재편하여 소만국경지역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탐지하는 특수부대를 창설할 방침을 세웠다. 만주지역의 지리와 상황에 익숙한 항일연군에 대한 소련측의 이용방안이었다.

이 결과 1942년 9월 항일연군을 재편한 소련군 참모부 정찰부가 관할하는 88독립보병여단이 창설되었다. 모두 소련군의 계급을 받고, 소련군복을 착용하며, 여단 및 예하부대의 지휘관은 구 항일연군 지휘부가 맡고 부지휘관으로는 소련군 장교가 파견되었다. 김일성도 대위계급을 받고 제1보병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88여단은 그 후로도 소련내 소수민족출신 병사들을 충원하여 계속 확대되었다. 이 중 한인 병사들은 월경 당시 최소 100여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몇 년 간 88여단에서 함께 생활하며 활동하였다. 앞에서 썼지만 88여단의 주임무는 소만국경지역에서의 일본군 정찰 및 대민정치공작이었다. 이와 더불어 소련군의 각종 군사훈련 및 공산주의사상과 소비에트 건설에 관한 정치교육도 진행되었다.

이 공동의 경험은 이들을 굳게 결속시켰다. 해방후 북한권력의 핵심이 되는 '만주파'는 이를 통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항일연군의 월경과 88여단의 결성은 만주 항일유격투쟁에 참여했던 한인들에게 한 곳에 집결하여 안정된 상황에서 통일된 세력을 형성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동시에 이들은 소련군 계급을 받고, 그 군복을 착용한 것이 상징하는 바, 실제 중공 중앙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소련의 지도체계로 흡수되었다.


그렇다면 이들 '만주파' 내에서 김일성의 위상은 어떠했는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김일성은 이들의 지도자로 부상했는가? 해방후 '만주파' 내에서 김일성의 권위에 도전한 인물은 없었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위상은 소련 체류 기간 동안 형성된 것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점은 상당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사실 '만주파' 내에서 적어도 앞서 언급한 최용건이나 김책과 같은 인물들은 연배상으로도 김일성의 선배급이었으며, 항일연군 시기나 88여단 시기 모두 김일성과 동급이거나,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평가를 내릴만한 자료적 근거는 없는 실정이다. 다만 몇가지 방증을 통한 추정은 가능하다. 우선 김일성은 88여단 내에서도 주로 한인들로 구성된 제1대대의 지휘관이었다. 제1대대에는 안길, 최현, 김일 등과 같은 유력한 한인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리더로 부상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여단 부참모장이었던 최용건은 야전부대를 지휘할 수 없었으며, 김책의 경우 소련 월경 후 한 때 다시 만주로 돌아가 독자적인 유격투쟁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88여단 중국인 지도부의 김일성에 대한 신뢰를 들 수 있다. 앞서 썼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김일성을 아껴 반민생단투쟁의 와중에서도 김일성을 보호해준 바 있었던 88여단장 주보중은 이 시기에도 소련군 지도부에 김일성을 우수한 간부로 추천해 주었으며, 만주유격투쟁시 그의 업적을 소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소련군 지도부의 신임을 들 수 있겠다.

후일 작성된 한 문건에서 소련군 지도부는 88여단 시기의 김일성에 대해 "용맹하고 과단성 있음. 겸손하고 근면함. 동지들에게 호감을 주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여 과업 수행을 북돋아줌. 적에 대해서는 단호함. 자존심, 자신감이 강함."(북한 주재 소련 민정국장 레베제프가 작성한 <북조선 정치가들의 평가> 중에서) 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상의 요인들을 통해 김일성은 소련측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한인 지도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 시기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의 활동을 규정한 것은 당연하게도 일차적으로 소련의 이해관계였으며, 소련군의 전략방침이었다. 이는 그들에게 새로운 훈련과 활동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제약요인은 해방후에도 벗어나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이들의 북한 권력 장악과정을 외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소련의 규정성은 사실상 이 시기부터 움직일 수 없는 독립변수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b>1945년 9월 '김일성그룹'의 귀국과 그 이후</b>

1945년 8월 15일 종전과 더불어 88여단은 해단절차에 들어갔다. 김일성을 비롯한 한인들에게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내에서 활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귀국길에 오른 김일성그룹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에 도착하였다. 귀국 후 김일성그룹의 정치적 위치는 묘한 것이었다. 우선 소련은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는 달리 미래 북한의 지도자로 김일성을 정해놓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 반면 서울에서 재건된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중앙위원 서열 2위의 자리에 김일성을 올려 놓았다. 항일투쟁을 통해 형성된 김일성의 명망을 반영한 조치였다. 그러나 실제 김일성그룹은 비록 유격투쟁과 소련 체류 기간을 통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100여명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국내에 자리잡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숨가쁘게 돌아가는 국내의 정세와 미·소·중의 이해관계의 상충은 자연스럽게 김일성의 부상을 도왔던 것이다. 이 과정은 조선공산당이 남·북조선노동당으로 분리 정립되어가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북한정권의 수립과정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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