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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6.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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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그 깊고 오래된 상처에 대해서

조성은 | 회원
<b>친구, 회고된 80년대의 미학</b>

영화 <친구>를 재미있게 보셨나요? 혹시 <친구>를 보고 나서 개운치 못한 기분은 없으셨나요. 영화 <친구>에 대한 불만에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ont color="##003366">한국영화광인 조군은 오랜만에 영화를 한편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외국영화는 아무래도 바탕이 되는 문화적 이해가 없으면 감동이 덜 한 것 같아 주로 한국영화를 고집하는 조군은 몇 편의 영화를 후보에 올려놓고 고심한 끝에 <친구>를 선택했다. 너무 잘 팔리는 영화라 무언가 찜찜한 구석도 있었지만 그래도 먼저 본 수백만의 식견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윽고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친구>는 70년 후반의 부산으로 안내했다. 빠른 전개와 장동건, 유오성의 후까시가 두시간 정도 지루함 없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느낌을 중시하는 조군은 영화를 보고나서 싱숭생숭한 기분만 들뿐 별다른 필(feeling)이 오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반복되는 "친구"라는 단어가 관객들에게 선악(善惡)과 미추(美醜)를 뛰어넘으라고 강요하고 있을 뿐. 영화는 끝으로 갈수록 신파에 가까워지고, 줄거리 전개상 중요한 여주인공은 어느새 이유도 없이 화면에서 사라져버린다. </font>


영화 <친구>는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그저 시간때울만한 정도의 영화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수백만이 몰려가서 볼만하지는 않던데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영화 <친구>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font color="##003366">386세대’가 극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으고 있는 영화는 ‘친구’(곽경택 감독·씨네라인Ⅱ 제작). ‘친구’는 30대 또는 40대들의 아련한 향수와 추억의 감성에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검은색 교복 상의 호크와 단추 한두 개를 풀어헤친 채 교모를 삐딱하게 쓰고 국방색 가방을 옆구리에 낀 모습, 껄렁껄렁한 걸음걸이, 학교 화장실 한구석에 숨어 담배를 몰래 빨아대다 선생님에게 걸려 된통 혼이 나던 추억, 도색잡지와 롤러스케이트장 등. 386세대, 아니 그 윗세대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아이콘들이다.

영화 ‘친구’는 이들 세대들이 간직하고 있는,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학창시절의 여러 에피소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이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으고 있다. (중략) 개봉 첫 주말인 지난 3월31일과 1일 개봉관 앞에는 20대뿐만 아니라 30∼40대 관객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띄었다. 심지어 40대 중반의 여성들이 이미 매진된 관람권을 구하기 위해 암표상과 거래하는 모습까지도 연출됐다. (스포츠투데이 '386세대 부르는‘친구’의 음성'. 2001.4. 3)</font>


아마, 이 60년대생의 지지와 호응이 없었다면 <친구>는 보통의 흥행작에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70년대생인 저는 그만큼 재미가 덜했던 것일 수도 있구요.
영화의 주인공은 64년생입니다. 물론 이 영화를 만든 감독도 63년생이지요. 영화 <친구> 지지자의 상당수도 이 연배일텐데요. 이들이 누구입니까. 한국에서 그 유명한 386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의 열광의 대상이 그저 '친구아이가'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상투적인 드라마라니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사회의 격동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인식을 갖고 사회에 나갔다던 이들이, 80년대를 그리면서도 사회 상황은 전혀 배제한 채 오히려 남성중심적이며 혈연.지연에 얽매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친구>에 갈채를 보낸다는 사실은 그 세대의 위치를 반영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30대말에서 40대 초반이 된 이들은 사회전체에서 이미 주류로 편입되어 자리를 잡고 있지요. 그 과정에서 이전 세대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상당히 저버린 채, 주류의 가치관에 이미 충분히 매료되어 있다는 것을 영화 <친구>의 열풍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386 세대란 말 자체가 허상에 가깝기도 하고, 이 세대의 정치적 행태로부터 수많은 이율배반을 확인하긴 했지만요.

몇 년전까지 계속되었던 이른바 후일담 문학의 유행에서 확인한 것이기도 한데, 이 세대는 자신들의 젊은 날에 대해 상당히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세대를 넘어서 젊은날이란 늘 아름다운 시절로 회상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386들은 여기에 '민주화 운동 세대'라는 정당성을 덧붙여서 보다 찬란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공지영류의 후일담 문학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그때 우리는 참 아름다웠지...". 소설속 주인공들도 '동지애' 하나로 험한 세월을 버텼던 것으로 묘사되곤 하지요. 그 아름다움의 반대쪽에는 현실의 고달픈 상처가 있구요.
저는 영화 <친구> 열풍 뒤에 이런 회고된 80년대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b>매혹의 기억? 기억의 매혹</b>

아시다시피, 80년대는 그 이념의 과잉에 비해 당시의 사회적 전망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했다고 평가됩니다. 영화판도 이러한 과잉과 급속한 후퇴가 뚜렷하기에, <친구> 같은 영화조차 좋은 영화의 반열에 끼어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 3월30일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는 "매혹의 기억"이라는 영화전이 있었습니다. 독립영화협의회에서 매월 갖는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라는 기획전의 일환으로,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등 80년대 대학사회를 뜨겁게 만들었던 대부분의 영화들을 모아 3일간 상영했습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제목들이 반갑기도 하고, 영화제이후 비디오로 출시까지 되었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지기도 하였지요.


<font color="##003366">조군의 대학생활은 이른바 운동권 영화의 세례 속에 굴절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3년 3월 2일. 바야흐로 봄날은 오고 대학엔 들어왔지만 고등학교와 달리 입학식이 끝난 자신을 아무도 챙겨주지 않음에 불만을 품은 조군은 학교밖으로 무작정 나가기로 작정을 했다. 그러나, 서울생활 첫날 갈곳도 없어 막막했던 차에 학교 담벼락에 붙어있던 영화포스터 한 장을 보고 한국영화광 조군은 머나먼 H대 체육관까지 어렵게 찾아갔다, 단지 입장료가 무지 싸다는 이유로. 포스터의 영화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장산곶매의 마지막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였다.

정부의 탄압으로 녹음을 못해서 체육관 무대에 배우들과 음향담당들이 올라와서 화면에 맞추어 대사도 하고 효과도 하는 동시에 배경음악을 맡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노래공연도 하는 기상천외한 상영이었지만, 고등학교에서 많이 맞고 자란 조군은 암튼 엄청 감동을 받고 이후 비딱한 세계관에 엄청 친한 척 하기 시작했다. </font>


저는 그렇지 않았지만, 여러분 중에는 사수대를 세워놓고 이 영화들을 보신 분들도 있을겁니다. 이런 영화들이 "매혹의 기억"이란 칭호를 받다니 세상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87년에서 92년 사이에 제작된 이 한줌의 영화들 외에는 그만큼의 성과를 낸 90년대 극영화가 부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기획전이기도 했습니다. 노뉴단을 비롯한 다큐영화들이 현장에서 부각된 측면도 있었지만, 이들 영화를 제작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자신이 이야기했던 메시지를 배신하고 안일하게 일상과 주류의 길로 타협했던 것이 극영화운동의 후퇴에 더 큰 원인이지요.
80년대말 영화운동의 주역들은 다른 영역보다는 더 빨리 주류에 편입되어 버렸습니다. 정확하게는 주류 영화판으로 거의 남김없이 들어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회성도 없고 작품성도 없는 주류영화의 트렌드에 매몰되고 있다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font color="##003366">80년대 영화운동의 대표주자 <장산곶매>의 이후 행보에 관한 보고서: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등을 만든 장산곶매는 90년대 초중반 이름도 없이 사라졌지만 90년대 말까지도 그들의 영화는 대학가에서 심심치 않게 상영되었음. 이 영화들을 만든 사람들은 당시엔 경찰서를 들락거렸지만, 지금은 충무로에 잘나가는 감독이됨.

<오, 꿈의 나라>: 1987년 7월, 성균관대에서 열린 대학연합 시사회에 참여했던 서울예전, 중앙대, 한양대 영화패 중에서 의식있는(?) 영화인들이 의기투합하여 88년 여름부터 제작한 작품. 이 영화의 연출자는 이은, 장윤현, 장동홍으로 이 모임이 <장산곶매>로 발전하게 되어 <파업전야>, <87에서 89로 전진하는 노동자> 등을 만들어 냄.

이은: <공장의 불빛/87년 여름> <오, 꿈의 나라/88년 12월> 등을 연출하고 <파업전야/90년 2월> <닫힌 교문을 열며/91년> 등을 제작한 후, 95년 명기획 심재명 대표와 함께 명필름을 설립함. 첫영화 <코르셋>으로 절반의 성공을 거둔 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을 직접 연출 하고 <접속> <해피엔드> 등의 제작으로 연속 안타를 날린후 드디어 <공동경비구역 JSA> 제작으로 대종상까지 수상. 그의 과거에 대한 유일한 흔적 - 명필름의 홈페이지 회사소개를 누르면 "주류로부터의 전위를 꿈꾸다"라고 글귀가 선명하게 떠오름.

장윤현: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연출 이후 언제인지 모르지만 헝가리 유학을 다녀온 후 97년 <접속>, 99년 <텔미썸씽>으로 A급 감독 대열에 순식간에 합류. 현재 후속작 제작중.

장동홍: 가장 늦게 주류 편입으로 가장 불쌍한 형편.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의 연출후 행적 모름. 98년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을 연출하고 나서 흥행에서도 크게 빛을 못 보고, 평단에서도 혹평. 시네21의 20자 약평 曰 "어제는 장산곶의 매, 오늘은 팬시점의 참새 ★★" </font>


당시 영화를 만든 주역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포기한 지금, 그 때의 영화들에게 "매혹의 기억"이라 이름붙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독립영화사가 주류영화사에 비해 훨씬 정당성이 있다는 것과 독립영화인들이 주류에서도 당당하게 성공했다는 것, 그런 등등의 자기 정당성을 과거에서 끌어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80년대 후반 독립영화가 획득한 사회적 비판의 날카로움은 지금 독립영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기억의 속성이란 것이 늘 매혹적이라는 사실이 또다시 확인됩니다.


<b>들국화와 다섯손가락</b>

80년대에 대해 회고할 기획가 한번 더 있었습니다. 바로 들국화의 컴백이지요. 한국적 록을 자생적으로 구축함과 동시에 암울했던 시절 포효하는 보컬 전인권의 음성으로 "행진"을 외치거나 "그것만이 내 세상"임을 선포할 때, 젊은이들은 그 음성을 자신들을 대변하는 외침으로 받아들였던 들국화. 그 들국화를 오랜만에 TV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키보드 주자 허성욱이 캐나다 선교 도중 사망한 이후, 재결성과 콘서트로 다시 모인 들국화를 위해 후배 가수들이 헌정음반을 만들었습니다. 그 기념으로 열린 세종문화회관에서의 헌정공연을 TV에서 보여주더군요. 실력있는 가수들의 연주가 끝나고 드디어 들국화가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font color="##003366">살이 붙어서 둔해 보이는 전인권이 "행진,하는 거야"라고 부르짖을 때,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건지 아무런 감동이 없었고, 최성원이 예의 그 조크, "매일 그대와 옷을 벗고파"라고 했을 때, 그것은 흥겨운 뒤틀음이 아니라 느끼한 애드립에 불과했다. 과거 라디오 프로그램에 가끔 나와서 거침없이 말하던 그들의 거침없음이 이제는 거세되어 하나의 상품으로 잘 포장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의 선동에 젊은 지향을 꿈꾸던 이들은 과거의 추억을 되씹으러 그들을 감상할 뿐, 정신이건 음악이건 더 이상의 발전도 계승도 아무것도 없이 뒤늦게 다시 팔리고 있는 것이다. </font>


80년대 대중음악에서 하나의 저항을 상징했던 들국화도 '추억 들국화'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지요. 다시 꺼내본 첫 번째 앨범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완성도 높은 명작이던데요. 그 이후의 작업들이 부재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이두헌이 첫 번째 솔로앨범을 들고 귀국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다섯손가락 - 들국화와 같은 해에 데뷔해 TV에서는 들국화보다 잘 팔렸던, 마치 의도적으로 들국화의 영향력을 반감시키려고 대학생 록그룹으로 키워진 듯한, 그래서 대중음악사에서 별로 평가를 못받는 다섯손가락이 들국화의 부활과 비슷한 시기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의 대중적 인기는 다섯손가락도 대단했지요. 인기만으로는 들국화에 필적할만도 했음에도 이두헌의 복귀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더군요. 들국화에 대해 추억하고 헌사를 바치는 또래들이 이두헌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더군요. 들국화의 음악성이 뛰어나서?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다섯손가락의 젊은 감수성과 우울한 톤도 나름대로 괜찮았는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키운 30대 또래들이 회고하고 칭송하는 자신들의 것은 나름대로의 진보성이 있으면 더 그럴듯해서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문화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지만, 지금은 거세된 것이어야 하구요.

들국화에게 무한한 헌사를 바치는 작업을 <장산곶매>의 마지막 영화 작가인 강헌이 주도한다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b>전공투 세대, 실패의 기억</b>

이런 60년대생들의 회고의 미학에는 현실의 각박함이나 삼엄함이 존재하고 있으리라 추측됩니다. 회사내에서 중간 관리층으로 편입해가면서 위에서 눌리고, 밑에서 치이는, 그리고 IMF 이후 사는 것은 팍팍하기만 한 그런 현실말입니다.
히로시마 켄시의 작품속에서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도 그런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한국에 소개된 일본 만화작가 중 사회적인 주제에 관심이 깊은 히로시마 켄시는 그 자신이 전공투 세대이지요. 그는 학생운동의 주류에 서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관심은 깊었다고 스스로 말하는데요, 68 당시 와세다대 법학부에 다니던 그는 전공투 투쟁의 폭력성과 학생운동 조직의 비도덕성에 대해 동의하지 못해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출세작 <시마과장>을 보면, 당시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한 친구가 등장합니다. 그는 뒤늦게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시마가 다니는 기업의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생활에 허덕이느라 당시의 열정을 떠올릴 틈도 없이 바쁘고 지친 모습으로 그려집다.

급기야 그는 친선 골프대회 상품인 비디오 캠코더를 타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고 이것을 시마가 발견해서 해결해나가는, 그런 하나의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아마 이런 상황을 그리면서 히로시마 켄시는 과연 과거에 그렇게 사회변혁을 외치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기 삶을 제대로 꾸려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켄시가 전공투에 대해서 일종의 실패의 기억으로 묘사하고 운동 주체들의 삶을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지 않는 것은 전공투 세대가 가지는 하나의 공감대로 보여집니다. 그 핵심은 아마도 자신들의 주장을 삶 속에서 구현해내는 지속성과 주장이 다양한 모습으로 체화되는 진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

그토록 극심했던 일본 68 혁명의 실패는 어떻게 보면 이러한 주체들의 내부적 실패임과 동시에 삶의 자리에서 혁명의 이념을 재생시킬 또다른 기재들을 찾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그런 면에서 한국의 60년대생들도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구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80년대에 대한 기억의 깊음은 또다른 한편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상처를 넘어, 진정성을 키워나가는 것은 반성의 깊이와 무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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