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3-4.105호
첨부파일
105_기획연재_보건의료팀.pdf

보건의료의 이론과 역사

보건의료운동의 이념역사현실 -2

김태훈, 김동근, 이은주, 최윤정 | 보건의료팀
보건의료팀은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과제와 전망을 밝히기 위한 보건의료팀의 입론을 마련하기 위해 2009년 세미나를 시작으로 2010년부터 교안을 작성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교안의 구성은 크게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역사와 과제로 이루어진다.『사회운동』에서는 지난 1~2월호부터 총 4회에 걸쳐 그간 작성한 교안을 축약하여 연재한다(축약되지 않은 교안 원본은 사회진보연대 자료실에 게시함). 이번 호에는 두 번째 파트를 연재한다.

기획연재 1
I.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1. 자본주의의 발전과 19세기 보건의료
2. 법인자본주의 발전과 20세기 보건의료
3. 한국보건의료체계의 역사 :1945년부터 1989년까지
기획연재 2
II.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
2. 자본주의적 의료 분석
3. 생태학적 관점
4. 페미니즘적 관점

기획연재 3
III. 남한 보건의료운동의 역사
1. 보건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대안세계화 운동
2. 남한 보건의료운동의 시작과 발전
3. 남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보건의료운동의 한계
기획연재 4
4.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보건의료운동의 모색
5. 보건의료운동의 현 정세와 과제


[기획연재 2]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

건강과 질병 그리고 의료에 관한 두 가지 주요한 인식이 존재해왔다. 사회적유물론적 인식과 임상적개인주의적 인식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립적 이익을 반영하면서 보건의료의 이론과 실천에서 두 가지 주요한 조류를 이루었다.
엥겔스(Engels)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장티푸스, 결핵, 구루병의 병인학과 역학을 상세하게 분석했으며, 의학적 개입만으로는 그러한 질병들이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질병을 사회적 생산관계와 그 관계가 낳은 계급구조에 연관시켰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영양상태 및 주거환경과 감염성 질병의 상관관계를 지적했으며 계급 간 영아사망률의 차이, 작업환경과 질병의 관계를 조사했다. 문제는 자본주의에 내재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해결은 자본주의의 지양을 필요로 했다. 엥겔스의 영향을 받은 비르효(R. Virchow)는 발진티푸스의 유행에 대한 해결책으로 토지개혁과 소득재분배, 주거개선, 기타 사회적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그는 인구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개혁은 사회의 지배적인 계급관계를 위협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엥겔스와 비르효의 사회적유물론적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적 보건의료 분석의 기원을 이룬다. 이들의 입장은 건강과 질병의 사회적 원인과 기원을 정의하고, 이를 사회의 권력관계와 관련시켰다.
반면 지배계급은 이러한 입장을 사회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대신 질병의 원인을 박테리아와 같이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미시적으로 관찰 가능한 요소에서 찾으려는 입장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현미경을 통한 미시적 탐구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거시적사회적 조건은 무시되었다. 질병에 대한 개입역시 미시적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면서 임상적개인적 의료가 형성되며, 병원조직은 이를 완벽하게 구현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을 사회적 생산관계와 계급구조에서 찾는다면, 노동과 건강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 중요해진다. 주류적 입장에서 노동은 환경적인 문제로 제시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개입전략은 노동자가 병리적 요인에 노출되는 빈도를 줄이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 노동자와 환경, 양자 모두를 결정하는 사회관계에 대한 이해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개인과 환경이라는 이분법을 재생산한다. 또 다른 입장은 노동을 노동자의 욕구와 기대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소득과 같은 자원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활동이자 사회관계로서의 노동이 등장하지 않으며, 시민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소비자로 인식되고 정의된다.
아이어(Eyer)와 카라섹(Karasek)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앞의 두 전통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들은 건강과 질병을 사회의 조직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사회의 조직화 과정은 스트레스(아이어)와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 정도(카라섹)를 통해 건강과 질병을 결정한다. 이 작업은 건강과 질병의 총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러한 총체성을 생산관계와 결합시킨다.
다른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은 노동을 사회적 생활의 조직자이자 사회적 모순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간주했다. 나바로(Navarro)는 생산의 세계에서 개인이 점하는 위치(계급)가 소비교환분배정당화의 세계에서의 위치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건강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산업보건안전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마르크스주의 보건연구의 주요한 주제인 작업장의 변화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분석하는 연구를 결합할 수 있었다. 산업보건안전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분야였다.


2. 자본주의적 의료 분석

가. 권력관계의 총체로서 의료

의료는 항상 특정한 생산양식 내에 접합되어 있다. 따라서 의료 일반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봉건제적 의료, 자본주의적 의료, 또는 공산주의적 의료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 유물론적 분석은 특정한 의료형태 내부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경제적 수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의료는 여러 다른 부분들로 분리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따라서 의료를 자립적 권력으로 간주하고 사후적으로만 지배계급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도구주의적 인식을 경계해야 한다. 계급은 처음부터 의료 내부에 위치하며 의료의 결정과정에 개입한다.
의료에 대한 도구주의적 시각은 의료를 다양한 이익집단들(의사, 제약회사, 보험회사)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하는 분석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분석은 의료에서의 집단적 투쟁의 일련의 규칙, 가치, 파라미터를 정의하는 비가시적 행위자들을 무시한다. 또한 의료 분석을 가시적인 행위자와 개인의 갈등에 관한 분석으로 축소하는데, 가시적인 행위자가 계급관계 내에서 투쟁하고 있는 계급의 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도구주의적 시각의 또 다른 예는 의료를 우선적배타적으로 자본가계급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발견된다. 의료는 부르주아지가 통제하는 도구로 간주되며 노동자계급은 의료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입장이 갖는 한계는 첫째, 계급투쟁이 의료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 둘째, 의료가 자본축적과 정당화라는 기능을 최대화하기 위해 부르주아지에 의해 활용되는 도구로 간주된다는 점, 셋째, 노동자계급은 단지 불만족스러워서 더 많은 의료서비스를 요구하거나 만족스러운 상태로만 간주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노동자계급이 사회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현존질서 이외에 어떠한 대안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물리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봉기하지 않는 상태일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 물론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의지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지의 의료지배는 부르주아지만이 전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이 아닌 일련의 권력관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의료를 자본주의적 의료 또는 부르주아적 의료로 정의하는 것은 부르주아가 지배적인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의료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의료지식행위제도는 계급관계와 계급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권력관계의 총체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미국 의료의 진화는 미국 자본주의 진화의 일부로 간주된다. 따라서 의료의 법인화, 즉, 금융과 법인자본이 자금관리소유의료서비스의 점유 등에 깊숙이 관여하는 현상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료에 대한 도구주의적 시각은 법인화를 의료에서의 새로운 권력집단, 예를 들어 법인기업의 출현으로 정의한다. 이들은 의료의 진화를 자본주의의 발전과 분리해서 사고함으로써 법인화가 왜 발생했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며, 예기치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나. 자본주의적 의료의 이중적 기능

자본주의적 의료는 이중적 기능을 지닌다. 사회집단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관리와 치료라는 어떤 생산양식에서도 필요한 기능과 노동자계급과 대중에 대한 통제의 기능이다. 두 가지 기능은 단순히 병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의 기능을 통해서 통제의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적 의료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통제의 기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통제의 기능이 필요의 기능을 형성한다. 의료는 사회적 분업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자본가계급이 지배적인 지배·피지배의 계급관계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이다. 의료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에 대해 나바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과정에 대한 지배수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기본적으로 집단적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문제가 개인적인 치료방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그릇된 의식을 창출한다. 즉, 의료는 정치적인 문제를 탈정치화하는 기능을 한다. 집단적인 대응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인 것처럼 제시하는 이러한 역할이 의료의 이데올로기적 기능, 우리 사회 계급관계에 대한 정당화 기능이다.

의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료전문직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다. 의료에서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의료의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 의료전문직의 쁘띠 부르주아적 성격은 그 계급적인 기원과 구성위계지위수입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의료가 요구하는 의료전문직의 역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의료의 계급적 성격은 의료전문직의 구성을 바꾼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적 의료의 이중적 기능을 재생산한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의료전문직은 의료의 관리자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언제나 의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최종심에서 결정한다. 이러한 지배는 의료행위나 제도뿐만이 아니라 의료지식의 생산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의료는 근본적인 치료(노동과정과 계급관계에 대한 개입)를 하지 않고, 사후적인 관리로써 대증적 치료만을 할 뿐이다.

다. 의료의 위기

의료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의료의 위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도 나타난다. 서구에서 의료의 위기는 대체로 인구의 건강 증진에 조응하지 않는 의료비 지출의 급격한 증대로 개념화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해석 중 하나는 문제의 근원이 의료의 산업화에 있다고 본다. 의료기술의 진화 자체의 결과로 보는 입장이 있고, 의료전문직이 의료를 조작하고 유해한 성장을 촉진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나바로는 의료가 위기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의 일부로 복지국가도 위기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즉, 의료의 위기는 의료제도에 반영된 자본주의의 위기이다. 의료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한 주요한 보건문제들, 즉 노동자들이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나타나는 스트레스 관련 질환과 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른 질환들 · 심혈관계 질환, 궤양, 암 등 · 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한 문제들은 대부분 의료 외부적인 조건들에서 기인하고, 따라서 의료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의료가 손상을 호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많은 의료를 원한다. 이러한 대중적 요구로 인해 의료가 성장하고 의료서비스가 확대된다. 자본주의의 확대에 따른 자본주의적 질병의 확산과 대증적 치료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의료의 양적 확대는 ‘의료비의 급격한 증가와 그에 조응하지 못하는 대중의 건강’이라는 현대 보건의료의 위기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나바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 대한 자본의 요구와 자본의 침투가 일반적으로 사회적 서비스, 특히 의료서비스의 성장을 필요로 하는 보건문제들을 점점 더 많이 창출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의료는 자신의 통제권 밖에서 야기된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는, 즉 불가능한 것을 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점이 의료의 비효율성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위기에 대한 보수주의적인 또 하나의 대응은 보건문제의 해결책으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하는 것, 즉 질병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크로포드(Crawford)는 이러한 희생자 과실론을 비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과 주거, 환경조건, 그리고 자신들이 포괄되는 관계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굿마커와 베를리너(Gutmacher and Berliner), 스타크(Stark) 등은 (계급·인종·성 등을 포함하는) 사회의 권력관계 내에서 개인이 점유하는 지위가 건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파악했다.
웨이츠킨은 의료의 위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 이윤의 구조와 분리될 수 없으며, 위기가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모순으로서 웨이츠킨은 기업의 의료분야 침입, 불균등한 사회적 발전, 비싼 기술이 더 효과적이라고 전제하는 의과학의 이데올로기, 민간영역에 대한 공적인 재정 투여, 인도적인 치료를 방해하는 의료 인력의 특징 등을 제시한다. 특히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저발전 국가 모두 의료비 부담은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법적 행정적 장치들이 의료비 절감을 위해 고안되었는데, 그것들은 주로 의료 기술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비용효율 평가 모델에 근거한다. 즉, 의학적 효과에 비해 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의료기술은 규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비에 대한 대부분의 비마르크스주의적 분석들은 비용유발적이고 비효율적인 기술이 도입되고 확산되는 보다 광범위한 정치경제적 맥락, 즉 자본주의적 이윤 구조에 대해 맹목적이다.
의료기술이 이윤 추구에 종속적이 되는 경향 자체가 어떤 의료기술을 개발할 것인가를 질적으로 결정짓기 때문에 이미 개발된 신의료기술에 대한 비용효과성 평가는 제한적이다. 이윤추구적 경향은 의료기술 개발을 민중들의 건강을 보편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구매력이 높은 방향으로 집중시키기 때문에 보편적인 건강 향상의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며 이는 의료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3. 생태학적 관점

가. 현대의학의 생의학적 모형에 대한 비판

현대의학은 건강을 질병의 부재로 정의한다. 생물학적 정상성 개념에 기초한 정규분포곡선 상의 위치를 통해서 건강과 질병을 규정한다. 이러한 현대의학의 건강과 질병 개념은 ‘생의학적 모형’에 기초를 둔다. 생의학적 모형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고 육체를 다양한 부품들로 조합된 기계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또한 생의학적 모형은 ‘특정병인론’(모든 질병이 생물학적으로 검출 가능한 특정한 질병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가정하는 이론)을 수용한다. 그 결과 현대의학은 건강과 질병에 대해 생물학적 환원론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감염성 질병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던 현대의학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현대의학은 과거보다 강화된 독성과 내성을 가지고 복귀한 감염성 질병과 새로이 출현한 감염성 질병,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 양산한 만성질병에 대해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 채 대증요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의학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회적 요인을 강조하면서 의학보다 의료의 제도적 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견해는 의학의 생물학적 기초를 과학적으로 재구성하지 못하는 외재적 비판에 머무른다. 반면 생명체의 유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대체의학을 제시하는 입장은 대부분 반과학적인 신비주의 성격을 띤다.
건강과 질병이 결국 생명체의 상태에 대한 설명과 판단에 근거하는 이상 의학은 생물학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대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더 작은 단위, 즉 유전자나 개별 유기체 등으로 환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복잡한 체계에서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사회·생태적 요인을 의학적 지식에 체계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관점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생태학적 관점의 발전
생태학은 기존 생물학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통해 현대의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자 레빈스는 생태학과 현대의학 비판을 결합하는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생명현상을 복잡한 체계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건강과 질병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생태학은 유전학에 기초한 현대생물학의 환원론을 비판하고 다양한 수준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현상을 이해한다.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에서의 이러한 차이는 궁극적으로 생명현상의 역사적 변화, 즉 진화를 설명하는 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나. 생태학적 진화론

기존의 유전학적 종합설은 임의적·연속적 유전자의 변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연선택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환경은 개체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결국 생명현상을 유전자의 문제로 환원하는 접근법을 따른다.
1890년대에 생물학의 한 분과로서 등장한 생태학은 생명체들 사이의 상호작용, 나아가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다. 환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단일한 기준에 따라 개체들의 적응도를 개별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오히려 유기체의 적응 메커니즘은 환경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수준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학적 모형화의 시도와 성과들이 있었다.
대안적인 ‘생태학적 종합설’도 유전적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 유전자에서 지질학적 또는 천문학적 현상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에서의 상호작용에서 자연선택이 발생한다고 본다. 또한 유기체의 모든 형질이 적응적 목적에 부합한다는 기능주의적 설명을 비판한다. 그들은 유전적 기초를 지닌 형질로 간주되는 많은 현상이 유기체의 발생 과정에서 나타난 필연적 부산물일 뿐 자연선택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진화가 개체의 유전자 수준이 아닌 개체, 개체군, 종 등과 같은 다양한 수준에서 파악된다면, 환경의 수많은 측면에 적응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모두 적응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비적응적 과정이 조건의 변화에 따라 적응적 중요성을 부여받는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선형적 진보의 사다리라는 관점은 다양한 유기체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적 조건의 다양한 측면과 수준에 적응하면서 공진화한다는 관점으로 대체된다.

다. 생태학적 관점과 보건의료

1) 역학적 전환
생태학적 관점은 자기조절체계의 작동이 자기보존적인가를 기준으로 건강과 질병을 판단한다. 다양한 수준의 자기조절체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다양한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병원균과 인간의 공진화, 자본주의적 노동과정과 생활양식의 변혁 등은 건강과 질병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한다.
질병유형의 변화와 이에 따른 의료형태의 변화를 역학적 전환이라고 부른다면, 첫 번째 역학적 전환은 농경에 기초한 문명이 확립된 ‘신석기혁명’과 함께 발생했다. 인구가 성장하고 도시가 발전하면서 고유한 지역적 질병을 갖는 질병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몽골제국의 성립에 따른 동서양의 교류는 질병이 유라시아 전체에 확산되게 하였고, 신대륙으로 질병이 확산되어 생태적으로 다양성이 부족하고 질병의 종류가 적어 면역이 되지 않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역학적 전환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산업화도시화와 현대의학의 태동으로 이루어졌다. 현대의학이 발전하면서 항생물질과 면역법이 개발되었고, 물질적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공중보건운동이 실시되면서 감염성 질병이 감소하였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적 노동과정 및 생활양식에 기인하는 비감염성 질병, 특히 만성질병과 노화가 중요한 의학적 문제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소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결핵과 같은 감염성 질병이 다시 등장했으며, 사회생태적 환경의 변화와 함께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신종 인플루엔자와 같은 새로운 감염성 질병도 출현했다. 이는 세 번째 역학적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대의학은 병원균 퇴치에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질병이 만연할 수 있는 생태적 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변혁은 필수적이지만 이것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며, 생태학적 관점에서 감염성 질병에 대처해야 한다. 신종플루의 경우 대규모 사육은 밀집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돼지들을 집중시킴으로써 바이러스들이 복제를 통해 역병으로 발전할 기회와 가능성이 극대화시킨다. 또 돼지들의 원거리 수송이 늘어나면서 감염 범위도 확대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인 습지 파괴 또한 신종플루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관개농업을 위해 댐을 건설하고 습지의 물을 이용하면서 철새들도 관개 수로와 농지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방목되는 가금류, 특히 오리들이 야생 조류가 배설한 바이러스와 빈번하게 접촉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자기조절체계
자연에서 개별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단위는 외부 환경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내부 구조를 갖지만 또 그 경계에서 내부와 외부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여기서 외부는 물리적 환경일 수도 있고 다른 개체나 종일 수도 있다. 생명체는 환경의 상반된 요구 속에서 내외부적 작용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자기조절체계를 가진다. 이 자기조절체계가 안정적일 때 내외부적 상호작용이 지속될 수 있으며, 파괴되거나 오작동하여 자기보존에 지장을 줄 때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규정될 수 있다.
자기조절체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손상될 수 있다. 자기조절체계의 손상이 질병을 야기하며, 질병은 손상의 원인에 따라 감염성 질병과 비감염성 질병으로 나뉜다. 감염성 질병은 병원균으로 간주되는 다른 생명체와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자기조절체계가 손상되는 것이다.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나 소화기관의 박테리아 등을 보면 기생체와 숙주의 관계는 항상 병리적인 것은 아니다. 양자의 상호작용의 결과가 숙주인 인간의 자기조절체계의 손상을 야기할 때 발생하는 것이 감염성 질병이다. 이 때 숙주의 영양 상태와 면역력 등이 발병의 조건이 된다. 또 인구밀도, 주거유형, 생산수단과 같은 생활방식이 변화할 때 병원균, 질병의 매개체 등과 우리의 관계 역시 변화한다. 예를 들어, 흑사병은 6세기 로마제국이 쇠퇴하는 시기에 최초로 창궐했으며 14세기 봉건제의 위기가 심화되던 시기에 다시 등장하여 인구를 격감시켰다. 그 사이에도 흑사병은 몇 번씩 유럽에 진입했겠지만 인구가 취약해지고 쥐를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붕괴하는 시기에 창궐했던 것이다. 병원균은 질병 발생의 여러 원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병원균 외의 요인으로 인체의 자기조절체계가 손상되는 것이 비감염성 질병이다.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중요한 메커니즘인데, 이 질병의 주요 원인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로 인한 생활습관과 노동조건의 변화, 일상적 스트레스와 사회생태적 위험 증가 등이다. 자본은 노동을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 뿐 노동을 매개로 한 신진대사 과정의 구체적 메커니즘은 고려하지 않는다. 특정 행위의 반복은 육체의 자기조절체계를 고갈시키며, 지속적인 통제와 감시로 인한 스트레스는 육체의 자기조절체제를 손상시킨다. 또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건강을 유지할 물질적 자원의 결핍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가중시켜서 생리적 메커니즘을 통해 육체의 질병을 유발한다.


4. 페미니즘적 관점

가. 재생산의 의료화

20세기 대중보건의료의 발전은 여성에 대한 보건의료서비스를 확대한다. 그러나 그것의 기초를 이루는 생의학 모델은 건강한 남성의 육체를 인체의 표준으로 설정함으로써 여성 건강의 독자성을 무시한다. 그것은 여성 육체의 고유성을 생식기관의 해부학적 차이로 정의하고, 자기조절기능의 차이를 재생산 기능으로 환원한다. 이에 따라 여성보건 문제는 산과학 및 부인과학의 대상으로 한정되고, 여성의 건강 욕구는 모성 및 아동 건강 프로그램으로 위임된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관할에 있던 재생산과 관련된 모든 관행은 이제 대중보건의료에 의해 독점되는데, 이를 재생산의 의료화라고 부른다. 20세기 초까지 재생산을 보조하는 기술의 효과와 안정성의 측면에서 산과의사의 경쟁력은 여성조산사에게 밀리고 있었다. 임신출산은 질병으로 간주되고, 치료를 위한 병원출산이 권장, 확대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대공황과 2차 세계전쟁을 계기로 국가적 인구조절의 필요성이 인식되면서 가족계획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대중보건의료의 사회정치적 위상이 강화된다. 그리고 치료혁명으로 산부인과의 치료능력이 개선되면서 재생산의 의료화 과정이 실질적으로 완성된다. 이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매개로 한 사회적 지배·통제관계의 변형이자 확장이다.
병원출산 과정은 전적으로 의사에 의해 주도되고, 산모는 오직 환자로서 취급되며, 그녀의 육체는 치료를 위해 개입조작되는 대상으로 환원된다. 법인자본의 생산력과 산부인과학의 전문성이 재생산에 대한 통제기술로 체계적으로 결합되자 임신과 출산의 모든 과정은 도말검사선별검사초음파검사 등 기술적 절차로 채워진다. 이제 여성은 산업화된 의료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재생산 능력을 알지도 쓰지도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한다.
여성과 현대보건의료의 관계가 재생산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임신출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여성의 질병은 대부분 기질적 원인이 없는 꾀병 또는 심인성 질환으로 간주된다. 즉 재생산이 과잉의료화 된 반면 여성의 다른 질병은 과소의료화되는 것이다. 성차별적 의학적 임상연구는 이러한 현실을 대표한다. 중요한 임상연구의 대부분은 남성을 대상으로, 또 이른바 ‘남성적’ 질병을 주제로 이루어진다. ‘여성적’ 질병이 연구 주제가 될 때에도 생식과 무관한 문제들은 대부분 제외되거나, 남성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이 이루어진 후 바로 여성에게 시판된다.

나. 여성건강운동의 대중보건의료 비판

1960년대 말부터 권위주의적인 산부인과에 대한 이러한 경험의 공통성을 집단적으로 인식하면서 대중보건의료를 비판하는 여성건강운동이 조직된다. 초기 자유주의 페미니즘 여성건강운동은 남성의사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따라서 그 해결을 위해서는 남성의사의 인식개선과 여성의사의 확대, 그리고 여성의 의사결정권을 요구한다. 특히 환자로서 여성의 합리적 선택권과 능력을 강조하면서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의 법제화를 주요 실천전략으로 채택한다.
그러나 여성의사의 비율이 크게 증가한 오늘에도 보건의료와 여성의 관계, 여성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의사직에서의 성별 불평등만을 문제 삼음으로써 현대보건의료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현대의학이 여성에게 미치는 모순적 영향을 간과한 것이다. 부분적으로 법제화된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 전략도 새로운 기술을 임상에 도입할 때 환자의 동의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전문가 집단이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이 될 수 있다.
여성건강운동은 낙태권 운동과 결합하여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는 한편 이론적으로도 급진화 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여성의 육체성욕재생산능력을 사회적으로 통제한 결과이며, 보편적 남성 지배를 뜻하는 가부장제를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남성의사는 지배계급 남성들과 동맹하여 여성치료자와의 경쟁투쟁에서 승리하고 의학지식과 기술을 독점하면서 보건의료 영역으로부터 여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의료 지식과 기술은 가부장제의 역사적 산물이자 남성의 지배도구이며, 남성의사는 산부인과 지식과 기술을 통해 재생산을 의료화하고 여성의 육체와 성욕을 지배통제한다. 따라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대중보건의료가 의학적 지식의 생산과정부터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지식과 기술은 여성의 억압과 지배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여성의 건강과 복리 증진에 기여할 수 없으며,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찾아서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초역사적인 것으로 인식하면서 여성이 착취억압받는 구체적 형태와 그것을 결정하는 사회·역사적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간과한다. 그 결과 이론적 분석에서는 재생산이라는 여성의 공통성만이, 그리고 대안적 의료실천에는 자기결정에 기초한 재생산의료서비스만이 과도하게 부각된다.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 있는 여성들이 재생산과 무관하게 호소하는 여러 다른 건강상의 문제는 여전히 간과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기존의 남성 중심적 보건의료를 비판하며 등장한 페미니즘적 보건의료에서도 여성은 재생산하는 존재로만 간주되는 양상이 지속된다.
이러한 한계는 현대보건의료의 물질적 토대를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가족형태가 규정하는 성별 분업의 구조에 인종적민족적지역적 차이들을 결합하여 여성에게 상이한 생계조건과 활동방식을 할당한다. 여성의 보건의료 욕구는 이러한 생활조건의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그 자체가 대중보건의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가 된다. 남성의사의 권력의 원천이 되는 의학적 지식기술장비는 남성을 위해 생산된 것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논리에 따라 생산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보건의료와 여성의 관계, 그리고 여성의 발병의 구조적 원인이라는 근본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역사적 가족형태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다. 현대적 가족형태와 여성의 질병

사회적 생산관계는 가족형태 속에서 구현된 성별 분업을 매개로 성별화된다. 현대적 가족형태의 성별 분업은 보건의료의 실천과 이론에도 반영된다. 남성에게 더 나은 보건의료를 제공하는 대중보건의료의 성차별주의는 그것이 일차적으로 남성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을 목표로 하는 데서 발생한다. 대중보건의료나 사회 전반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성적 동일성을 규정하는 지배적 가족형태와 가족임금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법인자본주의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남성과 여성의 고유한 생물학적 차이와 대중보건의료의 성차별주의가 결합된다. 여성이 겪는 질병과 고통은 여성의 고유한 육체적 특성에 기초하지만, 그 특성이 여성에게 위험이 되는 것은 20세기 법인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가정에서 권리와 책임의 비대칭성은 여성의 과잉노동을 야기한다. 여성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가사노동은 단조롭고 지루하며 개별가정에서 혼자 수행하게 된다. 이는 신경과민, 우울증 등으로 표현되는 ‘주부신드롬’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어려움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외피로 인해 종종 은폐되고 무시된다. 가정폭력 역시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피해자 여성이 가정을 떠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경제적인 제도인 결혼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이 가사노동 및 자녀양육과 함께 임노동을 병행한다. 현대적 가족형태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노동력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여성을 주로 저임금의 불안전한 직종과 직무에 배치한다. 특히 서비스직 등 이른바 ‘여성적’ 직종의 경우, 과도한 감정노동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소진에 성희롱이라는 위험도 추가된다. 그밖에도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서 산업적 유해요소들은 재생산 기능과 관련해서 여성에게 추가적인 위험이 될 수 있지만, 잉여가치 추출과 관련된 부분에서 여성은 무성적 존재로 간주된다. 산업역학 연구의 대부분이 남성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되며, 따라서 작업장 환경의 개선도 남성의 육체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성욕과 재생산은 노동과 일상생활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보건의 고유한 영역을 이룬다. 여성이 성욕재생산에 대한 자율적 결정권을 상실하면서 성욕과 재생산의 관리에 관련된 신체적사회적 위험은 여성에게 전가된다. 새롭게 개발되는 피임기술은 대부분 여성을 대상으로 하며, 여성은 피임용구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한 채 차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출산장려정책 또는 출산억제정책이 피임용구나 영구불임술 등 재생산기술의 형태와 공급 방식을 결정하며, 종종 우생학적 함의를 내포하면서 계급인종지역에 따라 차별적으로 시행된다. 재생산조절법의 하나인 낙태의 법적 지위는 여성의 건강지위를 결정하는 단일요인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현대적 가족 형태에서 많은 여성이 ‘의무적’인 성생활을 영위하며, 그에 따른 종속감은 여성의 정신 건강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종종 생식기전염병과 같은 심각한 부산물을 낳는다.

라. 생명공학기술과 재생산의 분절화

20세기 대중보건의료에서 여성보건의 주요 목표는 임신과 출산을 잘 관리하여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다. 그에 따라 불임은 현대 산과학(産科學)에서 치명적인 여성보건 문제로 규정되어 불임치료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새로운 재생산기술 · 체외수정, 시험관 아기 · 은 ‘생명공학기술’이라는 형태를 띠는데, 이는 여성의 재생산과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소거시키고, 첨단산업으로서 생명공학의 잠재력과 파급효과만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생명의 도덕적 위상을 강조하는 담론과 새로운 기술의 잠재적 혜택을 강조하는 담론의 논쟁 구도 속에서 새로운 생명공학기술이 여성 육체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자 기존의 성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재생산기술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페미니즘의 주장은 주변화 되고 있다.
재생산기술이 생명공학기술로 발전함으로써 이제 재생산은 분절화된 형태로 의료화 된다. 생산과정의 분업처럼 재생산과정의 분절화도 각각의 과정에 수반되는 전문기술의료자원서비스의 개발 등을 촉진한다. 노동과정의 분절화가 자본의 통제력을 확대시키고 노동자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불임치료과정에 의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들의 개입이 증가하면서 실제 부모나 여성의 의사결정권은 더욱 제약된다. 게다가 재생산의 분절화는 원료를 공급하거나 작업 대상이 되는 여성의 육체를 착취하며, 소비자의 계층화를 통해 대중을 분할한다. 난자와 자궁은 상품화되었고, 이는 경제력 있는 여성이나 의료자본이 빈곤하거나 주변화 된 여성을 생물학적으로 착취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체외수정기술 나아가 생명공학기술은 페미니즘적 분석과 비판의 중요한 대상이 된다.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는 그러한 비판의 기초를 이룬다. 현재의 재생산기술은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여성의 모성을 핵가족형태에 종속시킨다. 유전적으로 연결된 ‘자기 자식’을 갖는다는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핵가족형태의 생물학적 기초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여성의 모성이 사회적 모성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약하며, 가족 형태를 통한 여성의 억압과 종속을 더욱 고착시킬 것이다. 한편,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은 더 넓은 경제적사회적 맥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생명공학산업 자본은 생산기술의 원료가 되는 난자와 정자, 대리모 등은 이미 세계적으로 거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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