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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7-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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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여성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박준도 | 편집부장
빈곤의 여성화, 노동력의 여성화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 한 해 남한 전체 노동인구의 42%가 여성이고 69.7%가 비정규직이다. 같은 해 남성은 전체 노동인구의 58%이고 이 중 40.8%가 비정규직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74%가 남성이지만, 비정규직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54%이다. 1999년, 여성은 남성과 거의 같은 시간(남성 48.2시간, 여성 47.3시간) 노동을 하고도, 임금은 남성의 64%수준(남성 137만원, 여성 87만원)에 불과하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직종인 서비스근로자 및 상점과 시장판매근로직에서 여성의 비율은 남성에 비해 1.5배(남성 1,963 천명, 여성 3,074 천명)가 넘는다. 성별 실업률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되지도 않는 실업급여의 분배비율을 보면 2000년 한해 남성이 68%, 여성이 32%이다.

오늘의 페미니스트들은 빈곤이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며,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다. 페미니즘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은 '빈곤의 여성화'를 여성의 빈곤화 정도로 이해하고 마는데, 사실 제기되는 쟁점은 이를 넘는다. 자야 메타는 이같은 사정을 다음과 같이 보다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빈곤율은 1인당 가계소득(하루 1달러미만)을 통해 구해진다. 혹자는 여성이 빈민의 50%를 구성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빈곤 속에 살고 있는 13억명 중 70%가 여성이다. 빈곤한 가계에서 여성이 많이 태어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빈곤집단 내에서 여성이 절대적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은 남녀간 소득차이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여성도 빈곤해진다는 평면적인 쟁점이 아니라, 남녀차별·여성억압이라는 입체적인 쟁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모성보호에 대한 입법안을 놓고 벌어진 논란은 우리로 하여금 신자유주의 시대, 빈곤의 여성화에 대해 시급히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자본축적의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대응 전략임을 누차 강조해왔다. 그것은 금융세계화-기업소유지배구조 개편, 노동의 불안정화-노동권에 대한 직접적인 제약이 핵심이며, 동시에 축적위기가 수반하게 되는 통치성의 위기에 대한 정치전략임을 확인한 바 있다. 불행하게도 이는 여러모로 불투명한 것이다.

분할과 배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페미니즘은 이를 보다 분명히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질문한다. 신자유주의는 무엇인가?


가족의 위기

1980년대 초반, 가족의 위기는 여러 면에서 징후적이다. 남편에 의한 아내구타와 강간·살해 및 가정파괴범의 급증, 공공연히 불거지는 청소년 문제와 함께 중동건설붐으로 표상되는 아버지의 부재/아내의 외도가 바로 그것이다. 책임의 향방이 어디로 향해있는 지는 충분히 가시적이다. 그러나 1987년 3저 호황-성공한 아버지는 가족의 위기를 잠시 뒤로 미룬다. 1990년 맞벌이 영세서민의 화재사건을 계기로 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가까스로 제기되고, 가족유형에 대한 논란 속에서 핵가족 논쟁이 제기되면서, 온전한 의미에서 핵가족을 형성할 수 없다는 사회적 불안감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가족의 위기는 본격화된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명예퇴직, 정리해고 등으로 계속되는 해고위협으로 인한 '고개숙인 아버지'가 바로 그것이다. 아동 유기, 낙태의 급증에 따른 모성 이미지의 급격한 해체와 노부모 부양, 아동 육아에 대한 책임 방기, 부인/가정 폭력, 딸의 가출-원조교제와 함께, 독신가족, 이혼가족의 증가는 명백히 이를 보충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의 위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의미했다. 핵가족 완성을 기대하기도 전에 가족의 해체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초반 '재도약을 위한 아버지의 부재'와는 매우 다른데, '고개숙인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노동력 전체가 파괴될 지도 모른다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부재'와 탈중심화된 가족은 남성권위-국가권위/남성권력-국가권력에 대한 암묵적 동의를 흔들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사회적 안정망 역할을 하던 기초단위가 상실될 수도 있다. 이런 사정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자본축적 조건에 대한 심각한 훼손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이다.


자본 축적의 조건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사회복지의 부담을 전적으로 떠맡는 막강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떤 개량적 조치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은 아동에 대한 양육은 물론 교육과 노부모에 대한 부양까지, 기본적인 사회복지의 모든 책임을 떠맡았다. 뿐만 아니라, 근검절약을 통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역할까지 떠맡은 것이다. 이 양자는 그 어떤 사회적 안정망보다 강력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유일한 국가지원은 이것이 가능하도록 물가를 강력히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짊어지게 되는데,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유교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며, 살림을 꾸린다는 명분으로 어머니가 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서구사회의 양상과는 조금 다른데, 서구사회의 경우 가족임금과 함께 사회복지시스템에 의해 사회적 안정망이 구축된다. 가족임금은 가계를 책임지는 가장(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여 가족의 생계비까지 지급되는 임금이다. 언뜻 보면 대단한 시혜조치로 보일 지 모르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하트만은 가족임금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남성노동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임금을 위해 싸우기보다는 가족임금을 요구하고, 그들의 아내가 가정에서 봉사하면서 남아있기를 원했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남성노동자계급의 요구대로 가족임금 체계가 완성되는데, 계속해서 하트만은 "가족임금의 발전은 남성우위의 물적 기초를 보장한다.

첫째, 남성은 노동시장에서 여성보다 더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고 더 높은 임금을 받는다. 둘째, 여성은 가사노동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남성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이 돌아가는 서비스를 가정에서 수행한다. 이같은 책임성은 또 다시 노동시장에서의 그들의 열악한 지위를 강화한다"며 가족임금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시민권은 노동하는 남성에게만 부여될 뿐이라는 부르주아의 기만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가족임금의 역사는 여성노동자계급에 대한 남성노동자계급의 배신의 기록이다.

하지만, 남한 노동자의 임금은 가족임금은 물론이거니와, 대개의 경우 자신의 노동력 재생산비에도 못미쳤다. 이같은 저임금은 현모양처에 의한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근검절약을 통한 재생산비용의 절약이라는 기본계획조차 온전치 못하게 한다. 가족의 전구성원이 생계를 위해 노동해야만 했고, 온가족이 다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렇지만 가족임금을 받을 수 있는 가계(중상류층 이상, 고학력집안)보다도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어떤 생존전략으로도 이 차이를 메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사실은 이 과정이 성차별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딸->아버지->아들 순서로 기회가 박탈되고, 어머니와 딸(->아들)이 생계전선에 뛰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빈민가정에 대한 연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생계가 어려울 때, 혹은 생계가 위기에 처해졌을 때, 이에 대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대응은 딸의 교육비 절약을 통한 지출 극소화와 딸의 취업을 통한 수입 극대화 방안"이었다. 이는 "사회에서 저임금 노동을 미혼여성에 의존하는 기제와 빈곤가구에서 생계책임을 딸에게 의존하는 기제가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같은 기제"이기도 했다. 가족임금제도는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한 임금을 보장하지 않았다. 되려 여성에 대한 차별 임금을 정당화시키는 기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뛰어든 딸의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은 수출산업에서 보다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부부는 경제적으로는 상호 의존하지만 위계적인 관계 속에서 가족 전체의 생계를 위하여, 여성이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는 형태로서 부부관계가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가계의 생존전략은 딸과 어머니에 대한 성차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빈곤이 왜 여성의 얼굴을 띠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 할 것이다.
철저한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남한 가족제도는 남한자본주의 복지의 부재를 해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키워드를 제공한다. 어머니와 딸들의 비참한 희생이 남한자본주의 복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이 남한 자본주의 축적의 얼굴이다.
이 강력한 안정장치가 아버지의 부재라는 이름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본 축적 위기의 시대, 자본주의 통치성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복지, 가족,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족의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해법은 전통적으로 복지와 관련한 쟁점에서 출발한다. 공장법, 여성노동 및 아동노동의 축소를 목표로 하는 보호입법 제정과 정비와 함께 전통적으로 가족이 담당했던 역할(교육,노인부양, 양육, 병간호 등)의 사회화와 이를 위한 복지제도를 구축한다. 미국 사회에서는 '가족임금제도'와 동시에 '요부양 아동 가족부조'로 대표되는 사회복지제도가 두드러지는데, 가족의 위기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대응은 여기에서부터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Welfare Mother"에서 "Working Mother"로 이동되는 정치적 상징을 추적하면서, 신자유주의의 복지정책이 신보수주의의 정치적 의제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정부의 시혜에 의존하는, 무능하면서 노동하지 않는 어머니-흑인미혼모(Welfare Mother)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시도된다. 반면, 탈산업화와 함께 늘어난 서비스부문에 여성노동력이 대거 진출하면서 가족임금이 탈중심화되는데, 이때 등장한 일하는 어머니(Working Mother)가 새로운 표준이 된 것이다. 이는 결국 어머니 상에서 보수주의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하지 않는 자·빈민 대 노동하는 자라는 노동분할 구도, 빈곤에 대한 개인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의 정치적 의제가 받아들여 졌음을 의미한다.

남한 사회 역시 이는 동일하게 드러나는데, "생산적 복지"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이 복지개념이 "인권과 시민권, 국민 기본권의 실현에서부터 출발하는 권리로서의 복지"라는 화려한 수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 매우 진보적인 조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한 기본 일자리의 보호에 그치지 않고, 최근의 세계사적 변화에 대응하여 인적 자원의 고급화를 통해 일할 권리와 기회의 확대를 추구한다. 또한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투자환경을 조성한다"는 단서는 노동력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면서 유연한 노동시장에 대한 대응을 강조하는,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보수주의적인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김대중 역시 자유주의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적 의제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이 군사파쇼 정권시절 남한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었던 복지를 실현해 보겠다는 공언은 한낱 말잔치에 불과할 뿐이다. 오히려 이같은 수사는 그간 한국 사회에서의 "복지"를 누가 책임져 왔는지, 그 진실을 은폐할 뿐이다. 언제나 늘 그랬듯, 그리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랬듯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논란 역시 몰성적(gender-blind)으로 진행된다.
은폐시킨 효과는 광범위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폐의 결과가 어머니와 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보아야 한다. 이제 중요한 쟁점은 신자유주의가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신자유주의가 여성을 보는 눈

1920년대 데이트혁명 이후 1960년대 2차 성혁명을 일컬어 독신자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미혼 남녀의 성적 활동을 수용하는 독신자 문화의 성장"에서부터 시작한 2차 성혁명을 놓고 "결혼 연령의 상승, 남녀의 교육정도의 수렴, 여성의 자율성, 성교와 무관한 출산통제방법의 발명, 독신자 수의 증가,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세대의 반감"이 이런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 여기에 매우 주목할 역사적 진실 하나가 있는데 "2차 성혁명이 낙태권과 같은 '동의하는 행위에 대한 제한'에 대하여 싸웠을 뿐만 아니라, 강간과 성희롱에 반대하는 캠페인에서처럼 '동의하지 않는 섹스'의 제한과 범죄화를 위해 싸웠다는 점은 종종 잊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성해방의 가장 강력하고 가시적인 모델을 제공한 것은 광고업자와 매스미더어였다"라는 것이다. 이는 성해방과 여성해방사이에 별 연관이 없으며 오히려 성산업이 성해방을 주도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제프리는 "반검열운동은 성혁명의 전개에 필연적인 발단이었으며, 그 전투는 여성의 이해에 적대적인, 성적 가치로 이루어진 책으로 승리를 쟁취했으며, 이 가치체계는 성에 대한 진리가 되었다… 반검열은 포르노산업을 위한 배출구를 열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남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독신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해결책은 그들(독신여성)을 성애화하는 것"이며, 2차 성혁명이란 "남성의 성적 봉사에 참여"하도록 독신여성을 성애화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는, 섹스에 혁명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성 급진론자들의 (남성성기중심의) '방출이론'을 비판하면서 "여성에 대한 더 다양해진 접근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는 혁명적 부수입이었고, 여성에게는 모호한 이익이었다"고 주장한다. 성해방이 노골적인 성적 대상화와 더불어 오히려 여성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쟁점 하나를 던지는데, 여성과 남성의 욕망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여성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를 살피는 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구조조정의 사회적 비용에 대한 책임전가

정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으로 실업대책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업대책의 핵심은 교육훈련, 고용정보 제공, 취업알선 이상 세 가지이다. 이미 앞서 생산적 복지가 이념적 수준에서 보수주의요, 반여성적인,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는 기제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같은 정책이념은 정부종합대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실질적인 사회적 안정망을 담당해온 가족, 여성의 희생에 대한 대책은커녕 언급조차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희생은 그 어떤 화려한 수사를 동반하는 사회적 안정망보다 강력하게 존재한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내놓은 사회적 안정망이 크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오로지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에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침묵은 그들에게 희망이다.

정부는 공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교역가능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어떤 추가비용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수혜자 부담의 원칙을 앞세워 교육, 양육과 같은 공적 재화를 서비스의 형태로 전환하려고 한다. 수가인상과정에서 점점 진의를 드러내고 있는 의료서비스, 공기업에 대한 분사와 민영화 역시 이에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의 손익계산서에는 추가비용이 없을지 모르지만, 가계의 입장에서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 모든 것을 여성이 부담한다. 절약의 형태로든, 생존을 위한 또다른 취업의 형태로든 말이다.


가족 해체 위기에 대한 책임전가와 직접적인 폭력

1990년대 이후 결혼시기는 확연히 늦춰지고 있고, 이혼인구도 급증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여성의 결혼은 26.5세이고 남성은 29.3세이다. 이혼인구는 2000년 한해 12만쌍인데 이는 1999년에 비해 1.7% 늘어난 것으로서, 1970년에 비해 무려 10배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아직까지 정부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조명되고 있는 바로는, "이혼은 당사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가족과 일가 모두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회적 불행이기도 하다. 자녀의 불행을 아랑곳없이 내 행복만 찾는 서구적 개인주의가 언제 이렇게 만연되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이혼율 급증 못지않게 걱정스러운 현상은 결혼연령이 자꾸 늦어지고,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한국일보 사설, 2001.05.25)는 것이다.

이 논평이 우리 사회의 평균 시각일진데,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지 분명히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녀의 불행에 대한 언급을 보면 남편에게 묻는 것인지 아내에게 묻는 것인지 불을 보듯 분명하다.
그가 서구적 개인주의의 도래라고 개탄하는 대로 1980년대와 1990년대 후반 사이에 결혼관계에서 몇가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동거 -> (낙태) -> (어머니)종속적 관계의 결혼이 만혼(독신) ->(낙태) ->(아내)동반자적 관계의 결혼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의 개탄대로 개인주의의 만연 탓은 아니다. 이 현상은 1960년대 경제호황기 직후 등장하는 미국의 동반자모델과는 분명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의 주장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남한사회 여성의 이혼사유는 미국과는 달리 여전히 대부분 피해사유들이다. 게다가 결혼이 늦춰지고 있는 것은 남성의 생존전략에서 기인한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부족한 임금과 불안한 상황하에서는 정상가계(가족임금, 전업주부)의 생계를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대로, 만혼(독신)과 이혼의 증가,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긴장감은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는 구성원들이 각각 제자리를 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때로 이것은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동반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남한사회에서 위기에 처한 가족의 생존전략은 어머니(아내)와 딸에게는 매우 일방적이다. 이념적 차원에서 그들의 위치는 자애로운 어머니와 현명한 부인이지만, 실제적 차원에서 그들의 위치는 가계의 생존 책임을 짊어진 여성노동자이다.

신자유주의 역시 침묵과 방기, 심지어 미국에서 보이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조장하면서 이를 되려 장려할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은 열악한 노동조건, 저임금이라는 여성노동과 구조적으로 더욱 긴밀히 결탁하여 있음을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역시 성산업이 사태를 장악하고 있는 2차 성혁명의 몇가지 징후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성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아동학대, 가정폭력, 낙태, 미혼모의 증가는 미국사회만큼까지는 아니라 할 지라도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의 또다른 증거라는 점에서만큼은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


여기에 한국사회 특유의, 양육에 대한 여성의 일방적인 책임은 이를 더욱 파국으로 몰고 간다. 매우 낯설었을 일방적인 피임(간단한 콘돔조차 거부하는 남성)과 임신, 결코 원치 않았을 아동유기, 남성의 암묵적 강요로 진행되는 낙태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일방적인 도덕적 비난(남성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은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환원시킨다. 여기에 더 비극적인 것은 사회적 통념이 문제삼고 있는 여성의 권리신장(성격차에 따른 이혼의 증가, 여성의 성적 표현의 증가, 여성의 사회 진출로 표상되는)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존재한다면 그것은 TV 등등의 대중매체와 대중문화 안에서일 뿐이다.

각종 의사 페미니즘은 그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 현실을 왜곡하고 쟁점을 희화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가족의 위기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기만이요, 노골적인 책임전가이자, 파렴치함을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위선이다.


여성에 대한 신자유주의 책임전가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남성의 경우 50대전까지 임금은 완만하게나마 상승하고 있지만, 여성의 경우 30대 중반만 넘어서면 급격히 하락한다. 이는 결혼 이후 남녀 격차의 심화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여성 내부에서조차 부당한 임금격차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여성의 노동시장 자체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김경애 등 몇 가지 연구에 따르면, 가사노동, 양육보다는 오히려 결혼 자체가 여성노동시장의 왜곡에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아버지에서 남편으로의 젠더관계의 변화가 여성의 노동시장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지하는 바처럼, 여성의 노동시장은 내부시장 즉, 장기근속과 승진의 과정은 전무하고, 외부시장 즉, 재고용에만 의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입과 퇴출이 격렬한 노동시장은 자본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줄 지 모르지만, 노동자에게는 노동강도의 강화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파괴한다. 여성억압은 이것을 보다 분명히 구체화한다. 이런 현실을 감내하는 노동의 양상에서 자기개발이나, 자아성취를 찾는다고 말하면 기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따라서, 전체 노동인구의 42%가 여성이요, 이 중 기혼여성이 77.8%(2000년 통계청)이나 되는 현실을 놓고 여성의 노동참여와 사회적 기여의 기회가 늘어난 바람직한 상황이라고만 평가할 수는 없다. 이 통계의 정확한 의미는 오히려 구조조정에 따른 가계유지 비용의 급증과 위기에 몰린 가정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전가의 결과로 노동시장에 내몰린 여성노동력의 크기인 것이다.


여성노동의 유형과 성격을 결정짓는 몇 가지 요소들

일반적으로 여성노동은 결혼과 출산, 자녀양육의 가족주기에 따라 노동시장에 진입-이탈-재진입한다는 M자 유형으로 분류된다. 반면 남성노동은 지속적으로 노동시장에 머무른다는 역U자형으로 분류된다. 정기선은 1980년 이후 여성노동이 M자형에서 역U자형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경애는 또한 기혼여성의 경우, 미혼여성에 비해 농업, 생산직, 판매서비스직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형성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아울러 여전히 자영업과 가업종사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경애의 연구는 좀더 역동적인데, 기혼여성의 노동참여에 있어서 자녀양육이나 가사노동은 장애가 아니라고 한다. 어떤 대안을 찾더라도 보다 높은 수입을 얻기 위해 일을 얻으러 나간다는 것이다. 이는 자녀양육에서 전통적인 도움이 줄어들고, 여성친가, 남편으로부터 가사노동의 대안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하면 여성이 이중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여성의 노동참여가 남편의 가사노동 분담으로 바뀌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기혼여성이 찾는 대안은 가사노동을 대폭 줄이는(!) 것이다.

노동참여에 대한 남편의 태도는 매우 적대적인데, 이같은 남편의 반대는 부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력 상실 우려에서 기인한 것이다. 대부분의 기혼 여성은 이에 단호하게 저항하는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우고, 한편으로는 남편을 안심시킨다. 다만, 부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는 부인의 노동유형을 결정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와 가족 생계에 대한 일방적 책임전가는 기혼여성 노동의 유형과 성격을 결정짓는다. 동시에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가족임금제도는 그 절대적인 불충분함으로 인해, 여성을 더더욱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내모는 객관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여성가구주의 경우 지난 10년 사이 미혼의 경우 경제활동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81%->71%). 기혼/이별/사별의 경우 남녀 모두 같이 하락하고 있지만, 미혼의 경우 남성은 83%로 거의 유지되는 것에 비해, 여성의 경우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서비스직으로의 진출 또한 1980년에 비해 눈에 띄게 증가하는데(21.5%->35.1%), 이같은 판매 서비스직에 대한 증가비율의 급증은 여성의 몸에 대한 상품화와 섹스산업의 급증이 주도하는 성해방 논리가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력히 환기시킨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가 성해방 이후 증가되었다는 지적은 오히려 여성들의 판매·서비스직에서의 고용 증가가 여성의 몸에 대한 상품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임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절박한 상황과 미래에의 불안과 함께 매스미디어에 의해 주도되는 성해방의 이미지는 여성의 몸에 대한 상품화와 섹스산업에 뛰어드는 데 제약이 되는 심리적 요소를 제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신자유주의의 금융세계화와 노동유연화 전략에 풍부한 자양이 된다.


신자유주의 비판과 페미니즘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특유의 몰성적(gender_blind)분석과 전략수립에 기반하여, 구조조정의 사회적 비용에 대한 모든 부담을 여성에게 떠넘기고 있다. 보수적인 의제로의 수렴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책임까지 강요한다. 자유주의자들의 침묵은 이같은 진실에 대한 인정이다. 금융세계화가 몰고 다니는 부후성과 노동의 불안정화는 여성노동력에 대한 성적착취와 노동력 착취를 강화한다. 이 모든 결과는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속적인 억압과 여성억압의 공고화이다. 돌이켜보건데, 페미니스트들이 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젠더역전전략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김대중 정부는 이 모든 것을 호도하고 있다. 신설된 여성부의 문제의식이라는 게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를 맞이하여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고 경쟁력 있는 우수한 여성인력 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이 구조적으로 억압, 배제당하고 있는 현실을 말 그대로 은폐하면서 여성의 자기능력개발 부족인양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 "여성기업활동 지원", "여성의 직업능력 개선 및 취업지원"이 주요한 과제인 마당에 어쩌면 그들에게서 여성의 빈곤에 대한 구조적 인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망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정이 그들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20세기 초 경제위기와 함께 가족임금제도가 확립될 당시 여성(노동자)에 대한 배신의 역사를 회고하는 것은 여러모로 교훈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것은 "합의"라는 이름으로 똑같은, 혹은 유사한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다. 남성노동자가 여성노동자를 팔아서 "합의"를 하든, 선택받으려는 여성이 배제된 다수의 여성을 팔아서 "합의"를 하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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