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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7-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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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hwp

신자유주의시대,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속화된다

박주영 | 편집실
<b>성적 자유주의는 여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b>

2001년 7월 15일, 가출청소년과 성관계를 갖고도 대가성이 불분명하다면 청소년성매매(원조교제)사범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가 판결당시 덧붙였던 설명은 "단순히 이성의 호감을 사기 위해 이익을 주는 것은 법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으로, "이성의 자유로운 만남으로 볼만한 관계까지 법이 간섭하는 것은 사생활과 애정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을 팔고사건 그것은 모두 개인의 자유의지에 맡겨진 것이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법부가 이를 구속할 수 없다는 인식인데, 이는 보수언론에서도 혀를 내두른 리버럴한 사고의 전형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그 모든 인간이 당장 현실에서 어떠한 차별과 억압으로 나눈다는 것을 보지 않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남성을 기준으로 마련된 것임을 애써 회피한다. 결국 불평등한 남녀의 역관계는 전혀 무시한 채 언급되는 성적 자유란, 성폭력에 대한 조장을 넘어서 성폭력을 선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른 에피소드. 검찰은 지난 6월, 자발적으로 성을 파는 청소년에 대해 형사처벌하도록 법무부에 청소년보호법 개정안을 제출한 바 있다.
성매매 청소년 형사처벌을 찬성하는 주된 논리는 "법의 형평성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으로서, "보호받을 값어치가 있는 권리를 보호해주는 게 원칙"이라면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성을 판 청소년들 또한 분명히 사법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착한아이와 나쁜아이를 구별해야 하고, 착한 아이는 계도하며 보호하되 나쁜 아이는 정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맥락이다. 이 맥락에는 자신의 성을 나름대로 깨끗하고 순결하게 지킬 의지가 있는 아이라면 보호해주고, 돈 때문에 자기가 먼저 나서서 몸파는 청소년이라면 정확하게 내치겠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성을 팔고산 사람 모두를 처벌하는 양벌규정은 남성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이전에 비해 활발히 다루고는 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여성, 성을 파는 자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실상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을 가진 성인남성과 그렇지 못한 10대청소년들이 나란히 경찰 앞에 서게 될 때, 사회는 누구에게 죄를 물을 것인가? 청소년 성매매를 하다가 법정에 서게 된 피고인 중 6%만 실형을 받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성에 대한 이중잣대는 남성의 성욕을 해소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여성과 순결을 보호해주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명확히 가르면서, 가해자로서의 남성보다는 성욕의 주체로서 남성을 강조하고, 피해자로서의 청소년보다는 사회악적 존재로서의 매춘여성으로 부각시킨다.
재산상 이익과 성관계간 대가관계를 폭넓게 인정해버리면 개인의 자유가 박탈된다는 자유주의적 언설,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아이들만 편갈라서 보호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의 공격 속에서, 여성의 성해방이란 그 온존한 의미는커녕, 성폭력을 지지하는 덫이 되어버렸다.


<b>신자유주의 시대, 여성의 위치에 대하여</b>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버무려진 혼란함은 최근 다시 불거진 매매춘 합법화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드러난다. 매매춘을 근절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고 여성들도 성적 욕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 바, 매매춘이 합법적인 산업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의 성적 자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논리를 구사하며, 공창제도를 통해 여성에 대한 이중적 성인식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보수주의와 맞닿아있다.

이러한 태도는 은근히 성폭력의 피해자를 바라보는 태도와도 닮아있다. 여성도 함께 즐기지는 않았는가, 여성이 먼저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닌가 하는 끊임없는 의심들은 성폭력의 피해보다도, 피해자의 성경험과 행실에 대한 평가를 선행시키면서 그 자체로, 성폭력을 자유로운 성관계로 둔갑시켜 버린다. 이 과정에서도 피해자를 착한여자와 나쁜여자로 구분하는 논리는 여전히 남아, 순결과 정조에 대한 뿌리깊은 인식들을 심화시키는 양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1990년대 이후 소위 신자유주의시대를 맞이하면서 자본의 축적을 가족의 위기로 치환시키고 그 모든 책임을 결국 여성에게 지우고 있는 상황을 분석한 전제아래, 국가의 주도아래 체계적으로 자행되면서도 더욱 자연스럽게 은폐되고 있는 성폭력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은 남한 사회에서 가장 물질적 풍요를 이루면서 개인의 욕구와 주목, 성, 욕망, 육체, 일상성, 친밀성이 강조되었던 시기였다. 이 글에서는 여성적인 것을 무차별적으로 상품화하면서 성개방 담론은 급속하게 확장되었던 1990년대 이후, 마구 혼재된 채 유포되는 성적 자유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성폭력은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 구조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작동시키는 동인으로서의 사회인식과 환경은 어떠한지에 대해 간략히 짚어볼 것이다.


<b>구조조정으로 가중되는 여성들의 성산업 유입</b>

흔히 말하기를, 성매매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며 애정없이 육체적으로만 만족하는 섹스, 프리섹스의 하나로 취급한다. 그러나, 성매매는 불평등한 금전관계를 매개로 상대를 성적으로 지배/피지배하는 구조를 갖는 일방적인 관계에 있다. 그것은 남성의 만족을 위해 여성의 몸이 일방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며, 여기서 성을 파는 자의 쾌락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선택한다느니, 성매매는 프리섹스의 한 종류라느니 하는 말들은 그 말 자체로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은폐한 채 성매매를 정당화하려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호황일 때 온갖 종류의 성산업과 성매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역시, 성산업으로의 여성유입이 증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경제적 혜택의 첫번째 대상이 남성이며, 피해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국가의 부와 여성의 부가 갖는 상관성은 남성보다 낮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가난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세계적인 빈곤의 여성화 현상, 실상 구조조정의 일순위는 여성이었으며 여전히도 생계를 유지해야만 할 경제활동의 요구는 강력해지는 가운데, 여성의 노동조건에 대한 제한, 여성의 고용기준으로 엄격해진 조건 등으로 인해 여성들의 선택지는 여러모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자본의 위기와 이를 돌파하려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가족은 해체될 위기에 직면하면서 여성들을 더욱 더 한 길로만 몰아가는 것이다. 되돌아보자면 1970-1980년대 말, 기생관광과 여성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성폭력이 국가의 산업화전략으로 주도된 바 있었다. 이후 신종 서비스업으로 부상한 향락산업(다방, 룸싸롱, 단란주점, 이발소, 증기탕, 안마시술소 등)은 남한사회에서 번창하는 성장산업이 되고 성적 서비스산업의 확산이 급격하게 증가해왔으며, 경제위기 이후 청소년들과 기혼여성들이 여기에 유입되었다. 서양의 성혁명과 관련된 요소들은 성의 상품화와 결합되어 성적 자유라는 담론을 왜곡되게 부풀려왔고 이렇게 수용된 남한사회의 성적 자유는 성매매를 관용화시키고, 성폭력을 구조화하는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여성에 대한 구조화된 합법적 폭력인 매매춘, 더군다나 일터, 교육기관 등에서의 강간, 성적 학대, 성희롱, 성적 위협, 여성 인신매매 등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침묵하며 어느 것 하나 책임지는 것이 없다.


<b>성적 서비스노동을 비롯한 성산업의 만개</b>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의 상품화가 야기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매매춘이 예전과 달리 노동과 여가가 이루어지는 일상공간에서 성행한다.
둘째, 매춘시장 밖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성공을 성적 밀거래와 연결시키는 사회환경이 확산되고 있다.
셋째, 여성이 성의 상품가치화에 주력하고 있다.
넷째, 여성의 육체와 성이 상품가치에 의해 지배되면서 여성의 고유성, 자율성이 박탈당하고 대상화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성의 상품화가 특정지역의 특정여성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여성전반이 관련된 사안이 되었음을 뜻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부상하기 시작한 매춘 이외의 성적 서비스노동을 보자. 자본주의적 노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재생산에도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이 대표적으로 행하는 노동이 성적 서비스노동이다. (성적서비스는 매매춘보다 포괄적인 광의의 개념인가 아닌가를 논의하기에 앞서, 학문적 정의보다 성적 서비스라는 명명이 갖는 정치학의 유용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매매춘을 윤락, 매춘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 맥락과 마찬가지로, 성적 서비스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기존의 매매춘에 대해 가진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섹스어필한 광고, 미스코리아대회 등을 성산업체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이효회,십대여성의 성적서비스에 대한 여성학적 고찰, 이화여성학포럼, 1998.12)

예를 들면 행사도우미 같은 형태의 노동인데, 이는 성적인 매력과 실질적인 노동력을 혼합하여 언뜻 보기에는 자본주의적 원리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고객(남성)은 도우미들에게 접대를 받으면서 성적 욕구를 충족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데, 이 과정은 여성들이 행하는 노동 그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여성적인 몸매를 갖춘 존재로부터 부가적으로 제공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노동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자, 특히 20대 미혼여성들의 경우 판매, 판촉, 홍보, 안내 등 대인서비스직에 종사하게 된다. 기혼여성들의 경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기혼여성노동력이 여성노동력의 3/4에 이르렀고, 어린 자녀가 있는 기혼여성의 취업률 또한 크게 늘어났다.

그렇지만 이들은 직업위계구조상 취하위를 위치하며 최악의 노동조건을 강요받아왔으며, 이들의 노동참여는 생산직보다는 비공식부문(서비스직의 85.6%)에 집중되었다.


<b>이미 내재된 성폭력의 위험성 </b>

사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성희롱은 업종을 막론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양산되고 있다. 월간지인 '호텔앤레스토랑'이 서울시내 27개 특급호텔에서 근무하는 여성 258명을 대상으로 조사(1999.5)한 바에 따르면 호텔근무 여직원들의 21.3%가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밝혔다. 고객으로부터 당한 성희롱의 유형에는 음란전화가 78.8%로 가장 많고, 성적관계를 강요하거나 회유하는 행위(37.5%), 직접 또는 팩스나 컴퓨터 등을 통해 음란한 편지·사진·그림 등을 보내는 행위(35.7%), 가슴, 엉덩이 등 특정 신체부위를 만지는 행위(31.3%), 안마나 애무를 강요하는 행위(20.7%)등이 다수였다.

또한 2000년 민주당 전갑길 의원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지역 남녀공무원 567명을 대상으로 성희롱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여성공무원의 성희롱 피해경험이 69.8%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실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이 가운데 54.2%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당사자나 당사자의 가족에게 통보하거나, 사법기관에 직접 신고하는 등의 적극적인 대처방법은 각각 4.5%와 2%에 불과했다.(대한매일, 2000.11.2)

여성경찰 또한 설문조사에서 여경의 34.6%가 '직장내 성희롱으로 근무환경저해가 매우 심각한 상태'라고 답변했으며 전체의 72%가 '여자라는 이유로 직장 내에서 성차별을 받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한국일보, 2000. 10.30) 서비스직종의 여성노동자들의 고객의 어떠한 행동도 감내하며 고객을 감화시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서비스를 불사해야 한다는 이미지는 광고와 각종 교육을 통해 습득되고 있으며 여성노동자들에게 모든 것을 그저 감내하기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친절을 생명으로 여기는 서비스직종의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고객의 성희롱, 성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b>자신의 노동공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 </b>

남한 사회에서 여성들의 날씬함과 그것을 공공연하게 전시하는 것은 성공한 사회적 지위로 상징화되면서 여성들에게 현실적인 힘을 발휘한다. 게다가 실제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외모는 직업적 자질로 요구되고 하나의 능력이자 자본으로 인식된다. 경제불황으로 더욱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외모는 취업의 결정적 조건이 되고, 여성들은 스스로가 남성중심적 시선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베리는 성애화된 사회가 "여성이 계급, 계층, 인종, 종교 등을 막론하고 성적 대상화의 일부가 되며 성이 여성의 신체와 동일시되는 사회"라고 말한다. 성적 대상화 문제는 더욱 구조적인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 이 상황은 여성과 남성의 직종, 업무가 분리되어 있고, 성별로 구분해 직종별로 따로 인력을 충당하는 구조와 밀접하게 맞물리게 된다.

대체로 이러한 성별직종 분리는 자연스럽게 임금, 승진 등에서의 차이로 연결되면서 결과적으로 여성과 남성사이의 위계를 강화한다. 여성들이 외모를 중심으로 고용되는 것은 같은 직종 내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업무를 차별적으로 분리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의 숙련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음으로서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고용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데, 기업입장으로서는 이것이 취업 후에도 영향을 미치는 차별적 고용구조를 관철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인 것이다.

여성의 노동공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점, 그 결과 직장내에서 여성의 고립과 도태를 초래한다는 점, 여성의 의지와 무관하게 남자에 의한 일방적인 성행위가 정당화된다는 점, 그로 인한 피해를 피해자인 여성이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하는 상황, 적절한 제도적 장치가 있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 무력화되기 쉽다는 점 등이 공통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999년 서울여성의전화 상담실태를 통해서도 드러난 바, 직장성폭력의 경우 피해가 주로 일상업무를 하는 사업장내(49.86%)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은 실제 피해자가 피해를 막기 위해 장소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2000년 성폭력상담사건 952건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전체의 42%가 지속적으로 발생한 피해사례였으며, 이 가운데 93%는 가해자도 같은 인물임이 드러났다. 더불어 "피해자가 사건을 혼자 해결하려하거나 무마하려 할 때 가해자는 성폭행 사실을 약점으로 이용, 폭로하겠다고 위협하며 피해자를 계속해서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한겨레, 2001.2.12)고 지적한 것은 성폭력에서 여성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최근 남녀고용평등법을 필두로 한 법적 지원들이 존재하지만 남성들의 50%는 법의 저촉을 피하기 위해 행동을 조심하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성폭력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b>신자유주의가 조장하는 성폭력의 역사</b>

신자유주의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금융세계화와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특질은 국제적 성산업을 더욱 번창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아시아의 성매매는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체제의 모습을 띠며,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다국적 기업, 국제금융투기와 함께 움직이는 국제조직폭력배의 이윤축적에 종사하는 상황이 되었다. 여성의 육체는 수익성이 매우 높은 훌륭한 수출품이 되었다. 아시아의 성매매가 오프라인에서 여성의 성적 착취를 실현하고 있다면, 온라인으로 인터넷포르노그래피 등을 다루는 성산업사이트가 정보통신업계를 주도하며 신자유주의가 동반한 성적 착취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여성에 대한 실질적인 성적 착취로 드러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이미지 속에서도 나타난다.

우선적으로 인터넷을 통한 성산업은 사이버 공간에서 여성의 성적인 이미지가 현실공간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남성들의 성적 '상상의 세계'를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들을 통해 '가상의 현실'로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은 이러한 방식으로 여성이미지의 상품화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남성중심 문화의 네트워크를 강화시키는 수단, 즉 성별관계를 고착화하는 가부장적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전세계적으로 손쉽게 전달하고 재생산하고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성인사이트보다 일반사이트에서 더 활개를 치고있는 사이버 성폭력의 위험성을 추가하자면 여성들이 발붙일 곳은 아예 없어지고 만다.

또한 여성들은 인터넷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한 소비를 그저 수동적으로 따르는 소비의 대행자로 간주된다. 인터넷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상거래에 의한 소비문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컴퓨터를 이용하여 상품을 구매한다는 사실 자체가 마치 정보화의 혜택을 입은 해방된 여성의 이미지라고 강조하면서 여성의 '주체적인' 또는 '개성적인' 자아정체성의 형성을 자극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통한 성 정체성의 주입은 기존의 성별체계가 강요해온 성차를 개성적 차이로 착각하게 만드는 소비전략에 불과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문화상품의 속성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감성, 욕망, 충동의 구조까지 은밀하고도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남성중심의 경제적 자본에 의해 과잉생산된 상품들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사람으로, 즉 자본의 이윤추구전략을 바탕으로 하는 인터넷의 새로운 상거래의 희생양이 되어 과잉욕망의 소비자로 길러지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서 주목할만한 것으로 청소년성매매에서 성인남성과 청소년간의 첫 접촉수단이 인터넷(66.7%)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 첫 접촉에서 성관계까지의 시간이 4시간이내(57%)가 가장 많다(경향일보, 2001.4.)는 사실이다. 검찰이 발표한 '청소년 성매매의 실상과 대책(2001.3)'에 따르면 전체 청소년 성매매의 76.8%가 성인남성쪽에서 먼저 제의한 것이었으며, 원조교제 동기 또한 호기심 56.6%가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학생들이 먼저 접근한다는 식의 시각은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익명성에 기대한 성매매의 비가시성, 인터넷에 기반한 빠른 계약관계의 성립 등은 정보통신산업을 주도하는 인터넷성산업과 함께, 성폭력의 일상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어린 10대들을 찾는 이유는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며 노골적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할 수 있다는 생각, 나이가 어리니까 함부로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남성들에게 성적 경험이 많지 않은 미숙한 여성에 대한 상대적인 우월감은 긴장과 경계를 완화시키는 동시에 소비자로서의 우월성과 권력을 부여한다.(이효희, 10대여성의 성적서비스에 대한 여성학적 고찰, 이화여성학 포럼방, 1998.12.30) 또한, 10대 매매춘은 성인매춘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구조화된 폭력이 성인의 범주를 벗어난 청소년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족의 해체와 위기를 불러온 자본주의위기의 책임을 다시 가족에게 전가시키듯이, 10대 매매춘의 책임을 가족의 붕괴와 어머니의 공백으로 인한 때문이라고 규정하면서 여성에 대한 공격을 다시한번 감행하는 명분이 된다.

더 많은 10대들에게 자신의 성을 매개로 하는 신종산업들을 일종의 선택할만한 직종의 확대로 인식하게 만드는 현실이 존재하는 것, 이에 대한 책임마저 어머니라는 이름아래 여성의 몫으로 돌아오고 만다.


<b>출산의 선택권이 여성에게 있는가?</b>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폭력은 성매매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기혼여성의 24.1%가 1회이상 낙태시술을 받았는데, 기혼여성이 낙태시술을 하게되는 이유로 든 것은 직업유지, 자녀양육에 대한 부담, 신혼을 오래 즐기기 위해, 기형아 출산 우려 등이었다. 그리고 병원들이 시술사실을 숨기므로 미성년자낙태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지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전국의 병의원 수를 감안하여 한해 낙태건수는 정상출산의 4-5배인 100만여건으로 추정, 이 중 미성년자가 10-20%를 차지한다.(동아일보, 2001.5.11)

성폭력피해에 대한 후유증으로서 임신, 낙태, 출산이 49.51%를 차지(서울여성의 전화, 2000성폭력상담실태)하는 가운데, 경제적 이유로 인한 낙태는 국가적인 지원체계조차 갖추지 못한 채 남성들과 국가의 침묵과 방조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출산이 아닌 낙태는 권리로서가 아니라 의무로서 간주되고 여성들은 불가피하게 낙태를 선택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국가의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성마저도 거부되고 금융자본의 무제한적인 부의 추구가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경기하강의 부담은 가족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젊은이들에게 지워지고 낙태권 또한 이러한 가족부양의 부담을 회피하는 방편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낙태권 자체가 여성권의 맥락으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요구와 경제적 강압 속에서 진행되는 사실은 남한사회에서 여성의 성적 자율권으로서 낙태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취약하다는 점과 더불어 강제되고 있다. 남성들의 침묵은 여성들이, 원치않는 임신에 대한 낙태권을 지지, 보장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지만, 그 책임 또한 여성에게 고스란히 돌아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여성들이 낙태를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을 인식하지 않고, 여성들의 생명경시풍조로 인한 모럴헤저드를 원인으로 삼는 것은 낙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 성매매는 연습이요, 덧붙여 낙태라는 책임회피로 일관된 논리가 성립된다는 것은 전혀 과도한 인식이 아니다.


<b>풀어야 할 쟁점들</b>

앞서 우리는 1990년대 이후 더욱 조장, 확산되고 있는 성폭력의 양상들을 살펴보았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노동조건의 제한, 고용조건의 엄격성 등은 여성들의 성산업으로의 유입을 방조하며, 여기에 성적 자유의 왜곡된 담론이 유포되면서 성산업을 합리화하면서, 급증된 성산업과 성적 서비스노동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편화시키는 효과를 양산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금융세계화와 동반되어 번성하는 국제적 성매매, 정보통신업계를 주도하는 인터넷 성산업, 낙태에 대한 사회적 방조와 강제 등은 여성들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폭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를 둘러싼 적극적 대응전략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쟁점들이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첫째, 남성의 성과 여성의 성에 대한 평가는 동일한가? 남성은 성욕의 대상이나 성적 존재로 규정되지 않는다. 남성의 정체성은 사회적 직업으로 규정되지, 신체기능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면서도 정력이나 성적 욕망은 오히려 당연시되거나 장려된다. 반면에 여성은 직업이나 업적에 따른 평가에 앞서, 신체적 기능에 따라 '여성'으로 분리된다. 1990년대 이후 성이 개방화, 서구화되고 있다는 분위기는 성적 자유를 곧 성해방, 인간해방으로 동일시했다. 전통적 성윤리의 점진적인 해체와 성산업의 급격한 성장은 성의 해방을 상징하고 가속화하고 그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여기서 여성들의 존재는 남성성을 위한 도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남한 사회에서 성산업과 관련하여 성의 상품화로 파생되는 외설과 퇴폐라는 측면만 규제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 서구의 1차성혁명은 데이트혁명으로서 관계의 성욕화를 통해 결혼의 동반자적 이상을 강화했으며, 2차성혁명은 성적 자유가 핵가족의 불안정성을 부채질하면서 결혼과 무관한 성욕을 용인하는 독신자문화의 성장을 낳았다. 이 담론을 받아들이면서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 언설들은 남성과 여성이 모두 동등한 성적 주체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자원에서 접근도와 통제력에서 남녀가 불평등할진대, 이러한 사회에서 남녀가 동등한 성적 욕망과 성적 실천을 가진다고 간주되는 것은 여성의 성을 남성의 성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남한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떠한 성적 주체인지 검토되지 않고,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위에 대한 통찰 없이, 여성의 성을 해방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여성의 성적 경험만을 탈맥락화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국가주도하에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세밀하게 인식해야 한다. 구조조정을 비롯한 정부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여성의 지위자체를 하락시키고 노동시장 내에서의 분화와 열등화를 조장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여성은 언제든 성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국가 차원에서 성적 착취를 조장하고 지지하며 이를 침묵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여성이 직면해야만 하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는 성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과 더불어, 이를 조장하고 은폐하고 있는 국가정책에 대한 정세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

최근 진행된 모성보호법 관련한 사안에서도 드러나듯, 여성보호조항의 삭제를 여성의 평등한 고용조건을 위한 요구로만 이해한 채 모성보호의 확대에만 주목할 경우, 여성보호조치가 삭제된 정세적 의미는 간과되고 만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적확한 인식과 이것이 양산하는 효과에 대한 분석 없이, 여성에 대한 차별을 통상적인 맥락에서만 제기할 경우, 정세적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부문의 운동으로만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모든 국가/남성 주도적 경제정책의 관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떠한 양상을 띠는지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계획이 필요한 때이다.

셋째, 성폭력에 대한 여성운동의 공동대응은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매매춘에서 서비스노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노동에 이미 성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이 여성의 성폭력문제에 대해 전선을 형성하고 이에 대한 일관된 대응을 역설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물론 현재까지 진행된 여성운동의 폭과 수위는 매우 광범위하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묶어낸다는 것조차 논의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하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전면화되고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간 진행되어왔던 이슈파이팅 중심의 대응으로는 이를 돌파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노동유연화 양상 속에서 여성의 정치적 주체로서 입지를 확보하고 구조조정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성적 폭력에 대항하는 폭넓은 연대와 저항을 모아내는 가능성이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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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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