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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7-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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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미술에 대한 조곡[2]-신여성에서 현모양처까지

구정화 | 회원
<B>- 1930~40년대 여성인물화에 대한 소고-</B>


<b>책 읽는 소녀상의 유래</b>

내가 여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독서서클이 가장 인기 있는 서클이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남학교와 함께 독서토론회를 한다는 사항이 마치 서클의 공약처럼 걸렸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중고생의 서클활동이 내신성적에 반영될 만큼 필수가 되고 남녀 학생들의 만남도 자유롭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남학교와의 공인된 만남은 서클활동 속에서만(!) 가능하였다. 특히 독서서클은 가장 모범적인 여학생만이 가입할 수 있는 인상을 갖고 있어서 오디션도 보고(내가 다닌 서클은 심지어 수십대 일의 경쟁률을 자랑하였음) 심지어는 100m 달리기 주파실력까지 적어넣어야 할 만큼(!) 까다로웠다.

그 이유가 얼마나 황당한가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어찌되었든 사설이 길었다. 중요한 것은 독서서클을 핑계로 여기저기 학교들의 도서반을 순회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교정마다 책 읽는 소녀상과 신사임당상이 있었다는 점이다. 학교 본 건물 로비에 걸려있던 신사임당상이나 학교 교정에 하얀색 대리석으로 조각해 놓았던 책 읽는 소녀상은 학교에 얽힌 괴담에 자주 등장할 만큼(!) 학생들의 머리 속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듯 하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여성이 또는 소녀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한국미술사에서 이런 정체모를 도상이 유입된 시기와 이유만큼은 분명한데, 지난 호에서 잠깐 언급하였던 조선미술전람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b>신여성, 교양있는 여성</b>

얼마 전 심사비리로 여기저기 사람들의 입담에 오르내린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전신이기도 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는, 근대적인 미술개념을 정착시키는 데에 일조한 일제시대의 중요한 미술전람회였다. 이 전람회는 조선미전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조선미전에서의 수상은 공인된 미술학교가 없었던 일제시대에 일본유학을 통하거나 개인사숙을 통해 그림을 배워야 했던 화가들에게 아주 중요한 인생의 목표이자 화가로서의 성공을 의미했다. 그런 만큼, 조선미전에 유행하는 화풍이나 주제가 있었다.

1930-40년대 조선미전에 출품된 여성인물화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주제가 실내여인상, 그 중에서도 <여성독서도>였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출품된 여성독서도를 살펴보면 주로 실내에서 여성이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주제는 조선뿐만 아니라 식민지 본국인 일본의 문부성전람회에서도 유행하던 주제였으며 서구에서도 한때 유행하였던 주제이다.

김하의 <독서>는 조선미전풍의 여성독서도이다. 그리 아름다운 여성은 아니지만 책읽기에 열중한 여성의 모습에서 우리는 배움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느끼게 된다. 여성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녀가 문맹이 아닌 교육받은 여성임을 의미한다. 이는 근대기 출판문화의 발달과 여성교육의 확대를 통해 여성의 교양과 배움이 강조되면서 일어났던 사회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이쯤 되면 근대기 변화된 여성의 지위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여성이 책을 읽는 행위가 당시에는 보편적인 풍경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성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신여성으로 불리는 여성이었다는 점만 확인될 뿐이다.

오른쪽의 사진은 사진가 김광배가 당시 영화배우 김신재를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아름다운 여성과 독서가 일상적인 분위기로 연출되어 있다. 김하의 작품에 등장한 여성과 달리 미모를 한껏 자랑하는 영화배우를 모델로 하여 제작한 것이다.
여기서 책을 들고 있는 여성은 근대기 새롭게 제시된 여성미의 기준을 보여준다. 즉, 아름다운 여성의 조건에는 미모뿐만 아니라 문맹이 아닌 교양있는 여성이 첨가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1930년대 이후 여성과 독서는 문명과 여성을 매개하는 관점에서 특정계층 측, 신여성의 우아한 취미로 부각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독서 이외에 음악감상이나 악기연주와 같은 여성의 취미를 주제로 한 작품들도 모두 실내여인상의 시리즈에 포함된다.

특히 피아노 연주는 당시 상류층 영양의 교양으로 필수적이었는데, 독서에 비해 좀더 정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에 속해 여성의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적절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통적인 여성노동의 영역이었던 뜨개질이 실내여인상의 주제로 등장하는 예도 있는데 주경의 <편물짜는 여인>(1938)은 따뜻한 실내에서 여성이 뜨개질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통적으로 바느질은 여성의 노동에 속하지만 여기서 뜨개질은 노동이라기보다는 여성적이고 우아한 취미로 선택된 듯 하다. 이는 실내에서 작품을 제작하였던 남성화가들이 여성모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일반적인 포즈였기 때문이다.

독서하는 여성이나 뜨개질하는 여성, 피아노 치는 여성 등은 모두 근대기 여성교육을 통해 배출된 새로운 계층인 신여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적 취미는 화초가꾸기 등과 같이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라는 점에서, 여전히 가정 안의 여성이라는 근대여성의 좌표를 설명해준다. 신식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이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보다는 주로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살아갔던 이 시기에 이러한 여성적 취미는 남성에 의해 새롭게 권장되었다는 혐의를 갖는다.
이처럼 1930년대 신여성에게는 한 가정의 운영자로서 구가정의 비과학적이고 비위생적인 부분을 타파하고 좀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여성상이 요구되었으며 이 때 신여성은 근대국가의 소단위인 가정의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다.

1930년대 각종 매체를 통하여 가정을 중심으로 한 담론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그것이 국가정책의 한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잡지의 가정란에는 명사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그들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단란한 신가정의 모습이었다. 구가정의 여성과 달리 좀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가정운영이 강조되면서 현모양처라는 가정 내에서의 덕목이 부가되었다. 독서와 음악감상으로 교양인의 자격을 갖춘 신여성은 1930년대 조선사회에서 현모양처라는 가정부인으로 새롭게 변모한 것이다.

신가정을 배경으로 한 실내여인상들은 주로 김인승이나 박득순, 도상봉에 의해 다수 제작되었는데 당시 부르주아 가정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카페트, 실내등, 고가구 등의 인테리어 소품들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여성의 모습에서 우리는 1920-30년대 신여성의 모습을 보게된다. 현모양처형의 교양있는 여성은 이후 1970년대까지도 인기있던 여성의 유형이었으며 각종 미술대전에서도 빠지지 않고 출품되었던 주제이다. 물론 이는 식민지 시대의 화가들이 또 다시 주류를 형성하게 된 미술계의 내막도 있지만 보편적인 여성이미지가 시대분위기와 교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실제 1950-70년대까지 만들어진 영화 등의 대중 문화에서 불륜을 다룬 내용이 많아지면서 정실부인에 대한 새로운 수요도 따랐다. 이때 정실부인의 후덕하면서도 교양이 있으며 가정을 지키는 모습은 중요한 캐릭터였다.


<b>현모양처로서의 삶</b>

책 읽는 소녀상만큼이나 나의 어린 시절 뇌리에 박힌 것이 있다면 신사임당상이다. 지금은 주말이면 결혼식장으로 사용되어 진가를 발휘하는 어린이회관은 어린 시절 나의 놀이터였는데, 그때마다 별관 로비에 웅장하게 서있던 육영수상(象)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야 그것이 육영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즉 위인전기를 통해 또는 학교에서 볼 수 있었던 신사임당상이라고 착각한 것인데, 그러나 이 점은 나의 잘못이라기보다 교육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사임당은 여성들에게 가장 본받아야 될 여성상으로 교육되었고 안타깝게도 어린 나에게는 TV에서 만들어낸 대통령 영부인의 이미지와 동일하게 각인되었든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이야 빛이 바랜 이데올로기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가장 오랫동안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던 현모양처주의는 학교교육을 통해 주입되었으며 가장 좋은 표본이 신사임당과 육영수였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현모양처가 사실은 근대기에 새롭게 등장한 여성교육의 이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불어 교육에 얽힌 맹자의 어머니 이야기나 신사임당 이야기는 모두 근대기 여성교육을 위해 새롭게 각색된 이야기라는 것도.

1900년대 처음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위해 세워진 여학교의 교육이념이,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여성에게 현모양처의 자질을 완비시키는 것이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점은 일본의 근대 여성교육의 이념과도 일치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현모양처주의는 열녀이자 효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전통시대의 여성덕목과는 많은 차이점을 갖는다. 전통시대의 경우, 가문을 중시하는 대가족 중심의 유교적 가족관에서 여성의 역할이 열녀와 효부의 삶으로 규정되었다. 한편 근대기 여성교육의 중요한 지침으로 자리잡은 현모양처주의는 부부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가정에서 여성역할이 총체적으로 제시된 새로운 여성관이었다. 이러한 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부일처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개념이 필요하였고 어느 정도 남성의 희생도 필요했다. 즉 남녀 모두에게 정조를 요구하며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부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녀교육이 여성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는데 즉, 국가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종구의 <모녀>라는 작품은 1940년 조선미전에 출품된 것으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성과 그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는 여자아이를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여성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어머니와, 이와는 상반되게 남성적 영역에 속하는 글쓰기에 열중하는 딸의 모습으로 우리는 한국 근대기에 교차하는 구여성과 신여성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모녀가 함께 그려진 다른 작품들에서 딸이 대체로 어머니의 가사노동을 지켜보거나 돕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본다면 불안한 딸의 자세는 어머니의 우아한 자태에서 비해 관람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화가가 어머니에게 좀더 애정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한편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조선사회는 전시체제로 접어들고 여성은 '국가'와 전쟁수행을 위한 2세의 양육이라는 모성애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어 간다. 전쟁에 나간 남성을 대신하여 여성에게는 가정을 책임지고 자녀를 양육하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일제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여성을 유도하기 위하여 대중매체를 통해 다양한 여성상을 유포하였는데 이때의 여성 그림은 주로 ①어머니와 아들 ②국모(황실의 황후)③근로여성④종군간호부 등이었다. 무장한 남성과 자애로운 여성은 호전적 남성, 평화로운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도식을 따른 것처럼 생각되지만 한편으로 가부장제적, 국가적 체제에서 양자가 상호 보조하면서 전쟁체제를 강고히 한 면도 있다.

임응구의 <어머니와 아들>(조선미전 18회 1939)과 임홍은의 <모자>(조선미전 19회 1940)는 모두 남자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으로 시국미술의 범주에 포함되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여성의 노동에 속하는 바느질과 육아가 함께 그려져 있어서, 후방에서 여성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체로 조선미전에 출품되었던 이 시기의 모자도는 이처럼 실내에서 여성이 자신의 젖가슴을 드러내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포즈였다. 이러한 모자도는 서구에서는 성모자상에서부터 유래된 전통이 깊은 주제이지만 1930년대 후반의 조선미전에 등장하는 모자도는 모유를 먹임으로써 건강한 남자아이를 키우는 후방에서의 여성의 임무가 강조되고 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제작된 포스터 <독일은 강한 여성들과 건강한 아이들을 통해 성장한다> 역시 전통적인 성모자상의 도상을 따르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처럼 정치적으로 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모자도는 모성애라는 정서에 기대어 건강한 아이의 양육이라는 후방에서의 여성의 임무를 강조하는 도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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