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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7-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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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에서 조선노동당까지[4]-해방후 조선공산당의 투쟁과 '정치적 패배'

염복규 |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과정
<b>'해방공간'의 의미</b>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로부터 1948년 8·9월 남북한에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간을 흔히 '해방공간'이라고 부른다. 이미 '공간'이라는 은유에 함축되어 있는 바, 이 시기 중에서도 초기 1년여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정치적 자유'가 존재했던 시기이다. 물론 전후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변수가 된 것은, 그들에게 우호적인 체제를 수립하고자 복잡한 대립과 타협의 정치과정을 전개한 미소 양강의 전후 세계전략이었다.

그러나 열강의 움직임은 한반도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가열하게 활동한 수많은 국내외 정치세력들을 파트너로 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운동과 관련해 본다면 해방공간은 남한 현대사상 유일하게 공산당이 합법·반합법적인 정치활동을 펼친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20세기 전반 한국사회주의운동이 도달한 '정치적 능력'에 대해 역사적 성찰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투쟁하였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한.


<b>조선공산당의 재건</b>

1945년 8월 16일 서울 및 인근지역에 소재한 일군의 사회주의자들은 시내 장안빌딩에 모여서 공산당 재건을 선언하였다(장안파 공산당). 여기 모인 이들의 일제말기 행적은 다양하였다. 1944-45년까지도 끈질기게 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이영·이정윤 등), 오랜 기간 운동일선을 떠나 광산업에 종사했다든지(정백), 국학연구에 몰두한(최익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일제시기 활동내역은 공통적으로 '화요파(-ML파)-경성재건그룹-경성콤그룹'으로 이어지는 계선, 즉 박헌영이 중심이 된 활동과 일정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장안파 공산당의 결성 자체는 다 아는 바와 같이, 해프닝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이러한 반(反)박헌영세력이 신속하게 결집했던 것은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운동의 아킬레스건이었던 파벌주의의 재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무렵 광주의 벽돌공장에 은신해 있던 박헌영은 전남 조직원의 알선으로 8월 17일 건준 전남대표단과 함께 상경하였다. 도중에 전주교도소에서 출감한 김삼룡과 합류한 그는 상경하자마자 경성콤그룹의 옛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는 '그 밖의 사회주의자들', 즉 장안파 공산당에 대한 의도적인 도외시였다. 이와 더불어 18일에는 누구보다 먼저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부영사이자 KGB간부인 샤브신과 회합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샤브신의 아내 샤브시나의 증언에 따르면 "박헌영은 공산당 재건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요청했으며, 샤브신은 그가 광주에서 은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고 하면서 그의 이론적 수준과 투쟁경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 증언은 소련의 정보계통이 이미 박헌영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과 박헌영이 공산당 재건의 전제로서 소련의 권위를 중시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상, 해방 직후 박헌영의 행보는 후일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종파주의자이면서 사대주의자인 박헌영'.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박헌영의 상경과 더불어 장안파 공산당이 와해되어 버린 것은 그들 자신의 권위가 서지 않았던 탓이 컸다. 일례로 1차 조공 책임비서였으며, 일제시기 내내 운동가들로부터 존경받는 사회주의자였던 김철수는 그 동안 내내 박헌영과 다른 길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그의 추종자들에게 "박헌영 중심의 당 재건이 옳은 길"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는 일제말기 박헌영과 경성콤그룹의 투쟁이 운동가들 사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음을 반증해 준다. 더불어, 당시 상황에서 소련과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르는 것은 사회주의자라면 당연한 상식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1945년 상황에서 소련과의 긴밀한 연결 없이 공산당을 만들고 공산주의국가 수립을 목표로 활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헌영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b>'평화노선'- '반파시즘연합'이라는 신기루</b>

여하튼 박헌영은 그 이틀 뒤인 20일 흔히 '8월테제'로 알려져 있는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이라는 문건을 발표하면서 당 재건을 위한 실질적인 첫걸음을 내딛었다.(이 문건은 9월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문건으로 확대, 발전된다.) 8월테제는 반파시즘연합론에 입각하여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조공은 미소협력에 따른 평화적 정권수립을 전망하였다(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 당연하게도 대미(對美) 전술로서는 '협조노선'이 채택되었다. 현 단계 혁명의 성격으로는 과도기적 성격의 '토지·산업 국유화'를 주요강령으로 한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론'이 채택되었다. 당시 동구권국가들에서 진행 중이던 '인민민주주의혁명'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이상 조공의 정치노선은 일단 당시의 국제정세, 소련의 세계전략 등에 충실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러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우선 미소가 언제까지 '반파시즘연합'이라는 이름 아래에 묶여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조공으로서는 미국을 최대한 오래 '반파시즘연합'으로 '견인'하기 위해 대미협조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터였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미소의 협력은 결코 오래 갈 수 없었으며, 나아가 '반파시즘연합'이라는 것도 결코 이념의 차원으로 격상시킬 수 없는 승자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세인식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된다. 조공은 동구권을 모델로 한 BDR론을 내세웠지만, 불행히도 한반도는 동구권이 아니었다. '타격·견인'을 통해 무력화시켜야 할 부르조아지의 존재는 미군정이라는 물리력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날로 뚜렷해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대미협조노선을 견지하는 한 이들과의 협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순은 대중운동의 영역에서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이를 노동운동을 통해 살펴보자.

조공은 그 외곽 대중운동단체로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를 결성하였다. 초기 전평 노동운동의 큰 흐름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한 '공장자주관리운동'이었다. 공장관리운동은 노자관계에 근거한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소유형태, 노동자 권력기관의 창출 가능성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일제시기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의 성장이 일정한 '권력의 공백기'를 맞아 만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평은 노동운동의 공식적인 노선으로 경제부흥과 산업건설을 내세웠다. 이는 전평 지도부가 조공의 노선을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조공으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민정권의 수립이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미군정·우익세력과의 마찰 가능성이 높은 공장관리운동은 자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대중운동의 분출'은 정권수립 이후에도 가능한 것이니까.
자세히 다룰 여유는 없지만, 이러한 '대중운동의 우경화'는 농민운동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대중운동이 당 운동에 종속되면서 나타나는 대중운동의 왜곡과 당 이데올로기의 일괴암적 전횡이라는 '역사적 공산주의' 운동 고유 모순의 한국판이라고 할만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조공의 '평화노선'은 대략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결성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1946년 5월경까지 계속되었다. 조공의 입장에서 평화적 인민정권수립의 가능성이 가장 많이 열려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 시기는 소련의 자국방위 목적이 짙었던 것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반파시즘연합'이라는 신기루를 쫓았던 시기라고 할 수도 있다.


<b>신전술의 채택과 좌익세력의 새로운 결집 </b>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조공의 노선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낭보이자, 조공과 박헌영의 정치적 생명을 크게 위협한 칼날이기도 하였다. 잘 알고있다시피 3상회의 결정은 우익언론의 공작에 의해 '한반도 신탁통치안'으로 왜곡보도되었으며, 1946년 1월 5일에는 박헌영이 외신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이 "조공은 소련 1국의 신탁통치를 원한다"는 것으로 오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우익세력에 의해 금방 부풀려졌으며, 박헌영의 정치적 위신은 크게 손상되었다. 이 가운데 박헌영과 조공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상회의의 결정이 실현되어 미소협력에 의한 한반도 정부수립이 정치일정에 오르는 것 뿐이었다.

이를 가시화시키기 위해 조공은 먼저 1946년 2월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하였다. 더불어 박헌영은 그에게 접근한 공산당적의 미국 기자들과 3상회의 결정 지지 기자회견을 하는 등, 또다른 방식의 대미협조를 활발히 전개하였다.(후일 이 정체가 불분명한 미국 기자들에 대해서는 미군 CIC요원일 가능성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1946년 3월 20일 드디어 3상회의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이하 '공위')가 개회되었다. 공위는 조공의 낙관적 전망을 밝혀주는 성명들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1946년 3-4월은 아마 해방 3년을 통틀어 조공의 전도가 가장 밝았던 시기일 것이다. 정부 수립은 목전에 다가온 듯 하였다. 조공은 미 군정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의 이력을 조사하는 등 임시정부 수립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6일 공위는 무기휴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알고있다시피 휴회의 직접적인 이유는 공위 참가단체의 자격을 둘러싼 미소의 대립이었다. 실질적으로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정치세력은 조공뿐이었으며, 미국은 우익세력의 참가 없는 공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역류의 시간이 온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역류를 알리는 소식은 내부에서 날아들었다. 5월 8일 화요파 이후 박헌영의 오랜 동지였던 조봉암의 박헌영 비판서신이 일제히 우익언론에 공개되었던 것이다. 이 서신의 내용은 그 동안 박헌영 및 그 측근들의 독단적 당 운영이라는 고질적 문제가 터진 것으로서 일견 있을법한 일이었다. 허나 문제는 민전 인천지부를 습격한 미군 CIC가 이 서신을 입수한 것은 3월 중순이었다는 점이다. 즉 서신이 쓰여진 것은 3월이었으며, 미 군정이 '하필' 공위 휴회 이틀 뒤 이 서신을 공개한 것은 조공에 대한 선제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곧 이어 5월 15일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발생하였다. 조공 재정부장 이관술,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등 당원 16명이 체포된 이 사건으로 조공은 재건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위조지폐사건이라는 특성상 조공은 도덕성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를 빌미로 한 미 군정의 탄압과 우익세력의 공격은 '조공의 불법화' 가능성마저 보여주었다.
6월 3일에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하는 이승만의 이른바 '정읍발언'이 터져나왔고, 더불어 6월 24일에는 우익세력의 반소운동을 빌미로 소련이 서울주재 영사관을 철퇴시켰다. 미 군정은 입법기관의 창설, 김규식·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운동후원 등을 통해 이른바 중도우파를 중심으로 한 정치질서의 창출을 추진하였다.

모든 상황은 짜맞춘 듯이 조공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실 이러한 상황은 예견되었던 것이었다. 1946년 초부터 미 군정은 지방에서부터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공위 개회/ 정권 수립에 희망을 걸고있던 조공은 최대한 수세적으로 대응하고 있었지만, 그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공위 휴회 이후 개시된 더욱 노골적인 탄압이었다.
당의 위기는 곧바로 대중운동의 위기로 전화되었다. 부분적이지만 전평을 탈퇴하여 우익계인 대한노총에 가담하는 노조가 증가하는가 하면, 농민조합의 이탈현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대중조직들의 이탈현상의 기저에 그 동안 쌓였던 당 노선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투쟁을 가로막아온 당이 위기에 빠지자, 투쟁을 하려고 했던 대중이 오히려 우익으로 돌아서는 엉뚱한 역전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 운동과 대중운동의 분리가 가져온 처참한 결과였다.
이제 조공에게도 최후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 군정이 의도하는 정치질서 속으로 끌려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줄곧 견지해온 대미협조노선을 전면적으로 폐기해야 할 것이냐. 전자는 사회주의운동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 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후원했다지만, 사실 미 군정이 요구하는 좌우합작의 조건은 좌익에 대한 우익으로의 포섭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조공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신전술'이 채택되었다. 하나 짚어보아야 할 것은 '신전술' 채택이 '서울 중앙'의 독자적인 의지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박헌영은 신전술 채택에 앞서 1946년 7월 1일 북한을 방문하였다. 김일성과는 무려 5차례나 회동하여 신전술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다. 더불어 김일성과 같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신전술에 대한 소련의 동의도 얻었다. 이 시기 소련은 트루만의 등장과 더불어 '스탈린-루즈벨트' 노선, 즉 미소협조는 불가능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조공의 신전술 채택에는 이렇게 수정된 소련의 세계전략도 고려되어 있었다. 신전술의 채택 역시 국제주의 노선의 일관된 견지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신전술의 구체적 구사는 미 군정 주도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공격이었다. 7월 22일 평양에서 돌아온 박헌영은 조공 서기장이자 민전 공동의장 이주하를 통해 조공의 좌우합작원칙으로서 이른바 민전 5원칙을 발표하였다. 우익세력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민전 5원칙의 발표는 미 군정의 평가대로 "좌우합작을 깨기 위한" 것이었다.


<b>남조선노동당 결성</b>

더불어 조공의 방침을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전을 통해 발표한 것은 예상했던 대로 격렬한 논란을 불러왔다. 여운형 등 좌우합작파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민전에 참가하고 있던 대중단체들은 압도적으로 조공의 방침을 지지하였다. 이제 좌익세력은 좌우합작 문제를 둘러싸고 재편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민전 5원칙이 겨냥한 바는, 바로 이렇게 최대한 다수의 좌익세력을 좌우합작에서 이탈시켜 새로운 결속을 다지려는 것이었다.
대중운동의 영역에서도 조공은 공세적 전술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적극적인 대중동원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8월 3일 박헌영의 성명에서는 그동안 대미협조 차원에서 자제되었던 구호, "모든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가 언급되었다. 지방공산당 차원에서는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한 가운데 명확한 반미지향의 운동들이 폭발하였다.

이는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 등으로 가시화되었다. 대중운동에서의 공세적 전환은 대중운동의 지향을 당이 담아내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미 군정의 노골적인 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좌익대중들을 일방적으로 노출시킨 '위험한' 전술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시기가 늦었다는 것이다. 초기의 우경적 오류가 결과한 필연한 좌경적 오류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대중동원 외에 기댈 수 없는 정치적 수단이 없는 조공으로서는 다른 길은 없었다.
조공의 대중동원,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운동은 전면전의 효과적인 전개를 위한 좌익역량의 새로운 결집, 이른바 3당합당의 추진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났다. 당시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미 군정의 우산 속에 들어가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중도좌익세력은 조공과 공멸의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조공, 여운형의 인민당, 백남운의 신민당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3당합당을 추진하였다. 조공은 각 당 지도부와의 협의보다 직접 대중을 선동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이에 따라 결국 3당합당은 조공 헤게모니하에서 각 당 당원들의 전취를 통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결성으로 귀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민당과 신민당은 각각 조공의 주도성을 인정하는 좌파와 여운형·백남운을 지지하는 우파로 분열되었다. 한편 조공은 박헌영의 결정을 전면지지하는 합당추진파와 3당합당 문제는 당대회를 열어 결정해야 한다는 대회파로 분열되었다. 해방 후 장안파 공산당을 결성했던 인물들 대부분이 대회파에 합류하였다. 조공 운영상의 아킬레스건인 당내 민주주의 문제와 파벌투쟁의 문제가 뒤얽혀 발생했던 것이다.

결국 조공 대회파는 인민당·신민당의 잔류세력과 더불어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다. 조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로당 결성은 두 가지를 의미하였다. 좌익대중의 총결집과 반박헌영세력의 자연스러운 출당. 이를 통해 남로당의 향후 투쟁은 더욱 강력해질 수 있었지만 그만큼 미 군정과 우익세력은 뚜렷한 표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b>북행, 그 이후</b>

1946년 9월 들어 미 군정의 탄압은 이제 그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9월 6일 좌익계열의 3개 신문사를 폐쇄조치한 미 군정은 9월 8일, 드디어 박헌영 등 조공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로써 남한에서의 '공개적 사회주의운동'은 끝났다.
박헌영은 이주하, 김삼룡 등에게 당을 맡기고 10월 6일 북행길에 올랐다. 북에서 박헌영의 활동은 남로당 최고지도자로서의 권위에 걸맞는 것이 되지 못하였다. 이미 공고해진 김일성체제 속에서 박헌영과 남로당계열의 입지는 너무 좁은 것, 북한 정권이 '허락'해 주는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유일한 활로는 남한 혁명의 실낱같은 가능성 뿐이었다. 박헌영의 북행 이후 남한에서의 일련의 민중항쟁들 -1948년 2.7구국투쟁, 4.3민중항쟁, 단선반대투쟁- 은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열망한 민중의 자발적 움직임이기도 했지만, 반도 남단에서의 이니셔티브가 유일한 생존의 의의였던 '북한에서의 남로당'의 지위와 희미하지만, 분명한 어떤 끈을 가진 것이었다.
해방 후 약 1년간, 조공을 결성한 사회주의자들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찾아오지 않은 '자유공간'에서 그들의 목표를 위해 투쟁하였다. 이는 물론 패배로 귀결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미 군정이라는 강력한 물리력의 존재였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세계공산주의운동이 소련의 국가주의적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가던 시점의 필연적 결과였다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조공의 정세인식, 투쟁노선은 분명한 우편향과 좌편향을 오락가락했으며, 당내 민주주의 문제 등 조직노선에서도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조공이 이러저러했으면 잘되었을 것이라는 식의 비판을 하는 것, 즉 누가 유죄인지를 가리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1945년 한반도라는 구체적 시공간 속에 나타났던 역사적 공산주의의 응축된 모순의 실체를 파악할 일이며, 이 모순의 가장 극명한 담지자로서 조공이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행보를 성찰해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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