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9.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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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자주·통일 투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위하여

김승호 |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이사장
1. 시작하며

'8.15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다녀온 방북단(민화협, 7대 종단, 통일연대의 대표들로 구성된) 단원 중의 일부가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앞에서 열린 개·폐막식에 참관한 일이 있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남한 언론과 정치권 안에서는 지금 우리 자주·통일 운동에 대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공격이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나라와 겨레의 자주·통일 문제는 이처럼 항상 매우 뜨거운 문제이다. 그리고 반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는 당면의 문제―변혁과제―이다.
그러나 이렇게 첨예한 당면 변혁의 문제가, 일반 대중들의 의식에서는 자신의 삶과 직결된 절박한 문제로 피부에 와 닿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이번 경우만 하더라도 수구·보수 세력이 요란하게 공격을 벌여 쟁점을 만들기 전까지, 일반 대중들은 어떤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민간통일운동의 대표자 및 관계자들의 8.15 민족통일대축전 참가는 일본수상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만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12년 전 당시 임수경 학생의 방북(이번 방북단에 임수경씨가 포함되었지만…)이 불러일으켰던 관심과 열기를 비교해 보아도 격세지감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사건'이 터지고 나서 수구·보수세력이 대공세를 벌이면서 비로소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는 형편이다. 더구나 국민의 대다수는 민간통일운동의 이번 행보에 대해 방관적이거나 비판적이다.
필자는 이것이 우리 자주·통일 운동이 처하고 있는 냉엄한 현주소라고 생각한다.1) 그리고 왜 우리의 자주·통일 운동이 이 지점에 머물러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며 성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주 통일 투쟁은 왜 객관정세가 요구하는 만큼 대중적으로 힘있게 수행되지 못하고 있는가? 민족모순이 그처럼 첨예함에도 불구하고 왜 투쟁은 그것에 조응하여 고양·격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세계사적으로는 소련 붕괴로 탈냉전이 대세가 되고 있고 국내적으로는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낡은 사고와 실천을 버리고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던―그래서 변혁적 자주·통일 운동의 입장으로부터 멀어져 갔던―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런 식으로 문제제기 한다고 해서 우리 자주·통일 운동에 성과적인 측면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로 많은 희생과 노력, 그리고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 다만 이 글에서는 비판적 성찰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므로 거론하지 않을 따름이다.


2. 자주·통일 투쟁은 왜 정세가 요구하는 만큼 힘있게 수행되지 못하고 있는가? 자주·통일 운동 내부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또 있는가?

2-1. 문제의 시작 : 지도급 인사들의 투항과 이탈

6.15 선언, 부시 정권 등장과 MD정책 추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상징되는 일본의 군국주의화 조짐 등 민족의 자주·통일을 둘러싼 객관정세는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이 하나하나에 대해 그 성격과 의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에는 필자의 연구와 고민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 노동자·민중운동으로 하여금 광범한 대중과 더불어 힘차게 자주·통일 투쟁으로 떨쳐나서야 할 정세를 조성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민족민주운동이라 부르든 진보운동이라 부르든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2)
그러나 이러한 객관정세의 요구에 비해 우리 운동의 주체적 대응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연세대에서 있은 '통일연대'(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주최의 이번 8·15 통일행사에 수만 명이 참여했다는 고무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15년 가까이 그렇게 힘들게 싸워왔는데 왜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것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변혁운동의 전반적 침체가 일차적인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소련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같은 객관적 요인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 민족민주운동 또는 진보운동이 안고 있는 취약성이 집중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상적인 취약성이! 소시민계급의 사상적 취약성이! 사회변혁을 추구하던 많은 소부르조아 지식인 활동가들이 운동을 떠나 소시민으로 돌아가거나, 심지어 제도정치권에 진출한다며 지배세력인 보수 또는 수구보수 정당에 투항했다. 그리고 활동가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대중들이 급격히 운동에서 멀어져갔다. 이것이 우리 변혁운동과 변혁지향적 사회운동3)의 전반적인 후퇴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대중이, 지도적 활동가들이 보여주는 모습 이외에, 무엇을 믿고 고생하며 시간과 돈을 내고 몸을 바쳐 운동에 동참하겠는가? 추상적인 이념이나 노선 또는 이론을 믿고 그렇게 하겠는가? 그런 것들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사람을 믿고 그렇게 하겠는가? 이 지점에서 다음의 인용문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88년부터 본격화된 조국통일운동은 87년 6월 항쟁의 세례 위에서 전개되었다. 6월 항쟁은 군부독재에 맞서 광범위한 민주애국역량이 결집하여 이루어 낸 위대한 민주항쟁이었다. 이 항쟁에서 제도권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의 연대가 反전두환 민주연합전선을 만들어낸 힘이었다면 청년학생, 종교계, 재야인사들은 헌신적인 투쟁으로 국민대중의 민주화 열기를 선두에서 개척하였다. 88년부터 대중적으로 앙양되기 시작한 조국통일운동의 주역은 6월 항쟁 당시 민주화 운동을 선두에서 개척했던 이들 집단이었다. 80년대 말 탈냉전 기운을 민감하게 포착한 위 세력은 6월 항쟁에서 분출된 민주화 투쟁 열기를 자주와 통일운동으로 승화·발전시켰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80년대 말 민간통일운동은 중요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조국통일운동을 선두에서 개척한 위 집단은 70년대 反유신 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주요하게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적 기반은 양심과 정의에 기초한 소박한 박애주의와 통일과 평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미·소간의 첨예한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에 여전히 깊게 드리워진 분단과 대결의 잔재는 마땅히 해체되어야 할 구 시대적 잔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의 주요 기반은 양심적 지식인이거나 중간층이었다.
80년대 말 탈냉전은 미·소간 첨예한 각축으로 형성되었던 냉전이 소련의 붕괴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향후의 방향은 냉전의 해체에 따라 평화와 통일의 계기가 조성되기보다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강화되는 기조로 발전될 소지가 컸다. 이러한 냉혹한 정세 발전을 반영한 것이 핵을 둘러싼 조·미간의 첨예한 대결과 범민련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었다. 80년대 말 조국통일운동의 주역들이 가지고 있었던 내적 한계는 이러한 정황을 돌파하는 데 난관을 조성했다. 조·미간의 첨예한 정치·군사적 대결이 전면화되고 공안당국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상대적으로 한반도 분단문제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조직화되어 있던 청년학생을 제외하고는 범민련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91년 1월 범민련 결성 직후 나타난 노태우 정권의 탄압에 대한 재야 다수의 투항적 태도는 이러한 사정의 반영이었다."4)

2-2. 그 간의 과정 : 사상적 동요와 조직적 분열, 그리고 투쟁의 침체

하지만 이상에서 말한 점들이 또한, 우리 운동의 침체를 가져온 이유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상적으로 완전히 무너져서 운동을 떠났거나 지배세력 측으로 투항한 부분은 그렇다 치고, 운동을 떠나지 않고 활동 일선에 남아있었던 부분에서도 많은 한계와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우리 운동의 현 상태를 만들어 낸, 그리고 만들고 있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의 세월을 경과하면서 우리 운동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별반 변화·발전하지 못했다. 우리 운동의 고질적 병폐인 NL·PD라는 정치사상적 차이와 그 각각의 정치사상적 조류 안에서 드러나는 좌우 편향의 동요, 그리고 정치적 견해 차이를 표면에 내세운 분파간의 주도권 및 입지다툼과 분열이 되풀이되어 왔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15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아직 그런 정치적, 사상적 차이를 지양하지도 못하고 있고 분파적 작풍을 극복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변혁운동 및 변혁지향적 사회운동의 다른 영역은 접어두고라도 자주·통일 운동 안에서도 극심한 노선상의 동요와 조직적 분열이 거듭되어 왔다. 그리고 이 지점은 여전히 해결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자주·통일 투쟁에 임하는 운동노선에서, 도식적으로 말해 개량적 노선으로의 경도와 이에 따른 개량적 노선과 변혁적 노선의 분열과 대립으로! 그러한 동요와 분열이 지금 '민화협'(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과 '통일연대'의 갈등으로, 그리고 통일연대 안에서 여러 입장들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 방북과정에서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개·폐막식에 참관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의견차이로 표출되었다.

그러면 우리 자주·통일 운동에서 1990년대에 들어서 동요와 분열의 고비가 되었던 '사건'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1993~94년에 있었던, '범민련'을 일방적·패권적으로 그리고 졸속적으로 서둘러 해체하려 한 청산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범민련 해소론'이라는 이 움직임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93년 8·15 범민족대회의 투쟁기조―합법집회로 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를 둘러싸고 표현되기 시작하였다.5) 그리고 그 해 가을 김영삼권에 의해 이적단체로 지목되어 탄압받던 범민련을 대체―사실상 해체!―하여 이른바 '새통체'(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건설하자는 형태로 불거져 나왔다.6) 당시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지도부(상임의장 이창복, 집행위원장 황인성, 자통위 부위원장 조성우)와 한청협 의장 유기홍 등이 주도한 이 움직임은 미국의 영변 폭격과 전면전 도발 책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1994년 상반기에 준비과정을 거쳐, 그 해 7월 2일 '민족회의'(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 집행위원장 조성우)의 결성을 낳았다. 1994년 2월 전국연합 대의원대회에서 파행적으로 추진을 결의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서였다. "대중적" 통일운동체를 만든다면서, 대중투쟁을 통한 대중적 결의과정도 없이!
민족회의는 '남북 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남북고위급회담을 마치면서 1991년 12월 13일 서명) 이행, 평화협정 체결, 남북한 상호군축, 외국군대의 단계적 철수, 한반도 비핵화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남북합의서는 1991년 9월 17일 UN 동시가입으로 남과 북이 각각 별개인 두 개의 국가로 공인된 직후 "남과 북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고 규정한 의미있는 합의문서였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노태우 정권이 국회비준을 하지 않아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문서다.7)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비핵화'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좋게 보면 실정을 모르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쁘게 보면 북한에 대해 핵사찰 수용을 압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한편, 이러한 조직상의 분열은 당연하게도 민족회의와 범민련간의 갈등과 그 격화로 이어졌다. 민족회의는 출범과정에서 범민련과 한총련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8) 출범 이후 줄곧 범민련, 한총련과는 통일운동을 같이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움직임은 전국연합의 지도부와 상층부가 주도했다. 그리고 비록 하층구성원들에서는 이와 다른 흐름이 일정 부분 존재하고 있었지만 결국 관철되었다. 이렇게 관철된 데에는 대중적인 통일운동체를 만든다는 명분과, 하부는 상부를 받들어야 한다는 조직관, '범NL진영 단결'이라는 종파적 심리, 그리고 학연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틈을 타고 김영삼 정권은 범민련과 한총련에 대해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이 두 조직을 해체시키기 위해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선별적으로 탄압하고, 탄압하여 고립·와해시키는 고전적 수법으로!
그 극치가 1995년 11월 나이 아흔에 가까운 독립투사인 신창균 선생과 임신 9개월의 신애순씨까지 포함한 범민련의 지도급 구성원 30여명 전원구속과, 김광일 청와대 비서실장이 경찰을 독전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1996년 8·15 광복절의 연세대 사태였다. 그리고 1997년에는 한총련 출범식 장소에서 이른바 '이석씨(프락치 혐의를 받은) 살해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를 빌미로 한총련에 대해 실로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졌다. 한총련 대의원 전원에 대해 검거 선풍과 더불어 구속이냐 탈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비열한 압박이 가해졌다. 그리고 이런 대탄압의 와중에 그 해 9월 15일에는 한총련 김준배 투쟁국장이 경찰의 체포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자주·통일 운동 안에서 대세는 김영삼 정권의 이러한 횡포에 대해 방관하였으며, 심지어 김영삼 정권에 동조하여 한총련 해체를 촉구하려는 움직임마저 없지 않았다. 우리 자주·통일 운동에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평범한 일상적 시기가 아니라 민족적으로 아주 위태로운 시기였다. 1993∼94년 상반기 동안의 전쟁위기를 거쳐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이후 북·미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미국은 한편으로는 핵사찰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봉쇄를 계속하면서 북한의 자연 붕괴를 전망하고 있었다. 또 조문파동으로 남북관계는 경색된 가운데 5년안에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북한 붕괴론이 기정사실인 양 이야기되면서 김영삼 정권이 흡수통일을 공언하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조직상의 분열과 갈등은 실천·투쟁상으로는 주로 연례적으로 치르는 8·15 통일행사를 둘러싼 갈등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문민정부가 되었으니 정부의 승인을 받아 합법집회로 하자"거나('93), "범민족대회는 범민련이 아니라 전국연합과 민족회의의 주도 하에 범추본을 구성하여 하겠다"거나('94)9), 범민족대회를 해소하고 8·15 50주년을 경축하는 '민족공동행사'로 하자거나('95), 하나의 대회로 할 것이냐 각자 따로 대회를 할 것이냐('96과 '97)10)를 놓고 해마다 지루한 공방이 벌어졌다. 전국연합 및 민족회의와 범민련 사이에서, 그리고 전국연합과 범민련 각각의 조직 내부에서.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대중들은 자주·통일 운동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이것이 IMF사태가 터지지 이전까지의 우리 자주·통일 운동의 상태였다. 거의 와해 직전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주·통일 운동이 동요, 분열과 갈등의 늪에 빠져 침체를 면하지 못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거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반년 후인 1998년 9월 3일. 그 동안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연임해 왔던 이창복씨를 비롯하여 친정부적인 통일운동 인사들로 구성된 관변 민간통일운동 단체인 '민화협'(공동 집행위원장 조성우)이 만들어졌다. 이제 민간통일운동의 주도권은 민간에서 정부로 넘어가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진보세력의 변혁적 자주·통일 운동은 더욱 고립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설적인 일이 일어났다. 자주적 민간통일운동 진영 전체의 위상은 떨어져버린 반면에 그 안에서 범민련의 위상이 회복되어 버린 것이다. "남측 민화협에 민족회의 성원들이 다수 참여하고, 이전시기 전국연합 및 민족회의 (지도급:필자) 성원 다수가 제도권에 흡수되면서 민족회의는 사실상 세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범민련과 민족회의로 분화되어 1990년대 중반을 어지럽게 수놓았던 논쟁은 민족회의 주요간부들의 변신으로 범민련 노선의 정당성이 자연스럽게 입증되었다."11)
한편 전국연합 안에서는 1997년 하반기부터 자주·통일 운동의 개량화, 그에 따른 분열과 침체를 경험하면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지는 구성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운동기조를 바로 세우려는 변화의 움직임들이 태동하기 시작하더니 1998년 여름에는 중대한 변화가 왔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얼마 후, 그 동안 개량적 노선을 이끌어 왔던 이창복 상임의장이 전국연합을 떠나 민주당에 입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국연합의 지도·집행부에 변화가 왔다. 아직 활동기조까지 바뀌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지도·집행부의 변화는 활동기조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12) 이런 가운데 1999년 초 대의원대회에서 오종렬 상임의장이 취임하고, 이어 전국연합은 민족회의에서 빠져나와 민주노총 통일위원회가 주축이 된 '자통협'(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1999년 5월 7일 결성)13)에 합류했다. 자주·통일 운동의 주체적 정세가 변화된 국면을 맞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 등 기층 대중조직이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1998년에는 북에서 제안한 통일대축전에 남측의 6백여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1999년 봄에는 민주노총과 북한 직총 사이에 북경과 평양에서 남북노동자 축구대회 개최에 관한 회담이 열리고 그 해 8월에는 '99 통일염원 남북노동자 축구대회'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인 흐름들이 고양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었던 만큼 자주·통일 운동의 '통일단결을 통한 전진'은 쉽지 않았다. 일례로 새로 결성된 자통협과 범민련 사이에 1999년도 8.15 통일행사를 둘러싸고 또다시 갈등이 빚어졌다.
이런 양상은 2000년에 들어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비로소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민화협 이외의 부분들 즉 범민련, 한총련, 전국연합, 전농, 전빈련,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과 민화협에도 참여하고 있는 단체로서 통일맞이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회, 경실련 통일협회 등이 하나로 느슨하게 엮어져서 2001년 3월 15일에 '통일연대'가 만들어졌다. 그 동안 배제되어 왔던 범민련과 한총련이 다른 자주·통일 운동 단체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통일연대는 그야말로 '연대'의 수준―정치적 통일성의 정도가 매우 낮은―이지, '연합'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개략적으로 살펴본 지난 10여년간의 자주·통일 운동의 동요, 분열과 이합집산의 경과이다.

2-3. 문제는 패배·청산주의와 개량화였다

자주·통일 운동의 이러한 우경적 동요와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침체가 민족회의의 출범에서 비롯되었음은 누차 언급했다. 그러면 대립의 초점은 무엇이었는가? 민족회의는 자주·통일 운동이 그동안 견지해온 원칙들, 즉 3자연대의 방식(남·북·해외가 단일한 명칭과 강령을 가지는 연합 형태), 자주적 통일운동 강령(4대 정치방침 : 연방제 통일, 주한미군 철수, 국보법 철폐, 평화협정 체결), 전투적·비합법적 투쟁기조에 대한 청산을 의미했다. 특히 남·북·해외 3자연대 방식에 대해 청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것은 범민련에게는 조직의 존폐가 걸린 문제였다.

물론 이 3자연대 문제는 한편으로는 소련이 무너져 지배세력이 기세를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영삼 정권이 등장하여 절차적 민주주의가 개선되는 등, 자주·통일 운동이 수세에 처하게 된 변화된 정세 하에서 진지하게 재검토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보는 충분한 토의와 심도 있는 고민을 거쳐 자주적 민간통일운동 내부의 공감대 위에, 대중을 주인·주체로 세우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 변혁적 입장을 견지하는 가운데 변화된 현실에 맞게 탄력화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패배주의14)가 만연한 가운데 변혁을 "청산"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자주·통일 운동은 민족 개량적인 경향과 민족 변혁적인 경향으로 날카롭게 분열, 이원화되었다. 그리고 전자는 정권의 탄압을 받지 않으면서 패권적으로 나아갔고, 후자는 탄압을 받으면서 정치적, 조직적으로나 실천·투쟁적으로나 더욱 경직된 모습으로 나아갔다.
범민련의 3자연대 방식은 물론 재검토되었어야 했다. 단일 명칭, 단일 강령에 의한 연합체는 우리와 같은 휴전상태의 분단 현실에서는 상당히 수위가 높은 것으로서 1991년 1월 범민련 남측 준비위가 발족하던 당초에도 받아안기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과 대중조직들의 이런 부담감이 청산의 진정한 이유는 아니었다. 상층부 자신들의 패배·청산주의가 진짜 이유였다.15) 사실, 출범도 하기 전 단계에서 민족회의(준)가 전국연합 상층부와 합작하여 남·북·해외가 공동으로 치르는 범민족대회의 주도권을 범민련으로부터 빼앗아 가져가려고 한 데서 보거나(1994년의 경우)16)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출범 후에는, 북한과의 민족공동행사를 주장하면서 남측 자주·통일 운동의 대표성을 주장함으로써 해마다 8·15 통일행사에 혼선을 빚었던 데서 보듯이, 어떤 형태로든 남·북·해외 3자가 연대를 하는 것 자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그러한 연대의 방식을 주·객관적 조건에 맞게 탄력성 있게 조정하는 것이 요청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합리적인 조정은 범민련을 청산하려는 조류의 돌출로 인해, 3자연대 방식의 청산이냐 고수냐 하는 것으로 대치점이 형성되면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대치점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3자연대 방식의 조정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보면 그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주·통일 운동은 이후 범민련·한총련의 집중탄압과 약화 뿐 아니라,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의 진취성 상실―노태우 정권이 합의했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비준하지 않음으로써 물 건너가 버린 남·북합의서 이행촉구 중심의 요구와 문화행사 중심의 실천―과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대중성 상실로 이어지게 되었다. 민족회의가 출범하면서 그렇게도 역설했던 대중성 확대17)는 결국 성공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거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자주·통일 투쟁은 '평화'라는 이름의 분단고착화나 흡수통일을 전망하는 것이 아닌 한, 미국에 반대하고 북한과 연대하는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민중에 의거하는 자주적·진보적 민주정부가 아닌 한, 정권과 날카로운 긴장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런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광범한 대중의 참여를 위해 정권과 지나친 긴장관계를 조성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그런 긴장감 없이 합법적이고 평화적으로 자주·통일 운동을 한다는 것―이러한 발상은 통일선봉대의 명칭을 국토순례단으로 대체하려 한 데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자체가 비현실적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합법적으로, 편안한 문화행사를 중심형태로 하여 자주·통일 투쟁을 대중화하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자고 하면 불가불, 운동의 원칙을 포기하는 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대중은 참여하지 않는다. 대중은 반외세의 자주적인 통일을 위해 힘든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행사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그 목적을 위해 어떤 수준에서건 가열찬 투쟁을 하려고 먼길을 달려 8.15행사에 오는 것이지, 기념식이나 문화제를 구경하려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외세에 반대하는 입장이 분명하지 않은 그런 행사는 대중성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청산적·개량적 조류의 만연과 그것의 패권적 작풍, 그리고 이로 인한 운동의 소모적 분열과 갈등이 지난 시기 우리 자주·통일 운동을 침체시킨 으뜸가는 잘못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과가 아직도 극복되고 있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2-4. 변혁적 입장은 경직되어 있었으며 기층민중을 주체로 세워내지 못했다

청산적·개량적 조류가 빚어낸 문제와 함께 변혁적 입장을 고수―이 시기 변혁적 입장의 운동에서는 '고수', '사수' 라는 말이 수도 없이 사용되었다―하는 흐름에서 보여준 한계와 오류도 가감 없이 짚어져야 한다. 이 조류는 범민련으로 대표되었다. 개량적, 변혁적 두 조류의 분열이 기정사실화된 이후 변혁적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는 '4대 정치방침 고수'가, 조직적으로는 '남·북·해외 3자연대'와 범민련·한총련 사수가, 실천적으로는 '범민족대회 사수'가 으뜸가는 방침이었다. 그리고 이 모두 범민련이 대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조류는 사실상 한총련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이 조류는 범민족대회를 힘있게 치르는 것을 통해 대중 속에 변혁적 입장을 다지고 확대해야 했다. 그런데 범민족대회 참가자는 한총련 학생대중을 제하면 수십명의 노·통일투사들과 이에 공감하는 소수의 각계각층 선진 대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18) 또 범민련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중앙위원 총회에서 한총련은 중앙위원 총수의 절반 가까이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연관에서, 변혁적 입장을 견지한 부분이 보여주었던 문제의 대부분은 한총련의 문제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한총련의 경우 1996년 연세대 사태를 경과하고 나서 그 투쟁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했어야 했다. 당시 자주·통일 운동 안에서는 '연세대 항쟁'을 좌익 모험주의 행위로 매도하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평가는 자주·통일 운동이 전반적으로 개량화된 조건에서 나온 것으로서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연세대 사태는 김영삼 정권이 학생들을 연세대에 몰아넣고 항쟁을 벌일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전술상의 오류에 대해서나 지도부가 학생대중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점은 반성적으로 평가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한총련은 개량화된 흐름의 자신에 대한 매도성 평가에 대해 즉자적으로 대응하며 '위대한 투쟁' '영웅적 항쟁'이라는 평가를 고수했다. 여기서 이미 우편향에 대한 즉자적 반응으로서의 좌편향의 조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좌편향은 1997 한총련 출범식을 진행하는 중에 '이석씨 살해사건'이라는 의외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는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명백했다. 당시 한총련은 연세대 사태(연행자만도 5,715명)로 위축된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사회생활 경험도 있고 나이도 있어서 실질적―상징적이 아니라―으로 대중을 이끌 수 있는 강위원 학생을 의장으로 세웠다. 그러나 연세대 투쟁에 대한 반성적 평가가 없는 상태였던 만큼 집행 계통에서는 좌편향이 계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양대에서 열기로 한 한총련 출범식 장소를 고수하려는 과정에서 불의의 인사사고를 빚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한총련은 국민대중으로부터 극심하게 고립되었다. 당시 강위원 한총련 의장은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구속되었다. 그리고 구속되어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결사의 각오로 수십일간 단식투쟁을 하면서 '혁신'의 필요성을 제기했었다.19)
그러나 의장의 옥중 단식투쟁도 한총련 혁신의 계기로 살려지지 못했다. 한총련을 주도하고 있던 변혁적 부분은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에다 자주·통일 운동 내에서 개량적으로 나아가는 흐름과의 갈등―한총련 내부 및 자주·통일 운동 전체 두 차원에 걸친―이 겹치면서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서 각 대학 학생회장 선거에서 자기 계열이나 계파 후보를 당선시키고 이로써 한총련 의장 선거에서 다수파를 이루어 집행부를 장악·유지하는 데 급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혁신의 요구를 받아안으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한총련은 학생대중으로부터 그리고 국민대중으로부터 고립되었고, 그럴수록 한총련은 더욱 편향되고 경직된 모습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악순환은 IMF 사태가 터지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는 상황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또 하나의 흡수통일 기도, 점진적인 흡수통일 기도로만 바라보는 데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래서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기 전까지는 김대중 정권을 "사대매국적이며 반통일적인 정권"으로 규정하고 '김대중 정권 퇴진'을 주장했다.20) 반면 한총련 간부들은 IMF 사태나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지했다. 오로지 자주·통일 문제, 정치·군사적 문제에만 집중할 뿐 사회·경제적 문제나 노동자·민중의 일상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탈근대 문제―성, 인종, 위계 등에 의한 차별과 억압으로부터의 인간해방 문제와 이에서 더 나아가 '노동하고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부터의 인간해방 문제 등―에 대한 관심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애국주의적 편향의 측면에서도 매우 경직되고 협소한 제한성을 보였다.

이러한 경직성은 마침내 1999년에 접어들면서 전체 자주·통일 운동 내에 조직적인 파문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총련은 범민련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선질서를 재편하고자 했다. 범민련의 성가(聲價)와 한총련의 동원력을 무기로 하여 자신들의 주도 하에 민민운동 전선체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1998년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고방식 하에서 1998년 9월 범민련과 한총련이 주축이 되는 '민권공대위'가 만들어졌다.21) 그리고 1999년 후반에 들어와서는 이것과 반미반전비대위 등 투쟁기구들을 묶어서 한시적 공투체로서 범투본(미국과 일본의 한반도 전쟁책동, 경제침탈 분쇄와 국가보안법 철폐, 공안탄압 분쇄를 위한 범국민투쟁본부)을 만들고 이것을 차후 상설적 공투체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근거는, 여타 민민운동에 대해 운동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불신은 일차적으로는 과거 김영삼 정권 시기 전국연합의 활동이 보여준 개량화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1998년 이후의 전국연합 활동가들의 변화 노력에 대해서도 역시 불신했다. 똑같은 이유로, 그러한 '개량주의 조류'들과 범민련·한총련을 접근시키고자 하는 노력까지 절충주의라고 냉소하고 불신했다. 물론 이런 불신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러면서 운동적으로 순수·순결하고 원칙에 충실한 자신들이 전체 민민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전선질서 재편을 향해 나아갔다. 이런 점에서 분명 과도했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전국연합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민민운동 전선체가 생겨나게 되고 분파적 대립이 격화되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분란은 범민련 내부의 조직적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1999년도 8월 대회를 마친 후 앞에서 말한 전선질서 개편논의가 한총련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 제기에 대해 범민련 의장단 내 다수는 그러한 전선질서 개편은 전선운동을 분열시킬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이 논쟁은 조직적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이러한 전선질서 개편 시도가 남측본부 사무처를 교체하려는 움직임과 연동되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범민련 내의 이런 갈등은 2000년 1월 1일 새해맞이 행사를 둘러싸고 재연되었다.
새해맞이 행사 이후 한총련은 범민련 조직의 상태가 심각한 상황이므로 강희남 의장(범민련의 조직의 상태가 심각하므로 탈퇴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새해 연초 나머지 의장단들이 회동하여 탈퇴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한 상태였다)을 소집책으로 하는 임시 중앙위원 총회를 소집할 것을 제기했다. 한총련을 제외한 범민련 여타 성원들 대다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월 13일 임시 의장단회의는, 이종린 서울 범민련 의장을 남측본부 의장직무대행으로 선출했다.
이런 와중에 2000년 1월 26일 김양무 범민련 상임부의장이 운명했다. 갈등은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한총련은 김양무 부의장을 고인의 유언대로 평양으로 보낼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범민련 구성원들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구성원들 대다수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렇게 과거와는 달리 자신들의 의사가 관철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한총련은 범민련을 두 개로 쪼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3월 하순 광주전남 범민련과 한총련 중앙위원들이 중심이 된 중앙위원 총회를 열어 별도의 지도·집행부를 구성했다.
이런 파행은 2000년 8월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한총련은 8월 대회 조직(준비위원장 및 집행부서의 책임자)체계를 범민련 남측본부 공식 지도·집행부측과 강희남 의장을 지도자로 내세운 한총련측이 공동으로 꾸릴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한총련을 제외한 민족민주세력 전체가 참여한 가운데 8월 대회 추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 상황을 우려한 범민련 남측본부는, 강희남 의장과 이종린 의장 직대가 개인 자격의 공동준비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하여 한총련을 설득하고, 민족민주세력이 망라된 8월 대회 준비위원회의 동의를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8월 대회에는 두 명의 대회장이 등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파행을 거친 이후에도 한총련의 경직된 입장과 태도는 변화되지 않았으며 마침내 10월 23일 현 지도·집행부를 중심으로 통일단결할 것을 촉구하는 범민련 공동사무국의 성명이 발표될 지경에 이른다.
다소 길게 설명한 이 일련의 과정은 많은 반성의 지점과 교훈을 준다. 3자 연대와 4대 정치방침에 견결하고 충실하며, 전투적·비타협적 투쟁에 가열차고 완강하면 그것이 곧 운동적으로 순결하고 올바름을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단순함이 이런 오류를 빚어냈다고 본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의 이런 경직된 모습은 지난 시기의 우리 자주·통일 운동의 많은 부분이 청년학생들의 눈에 운동적으로 순수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인식된 데에도 중대한 원인의 일단이 있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또 김영삼 정권에 이어 국민의 정부라고 자칭하는 김대중 정권에 들어와서까지 계속해서 이적단체로 규정받으며 탄압 받는 상황에서 생겨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범민련 내부에도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인생을 거는 것을 넘어 목숨을 걸고 자주 통일 투쟁에 온몸을 바친 老선배들에 관한 이야기인지라 함부로 언급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연로한 몸으로 매년 되풀이되는 여러 차례의 구속을 마다하지 않고 범민련을 지켜낸 노고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범민련을 지켜내는 과정이 상당히 경직된 모습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당시 상황에서 "정면돌파" 이외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세대 사태'에 대한 평가에서나 '이석씨 사건'에 대한 대처에서 보듯이, 범민련 활동이 매우 경직되어 좌편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한총련 학생들에게 추수하는 경향이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연세대 사태 이후 그 투쟁의 평가를 놓고 논란이 있었는데, 물리적 투쟁력을 다소 거칠게 구사하고 경찰이 완전 포위하여 덫을 놓고 있는 연세대에, 비무장 학생들을 집결시키는 등 과격하고 치밀하지 못한 투쟁전술 운용에 대해서는 마땅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위대하고 영웅적인 투쟁이었느냐 좌경 모험주의였느냐 하는 대립지점에 집착하여 균형감 있는 평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때 범민련이 좀 더 냉철하게 대응했더라면 이후 한총련이 더욱 경직된 방향으로 치닫는 것을 교정해 줄 수 있었을 것이고 나아가 내부 혁신을 실행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범민련의 제한성이 기층 대중운동의 동참은 아니더라도, 정치적·변혁적 노동운동단체들을 범민련의 둘레로 설득·견인하는 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할 수 있다.22)

2-5. 자주·통일 운동의 현주소 : 치유되지 않는 문제들

이상에서 살펴본 문제점―한계와 오류―들은 과거지사이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정치사상의 면에서 개량화된 조류와 경직된 조류의 문제, 조직의 면에서는 범민련·한총련이 안고 있는 문제, 전국연합이 안고 있는 문제, 자통협이 안고 있는 문제, 그들 사이의 문제, 사업작풍으로는 분파성 문제, 패권주의 문제, 대중을 동원대상으로 삼는 문제 등…. 물론 이 모든 문제 지점들은 또 서로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운동노선 내지 조류를 중심으로 자주·통일 운동의 현주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시기에 민민운동 안에서 숱한 문제를 일으켜 왔던 개량적 조류는, 지금 거의 다 민화협으로 옮겨가서 지배세력 측에 포섭·편입되어 버렸다. 이 부분은 이미 자주·통일 운동 또는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이라고 칭하기 어렵다. 그들은 지금 관변 민간통일운동 내에서 여러 부분 가운데 겨우 하나를 구성하고 있다. 민화협 내의 다른 부분들은 한국자유총연맹과 같은 수구적 부분들에서부터 재벌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하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지난 날 재야 인사들이 정치권으로 들어가 지배세력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고 말았듯이 이들도 또한 지금 그렇게 되고 있다.
그러면 지난 시기에 지금 민화협으로 흡수되어 들어간 부분들의 청산적·개량적 조류에 의해 이끌려졌던 전국연합 구성원들은 지금 어떤 정치적 경향으로 변화되었는가? 여전히 개량적인가? 이들은 지난날 보였던 우경적 편향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99년∼2000년 상반기 동안 좌경적―물론 자주·통일 운동 선상에서의 좌경이다. 즉 반외세 자주와 연방제 통일 및 북한과의 연대에 보다 원칙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의미에서이다.―인 편향을 보였다. 그래서 지난 시기 범민련이 보였던 경직성이 전국연합에 한 때 그대로 나타났다. 물론 전국연합은 앞장서서 범민족대회를 사수하자고 하거나 전투적 거리투쟁을 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범민련·한총련의 3자 연대방식에 대해 실정에 맞게 탄력화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민련 가입을 추진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국연합과 범민련간에 있었던 대립의 핵심 쟁점은 3자연대의 유지냐 청산이냐 였다.) 이에 대해 북측이 오히려 만류했는데, 이것은 이 시기의 전국연합이 북측보다 남측의 운동실정에 대해 더 경직된 인식과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23) 그러다가 6·15선언 이후에는 다시 오른쪽으로 심하게 이동하고 있다. 예컨대 전국연합은 지금 김대중 정권이 6·15선언의 당사자이므로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우경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시기의 개량적·우경적 동요를 제대로 비판, 극복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라 하겠다.

한편 지난 수년간 한총련을 이끌어온 경직된 조류를 보면, 이 조류가 여전히 한총련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그리고 6.15남북공동선언 직후인 작년 9월 21일부터는 앞에서 말한 민권공대위와 범투본 및 반미반전비대위 등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실천연대'(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실천연대 또한 범투본의 경우처럼 전체 민민운동 안에서 조직적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6·15 공동선언 이후 조성된 정세는 자주·통일 운동의 시급한 총단결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한총련 중심의 독자적인 연대조직인 실천연대의 구성은 연대조직 형태를 놓고 한총련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연대'냐, 자주적 민간통일운동 진영을 총망라하는 '통일연대'냐 하는 것으로 분열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오면 한총련은 정치적으로 급격히 오른쪽으로 동요한다. 한총련은 김대중 정권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뒤바꾼다. 김대중 정권 타도로부터 지지로. 김대중 정권은 이제 6.15 선언의 당사자이므로 반통일 정권으로부터 친통일 정권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사상적으로 흔들린다. 범민련 안에서, 앞에서 말한 공동사무국의 결정에 따라 현 의장측에 투항하다시피 한다. 요컨대 계속 좌우로 동요하고 있을 뿐 진정으로 지난 시기의 오류를 자기비판하고 극복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한편 자통협은 지금 전국연합과 전농이 사실상 빠져나간 상태이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전빈련, 평통사(평화와 통일 여는 사람들, 대표 문규현 신부), 천정연(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이 주요 가맹단체로 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김대중 정권을 반민족·반통일 정권으로 파악하고 김대중 정권에 대해 통일운동에서도 지지가 아니라, 투쟁을 주요 측면으로 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반면 범민련, 한총련, 전국연합 등은 김대중 정권에 정면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6.15선언의 당사자라는 이유로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좀체 좁혀질 기미가 없다. 그리고 이 문제로 또 서로 불신한다. 이런 불신에는 우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절대시하면서 다른 견해를 수용하지 못하는 측면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 단순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만이 아니라 제가끔 운동을 주도하려는 분파적 경향도 개재되어 있다. 때로는 패권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분파의 이익을 운동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모습으로! 그래서 분파적인 입지에 대한 고려 없이 허심탄회하게, 운동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서 토의하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 또 상당히 뿌리가 깊은 사상·이론적인 차이들이 개재되어 있다. 특히 민족해방 조류와 민중민주주의 조류 사이에. 거기다가 지난 시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 주었던 모습으로부터 생겨나고 축적된 감정도 작용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복잡하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2-6. 맺음말을 대신하여 : 운동의 과학성의 촉구하며

우리 자주·통일 운동의 현주소를 보면, 무엇보다도 통일단결이 급선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타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은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속에서 시간을 두고 극복해야 하는 연관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시급한 통일단결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통일단결을 촉진하는 여러 가지 방도 가운데 하나로서, 정세에 대한 인식을 최대한 접근시켜 보는 것이 하나의 유력한 방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세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정견 차이는 상당한 정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당면의 객관정세에 대한 인식은 이론적으로 추상성의 정도가 낮은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비교적 접근―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시키기 쉽다. 그리고 몇 번만 검증해 보면 비과학적인 인식은 머지않아 그 오류가 판가름날 수 있다. 예컨대 김대중 정권에 대한 견해 차이 문제만 해도 그렇다. 편가르기 식으로 지지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김대중 정권이 취하고 있는 정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실천적 평가(가치판단)가 과학적 인식(이치판단)을 건너뛰어 앞질러가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 시론으로서 하나의 인식을 제시해 보겠다. 김대중 정권은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활동가들을 아주 혼란스럽게 만든다. 대중들보다 활동가들을 더! 그는 IMF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이다. 이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또 6·15 남북공동선언의 당사자이다. 이 또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두 측면을 통일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24)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김대중 정권은 IMF와 신자유주의의 집행자이지만 그의 개혁은 이런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성격만을 가지지 않는다. 그의 개혁 기조는 분명 민주개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개혁이다. 하지만 민주개혁의 성격도 전혀 없지는 않다. 고문 근절 등의 면에서 다소간 민주개혁적인 측면도 있다. 의문사 진상규명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제주 4·3 특별법 제정, 공무원 노조 인정 추진, 사립학교법 개정 추진 등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에게 무단적 탄압을 가하고 있고 국보법 개정에도 적극적이지 않다. 의·약 분업은 기득 권 세력의 이익을 배려하느라 국민부담만 가중시키고 실패했다. 이처럼 그의 개혁에서 민주개혁적인 측면은 보잘 것이 없다.
더구나 그의 개혁은 대중에 의거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런 점에서 전형적이다. 민주개혁적인 사안에서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할 뿐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은 오히려 탄압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탄압하면서 민주노총이 요구한 노동시간 단축을 정부 주도로 추진한다.(물론 이 노동시간 단축 자체도 신자유주의 개혁의 일환으로서,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동자계급의 분할통치―정규직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포섭하고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제하는―를 위한 정책이다) 선심 베풀 듯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구세력으로부터 '민중주의'라고 비판받는다. 그러나 민중주의는 비록 '주체로서가 아니라 추종·지지층으로서' 일지라도 대중동원을 선호하는 것이라면(1992년 대선 때까지의 김대중은 그러했다), 김대중 정권은 그것을 선호하지 않으므로 민중주의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김대중 정권은 대중동원을 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중이 요구하는 것의 일부를 들어줌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감사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자기에게 추종하는 지지층으로 만든다.25) 이 때 대중운동은 투쟁으로 쟁취하는 진취적인 운동이 아니라 자주성과 진취성을 상실한, 정권에 의존적인 청원식 운동이 된다. 그러므로 김대중 정권의 통치방식은 '신 권위주의'이고, 그의 보잘것없는 민주적 개혁조차 이런 통치방식에 어울리는 시혜―'퍼주기'―식의 개혁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노동자·민중운동 안에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수혜를 받은 부분에서 김대중 정권에 대한 이른바 '비판적 지지'가 자리잡게 된다. 전투적 대중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은 부분들에게 약간의 시혜로 포섭함으로써 지지자가 되게 하고, 그럼으로써 노동운동과 노동자 대중을 "김대중 지지냐 반대냐"로 갈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과 6·15 공동선언은 어떤 성격을 갖는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은 그 얼굴이 여러 개다. 즉 다면적이다! 김대중 정권은 집권 초기에 "북한을 개방·개혁으로 끌어내기 위해", 속되게 표현해서 외투를 벗기기 위해 북한에 관여(engagement)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김영삼 정권이 집권 초기에 취했던 것과 같은 '점진적 방식의 흡수통일 정책' 즉 온건한 대결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대중 정권 초기 북한은 그의 이 햇볕정책을 맹비난했다. 그러자 김대중 정권은 햇볕정책을 포용정책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러면서 방북을 추진했다. 방북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에서는 "나라의 통일은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되,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점"을 살려, 추진해 나가겠다고 합의하고 선언했다. 이 지점에 관한 한 김대중 정권은 자주·통일지향 정책의 집행자이다. 그리고 이 때의 대북정책은 남북 연대정책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6·15 공동선언 이후 귀국해서는 미국과 국내 보수 지배세력을 의식하여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생각하는 연합제란 국가연합 방식을 말한다고 했다. 이 때 김대중 정권은 평화공존에 의한 분단고착화 정책―대결도 연대도 아닌 중간정책―의 집행자이다. 물론 아직 통일지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닌! 그러나 이런 정책기조는 부시정권이 들어선 이후 급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제는 국보법 개정에도 힘을 쏟지 않고 있다. 국내 수구세력은 물론이고 부시 정권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압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MD 정책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은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한 외교통상부 장관을 급히 경질했다. 주한미군 주둔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하고 있다. 이렇게 부시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대결정책 즉 강경 대결정책 때문에,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은 통일지향 정책은커녕 평화공존 정책에서조차 멀어져 가고 있다.

이 시간대별 변화를 종합하여 연관지어 보면 이렇게 된다. "미국의 대북정책에 크게 의존하는 평화공존 정책"이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의 기조이다. 그는 노벨평화상에 대한 집착에서 보듯이 한반도 평화 실현의 공로자로 역사에 남고자 하는 포부를 지니고 있지만, 정세변화 특히 미 행정부의 움직임에 의해 크게 규정받는다. 그렇다고 운신의 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 자동 붕괴론에 의지하다가 그것이 실패하자 대안을 잃게 된 클린턴에게 포용정책을 설득, 관철한 데서 엿볼 수 있다. 또 평화는 물론 통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이 없다고 볼 수도 없다. 그에게 민족적 양심이 있을 것은 물론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간 김대중 정권이 취해온 태도에 비추어 볼 때 자주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더구나 김대중 정권의 이러한 정책 기조는 지금 부시의 MD 정책에 의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앞으로 미국의 불황이 더욱 악화되고 부시 정권의 군사 케인즈주의가 강화될 때 얼마든지 강경 대결정책으로 변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고정된 사물로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로서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 성격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민중은 김대중 정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당연한 얘기로서 그때그때 그의 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판단해야 한다. 지금 그는 수구세력의 공세에 밀려 자신이 방북을 허가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구속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교류·협력의 면에서조차도 긍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그의 대북정책은 통일의 견지에서 볼 때에는 별반 긍정적이지 못하고, 다만 지배세력인 미국과 국내 수구보수 세력의 대결정책에 비해 한반도 평화에 대해 전향적이라는 점에서만 긍정적이다. 이처럼 국내 개혁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조를 이룬다면 통일정책에서는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이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즉 국내 개혁정책에서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라면 대북정책에서는 제한적으로 긍정적이다.
이런 구체적 인식을 바탕으로 김대중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입장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접근할 때 김대중 정권에 대한 민민운동의 견해와 태도는, 근본적으로는 운동노선에서의 입장 차이가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에서는 적어도 상당히 접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관계 인식에서의 이런 접근은 입장 차이의 강조와 그에 따른 상호불신과 분열을 극복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할 것이다.

자주·통일 운동의 단결과 전진을 위해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좋은 방도가 있을 테지만, 어려운 문제의 해결은 과학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운동의 순수성, 순결성을 역설하지만 과학적으로 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가다듬는 것, 사상적·운동적으로 순수·순결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1980년대 후반의 사회구성체 논쟁도 과학성에서 매우 부족했지만, 이렇게 과학성을 중시하는 측면은 패배주의가 만연하던 1990년대 중·후반 시기에 우리 운동에서 크게 약화되었다. 운동의 당파성―지배세력과 노동자·민중의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화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이 사라지면서 한편으로는 파당성이 그것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성이 후퇴하고 '이미지'가 판을 쳤다. 또 변혁적 원칙을 견결하게 지켜내는 데만 집착하면서, 대중의 힘보다 활동가의 주관적 사상의지를 더 중시하고 주체적 목적에서의 순수성으로 객관적 인식을 대신하려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제 분파성이니 패권주의니 하는 파당성이 아니라 이 당파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또 사상적 순수성이나 순결성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 말고 운동의 과학성을 높여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 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객관화 시켜내야 한다. 나아가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사물의 연관을 객관화'―이것이 과학성의 요체라고 본다―시켜내야 한다. 주체적으로 된다는 것은 결코 주관적으로 됨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관계의 구체적이고 정확한 객관화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물론 주체적 입장 즉 당파성에 입각한, 평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기초로 부족한 점은 채우고 그릇된 점은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통일단결은 그저 구호로 외치거나 지난 일은 일단 덮어두고 지나가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지금은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부적절한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PSSP


1) "분명 파장이 컸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서로 생각이 다름을 확인한 만큼 새롭게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4,700만 국민 전체가 이렇게 통일논의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걱정이었는데, 국민적 관심 속에 올바른 통일논의의 계기가 된 측면도 있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8·15 평양축전 남측대표단장 김종수 신부 인터뷰 기사', 한겨레 2000년 8월 25일자.
2) "노동운동 내에서 통일문제의 위상과 영향력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화되었다. 오랫동안 노동운동, 특히 민주노조운동에서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는 당위적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안 중의 하나로 위치지워졌고, 이로 인해 '통일운동'은 몇 개의 사건이나 연례행사 수준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0년 6월에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6·15선언이 남북 당국자에 의해 채택되면서, 이 사안은 노동운동에서도 중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사안으로 부상되고 있다. 현 정세에서 통일문제가 차지하는 위상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높아진 것이다." '민주노총 3기 임원선거 소책자' 중에서.
3) 여기서 '변혁지향적 사회운동'이란 아직 당면변혁 과제를 자신의 강령으로 받아안지 못하고 있는 수준의 대중적 사회운동을 말한다.
4) '민족대통일전선을 향한 위대한 승리의 노정(초안)', '본론 2. 범민련을 중심으로 한 민간통일운동의 역사와 평가', 범민련.
5) 이 대회는 당초 연세대에서 치르기로 결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연세대에 사전 집결하였으나,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장 문익환 목사의 집회개최 허가 요구('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태로)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이를 불허하자, 대회 직전 한양대로 장소를 옮겨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대회를 준비하는 핵심주체인 범민련(준)의 93년 8월 11일자 위원장단, 실행위원 연석회의에서 "8·15 범민족대회에서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결성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범민련 10년사> 참조.
6) 이후 "93년 가을 전국연합 연차수련회 겸 중앙집행위 회의에서 집행위원장 황인성, 자통위원장(당시는 부위원장 : 필자) 조성우에 의해 정식으로 제기"되었다. 이천재. '고백', 41쪽.
7) "91년 12월 7천만 민족의 조국통일 열망을 고조시켰던 남북기본합의서는 팀스피리트 재개와 특별사찰 문제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범민련, 앞의 글.
8) "민족회의가 만들어지면서 신촌 창천교회에서 적어도 100∼200명은 모였던 각계각층 애국자들 앞에서 칠십대 노인(이종린 선생)이 체면불구하고 '왜 범민련, 한총련을 배제하느냐?'고 질문했다. … 이에 대해 이해학 목사가 '한총련과 범민련은 이적단체이기 때문에 같이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천재, 앞의 책, 47쪽.
9) 민족회의(준)은 1994년 3월 25일 발기인대회 결의문에서 "오는 8월 범민족대회가 명실공히 남북 공동의 범민족적 통일행사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한다"고 해놓았다. 그리고 나서는, 5월 30일 제4차 운영위에서 "범민련이 범민족대회를 자신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이라는 입장을 내외에 명백하게 한 조건에서 범민족대회라는 명칭으로 오는 8·15 행사를 치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 다수임을 확인"했다. 한편 전국연합은 7월 2일 범민련을 배제한 채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 제안서'를 제 민민운동 단체에 발송했다. <범민련 10년사> 참조.
10) 1996년의 경우 6월 20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민족회의를 대표한 문정현 신부가 범민련 남측본부와 상의 없이 한시해(범민련 북측본부)를 만나 8·15 행사를 하나의 대회를 치를 데 대한 (가)합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7월 24일 범민련 남측본부와 전국연합간에 6·24 합의를 수용하고 명칭을 '평화통일 전민족대회'로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합치될 수 없는 견해 차이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한편 1997년의 경우, '하나의 대회'를 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입장 차이가 워낙 뚜렷하여 성사될 수 없었다. 그 결과 범민족대회는 서울에서 열리지 못하고 겨우 5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광주 조선대에서 열렸다. 서울에서는 민족민주운동의 통일행사가 두 곳으로 나뉘어 열렸다. 전국연합은 용산 가족공원에서 '평화통일민족대회'로, '하나의 대회'를 주장한 부분들은 시흥동 성당에서 '6.24합의(하나의 대회) 실천과 통일운동 단결을 위한 통일 한마당'으로.
11) 범민련, 앞의 글.
12)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고"였다.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이 장충단 공원에서 공동 주최한 1998년 8·15 통일행사의 명칭은 '남북합의서 이행과 평화군축 실현을 위한 98 자주통일 결의대회'였다. 이렇듯 전국연합은 이 당시까지도 이미 정치적 실효성을 상실한 남북합의서 이행을 행사의 주제로 삼고 있었다.
13) 자통협은 민화협이 결성된 이후, "민간 통일운동의 정권으로부터의 자주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으며, 이에 김대중 정권의 포섭·배제 전략에 맞서기 위해 통일단결이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여기에 "기층민중을 자주·통일 운동으로 진출시켜 통일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강화시킬 시점"이라는 문제의식이 복합된 속에서 홍근수, 이천재, 노수희 등 기층민중의 입장에 친화적인 민민운동 지도자들에 의해 발기되었다.
14) "소련의 붕괴와 함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은 자신들의 완전한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한 승리는 한 때 자본주의 극복을 꿈꾸었던 진보진영에게도 상당 부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소련 붕괴로부터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그 같은 자본주의 진영의 확신은 지나친 오만에 불과했으며 진보진영의 사고는 패배주의의 결과였음이 드러났다." 박세길, <민>, 2000년 8월호, 43쪽.
15) 만약 이런 대중조직의 부담감이 진정한 이유였다면 1991년 1월에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가 결성된 직후, 범민련 간부들에 대한 탄압으로 전교조와 전농의 대표(윤영규 위원장 및 권종대 의장)가 범민련 부위원장직을 이탈했을 때, 이 3자연대 문제의 재검토를 요구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후 범민련 3자연대의 청산에 앞장선 사람들은 당시에는 오히려 전민련 안에서 3자연대 방식의 고수와 조속한 범민련 결성을 주장하고 밀어붙여 관철했었다.
16) 94년 6월 1일, 전국연합은 범민련에 "범민족대회가 범민련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라는 범민련 규약 8조와 제5차 범민족대회와 관련한 범민련 2차 공동의장단 회의 결정사항(남·북·해외 3자의 민족대단결 사업인 제5차 범민족대회를 서울에서 합법적이고 공개적·거족적으로 개최한다)을 취소하고 이를 공개 천명하라"는 요지의 공문을 보냈다. 6월 13일에는 민족회의(준)이 "8.15민족통일행사는 모든 통일역량이 공동으로 추진기구를 구성하여 추진하되, 그 명칭은 범민련이 범민족대회를 자신의 최고의사결정기구라는 입장을 내외에 명확히 한 조건에서는 범민족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단 범민련의 입장변화가 있을 경우 범민족대회 추진여부를 고려할 수 있다"고 결정한다. 그 다음날인 6월 14일 전국연합 요청으로 범민련 남측본부와 전국연합 대표단 사이에 간담회를 개최하고, "제5차 범민족대회는 광범위한 자주통일 역량이 결집한 범추본을 결성하여 추진하며, 대회의 진행과 관련한 전반적인 문제는 [범민련이 아니라 : 첨가] 범추본에서 민주적으로 협의·결정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열린 '94 범민족대회에서는 범민족회의 결정사항이 발표되던 중 전국연합 자통위원장이 마이크를 빼앗고 일방적으로 폐막을 선언하는 사태가 있었다. <범민련 10년사> 및 이천재, <고백> 참조.
17) 범민련 해체와 민족회의 건설의 주된 명분은 범민련, 한총련이 이적단체이므로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건설할 새로운 통일운동체의 성격을 대중적 통일운동체―'대통체'―라고 주장했었다.
18) 분열이 확정된 1995년 전국연합과 민족회의 중심의 8·15 민족공동행사(보라매공원)와 제6차 범민족대회(서울대)가 각기 따로 열렸다. 한총련 학생들이 보라매공원에서 서울대로 한걸음에 달려올 때까지 범민족대회장에 있던 인원은 학생을 포함하여 1,000∼2,000명에 불과했다. 1998년 범민족대회 때에도 한총련 학생 중심으로 3∼4천명에 불과했다. 범민련, 앞의 책 및 이천재, 앞의 책 참조.
19) 이와 관련해서는 이태준,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 1주년과 민족통일대토론회를 맞이하여 민족의 희망 한총련과 청년학생, 그리고 제 민족민주단체 선생님들께 드리는 글'(전국연합 자유게시판 또는 민족통신 운동론 토론방)을 참조하시오.
20) 1998∼99년의 기간 동안 한총련은 김대중 정권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반민주적일뿐 아니라 사대매국적이며 반통일적인 김대중 정권의 퇴진투쟁을 강력히 전개"하겠다고 천명하는가 하면, 2000년 1월 8기 한총련 이름의 유인물에는 "김대중 정권 타도"라는 구호까지 등장한다. '범투본 11·12월 사업계획(안), 반미구국 총력투쟁 계획' 참조.
21) '3자 연대의 조국통일 전선체'인 범민련을 주축으로 하여 남한 민족민주운동 전체를 대표하는 '민족민주 전선체'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많은 민민운동 단체들에게 범민련이 민생·민권 투쟁을 지지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조직하는 주체로 나서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의문과 혼란으로 다가왔다. 이는 종래에 범민련·한총련에 대해 우호적이던 단체들에서도 그러했다.
22)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99범민족대회 공동 기조보고'에는 지난 운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지난 시기 범민련 운동과정에는 새시대 통일운동의 요구에 맞게 범민련 운동을 강화·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심각한 문제점들도 남겼습니다. 그것은 범민련 투쟁강령이 아무리 정당하고 통일의 앞장에서 피 흘리며 투쟁하여도 광범위한 애국통일 역량을 전취하여 대중적 지반을 확대하지 않고는 강력한 통일운동체로 합법적 권리의 쟁취도 할 수 없으며 반통일세력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앞에서 인용한 '민족대통일전선을 향한 승리의 도정(초안)', '본론 2. 범민련을 중심으로 한 민간통일운동의 역사와 평가'에서는 "결론적으로 말해 범민련은 범민련을 사수하고 범민련의 기본노선을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범민련의 조직대중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범민련의 정치적 영향을 확대·강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노동자·농민 등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꾸준한 노력보다는 불필요한 사상논쟁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았는가? 원칙이라는 이름 아래 대담한 합작과 통일전선 구축을 향해 통일운동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소아적이지 않았는가? 대중을 조국통일운동의 주인으로 세우기 위한 세련된 전술구사에 둔감하지 않았는가?"라고 자성하고 있다.
23) 전국연합은 지금은 자통협 활동을 중지하고 있다. 범민련 가입을 결의했으나 이후 "대중적으로 사업하는 데 이적단체인 범민련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북측의 의견을 존중하여 이 결의를 철회하는 결정을 했다. 한편, 남·북·해외간의 3자연대는 그야말로 차이를 인정하는 '연대적'인 관계여야만 남한 내에서 자주·통일 운동세력의 총단결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점은 남측뿐 아니라 해외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4) 이론적 실천영역 안에서는 김대중 정권의 총노선에 대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라는 수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집권에 도전할 당시부터 이미 IMF 사태를 맞이한 상태에서, 미국-IMF-초국적 자본의 요구에 따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누가 집권하든 피할 수 없다는 관점과 논리를 가지고 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대신, 자동 붕괴론에 의거한 대북정책이 효과를 보지 못함으로써 마땅한 대안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하여 남북 평화공존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목표를 설계했다. 김대중 정권 집권 직후 당시 민주당 핵심 지도부 가운데 한 사람이, "노동자를 배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되, 대북정책의 전향적 해결로 역사에 기여하는 것이 김대중 정권의 집권 기조"라고 필자에게 확인해 주었다. 그것이 당론이라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에 대한 집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5) 김대중 정권은 몇몇 사회단체 및 노조들과 이런 시혜자-수혜·추종자(clientelism) 관계를 맺고 있다. 예컨대 현 한국노총 지도부와의 관계가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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