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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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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2001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여 ①

홍근수 | 운영위원, 향린교회 담임목사
2001 민족통일대축제

나는 금년 8월 15일에 북측에서 여는 <2001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관'하기 위해 남측대표단('통일연대')의 한 사람으로 평양을 다녀왔다. 간다 못간다 하다가 결국 정부로부터 불허라고 발표가 보도되어, 공연히 한 때나마 평양을 가는가 했던 것을 속으로 어리석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불허방침이 철회되고 다시 허가되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신문보도보다 조직을 통하여 연락이 왔었다. '어허, 옛말에 조삼모개라더니 정말…!' 하면서도 짐을 주섬주섬 챙겨 떠나는 차비를 하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행준비를 별로 못하고 허둥지둥 떠나게 되었다.
나는 8월 15일, 그러니까 내 생일날이기도 했던 날 아침5시에 일어나 서둘러 집을 나서 시청 앞으로 갔다. 리무진으로 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새벽이라 길이 한산하여 1시간만인 7시, 그러니까 집합시간 1시간 전에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유있어 좋았다. 나는 태고종에 속해있는 어떤 스님을 만나, 윗층에 올라가서 차 한 잔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갔을 때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환송식을 하였다. 나는 오종렬 의장과 함께 간단한 답사를 하였다. 이번에도 세 사람의 불허자가 있었다. 그러나 평양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아 연설에서 항의를 했으나 그냥 다녀오기로 하였다. 그리 길지 않은 환송식을 마치고 비행기를 탑승한 것은 낮 12시가 지나서였다. 주석단과 평양공항에서 꽃다발을 받을 사람을 구별하여 따로 탑승시켰다. 나는 꽃다발을 받는 사람으로 분류하여 1호 비행기 앞에 앉게 했다.
행선지가 같은 내 땅 한반도의 평양인데 왜 김포공항이 아니고 인천국제공항인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아시아나항공기 편으로 가기로 했는데 사람이 많아 두 대를 전세내었다.


두번째 평양 방문: 뜨거운 순안비행장

막상 비행시간은 5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비행거리였다. 지난 번처럼 직항코스로 갔기에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바로가면 더 짧은 시간에 갈 수 있겠지만, 공해로 나갔다가 가는 것이어서 시간이 더 걸려 그 정도라고 하였다.
나는 작년 10월 10일 노동절창건기념 55돌에 평양을 다녀왔었다. 이번 여행이 두번째여서 흥분이 덜 했지만, 처음가는 사람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은 여러 면에서 민족통일사에서는 획기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렇데 대대적으로 남측에서 평양으로 가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금강산에서는 지난 번 6.15 1주년 통일대토론회에는 약 460여명이, 그리고 곧 이어있었던 농민통일토론대회 때는 약 7백여명이 갔다. 그러나 이북 수도인 평양에 이렇게 대대적으로 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하였다.) 비록 밀고당기고 하다 '참관'으로 낙착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북이 주최하는 '2001 통일대축전'에 남측대표들이 참관차 갈 수 있도록 당국이 허락하였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고, 남북관계에서 획기적인 변화라고 믿는다. 남측에서 민이 주관하던 8월 대회가 지금까지 늘 불허되었거나 탄압 가운데 치러졌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세상이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는 것과 이번 일이 그만큼 뜻깊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모두 6.15 공동선언 덕분이라고 할지….
어디 그 뿐인가? 이번에 같이 북에 가는 3백11명의 사람들은 민화협, 7대 종단, 통일연대 등 크게 세 단체가 함께 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통일연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단체들, 예를 들면 전국연합과 범민련남측본부 등은 평양가는 것이 이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관변단체'라는 민화협과 7대 종단과 함께 가는 방식을 택하였던 것이다. 결국 우리 자통협은 '2001 통일대축전 남측참가단'이라는 이름으로 가기로 하였고 민주노총, 전빈련, 민주노동당, 사제단, 사월혁명회, 천정연(카토릭), 자통협본부 등이 함께 가기로 되었다. 재야운동에 나오지 않았으나 7대 종단의 이름으로 가게 된 많은 목사들과 종교지도자들. 서울같으면 만날 일이 없던 사람들이었지만, 평양가는 길에 함께 만날 수 있었고 또 서울에서 잘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이 평양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 등이 참으로 이상야릇하였다.
우리가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였을 때 평양은 매우 뜨거웠다. 물론 해가 쨍쨍 내리 쬐고 공기가 신선하며 강물 색깔이 누렇고 산천이 청순한 것 등을 보아하니 어제 비가 온 듯 하였다. 물어보니 지난 3달 동안 계속 가물었다가 어제 비가 좀 왔다고 했다. 비온 후의 뜨거움은 또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자연 일기가 한여름 날씨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뜨거운 동포애 때문에 평양 순안비행장은 달구어져 있었다. 공항에 환영하는 남녀동포들 -주로 여성들이 많았다-이 "조국통일" "민족대단결" 등을 연호하고 꽃술을 요란하게 흔들어 면서 남녘에서 오는 동포를 환영하고 있었다. 거기 아스팔트의 뜨거움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들은 본래 도착 예정시간보다 3시간 전부터 나와서 기다렸고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저렇게 뜨거운 시멘트바닥에 서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고보니 내가 받은 꽃이 시들어 있었던 이유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인천공항에서 마냥 시간을 끌면서 기다렸던 관계로, 이 곳 비행장에 환영나온 평양 시민들도 꽃술을 들고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니 이것만 보아도 우리 서울과 평양 동포들이 한 운명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두 비행기에서 다 내렸을 때 소위 주석단이란 사람들과 꽃다발을 받는 사람들로 '선별'된 사람들이 먼저 가면서 어린이들로부터 꽃을 받았고 악대 앞을 지나서 환영객들 앞으로 악수를 하면서 지나갔다. 지난 번 10월, 이 곳에 와서 이같은 뜨거운 동포애에 환영받은 경험이 있는 나는 담담하였지만, 평양에 처음 오는 다른 사람들은 정말 감격해 하였다. 그 때와 비교해 볼 때 다른 점 한 가지는 연주악대가 나와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릴 때 이북의 관리가, 한 사람씩 일일이 대조하는 것도 전과 달랐다. 이런 방식으로 3백명이 넘는 사람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로 그들이 다 내려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우리야 괜찮았지만, 평양의 여름날 뜨거운 시멘트바닥 위에 서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던 환영객들에게 못내 신경이 쓰였고 미안하였다. 이어서 우리는 지정된 버스에 올라 평양시내를 달려 숙소에 도착하였다. 숙소는 지난번의 초대소와는 달리, 그 이름도 유명한 평양시내 한복판에 있는 고려호텔이었다.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의 2001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

도착하자 <2001 통일대축전>의 개막식은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주석단 등은 3대 헌장탑에서의 행사 참관문제를 둘러싸고 회의를 거듭하느라 시간을 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일부 인사들은 개막식장으로 이미 향하고 있었다. 누구의 선동이랄 것도 없었다. 이 개막식에 참관하지도 않는다면 구태여 우리가 평양에 올 까닭이 무엇이었겠는가? 너도 나도 다들 갔다. 거기에 무슨 민화협이니, 7대 종단이니, 통일연대니 구별이 없었다.
이야기인즉, 평양의 다른 곳은 좋지만 3대 헌장탑 앞에서는 안 된다고 조건부승인을 했다고 하고 책임자가 통일부에 가서 이를 약속하는 각서를 썼다고도 하였다. 해괴망측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넌센스는 문제가 안 되었다. 말을 들으니 남쪽에서 하도 말이 많으니 남측에서 오는 동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제막식은 하루 앞당겨 8월 14일에 북측 동포들만 모인 자리에서 이미 진행했고 <2001 통일대축전>은 남측 대표들을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남측 당국이 금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북측의 해석인 모양이었다.
4천여명이 운집했다고 하였는데 그 이상의 인파가 몰렸던 것같이 많아보였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 모두를 뜨거운 박수와 환호로 환영하였다. "<2001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오는 남녘동포 대표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는 말이 울려퍼졌다. 자리에 가서 앉았을 때, 짙은 국방색의 옷을 입고 훈장을 단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어 정말 반가웠다. 모두들 얼굴이 좋았고 젊어진 것같이 안색이 좋았다.
개막선언과 함께 연주단이 연주를 하고 단일기가 입장하여 게양되었다. 민족대축전 사회는 지난번에 와서 사귄 김영성씨였다. 그는 북 민화협의 부의장인가 하는 사람이었다. 으레 집회 때마다 묵념이나 민간애국가로 부르는 '님을 위한 행진곡'도 부르지 않아, 그것이 남쪽 행사와 다른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준비위원장의 인사말 등이 있었고 해외 대표의 연설도 있었다. 남측에서는 순전히 '참관'만 하는 관계로 일체의 순서가 없었음은 당연하였다.
축제가 무르익으면서 사방에는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개막행사가 이내 끝나고 축하문화공연으로 이어졌다. 이북 동포들의 노래와 춤과 여흥 등을 보면서, 그들은 노래 잘 하고 춤도 잘 춘다고 생각했다. 불꽃놀이도 있었다. 그 전날 전야제에서 서울 연세대에서 하던 그런 불꽃놀이였다. 마지막에는 다 같이 행사장 한 가운데로 나와, 남북이 어울려 춤판을 벌였다. 우리는 끝까지 앉아서 참관을 했지만, 이북 동포들은 모두가 운동장 한 가운데를 가득 메우며 신나게 달리며 노래를 불렀다.
3대 헌장탑은 양옆으로 두 여인이 구부려서, 가운데 책같은 것을 서로 붙들고 있는 돌로 된 거대한 아취형 기념탑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그렇게 문제란 말인가?"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 옆, 그러니까 행사연단이 있는 곳 뒤에 단일기 게양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큰 반반한 돌에 김일성 주석의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조국을 통일하려면 그가 북에 살건 남에 살건, 해외에 살건 관계없이 온 겨레가 통일 운동에 떨쳐 일어나야 하며 사상과 리념, 경건과 신앙의 차이에 관계없이 각계각층의 모든 동포들이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하나로 굳게 뭉쳐야 합니다. -김일성"
그렇다. 이는 민족단결에 대한 김일성 수령의 개인 말이고 소신이었다지만, 이 자리에 온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바였다. 아마도 그의 민족대단결의 유훈에 따라서 이 3대 헌장기념탑을 세우고 남과 해외의 동포들을, 큰 돈을 들여 초청하여 이 곳에서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 모양이었다. 정말 우리는 비록 이념, 종교신앙과 주의주장, 심지어는 정부가 다를지라도 민족이 대단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비로소 통일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할진대 북한이 변하지 않고 여전하다느니, 남북간에는 건널 수 없는 이질성이 있어 통일하기 어렵다느니 하는 말은 모두가 분단항구화의 구실이고 이유일 뿐, 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할 진정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남측에서 갔던 사람들 중에 '통일연대'측이 평양 '조국통일 3대헌장기념탑' 행사 참석한 것을, '돌출행동'이라고 단정하고 이 문제로 온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다고 전하면서 걱정하였다. 아마 수행한 기자들에게서 얻어들은 모양이었다. 멀리 평양에 와서,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는 대신에 말을 전해듣는 우리의 기분은 야릇하였다. 평양의 실제 광경을 직접 보지도 못한 채, 평양에 보낸 공동취재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던 이야기를 보수언론들이 보도하면서 반통일적으로, 아니 반민족적으로 매도했다는 것은 실로 꼴불견이라고 느꼈다. "통일탑은 북한이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상징물이고, 그 '고려연방제'는 대남적화를 위한 통일방안이다. 따라서 통일탑 행사참가나 연방제 주장은 곧 북한 통일방안에 대한 동조를 의미하는 것이며, 특히 국가보안법 철폐는 바로 '고려연방제' 주장에 들어있는 주요내용의 하나다."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본다.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서울 가본 사람과 가보지 않은 사람이 싸우면 전자가 진다'는 말과 꼭 같다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3대 헌장탑은 고려연방제만이 아니고 3가지 통일헌장 중의 한 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3대 헌장탑에서의 개·폐막식에 '참관'한 것은 하필 통일연대 사람들만이 아니고 민화협, 7대 종단에 속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 곳에 간 사람들은 그야말로 평양에 보내진 목적대로 충실하게 '참관'만 했을 뿐 아무런 역할이나 순서도 맡은 것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3대 헌장탑에서는 통일대축전을 할 수 없고 다른 곳에서 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어불성설이다. 공동행사도 아니고 참관인 터에 그렇게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북이 하는 행사에 남측이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3대 헌장기념탑 앞에서는 안되고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이 좋다란 말은, 구체적으로 다른 어떤 장소를 말하는 건가? 주체사상 탑 앞에서? 아니면 만경대에서? 김일성 대학에서? 이는 마치도 북에서 하는 집회를, 남쪽에서 집회허가하는 격으로 실로 어처구니없는 짓의 극치일 뿐이다.
식을 마치고 곧 문화공연이 계속되었다. 역시 우리 식과는 많이 다른 문화공연이었다. 노랫가락 가운데 아는 것이라고는 '나의 살던 고향은…' 뿐이었다. 온갖 희한한 문화행사들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고 감격하게 했다.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9시경이었는데, 이날 만경대 예술극장에서의 만찬 연회에 참석하였다. 이 곳에서 임인식, 김순환, 유태영, 이승만, 곽동의 등 해외인사들을 반갑게 만났다. 저녁식사 후에 또 유흥순서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민족보다 확실히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남측 운동단체들도 점차적으로 문화행사를 많이 가지는 경향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 평양에서의 첫 날은 막을 내렸다. 실로 긴 날이었다. 실은 이 날은 서울과 평양에서 보낸 하루였다. 여러 날을 평양에 있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날에 너무 중요한 일들을 많이 겪어서 그러하리라.


정치구호가 여기저기 쓰여있는 평양

평양에서는 상품광고를 볼 수 없다.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상품광고가 있을 법한 자리에는 으레 여러 가지 정치구호들이 쓰여있다. 구호들은 보통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쓰여져 있었지만, 집 건물에 그대로 새겨진 것들은 시멘트 색깔 그대로인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특별히 색깔을 칠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집에 페인트를 칠하지 않는 문화와 비슷한 듯 보였다. 우리 사회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그 사회나 체제를 깔보거나 불신, 배척, 멸시할 이유가 될 수는 없으리라.
평양시내를 차 타고 다니면서 많은 구호를 읽었다. 호텔에서 나오자 전선대 같은 곳 -평양에는 전선주가 안 보인다. 아마 땅 속에 파묻은 모양이었다- 에 몇 가지 종류로 내리쓴 구호들이 보였다. 진격의 해; 강행군의 해; 결사옹위; 일심단결; 강성대국; 자력갱생; 총진군; 3대혁명 등이었다. 내가 본 구호들을 아래에 더 소개해 본다. 물론 이것은 전부도 아니고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당의 군민일치 사상 만세!;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김정일 동지를 해와 달이 다 가도록 높이 받들어 모시자; 전당·전군·전민이 당의 선도를 떠받들자; 전민족적인 애국애족운동으로 삼천리 강토 우에 통일 강성대국을 일떠세우자!;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 이룩하자!; 조선은 하나다!;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옹위하자!;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 새세기 청춘들의 통일련대 무대.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해 8월 15일 평양; 민족자주 조국통일; 북과 남·해외의 청년학생들의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기수가 되자!; 청년들은 조선로동당과 국가의 정책의 적극적인 선전자·선구자이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나라의 통일을 자주적으로 이룩하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께 끝없이 충실한 청년 전위대가 되자!;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이긴다;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 결사 옹위; 자주·평화·친선;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위하여; 자주성을 옹호하는 세계 혁명적인 인민들은 단결하자; 위대한 선군정치 만세;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 우리는 행복해요;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라; 자주적 정신으로 통일하자;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모두 다 속도전! 앞으로; 자주적 정신으로 통일하자;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투쟁 방식으로; 김일성 동지의 탄신 90돐을 높은 정치적 열의와 빛나는 노력적 성과로 맞이하자; 장군님 따라 천리마; 조선의 심장 평양; 위대한 김일성 수령의 유훈교시를 철저히 맞이하자.

시내의 여기 저기에 있는 이 구호들은 말하자면 사회교육, 이념교육의 교과서같은 역할을 하는 듯 했다. 어떤 여성동지는 서울 가서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 소리가 그대로 나올 것 같은데요? 어떡하지요?"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북 물에 '세례'를 받고

평양에서의 사흘째를 맞았다. 날씨는 오늘을 축복하는 듯 매우 쾌청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실내에서 회의 등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참석한 행사를 치러본 경험이 없어 그런지, 일정 등 실무진에서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아 답답하였다.
우리는 대동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대동강 상의 분수지역을 지날 때는 바람의 방향관계로 우리 쪽에 분수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나는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더니 대동강 물로 완전히 온 몸이 흠뻑 젖었다. 정말 기념이라고 생각하여 이북의 물, 그것도 대동강 물을 잔뜩 뒤집어썼다.
대동강을 내려갔는데 서쪽 강변에 철갑선 한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미제의 푸에블로호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놀라움과 함께 그 때 일을 다시 떠올렸다. 확실히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이북이 미국에 대하여 확실하게 본때를 보여준 신나는 일이었지! 같은 민족으로서 자긍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또 한번 북의 물에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다음날인 토요일에 백두산을 관광한 후의 일이었다. 백두산에 내려오는 길에 정일봉 아래 '고향집'을 구경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한 참가는 데 소나기가 내리 쏟아졌다. 어떤 사람은 재빨리 우비를 가지러 도로 차로 갔지만, 그래도 비를 다 맞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나는 가지 않고 그 굵은 소나기를 다 맞아서 완전히 '물에 빠진 쥐' 같은 꼴이 되었다. 그 전날에 대동강 물로 덮어쓴 나는 오늘 백두산에서 빗물, 아니 백두산 물을 덮어쓴 셈이었다. 나는 이렇게 하여 두 번에 걸쳐 이북의 물, 대동강 물과 백두산 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생가를 방문하는 동안 내내 소나기가 내렸다. 윗쪽 산중턱에는 정일봉이라고 쓴 글씨가 멀리서도 보였다. 집 마당에는 6각형 나무를 마당에 박아놓았다. 그냥 나무토막을 박은 것은 남에서도 보았지만, 그 나무를 6각형으로 깎아서 박은 것은 처음 보았다.
이 곳에는 물 마시는 데가 두어 군데 있었다. 나는 전혀 깊지 않은 두 군데의 샘에 가서 물바가지로 한 잔씩 마셔보았는데 모두 물이 얼음같이 차디차서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듯 했다.

'만경대 정신'?

우리가 사흘째 유람선을 타고 대동강을 흘러 내려가면서 강 양쪽으로 펼쳐진 평양경치를 감상한 후에 만경대를 방문했다. 그 때 해프닝이 일어났다. 역사의 방향은 때로는 야릇하여 어줍지 않은 사건이나 해프닝으로 뜻하지 않게 굽어지기도 한다.
만경대란 김일성 수령의 생가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자연의 경치가 참으로 좋았다. 나무 숲이며 강물이며 아름다운 공해 없는 길이며…. 김일성 생가가 있는 곳은 굉장히 넓은 곳으로, 말로 듣고 상상하였던 것같이 '성역화'하여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남에서 역사적인 유적지를 '성역화'한 것과 별 다름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몇 년 전에 전주쪽의 전봉준 장군 생가를 가본 나는 그것과도 별 차이가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역시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 곳에서 강정구 교수가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 라는 방명록을 썼다고 하여 큰 말썽이 일어났다. 나는 사실 그 때에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나는 방명록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런 방문록을 쓴 것이 무슨 '돌출행동'이란 말인가? 그것이 결코 부적절한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릇 사람사는 사회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느낌과 소감을 방명록 등에 쓸 자유는 적어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 그것을 문제삼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그 당사자에게 물어야 한다. 강정구 교수는 그 방면의 전문학자로서 그의 학문적인 정의가 중요하고 또 그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되지도 못한 자신의 주장과 논리로 제3자인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 인사들이 억지를 부린다면 이는 실로 한심한 일이다. 반세기가 넘는 오늘날까지 민족통일이 되지 않은 것이 우연이 아니리라. 이들 반통일, 반공, 반민족적, 반민중적인 사람들은 강정구 교수가 쓴 '만경대 정신'을 '김일성 주체사상에 의한 통일주장'이라고 우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통일연대측 사람들이 '온갖 사술로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태도를 보인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이탈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비방하였다. '지가 기면서…'라는 말이 있지만, 그렇게 자기 의를 내세우고 타인의 의사를 부정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이탈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만경대 정신을 주체사상과 동일시한다고 말하고 있는 데에서 그 자신이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현실에서 아주 멀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반공, 반북한적인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냈을 뿐이다.
정작 당사자는 '만경대 정신'에 대하여 '민족을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한 사람을 기리고 자손에게까지 명예와 보상을 내림으로써 민족을 위해 헌신하도록 해 민족정신을 세우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가문이나 주체사상을 찬양할 의사가 없었다'고 직접 말하고 있다. 이같은 당사자의 말에도 아랑곳 없이, 견강부회식으로 억지부리는 것은 민족적인 인사나 성숙한 민주사회에 사는 사람의 자세일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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